즐거운 여행

신일본 핵심일주(2007)

청담(靑潭) 2009. 9. 1. 15:42

2007 신일본 핵심일주

 

프롤로그

  원래 작년여름방학에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유럽여행을 하기로 예정되었 있었으나 나의 교감연수로 인하여 금년으로 미루어졌던 것이 올해는 승수의 영국어학연수로 인하여 또다시 내년으로 연기되고 그 대안으로 일본여행이 결정되었다. 승수가 6월 28일에 영국으로 떠났는데 우리가 열흘뒤에 유럽여행을 떠나는 것은 첫째 숭수의 연수비를 마련해 주신 부모님께 도리가 아니요, 감수성이 예민한 승수에게도 자식의 연수를 가벼히 홀대하는 느끼게 하는 것 같아 과감히 취소하고 대신 양선생이 아직 가보지 못한 일본을 가기로하고 여러 여행사의 투어를 탐색하였다. 최종적으로 내가 1990년에 조선일보사가 주관하여 참가한 역사기행에서 큐슈에서 간사이 지방의 나라까지는 다녀왔으나 아직 토쿄를 가보지 못한 일본여행의 미완성태이며, 양선생은 오사카, 교토, 나라를가고 싶어하므로 《온라인 투어》에서 설계한 상품인 〈신일본 핵심일주〉가 딱 맞아 떨어졌다. 승원이와 함께 할 생각도 하였으나 승원이의 방학일정이 여름학기 이수중인데다 지난겨울에도 함께 중국여행(계림과 시안)을 다녀온지라 이해(?)를 구하고 보충수업 일정을 고려하며 8월 9일에 출발하기로 하고 거금 100만원짜리(999,000원) 일본여행을 계약하였다.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10명이상이요 어느때는 20여명까지도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추세였는데 금년에는 나와 박영관 선생 둘 뿐이어서인지 많은 선생들의 관심이 되었는 듯 싶다.


첫째날 8월 9일(목)

  6일에는 아버지께서 전북대 병원에서 위와 대장의 용종을 내시경으로 수술하셨는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하룻밤을 응급실에서 지내도록 되어 7일아침에 퇴원하여 김제에 모셔다 드리고 점심때에는 교육연수원에서 교육중인 강거희선생을 위문하고는 오후에 거북회의 여름 여행이 계획된 지리산 뱀사골로 향하다. 하룻밤을 회원들과 지내고는 8일 아침에 돌아오는데 어찌나 피곤하고 잠이 오는지 두시간 반이면 오는 것을 한번은 40분간 에어컨 켜고 잠자고 한번은 죽림온천에 들어가서 1시간 반을 자고나오니 무려 5시간이나 걸려서 오게 되고 양선생에게 주의를 듣다. 오후 5시가 되어서 여행에 필요한 슬리퍼등을 준비하고 짐을 꾸렸다.

  잠을 자는둥 마는둥 TㆍV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3시 30분에 집을 나서다. 익산 인터체인지에 있는 공항버스 간이 터미널에다 차를 놓고 4시 30분에 차가 출발하다. 인천에는 승수를 전송하느라 다녀간지 12일만에 다시 오는 것이다. 정확히 7시 30분에 도착하였고 남성가이드로 착각하게 한 김재수씨를 만나  수속이 이루어졌고 일행은 모두 6개 여행사에서 모집된 37명이었다. 여행단 이름은 〈아시아나 연합투어〉라고 하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모두 48명으로 한 버스로 이동하는 대규모 여행단이 계획되었다가 2명이 오버되어 50명이 되는 바람에 둘로 나누어 이동하기는 하나 모든 일정은 똑같고 함께 움직이는 가이드 2명포함 총인원 52명의 대규모 가족중심의 여행단이었다.

