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위기관리의 리더십

청담(靑潭) 2013. 1. 19. 11:52

 

 

조선왕조에서 배우는

 

 

위기관리의 리더십(2003)

 

전 공보처장관 오인환

 

   많은 사람들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하나(총론 찬성), 막상 자신의 기득권을 양보하거나 침해받게 되는 경우에는 동의하지 않는(각론 반대) 이중성의 딜레마가 등장한다.

전임자나 전임정권을 일단 부정하고 나가는 한국정치의 특성 때문에 위기관리 체계가 제대로 계승되고 작동할 수 없었던 점은 한국정치 및 한국사회의 불운이었다.

   저자는 한국의 정치가 발전하고 괄목할 만한 정치지도자를 양성시키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아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정치의 원형의 뿌리인 조선왕조의 정치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원칙도 철학도 없이 離合集散을 되풀이하는 지금의 정치풍토에서, 조선왕조 선비 정치인들의 뚜렷하고 숨이 긴 大義의 정치는 반드시 익혀야 할 전통이고, 패거리정치나 파당정치의 병폐는 반드시 벗어 던져야 할 유산인 것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소위 역사를 연구한다는 학자들이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는데 그치거나, 역사적 해석에 지나치게 조심하는데 반해서, 역사를 공부하고 새롭게 정리하여 기록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해 독창적이고 매우 정확한 평가를 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 저자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역사적 가설을 통하여 지나간 역사를 명쾌하게 재조명하는 놀라운 역사평론의 방법론을 내게 눈 뜨게 해 주는 책이다. 역사에 대한 평가 는 이미 나도 조금씩 조심스럽게 실천해 온 바이나 그에 대해 더욱 크게 눈을 뜨게 해 주고 역사평론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해 주었음에 저자에게 크게 감사드린다.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기술되지만, 역사 해석은 역사가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 훨씬 더 명쾌함을 알려주고 있다.

 

 

 

1. 위화도 회군과 고구려 정신-태조(1335-1408)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위대한 지휘관이라 함은 전술적 판단과 전략적 판단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다. 현대에 와서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전술적 판단)이 전쟁에서의 승리(전략적 판단)로 이어진다는 판단을 동시에 하면서 상륙전을 지휘한 아이젠하워 장군이 실례가 될 것이다.

   이성계가 부딪친 상황이 전술적 판단과 전략적 판단을 동시에 해야 할 상황이었다. 전술적으로 승리(전투에서의 승리)가 가능하더라도 전략적으로는 어려운 전제이고, 국내정치와 연관시켜 생각할 때 자신이 소모품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위화도에서 군대를 되돌릴 수 있었던 것은 이성계의危機管理가 일단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냉철한 위기관리자라는 개념의 성공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후계자 선택과정에서 惡手를 두고, 개국공신 선정과정에서 失着하는 등 나라를 개국한 국가지도자답지 않게 지도력의 혼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방원을 후계자로 삼고 자신의 참모인 정도전을 문하시중을 시켜 방원을 보좌하게 하는 포석을 놓은 뒤 적절한 시기에 제 이선으로 물러나 후견자가

되었어야 했다.

 

 

 

2. 위기관리 능력과 기획능력의 결합-태종(1367-1422)

●태종은 이성계의 위기관리능력에 스스로 기획능력까지 갖추었다. 나아가 위기관리능력을 제도화하는 능력까지 겸비한다. 그는 이성계가문에서 처음으로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광범위하게 숙청작업을 시작한다. 사병해산에 반대한 이거이, 이저 부자다. 이어서 처가 쪽인데 처남들의 속마음이 자신이 아니라 세자(양녕대군)쪽이라고 판단하고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죽이고 그 뒤 민무흘, 민무희까지 숙청한다. 일등공신인 이숙번도 숙청하고 심복인 이무도 숙청했다.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후에도 병권은 자신이 장악하고 이를 어긴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동생인 심정에게 속이 상한 뒤, 심온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고관대작들이 빠짐없이 참석하였다하여 국경을 넘어서자마자 사약을 내려 죽였다.

 

 

 

3. 세종(1397-1450)은 왜 위대한가?

●최만리 등 집현전의 중견관리 여러 명의 한글창제 반대이유 6가지

1. 새로운 문자창제 소속이 중국에 흘로 들어가면 비난받게 된다.

2. 諺文을 만들면 오랑캐가 된다.

3. 설총의 이두가 있는데, 굳이 언문을 또 만들 이유가 없다.

4. 말과 글이 같아도 어리석은 백성의 원통함을 푸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5. 신하들과 의논 없이 국왕이 독단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6. 세자(문종)이 언문정책을 주도하는 것은 부당하다.

 

 

 

4. 성공한 쿠데타도 평가 나름-세조(1417-1468)

●조정은 당시 황보인과 김종서를 축으로 안평대군을 지지하는 세력과 수양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화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수양대군 일파가 소수파였다. 대세가 안평대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말단 궁지기였던 한명회는 두뇌회전이 빠른 지략가로 <지금은 세상이 변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문신들은 쓸 곳이 없습니다. 나리는 반드시 무사들과 결탁하셔야 합니다>라고 권고했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던 쿠데타에 대한 공로로 43명의 靖難功臣을 정하고 다음 급으로 공이 있다는 原種功臣을 6차례에 걸쳐 267명을 고른다.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를 추대한 공로로 左翼功臣 46명을 책봉한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55명을 敵愾功臣으로 선정했다.