  좌석이 창가인데다 자리도 여유가 있어 양선생도 빈 창가 좌석에 앉아 밖을 구경하였다. 항로가 놀랍게도 동해안을 지나 을릉도와 독도를 지나 직선으로 일본으로 가게 되고 동해안까지는 구경하다가 동해안의 푸른바다만이 보이기 시작하기에 졸다 보다 아침을 거른탓에 기다리던 기내식 먹다 쉬다 하다가 일본이 나타나서 계속 일본열도를 주시하다. 오늘 찾아보니 비행기는 혼슈이시카와(石川)현 위를 지나는데 어제 오늘 6도 지진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이시카와현은 노토반도라 부르는 반도이며 비행기에서 보니 매우 좁은 반도이다. 비행기는 이시카와현을 지나 도야마만을 지나서 니기타현의 해안선을 따라 나르더니 야마가타(山形)현 위를 지나 목적지인 미아기(宮城)현에 있는 센다이공항에 도착하였다.

  도착해 보니 센다이 공항은 그야말로 시골공항이다. 대기중인 비행기가 고작 세대요 여행객들도 도착한 우리들이 전부인데 수속은 느리고 느려 시간이 지체되다. 공항사용로가 15%이상 저렴하여 이용하는 공항이고 마침 신일본핵심일주와 맞아 떨어져서 찾게된 공항이지 다른여행시에는 찾을일 없는 공항인 듯 싶다. 버스는 센다이시를 지나 후쿠시마(福島)현으로 들어선다.

  먼저 지나는 길에 들른 것일 뿐이지만 유리공예전시관인 가라스관●에 들러 구경하였다. 일본제작의 판매품보다는 2층의 세계적인 유리 공예전시관이 볼만 하다.

  그 다음에는 ●이나와시로 호수●에 도착하였다. 지도에도 표시되어있을 정도로 큰 호수인데 일본의 3대 호수중의 하나이며 칼데라호이다. 주변의 경치가 볼만하며 평화로운 모습을 느끼다.

 

 

 

오후에 일찍 호텔에 도착하다. 오늘은 특별한 관광도 없고 쉬는 날이며 이곳 온천지대에서 온천욕으로 피로를 푸는 날이다. 그러고 보니 5일에 익산온천 8일에 죽림온천 오늘 아시노마키 호텔에서의 온천욕이다. 이곳은 후쿠시마현의 작은 온천관광지로서 10여개의 크고 작은 온천장내지 호텔이 있는데 우리가 머문 아시노마키 호텔(707호실)은 지은지가 족히 40년은 넘은듯한 정말 아주 낡은 건물의 온천장급 호텔이다. 다다미방으로 일본맛을 내는 방이었으나 청소가 시원찮고 머리카락이 보이며 건물외곽이 너무 불결하여 양선생은 크게 불만을 피력한다. 그러나 복도와 식당등은 비교적 일본의 전통을 많이 살린 모습으로 조금은 흡족하기도 하나 어쨌든 관리가 아주 부실한 저급호텔로 가이드가 다음날 변명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울지경인데도 손님들은 아무도 불평을 말하지 않았다. 섭씨 43˚나 되는 천연 온천물이어서 아주 상쾌한데 시설은 역시 억망으로 개인적인 여행이라면 들릴 일이 없는 곳이다.  저녁식사는 오랜만에(아니 17년만에?) 만나는 일본식식사인데 한사람에 한상씩 따로 차리고 수십명이 한방에 모여 일본식 간편복장을 하고 식사하는 모습역시 일본의 문화이다. 원래 일본음식이 먹잘것이 없기도 하지만 양이 적어서 걱정이 되나 기실 먹어보면 그렇지도 않아서 충분히 배는 부르게 된다.


둘째날 8월 10일(금)

  둘째날이다. 아침에 이왕이면 공짜라 천연온천욕을 다시 한번 하다. 아침식사도 어제와 거의 비슷하나 음식의 내용은 조금 다른 모습의 식사를 하다.  일본음식을 먹으면서 불평보다는 우리의 짜고 맵고 찐한 지나침과 과식을 학 만드는 지나친 양에 대해 반성하고 개선의필요성을 느낀다. 우선 나부터 개선해보자는 마음이 인다. 우선 적게 먹자. 그러자면 식탁에 음식을 잔뜩 올려놓지 말고 호텔 뷔페식으로 큰 접시에 자기가 먹을 만큼의 양만 조금씩 미리 덜오 놓고 식사를 시작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곳 온천마을의 경치가 아름다워 분위기와 좋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책하는 기분은 매우 상쾌하였다. 마을주변을 걷다보니 길가에 핀 꽂과 풀들이 우리나라와 너무 똑 같다. 내가 싫어하여 보이기만 하면 뽑아버리는 망초, 수국, 백일홍, 무궁화, 능소화들이 곳곳에 피어 있다.

  아침을 먹고  닛코(日光)국립공원으로 향하다. 닛코는 도치기(枋木)현의 현소재지인 우쓰노미야에서 서쪽으로 30킬로이며 도쿄로부터 120킬로에 위치한다.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이요 많은 문화 및 자연유산이 있어 관광객이 넘치는 곳이라한다. 현재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도쇼구(동조궁:東朝宮)를 찾았다. 도쿠가와가 죽을때 그 손자에게 유언을 남기를ꡐ나를 후사날 닛코에 묻으면 신이 되어 일본을 지키리라ꡑ하여 도쿄에서 이곳까지 유해를 이동하여 만든 묘와 사당이 바로 동조궁이다.

 

 

  도쿠가와의 손자가 짧은 기간인 1년 반 만에 이런 거대한 궁묘를 지은 것이 놀랍고 아름다운 목조 건축과 조각이 뛰어나 일본의 목조건축미를 엿볼 수 잇게 한다.자꾸 한국의 소박한 목조건축이 생각나고 그것이 정말 자연스럽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큰것인지 의문을 품게 한다. 어린 원숭이 세 마리가 눈과 입과 코를 막고있는 앙징스런 조각이 재미있는데 어릴때는 그렇게 살라는 의미라한다. 김재수 가이드가 어린이들이 여럿이어서인지 참배는 안된다는 것을 자주 강조하는 것이 인상적이며 구태여 많은 계단을 올라 도쿠가와 이에야쓰의묘까지 갈 필요가 없는지라 1시간동안 묘역의 건축들만을 구경하였다. 

  쥬젠지코(중선사호:中禪寺湖)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다. 어제와 비슷한 일식이다. 점심후 호수가에서 쉬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바람이 시원하여 졸리기까지 하다.

 

 

 

이 호수 역시 매우 큰 호수인데 칼데라 호이다. 이것이 1270m이니 신비롭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한것이리라.

  조금 이동하여 게곤노타키 폭포를 구경하였다. 백두산의 장백폭포에는 어림도 없지마는 그래도 꽤나 시원스런 폭포다.

  2시에 이곳을 출발하다. 120㎞의 대장정이기도 하지만 길이 막히면 큰 고생이라한다. 사이타마(崎玉)현을 거쳐 드디어 관동지방에 들어서고 꿈에 그리던 동경(토오쿄오)에 들어서다. 일찍이 초등학교시절부터 세계에서 가장크고 가장 인구가 많다고 배워온 동경이요, 중학교시절부터 근대소설을 읽노라면 으레 주인공들이 유학하러 찾아가는 신학문, 신문화의 메카로 여겨지던 동경(東京,憧憬)이 아니던가? 차가 너무나도 막혀 5시에 도착하여 신쥬꾸(新宿)근처에 있는 코리아 타운의 한식집에서 저녁을 먹다. 30정도의 젊은 주인이 기타로 앙콜까지 받아가며 상당한 실력의 노래(가수지망생이었다고)를 불러주어 흥을 돋우었다.

 

 

 

  식사후에 동경신도청 전망대에 올랐다. 45층의 엄청난 규모의 도청사가 대단하고 시민들에게 전망대를 만들어 선사하에 되어 자앙거리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서울시청의 초라함이 비교된다. 토쿄의 저녁야경을 실컷 구경하고 아카사카 호텔 702호실에 들었는데 규모는 아주 작고 변두리라고 생각했더니 시설이 아주 깔끔하고 조용하였다. 뉴스에 내일의 동경기온이 최고 섭씨36°라니 몇 년전 북경에서 섭씨37°에 만리장성에 오르던 날 그 수많은 인파중에서도 가장 많은 땀으로 그야말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 몸이 땀으로 젖었던 기억이 났다.  내일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가?