 

 

 

5. 성종(1457-1494) 사림시대를 열다.

●한명회는 셋째 딸을 예종에게, 넷째 딸을 자산군(예종의 형인 의경세자의 둘째아들로 성종이 됨)에게 시집보내 겹사돈을 맺는다.

●우수한 인재를 홍문관에 모았다. 홍문관에 들어갈 대기자명부인 홍문록에는 과거시험의 장원급제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뽑힌다는 보장이 없을 만큼 권위가 붙었다. 성종은 홍문관에 국왕의 자문역이 되는 經筵官의 자격을 주었다. 경연관들은 국왕과 대신들이 국정을 논하는 경연에 참석하여 의견을 반영했다. 건국 이래 경연은 국왕에게 제왕학을 가르치는 자리였으나 성종대에 와서는 국정을 협의하는 중요기능이 추가된 것이다. 경연정치의 등장이다. 경영관등 젊은 사림들의 명분론과 정치현실을 우선시하는 현실론의 대신들 사이에 활발한 논의가 벌어지며, 국왕이 양쪽의 의견을 절충하여 채택하게 되는 일종의 정책협의가 진행되었다. 경연정치를 통해 정책에 대한 이상과 현실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국왕, 대신, 젊은 사림파간에 견제와 균형이 가능하게 되었다. 경연정치의 성공에 이어 훈신파 대신들을 확실하게 견제케 하기 위해 홍문관관리들에게 언관권까지 주었다. 사간원, 사헌부와 함께 홍문관이 등장하는 조선왕조의 언론3사가 이때 확정된 것이다.

 

 

 

6. 좌초한 개혁-중종(1488-1544)

※급진개혁은 실패한다.

● 조광조(1482-1519)는 중종 6년(1511) 2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예비관료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교한다. 이곳에서 학문과 행동거지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 성균관 유생 2백여 명의 천거와 젊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가졌던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특채후보자가 되었다. 당초 참봉(종9품)내정에서 종6품인 造紙署의 司紙로 3단계를 뛰어 발탁되었다. 閒職이었으나 그때까지 특채자에게 9품직을 주어 오던 관례에 비해 볼 때 파격적인 대우였다.

   나중에 최대정적이 되는 당대의 문장가 남곤도 조광조는 당장 정4품직을 맡겨도 될 만한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조광조는 그 같은 벼락출세에 대해 주위의 눈길이 곱지 않자 두 달 뒤 본과시험인 알성시에 응시하여 당당하게 이등으로 합격함으로서 실력으로 성균관 전적(정6품)으로 진출했다. 34세 때였다. 1515년의 일이다. 이후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여 3년 만에 종2품직인 부제학으로 승진하게 된다. 같은 해 11월에 대사헌(종2품)이 된다.

●기묘사화에 대한 기록에<임금이 신하와 함께 人臣을 제거하려고 꾀하는 것은 비록 盜謨에 가깝기는 하나, 奸黨(조광조 일파)이 이미 이루어졌고 임금은 고립되어 이를 제어하기 어려우니 공모하여 제거함으로서 종사를 안정시키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일파를 숙청하도록 밤늦게 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내린 밀지에는<조광조 등이 정국공신을 삭제한 것은 공신들을《신하가 임금을 폐하지 못 한다》는 綱常의 죄로 몰아가려 함이다. 먼저 공이 없이 공신에 오른 자를 삭제한 후에 나머지 공신들에게 燕山을 폐한 죄로 성토하고 보면 卿들은 魚肉이 될 것이요, 그 다음에는 화가 내게 미칠 것이다. … 이들에게 죄를 주고 싶으나 대간과 홍문관과 육조와 유생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말하면 내가 능히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내기 이름은 人君이나, 실상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바지저고리이다>라고 쓰고 있다.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키워놓은 사림파가 오히려 왕권을 능가하게 되는 바라지 않던 사태로 변질된 것이다. 당시 조광조 세력인 언론 3사의 위세가 하도 높아 의정부의 세 정승도 그들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조광조야말로 그 시대 개혁의 상징이었고 카리스마를 갖춘 특출한 지도자였던 만치 그 평가에 맞는 의무를 다 했어야 했다. 그런데 조광조가 전개한 개혁과정은 편협하고 과격하며 과속이어서 성공확률이 매우 낮을 수밖에 없었다. 지혜와 슬기가 모자랐다는 점에서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조광조는 동조세력을 만드는데도 실패했다. 정치, 경제를 본격적으로 개혁하려면 광범위한 동조세력을 끌어안고 가야한다. 조광조는 자신과 동조세력을 군자로 보고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시각을 가졌다.

 

 

 

7. 조선성리학, 실천주의를 완성했어야

◯退溪 이황(1501-1570) 南冥 조식(1501-1572) 栗谷 이이((1536-1584)

●이황은 天命圖說에서<四端은 理가 발동한 것이요, 七情은 氣가 발동한 것이다>라고 규정하자 기대승이 잘못이라 지적하며 논변이 시작되었다. 8년간의 논쟁을 거쳐 이황이 당초주장을 수정하여<四端은 理가 발한 것에 氣가 따른 것이고, 七情은 氣가 발한 것에 理가 탄 것이다>라는 理氣互發說을 내놓아 기대승이 양보하여 끝을 맺는다. 《주리론》

   이이는 기대승의 주장에 동의하고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반대한다. <四端과 七情이 모두 氣가 發한 것에 理가 타는 것> 이라는 주장을 하였고 이는 氣發理乘一途說이라 한다. 《주기론》

●율곡의 제자인 김장생은 스승의 개혁사상을 이어받지 않고 오히려 예학을 집대성하며 그 아들 김집은 율곡이 백성을 피폐시키고 있는 방납제도의 개선책으로 지지했던 대동법의 실시를 추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강히 반대했다.

   조광조가 처음 문제를 제기하고 이율곡, 이원익을 거쳐 잠곡 김육(1580-1658)에 의해 완성된 대동법의 실현은 보수일변도의 조선왕조에서 진보파가 1백여 년의 노력 끝에 이룩한 최대 업적이었는데 그런 곡절이 있었다.

→ 고전산문(한국고전번역원 정선용 수석연구위원) : 잠곡은 이 서문의 첫 대목에서 군자가 학문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백성에게 은택을 내려주어, 백성의 삶이 편안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자신은 '형식적인 것을 중요시하지 않고, 실제적인 일을 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 몇 마디의 말에 잠곡이 가지고 있던 사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잠곡은 당시의 유학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였던 성리학(性理學)이나 예학(禮學) 등에 대해서 조그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철저하게 실제(實際)와 실용(實用)을 위주로 하는 학문을 하였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려는 경세관(經世觀)을 가지고 있었다.

   잠곡은 대동법을 확대 시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당시 호서 지역에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송시열, 김집, 송준길 등 소위 산림(山林)들의 격렬한 반대에 맞닥뜨렸다. 이 반대파는 심지어 잠곡에 대해 상앙이나 왕안석과 같은 자라고 하면서 비난하였다. 상앙과 왕안석은 제도의 개혁과 엄격한 법집행을 통하여 오로지 부국강병(富國强兵)만을 추구하였던 자들이다. 이들의 개혁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것이어서 후대의 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잠곡은 반대파의 이와 같은 격렬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해, 대동법을 호서 지방까지 확대해 시행하였다.

   잠곡은 대동법의 시행 이외에도 여러 가지 제도를 개혁해 백성에게 실제적인 혜택을 주었다. 물품화폐가 가지는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화폐(貨幣)를 만들어 유통시켰고, 틀린 역법(曆法)을 바로잡기 위하여 시헌력(時憲曆)을 도입해 시행하였으며, 민생의 편의와 생산력의 증대를 위하여 수차(水車)와 수레를 제작해 보급하였고, 백성을 교화하기 위하여 활자(活字)를 제작해 서책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잠곡이 행한 이러한 제도의 개혁은 우리나라의 역사발전을 한 단계 끌어올릴 만큼의 진보적인 것이었다.

●정치라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백성을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요체라고 할 때 퇴계는 도덕이론에 치우쳐 현실정치에서 소극적이고 생산성이 떨어진다. 어려움에 처한 현실에 뛰어들어 과감하게 개혁을 실행함으로써 난관을 정면 돌파하는 행동하고 실천하는 지성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그는 순수도덕주의에 대한 이론뿐 아니라 강력한 실천철학까지 완성했어야 했다.

●이황은 양명학을 검토해 보고 異端이라고 단정한 뒤 배척해 버렸다. 정통성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양명학은 불교나 老莊思想의 영향을 받은 것은 정도를 벗어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경직된 사고체제는 우암 송시열의 斯文亂賊 是非에서 보듯이 같은 성리학 내의 異見까지도 이단시 하는 극단주의로 흐르게 된다.

●남명은 입으로 말하는 유학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행하는 실천유학을 가르쳤고 武를 경시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도학이라는 것은 경서를 통달하고 담론을 잘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실천의 공부를 통해서 달성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실천의 공부를 엄격한 수양과 절제를 통해 진행시키게 했다. 남명만큼 실천하는 지식인을 강조한 철하자는 없었다. 퇴계를 향해<물 뿌리고 빗질하는 節度도 모르면서 입으로 天理를 말하여 세상을 속이고 명성을 훔치려는 자들이 많다>고 비판하였다. 理發이니 氣發이니 하는 空理空談을 꼬집은 것이다.

   퇴계는 <남명은 理學으로 자부하고 있지만 그는 한명의 寄士에 불과하다. 그의 이론이나 식견은 항상 신기한 것을 숭상하며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주장에 힘쓰니 어찌 참으로 道를 아는 사람이라 하겠는가?>하고 괴짜 선비 정도로 낮게 평가하였다.