  

셋째날 8월 11일(토)

  아침에 5시 40분에 잠이 깨어 시내 산책겸 운동에 나서다. 밖에 나와 걷다보니 호텔앞에는 거대한 40여층의 아카사카(東北)빌딩이 있고 소니(sony) 본사 인듯한 건물과 아카사카 경찰서가 있다. 그리고 주변에 매머드 빌딩들이 많고 짓고 있는 건물도 많아서 이곳이 결코 변두리가 아니며 동경의 마천루지역임을 짐작케 하였는데 실제로 동경을 빠져 나가면서 멀리서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호텔 가까운 곳에만 무려 다섯 개의 작은 절들이 있어 아직도 불까 살아 있음을 알게 해 주며 가정집들은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아주아주 깨끗하게 관리하며 작은 화분에 꽃들을 심어 건물의베란다와 집앞의 뜰에 또는 길가에 내놓은 모습이 인상적이며 깔끔하고 질서있고 예절바른 일본인들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동네병원은 우리의 그것보다도 더 소박하게 그저 문하나 달려 있고 간판하나 걸린 모습이다. 우리의 삶과 모습이 이 동적이고 부단하게 변화하고 아파트문화이고 시끄럽고 복잡하고 무질서라 한다면 일본의 그것들은 정 반대이다. 양선생이라면 이런곳이 딱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런 질서와 조용함과 단독주택과 차분함과 단조로움과 예의바름같은 일본의 문화에 흔쾌히 적응할 수 것인가? 나는 이젠 절대 아니다. 양순옥도 이젠 거의 모두 아니다. 아직도 그저 우리의 연립주택같은 작은 아파트들 이외에는 대도시 사람들도 여전히 일본식 단독주택에서들 알뜰 살뜰 깔끔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서(물론 지진이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진정 우리와 너무도 다른 그들의 생활모습을 발견하며 우리와 나는 이제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의 문화는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내가 일찍이 초등학교 시절 임낙순 교장선생님과 바둑을 두시기 위해 교장사택에 놀러 가시는 할아버지를 따라 일본식 교장 사택에서 교장선생님의 외손자인 1년후배 기소와 함께 놀면서 다다미방과 화장실의 과학적 구조와 깨끗함에 탄복하고 교장가족이 마치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여겨지던 일본문화에 대한 선망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나 보다. 일본집과 그 문화가 지금 우리의 고급아파트보다 꼭 좋아서라기 보다는 당시의 일본집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구조와 우리 초가집의 비과학성과 화장실의 불결함과 저급한 목욕문화의 대조적인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 나의 과념에 고정되어 있기에 그리 쉽게 잊혀지지 않는 까닭이리라.

  호텔 뷔페식으로 식사를 마치고 8시에 메이지 신궁으로 출발하다. 메이지 천황을 모신 묘궁인데 그 부지가 70만평이라 한다. 울창한 숲으로 덮혀 있어 규모가 대단한데 이미 어젯밤에 도창전망대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 본 바 있다.

 

 

  

  1시간을 관람하고 다시 신쥬꾸 지역에 있는 일본관광공사소속이라고는 하나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관광상품판매점에서 찾고있던 코털자르는 칼이 아닌 전기식 코털자라기를 구입하고 키토산을 무려 24만원에 구입하였는데 해외여행시 절대로 그처럼 선물 안사기로 작정하고 또 실천하고 있는 중에도 그저 건강에 좋다면 금방 마음이 변하여 사고 마는 것을 보면 나도 이미 건강을 최우선하게 된 중늙은이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게 좋은 현상인지 아니면 이제 몸건강이나 생각하게 된 처량한 모습인지 헷갈린다. 어쨌든 중성지방과 콜레스트롤을 제거하는 식품이요 신일본제약제품이요, 믿을만한 가이드인 김재수씨가 추천하였으니 이왕 구입한 것 잘먹고 효과나 크게 보아야지 별수 없다. 돌아와 조사해보니 결코 비싸게 속아산게 아니어서 다행이고 여행시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면 내가 양국에서 찾아서 키토산을 먹을 리 없으니 참 잘된 일이라 생각하고 먹기 시작하니 마음이 편하다.