 

 

 

8. 최대의 위기시대-선조(1552-1608)

●이준경은 죽기 전에 병석에서 짧은 遺箚(유차)를 국왕에게 올린다. <붕당의 사사로움을 깨트려야 합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잘못이 없고 일에 허물이 없는 이라도, 자기네와 한마디 말이라도 합하지 아니하면 배척해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행실을 닦지 않고 글 읽기에 힘쓰지 않으면서도 거리낌 없이 큰소리치며 당파를 지으면서 그것이 높은 것이라고 허풍을 키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이면 함께 들어 의심하지 마시고 소인이거든 버려 두어 저희끼리 흘러가게 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전하께서 공평하게 듣고 공평하게 보아주시어 힘써 이 폐단을 없이 하기에 힘쓰실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를 구하기 힘들 것입니다>

   율곡이 강력하게 반발했다.<새가 죽을 때는 그 울음소리가 슬퍼지고 사람이 죽을 때는 그 말이 善해진다고 하는데 준경은 죽을 때에도 그 말이 惡합니다>라고 평하면서 이준경의 상소내용을 시기와 질투, 그리고 음해로 평가절하해 버렸다.

→이준경이 말하는 소인들이 오늘날 한국정치에서 노무현 추종파들과 비슷한 일면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개혁을 내세우며 상대당 사람들을 보수 꼴통이라 몰아 부친 사람들이다. 개혁이라는 말만 내세우면 무조건 正義이고 善이라고 착각하는 무리들이다.

   원숭이도 외나무다리에서는 떨어진다더니 완전한 인간으로 여겨지는 이율곡도 원로대신을 욕보이는 말을 함부로 하면서 그의 충정어린 예언을 무시한다. 그러나 이준경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담당한 서인의 실세 정철이 위관(조사관)을 맡으면서 정여립과 교유관계가 있는 사람부터 인척까지 모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도 모두 조사대상 이었다. 동인계 인사들이 共謀로 몰려 처형당했다. 정여립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무차별로 처벌을 받았다. 정철은 평소 미워하던 사람들을 이 기회에 모두 연루시켜 屠戮을 할 심산이었는지 3년 만에 죽은 사람만도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서인 정철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상대당인 동인들을 1천여 명이나 도륙을 낸다.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우리 국문학사에서 가사문학의 거인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슴 아픈 일이다.

   4대 사화는 교과서에서 그 참상을 가르친다. 천주교 박해도 그 참상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 기축옥사는 당쟁의 엄청나고도 처절한 폐해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잘 가르치지 않는다. 왜 일까? 일본의 역사가들이 일제 강점기에 우리민족의 고질적 병폐로 사대주의와 당파주의를 내세웠던바, 그당파주의를 부정하고 당파싸움을 붕당론으로 치장하면서 붕당론의 긍정적인 평가(오늘날의 정파내지 정당과 같은 성격으로 규정)만 내리려다 보니 나타난 역사왜곡 다름 아니다.

●1590년에 조선통신사로 다녀온 정사인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 군관 황진과는 달리 부사인 김성일은 끝내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유성룡은 의심스러웠으나 같은 동인인 김성일의 편을 들었다. 김성일이 말한다.

“낸들 왜놈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황윤길이 마치 왜놈들이 사산들을 뒤를 따라올 것 같이 말해 민심이 동요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렇게 반대로 말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준 국서에 征明假道를 말했고, 김성일이 <명국에 한번 뛰어 들어 가겠다 ; 一超直入大明>로 기어이 고치도록 요구하여 돌아왔으면서도 귀국한 뒤에는 일본의 분위기를 완전히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쟁이 빚어낸 무서운 병폐였다.

   그 뒤 일본의 사행들이 이듬해 군사를 일으킴을 알려주고 김성일에게도 전했으나 김성일은 조정에 보고조차 안한다. 전쟁을 반대하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사위인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도 사람을 보내 침공일이 4월로 연기됨을 알려주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조정에 보고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조선의 경제원조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전쟁을 막는 데 필사적인 요시토시가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침략계획을 다시 전달하고 명나라에 통고하여 수습하게 하자고 거듭 촉구했으나 10일이 지나도록 회답이 없자 그대로 돌아갔다.

→오호 통재라! 저 김성일을 보라! 나라의 안위보다 당파를 먼저 생각한다. 이이만 살아 있었어도 전쟁에 대비하였을 것을.... 오직 이순신만이 전쟁에 대비할 따름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2월 진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2월 13일 정읍을 떠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지금의 여수)에 부임했다. 유성룡(柳成龍)은 이미 이이(李珥)가 이조판서로 있을 당시 이순신의 이름을 소개한 바 있었으나, 이순신은 이이가 자기와 성씨가 같은 문중이라 하여 그의 재직시에 찾아가기를 사양했다 한다. 부임 후 왜구의 내침을 염려하여 바로 영내 각 진의 군비를 점검하는 한편, 후일 철갑선(鐵甲船)의 세계적 선구(先驅)로 평가될 거북선[龜船]의 건조에 착수했다. 전라좌수사의 취임 이듬해인 1592년 3, 4월경에는 새로 건조한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는 것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시 조정에 있던 수많은 관리들이 공신이 되고 마치 오늘날 대단한 인물들이었던 것처럼 존경의 대상이 되어 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닌가?