  10시 10분에 동경을 출발하였는데 한시간쯤 지나니 비행기가 날고 앉는 것이 잦은 것을 보면서 하네다공항이 이 근처인 듯 싶다. 어찌나 차가 밀리던지 가나가와(新奈川)현가와사키(川崎)시요코하마(橫兵)시 부근을 지나 후지산이 가까이 잡힐 듯이 보이는 시즈오카(靜岡)현국립공원 하코네에 12시 30분이 되어서야 도착하여 점심부터 먹었다.

 

 

 

  오늘부터 일본은 우리의 추석과 같은 명절이 시작되고 그래서 많은 도시인들이 시골로 이동하게 되어 길막힘 현상이 가히 클 것이라 한다. 1시간을 달려 오와쿠타니 유황계곡에 도착하였다. 17년전에 가 본 오이타현의 아소산(1592m)에는 크게 못미치지만 그래도 여기저기에서 화산이 살아있어 물이 끓고 있고 연기가 솟는 모습이 섬뜻하며 그 뜨거운 물에 계란을 넣으면 겉이 까맣게 되어 이것이 특산물이 되어 큰 수입을 올리고 있다 한다. 계란 여섯 개에 500엔(우리돈 4000원)인데 둘이 세 개씩이나 먹었다.

  다음에는 아시노코 호수로 간다. 이곳에서 해적유람선을 타고 오노아시노토까지 40분간을 가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3시 40분부터 머나먼 도요하시로 향하였다.

 

 

  야마나시(山梨)현에 있는 후지산(富士山)은 정말 대단한 산이다. 하코네에서도 훤히 보이던 후지산은 버스로달리는 매우오랜 시간에도 줄곳 볼 수 있을 정도로 평야지대에 정말 홀로 우뚝 솟은 3776m의 거대한 산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보면 나무도 없고 돌과 눈만 쌓여 있어  백두산과는 대조적인 볼품없는 산이라고 한다.

  어찌나 길이 막히던지 저녁밥을 걱정하며(9시가 넘으면 호텔밥을 주지 않는다 하므로)달리고 달려 8시 30분에야 아이치(愛知)현도요하시(豊橋)에 겨우 도착하여 30층짜리 도요하시 닛코호텔에 들어 우선 밥부터 해결하고 22층 6호에 여장을 풀었다.

  생맥주를 사러 호텔뒷편에 있는 100엔 상점(우리돈 800원)에 가니 캔맥주가 88원이요, 웬만한 음료수나 과자나 안주는 거의 다 100엔 미만이니 놀라지 않을수가 없다. 1990년경에는 우리돈으로 환산하여 물건값이 거의 두배 정도여서 (예 : 우리나라 1000원짜리 과자가 5천원이나 하므로 차마 사서먹지 못하였다)일본인들이 수입은 우리의 다섯배이나 물건값이 비싸 겨우 두배정도 잘 산다 하였는데 오늘의모습은 너무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도시근로자 가구의 평균소득이 320만원인데 일본인들은 40만엔이라 치고(연봉 500만엔이면 상당한 고액연봉축에 든다고 들었다.) 우리돈으로 바꾸면 320만원이다. 그런데 수퍼의 생필품은 우리와 거의 같고(물800원, 아이스크림1000원, 캔맥주1200원, 음료수1000원등) 식사비는 오히려 두배 정도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이나 한국인들이나 사는 것은 마찬가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원화의 강세와 엔화의 약세로 현재 환율이 100엔대 760원대인데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는 모르겠으나 기분은 좋은 일이다. 내 월급이 50만엔이 넘고 있다.



넷째날 8월 12일(일)

  오늘은 대단한 강행군이 이어질 전망이다. 하룻동안에 간사이 지방까지 이동한 뒤에 교토, 나라, 오사카를 돌아볼 예정이니 말이다. 8시 20분에 호텔 전용버스로 신간센(新幹線) 역으로 출발하다. 9시1분에 열차가 출발하였는데 객실이 비교적 우리 KTX보다 넓고 더 빠른 느낌을 받았다. 첫날과 이튿날에 다닌 미아기(宮城)현후쿠시마현, 도치기현 등은 500m 이상의 고지대이면서 논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산간지방이었던데 비하여 이곳 아이치현도요하시부터는 신간센 주변에 논이 펼쳐지고 논농사지대의 도시와 농촌이 끝없이 이어진다. 마이바라역까지 가는 중에 나고야(名古屋)시를 지나면서 유명한 도시를 보게 되어 흐뭇하다. 9시 50분에 도착했음에도 역을 빠져나오는 시간이 30분 걸리고 버스를 타고 교토까지 무려 1시간 반이 걸려 12시에야 교토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게 되니 도대체 오늘 오전에는 이동밖에 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일정을 소화할까하는 걱정에 ꡐ신간센으로 바로왔더라면 10시 40분에 도착했을 것을 스케쥴이 잘못되어 우리 고생시키고 저들의 이익만 챙긴다고 비판을 했더니만(가이드가 신간센 열차비를 아끼기 위해 버스를 대기시켰다고 설명하였기에) 나중에 알고보니 쿄토까지의 차표를 모두 구할 수가 없어 이루어진 일이라 한다.

  교토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지나치면서 보게된 본능사(本能寺)는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을 배반하고 쳐들어온 부하인 아케치 미스히데에게 추함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살한 곳이라 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1549년 아버지 노부히데[信秀]의 뒤를 이어 오와리국[尾張國: 愛知縣]의 태수가 되고, 이웃의 여러 제후를 평정하여 무명(武名)을 떨쳤다. 156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동맹을 맺고, 1568년에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막부(幕府)의 회복을 청해 왔으므로 이를 기회로 삼아 교토[京都]에 입성하여 막부를 재건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1573년에는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를 교토에서 추방함으로써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단절시켰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평정하였으나 1582년 혼노지[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 습격을 받고 자결하였다.

 

  제이궁(第二宮)은 아주 겉으로는 서민적으로 지어진 우직한 아케치 미스히데가 지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위한 집인데 이 집을 너무 잘 지은 일로 인하여 노부나가와 미스히데의 사이가 벌어지고 머리를 얻어 맞는 수모를 당한 미스히데가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 집이며 훗날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아들인 토요토미 히데요리가 도코가와 이에야스와 이곳에서 회담하고 모든 것을 바치게 되는 역사의 현장이 된 곳이라 한다. 가이드인 김재수씨가 일본의 유학생출신이며 역사를 많이 공부하여 많은 설명을 하였는데 관광객들이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게 일본사이다. 나도 가르친지 오랜 일본사를 다시 간단히 정리하여 본다.

 ●나라지방의 야마토 정권 :  3C말  - 7세기 중엽(645)까지

 ●나라시대 : 710-794

 ●헤이안(쿄토) 시대 : 794-1185

 ●카마쿠라막부 : 1185-1333-미나모토 요리토모 집안, 가나가와현의 카마쿠라시

 ●무로마치 막부 : 1338-1573 교토의 무로마치지역, 아시카가 다카우지 집안

 ●전국시대 : 1467-1568   1590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 완수

 ●도쿠가와 막부 : 1603-1868 에도막부시대, 에도로 천도


  금각사(金覺寺)에 도착하였다. 무로마치시대의 아시카가 집안에서 지은 절인데 금으로 누각을 칠하여 화려하기 그지없는 건물과 아름다운 일본식 정원이 자랑인 곳이다.

 

 

 

  청수사(淸水寺)는 교토를 대표하는 사찰로 규모도 크거니와 산기슭에 자리잡아 쿄토시의 전경이 한 눈에 잡히는 아름다운 절이다. 찾아온 관광객 인파로 주차장에서 사찰안까지 사람들로 가득차서 서로 부딪히며 걸어가는 판이다. 절안에는 신사도 있어 사람들이 참배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의 불국사라고나 할까? 어쩌면 그리도 많은 외국인들과 젊은 일본청년들이 저리도 많이 찾아올까? 우리나라의 불국사나 합천 해인사에도 젊은이들이 가득 가득 찾아오는 날이 있었나? 아마도 우리의 산중불교와 일본의 도시불교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고 젊은층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한국불교의 어떤 약점이 있다고 본다. 찾아가기 힘든 위치, 생동하는 한국문화와는 다른 정적인 요소, 어두운 법당, 그저 구경가는 곳이 경치좋은 곳에 있는 절 일 뿐 젊은이들에게 와닿지 않는 이질적인 종교문화공간일 뿐이리라. 나 또한 그러하거늘 하물며 젊은이들에게야 말할 나위가 없다 하겠다.