   전쟁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으니 중앙군은 군적만 있고 사람이 없다. 일본은 조총을 가졌는데 이에 대한 정보도 없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바다를 새까맣게 덮은 일본함대를 보고 1백여 척의 천선을 自沈시키거나 불태워 버리고 수군을 해산한 뒤 달아났다. 경상우수사 원균도 출전하라는 도 관찰사 김수의 명령을 받았으나 여기 적세에 눌려 판옥선등 1배여 척을 버린 뒤 수군을 해산하고 배 4척으로 전쟁터를 이탈했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도망가 버렸다. 김성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잘못 보고한 책임으로 처벌이 논의되었으나 동인인 유성룡의 변호로 경상우병사에 임명되었다. 경상우병사 김성일은 <전선은 4백여 척에 불과하고 순사 수십 명을 태웠으니 모두 1만 명을 넘지 못 한다>고 오보를 올린다. 순변사 이일이 내려갔으나 군인이 없고 그나마 대구에 모여 있던 동원군은 지휘무장이 늦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도순변사 신립은 천연요새인 조령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 포진하고 기병부대를 활용하려 했으나 조총부대에게 패전한다. 유성룡이나 김성일이나 그 인간이 그 인간이다. 오늘날 안동지방에서는 최고의 역사적 인물로 유성룔과 김성일을 치며 하회마을 유성룡 생가와 김성일의 본가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고 대단한 역사적 인물로 여긴다. 오직 학문에만 열중한 인간들이 나라를 좌우지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대학시절부터 민주화 투쟁한다고 학생회장하면서 정치에만 눈독들이던 인간들이 이 나라가 마치 저희들에게 볼모잡힌 세상인양 날뛰는 것은 아닌가?

●선조는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를 받고서야 일본의 침공사실을 알았다. 일본군이 상륙한지 만 3일 뒤였고 부산앞바다에 나타난 지 만 4일이 지난 뒤였다. 나라에 변고가 있으면 하루 뒤쯤은 알았어야 한다. 봉화체제는 그런 때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부산에서 서울까지 산꼭대기를 잇는 봉수대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건국 후 200년 동안 대규모의 적침이 없다보니 봉수체제가 유명무실화되어버린 것이다.

→국사시간에 봉수제도는 왜 가르치는 것인고? 제도만 남아있고 무너져 버린 실행 없는 제도는 무슨 자랑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시험문제는 내는 것이었던고? 부끄럽기 그지없다. 실제 인진왜란에서 무용지물이었던 봉수제도는 대단한 제도인양 가르치지 말고 교과서에서 아예 삭제해 버려야 한다.

●이율곡이 1583년 10만 양병설을 건의한다.<2백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곳간에 1년 치 군량도 갖고 있지 않고 군역을 돈으로 사려는 사람이 많아 나라가 모래위에 집을 지어 놓은 것과 같다>고 지적한다. 유성룡까지도 <그 때 가서 상항에 따라 대비하면 된다>고 반대했다. 이이의 수제자였던 조헌도 왜란의 발생 가능성을 경고하는 상소를 올리고 備倭策을 올렸다. 일본군의 공격 예상로인 낙동강 하류의 요새지 강화, 복병전과 유격전의 준비 등 탁견을 담고 있었으나 조야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조헌은 제자를 중심으로 고향사람들을 모아 훈련시키기 시작했고 왜란이 나자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나라의 안위는 관심 없고, 오직 자당파의 권력쟁취와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있을 뿐이었다. 오호라! 진정한 충신은 이순신과 조헌이로다. 유성룡의 사람됨이 대단치 않음을 알게 해 준다. 임란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의 3차에 걸친 수군첨절제사(정3품)발령은 사간의 끈질긴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동인인 유성룡의 추천을 의식한 서인계 대간들의 동인세력의 무관고위직 진출을 견제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래도 우리 역사학계는 당파싸움이 아니고 붕당정치라고 미화만 할 것인가?

●선조의 행차가 도성을 나서자 난민들이 공사노비의 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장례원과 형조부터 불태웠다. 내탕고에 들어가 금이나 비단 같은 귀중품을 훔쳐갔고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까지 불을 질렀다. 군기시도 불을 질러 보관중이던 화약이 모두 폭발해 버렸다.

   선조의 행차가 개성에 이르렀을 때 돌을 던지는 백성이 있었고, 행차가 지난 뒤 일본군이 알 수 있게끔, 국왕의 행선지를 써 붙이는 자도 있었다. 평양에 간 선조가 그 뒤 다시 평양성을 버리고 의주로 가려하자 분노한 백성들이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행차를 가로막는 불상사도 발생했다. 선조 일행은 세 사람의 목을 베고서야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백성들의 약탈과 방화, 파괴로 서울은 적이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백성들의 난동으로만 볼 수 있는 일인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는 임금이나 정당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라도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당시 전국이 거의 다 유린된 것처럼 과장되어 있으나 실제 침입을 받은 지역은 반 이하였다. 전국 군현 330개 가운데 136개 군·현만 침입을 받았고 나머지 194개 군·현은 무사했다.

●북병의 지휘관인 이여송은 남병의 주공으로 이루어진 평양성 탈환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나머지 평양성 성벽을 먼저 넘어가는 병사에게 5천 냥의 상금을 주기로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남병들이 이에 반발하고 소요를 일으키자, 이를 반란이라고 규정하여 1,300여명을 처형했다.

→전쟁터에서 사람의 목숨은 파리 목숨만도 못하다. 그러나 저 멀리 복건성, 절강성, 광동성 등 중국의 남부지역에서 조선 원정군으로 참전한 병사들이 전쟁의 싸움이 아닌 이여송의 농간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만 했으니 저들의 원혼을 그 누가 달래 줄 수 있었을까> 이여송의 사람됨을 능히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선조는 자신을 수행하여 의주까지 따라온 조정신료들의 행위는 무조건 높이 평가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있었던 훈공의 배분율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의주수행의 공으로 훈공을 받은 사람이 무려 86명인데 비해 7년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훈공자는 18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나라를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의병장은 한 사람도 끼지 못했다.

→세습왕조의 병폐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이다. 무능하고 편협된 소인배가 졸지에 왕위를 받아 당쟁을 악 이용하고 성웅 이순신 장군을 시기하는가 하면 자식인 광해군을 멸시하는 등 그의 악행은 너무나 많고 그 소행은 용서할 수가 없다. 국민이 지도자를 선출하는 오늘날의 선거는 그래서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며 지난 대선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이 크고, 권력쟁취보다는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박근혜를 국민들이 당선시킨 것은 당연하고도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9. 연립정권의 위기-광해(1575-1641)

●七庶의 獄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장인인 김제남은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는다. 여덟 살 영창대군도 대북파들은 처단해야 한다고 했지만 광해군은 거부한다. 결국 庶人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시킨다. 그러나 이이첨은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만다. 이어 대북파들에 의해 인목대비 폐모론이 나왔다. 사림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를 상소하니 대북파는 전․현직관리 970명과 종실 170명 등 1,100여명을 동원하여 대비를 처벌하라는 상소까지 올린다. 관제데모인 셈이다.

→저 성리학을 공부하고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관료들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라. 그들이 君子이고 그들이 임금(국가)에 충성하고 그들이 백성을 사랑하는 인간무리들인가? 오늘날 민주통합당에 무리지어 모여들어 젊은이들을 감각적 언사로 선동하고 자신들만이 진정한 노동자들의 편인 듯 행동하며 자신들만이 서민을 대변 할 수 있다고 설쳐대면서(자신들은 모두들 강남좌파들이었다. 자신들의 자식들은 외국인학교에 보내고 다들 미국에 유학가고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미래는 오로지 자신들만이 양어깨에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는 착각에 빠진, 어느 정치학 교수의 말마따나 정치 아니면 할 일이 없는 무리들이 모인 집단은 아닌가? 나는 그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좋은 가문에서 좋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서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거나 고시에 합격하여 출세한 사람들이 모인 새누리당 사람들은 저들처럼 국민을 속이거나 자기 자신까지 철저히 속이는 파렴치한들은 아니다. 그저 잘난 인간들이 모이다 보니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인간들이 가끔씩 나타나기는 하지만... 민주통합당 사람들은 도대체 존경심이 조금도 생기지 않는다. 문재인 후보나 정세균 전 대표 같은 인품있는 인사들이 그저 몇 있을 뿐이다. 대통령 선거에 실패하고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을 선출하여 실패원인을 분석하고 새로운 당으로 추스린다고 하는데 잘 될 것이라고 보는 정치평론가들은 거의 없다. 왜일까? 실패한 정치인 노무현 추종자들이 패거리지어 마치 운동권마냥 당을 장악하고 있는데 그들이 물러설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5년 뒤 대한민국을 다시 노무현 세력이 경영한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2013. 1.18일자 동아일보 : 송영길 인천시장 대담내용

―노 전 대통령은 어떤 정치인이었나.

철학과 원칙이 있었다. 2002년 대선 직전 효순·미선 사건(미군 장갑차에 치여 두 여중생이 사망한 사건) 때 수많은 시민단체가 찾아와 촛불시위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노 전 대통령은 ‘여러분의 의견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같은 정책에 반영하겠다. 정치인이 시위대와 같이 시위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를 지켜보면서 ‘이 사람, 대통령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통령 재임 때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추진했다. 지지층의 반발이 심했지만 개방을 외면하면 우리는 영원히 변방이 된다고 설득했다. 시대정신에 충실한 정치인이었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신’은 뭔가.

지지자들이 반대한다 해도 시대정신에 부합하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않는 것, 한마디로 실사구시(實事求是)다.”

―민주당은 늘 ‘노무현 정신 계승’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한미 FTA 폐기를 주장하는데….

한명숙 정동영 천정배 등 노무현 정부 때 국무총리, 장관을 지낸 사람들이 앞장서서 한미 FTA 재협상이니, 폐기니 하는데 코미디다. 황당무계한 수준이다. ‘정치적 경호실장’을 자임하던 유시민은 농민단체를 찾아가 한미 FTA를 막지 못한 데 대해 고해성사를 했다. 노무현 정신을 왜곡하고 있다. 문재인 전 대선후보도 스탠스가 애매했다. 왜 노 전 대통령의 정신을 아는 안희정 이광재가 문 전 후보 측의 핵심 역할을 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 분들은 왜 말과 행동을 바꾼 걸까.

“철학과 정치관의 문제라고 본다. 국민들은 야당 됐다고 여당 때의 일을 부정하는 걸 가장 황당해하는데 그걸 모르는 것 같다.”