 

 

  날씨는 지독하게 덥고(아마 35도 이상인 듯)물만 사정없이 마셔대니 하루에 우리 들이 마시는 물병이 세 개씩이다. 주차장은 만원이어서 복잡하고

빠져나오는 시간이 너무나 걸려 짜증이 난다.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나가는 통로를 하나 마련했으련만 수백미터 거리를 그 좁은 2차선도로에서 버스와 버스까지도 교차하니 도대체 느리기가 말도 안되게 느리다. 아 과연 우리가 아니라 일본이다. ꡐ빨리 빨리ꡑ정신으로 살아가는 우리로는 살기 힘들 것 같다.  겨우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하여 나라로 향하다. 동대사와 호류사와 다카마쓰 고분이 있는 곳으로 17년 전의 기억이 새롭다.

  동대사(東大寺.도다이사)에 도착하니 5시가 넘어갔는데 30분에는 대웅전의 문을 닫아버린다고 말하며 가이드가 바삐 서두는 모습이 초조하고 비장하다. 가이드를 따라 80노인들까지 사정없이 내달렸는데 정말 거짓말같이 그 500미터는 됨직한 본전까지를 모두들 10분이 안걸려 따라왔다. 한국인들 만세다. 그리고 80노인네들(남자 두 분, 여성 한 분) 대단하다.

 

 

  동대사 사슴공원에서 사슴들과 잠시 놀다가 6시에 30분에 오사카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7시 30분에 오사카성에 도착하여 안으로 걸어갔는데이 성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쌓기 시작하엿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우리의 원수인 토요토미가 쌓은것이기는 하지만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이 대단하여 부럽기조차 하다. 바로 이 오사카가 토요토미의 근거지이며 토쿄는 토요토미의 근거로 지금도 일본의 모든 정치 경제 문화의 거대 산맥이 이 두 도시이다. 오사카 성의 장대함은 토요토미의 권력을 상징하고 야경은 성의아름다움을 더하였다.

 

 

 어두운 오사카성을 걸어나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이젠 오사카의 번화가인 도톰보리에서 젊은이들 속에 끼여서 각자 저녁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다. 8시45분부터 10시까지 자유시간이 주어지고 가이드가 1,000엔씩 나누어주는 돈을 받아 우리는 금용라면을 사먹었는데 이게 웬 맛이 이리도 좋아? 내가 라면을 좋아하지 않게 된 지가 수십년인데 (80년대 이후 거의 먹지 않으니까) 이 라면집은 49년 전통의 라면집이라는데 국물이 하얗게 된게 무슨 곰탕국물같고 그안에는 곰탕식 돼지 고기들이 가득 들어 있으며 그 양또한 잠뽕만큼은 되니 식사가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다. 작은 것은 우리돈 4500원, 양이 큰 것은 7000원 정도여서 그 값도 상당하니 우리의 500원짜리 라면을 쌂은 것과는 전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겠다. 바로옆에 있는 젊은이들의 환락가라는 신사이바시에는 가지 않고 우리는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이들과 거리풍경을 감강하며 쉬었다. 10시 10분

까지 이곳에서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50여분을 달려 간사이 공항 근처에 있는 마지막 밤을 보낼 간사이 히네노스테이션 호텔에 들었다.


 

 





다섯째날 8월 13일(월)

  오늘은 그저 가기만 하면 되는 일정이다. 아무것도 찾지 않고 집에만 이상한 일정이다. 겨우 비행기로 2시간이 안되는 곳인데 스케줄이 원래 이러니 할말도 없다. 여유있게 10시 20분까지 자고 놀다가 호텔버스로 공항으로 출발하다. 1시 10분 아시아나 111편으로 출발하여 돌아왔는데 자리가 창가가 아니어서 구경을 못했으나 짐작으로는 효고(兵庫)현, 오기야마(岡山)현, 시마네(島根)현을 지나 경상도로 들어온 듯 하다.

  세시에 나와서 3시 30분 공항버스를 타고 익산인터체인지 간이정류장에 7시에 도착하고  집에는 7시 30분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