―민주당의 강령에도 ‘한미 FTA를 포함한 모든 통상정책의 전면 재검토’라는 점이 명문화돼 있지 않나.

이상한 세력이 정통 민주당 세력을 몰아냈다.”

―당 강령에는 ‘99%의 국민을 위한 정당’ ‘대기업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란 문장도 들어있는데….

“99%라…. 아주 불쾌한 표현이다. 왜 국민을 분리하나. 1%? 국민들에게 1%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국회의원이라고 할 거다. 대기업 없이 국가경제가 돌아갈 수 있나? 사장이 종업원들을 먹여 살리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중소기업과의 상생이 가능하도록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정체성과 노선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불가피하다. 강령, 체질…. 정말, 모든 걸 다 바꿔야 한다.”

―민주당의 대선 패인(敗因), 무엇이라 보나.

“야권 단일화가 진행 중일 때 문 전 후보에게 전화를 걸어 2002년 대선 때 직접 지켜본 노 전 대통령과 정몽준 의원과의 단일화 때 일들을 들려줬다. 노 전 대통령은 당선만을 위해 끌려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을 던져 단일화를 성사시켰고 단일화 뒤엔 유세를 구걸하지 않았다, 상대가 끊임없이 지분을 요구했지만 끝까지 거절했다, 나는 유세 때 차량을 함께 타고 수행한 사람이다, 내가 직접 지켜봤다는 등의 얘기였다. 안철수에게 의존하지 말라는 당부도 했다. 그런데, 이런 얘기가 잘…(수용되지 않았다). 시대마다 시대정신이란 게 있다. 2010년대를 사는 국민에게 자꾸 1970년대의 일(박정희 시대의 독재)을 주입하려고 했으니 싸움이 됐겠나.”

―요즘 민주당에서는 DJ는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DJ는 평생 끊임없이 공부하고 정책적 이니셔티브를 놓지 않았다. 독재가 사라지자 민생에 착근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DJ와 닮은 점이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수출 주도가 당시 시대정신이라고 봤다. 독재를 했지만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재와 민주란 이분법적 구도로 가서는 안 된다.”

―대선 패배 이후 당내에선 중도 강화론이 나온다.

“선거공학적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전술적 차원이 아니라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하다. 극단이 아니라면 모두 함께 가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화이부동(和而不同·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면서도 자기중심과 원칙을 잃지 않음)’의 중요성을 알았다.”

―민주당은 선거 때마다 자꾸 당 밖에 기대는데….

“자괴감을 느낀다. 왜 선거 때마다 교수, 작가, 시민단체가 대장 노릇을 하나. 왜 국회의원 127명이 들러리를 서나. 민주당은 127석이란 의석을 가진 제1 야당이다. 스스로 127석의 거대 정당이란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 것, 여기서부터 혁신이 시작된다.”

―민주당은 미국대사관에 가서 한미 FTA 발효 정지를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한다거나 촛불시위에 나가는 등 장외(場外)로 달려 나가는 걸 좋아한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 때 손학규 당시 대표가 ‘희망버스’를 타야 하는지를 묻더라. 나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왜 국회의원들이 시민단체 속에 서나. 계엄령이 발동돼 국회가 해산된 상황인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때도 함께 시위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국회의원은 시위대가 아니지 않나. 국회의원이라면 검역을 강화하는 법안 마련에 주력해야지.”

―이른바 ‘운동권’ 출신이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전 대선후보를 평가한다면….

정치인은, 아니 국민은 대한민국의 헌법 체계하에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남북화해, 남북협력은 북한식 사회주의로 가자는 것이 아니다. 문 전 후보도 이해가 안 된다. 왜 대선후보 TV토론 때 ‘남쪽 정부’ 운운하는 걸 제지하지 못했나. 왜 이정희에게 끌려 다니고, 왜 이정희에게 캐스팅보트 역할을 만들어주나.”

   이 대담을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특히 송영길 시장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강홍립은 출병이 마지못해 이루어진 것이며 조선은 후금에 대해 원한이 없음을 밝히고 항복한다. 후금도 조선이 再造之恩 때문에 명나라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음을 이해한다고 밝히고 항복한 조선군을 관대하게 다뤘다.

   강홍립이 투항한 사실이 본국 조선에 알려지자 조정의 중신들은 신하로써 절개를 잃은 것이라면서 가족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 같은 의견을 묵살하고 강홍립의 가족들을 서울에 불러 살게 하면서 인편에 편지 연락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강홍립은 홍경노성에 있으면서 계속 광해군에게 후금에 관한 정보를 보냈고 광해군은 이를 등거리 실리외교의 자료로 활용했다.

→아무리 국제정세를 내다보는 눈이 뒤지는 조신들이라 할지라도 무려 1만 3천여 명의 우리 군인들이 후금에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어찌 강홍립의 가족들을 처형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강홍립의 처형은 곧 후금에 대한 적대정책을 표현하는 것이니 포로로 잡힌 우리 1만 3천의 자식들은 죽든 말든 대의명분만 중시하는 저들 중신들은 백성의 웬수다. 백성들의 목숨은 개나 소만큼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저들일진대 오늘날 자유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 행복할 수 있다.

 

 

 

 

10. 전쟁을 자초하다-인조(1595-1649)

●조선왕조 이후 6번의 군사쿠데타가 있었다. ◆이방원의 쿠데타 ◆수양대군의 쿠데타 ◆중종반정 ◆인조반정 ◆5.16군사정변 ◆12.12사태 등이다.

●인조와 서인들은 광해군을 폐위하고 정권을 잡았으나 광해군은 폐위당할 이유가 없는 임금이었다. 정권을 잡은 서인들의 대외정책의 급전환으로 인하여 1627년 후금이 3만의 군사로 침입한다. 정묘호란이다. 명분 없는 반정과 중국의 정세변화를 읽지 못하고 망해가는 명과 친하고 새로이 부상한 후금을 배척하는 기막힌 이교정책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중원정복을 위한 전초전으로 조선을 굴복시키기 위해 쳐들어온 것이다. 반정공신들은 주화론을 택하여 굴복한다. 형제의 맹약을 맺고 해마다 목면 1만 5천 필, 면주 2백 필, 백저포 2백 5십 필 등을 제공하기로 합의한다.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들인 반정공신들은 제 발 저린지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보다는 반대파에 대한 사찰정치, 공작정치에 치중하다 후금의 침략을 받고는 즉시 굴복해 버린 것이다. 1636년 척화로 돌아간 조선을 국호를 청으로 바꾼 저들이 13만 대군으로 쳐들어 온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병자호란 후 명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고 조선이 당한 호란의 치욕을 갚아야 한다는 崇明排淸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패전에 책임이 있는 조정신료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 같은 돌파구를 여는데 앞장 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중국문화의 嫡統이 오랑캐인 청나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 있다는 小中華 라는 논리가 등장하게 되고 청나라를 무력으로 꺾어야 한다는 북벌정책이 나오게 되었다.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그 같은 국론이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광해군의 현실적인 중립노선을 외면함으로써 호란을 자초하고 전후처리에서도 대준심리에 편승하여 외교정책을 폄으로써 조선이 효율적으로 재기하는 길을 스스로 막아 버렸다. 일어날 필요가 없는 쿠데타가 결국 민족적 수난을 불러오고 피해를 심화시킨 것이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했다면 그것이 일단 중국의 실체가 되는 것이다. 내부적으로 저항의식이 있었지만 중국 사람들은 일단 청나라 체제를 수용했다. 따라서 중국을 지배하게 된 청의 실체를 부인하고 망해 없어진 명나라를 애타게 찾는다는 것은 중국역사와 정치의 특징을 무시하는 것이어서 현실적이지 못했다. 결국 숭명배청, 대명의리론, 북벌론 등의 논리는 지도층의 머릿속에서만 있는 관념이었다.

●북벌정책을 둘러싸고 송시열, 송준길과 국왕의 사이에는 시각과 관점의 차이가 문제였다. 송준길은 북벌은 동의하나 養民이 强兵에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송시열은 진정한 북벌은 국왕의 修身이 가장 중요하므로 그것이 우선해야 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영의정 정태화는 북벌론이 현실성이 없음을 조정이 공공연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북한이 <민족>과 <통일>을 입에 달고 사는 것과 같다. 소위 우리나라의 자칭 진보라 하는 이들이 입만 열면<개혁>을 부르짖는 것과 전적으로 궤를 같이 한다. 그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1.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17세기 송시열(1607-1689)시대 : 효종,현종,숙종

●華夷論과 嫡統論은 17세기 조선을 지배한 주류라 할 수 있다. 오랑캐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이론인 화이론은 청나라를 쳐야 한다는 북벌론을 뒷받침하는 체제수호이념이 되었고, 나중에는 조선이 바로 성리학의 적통을 송나라를 이은 명나라에서 이어받은 나라라는 소중화주의까지 낳게 된다.

   적통론은 예학의 형태로 지배이념이 되었다. 예의의 문제는 성리학이 도입된 고려 말부터 소개되기 시작했으나 조선국토 모든 곳에서 통하는 사회관습으로 보급된 것이 17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왕실은 宗法을 지켜 왕통을 이어가야하고, 사대부는 적통을 통해 가통을 이어가야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조상을 살아 있을 때 모시듯이 모시는 제사를 일반백성까지 지내게 되었다. 또 喪禮에서 가장 중요한 3년상도 고려 말에는 일부 사대부만 지켰으나, 17세기의 조선에서는 양반은 물론 일반백성들에게까지 보급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그랬지만 조선전기 200년 동안은 재산상속에서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는 균분상속제였다. 남녀의 구별 없이 똑 같은 몫을 나누어 주었고 서출의 경우에도 1/7∼1/10까지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은 뒤 적통을 중시하는 성리학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서 이 상속제도가 후퇴하게 되었다. 딸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지 않게 되었고 아들들에게도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이 관례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17세기는 송시열의 시대(1607∼1689)이다. 인조와 효종과 현종과 숙종의 시대이다. 이 시대야 말로 우리 역사에 있어 최악의 시기이다. 사림파에 의한 觀念的, 思辨的 주자학의 성행으로 富國强兵과 爲民政治는 사라지고 오직 禮學이요, 譜學이며 당파싸움에 혈안이 되어버린 시대다. 현종 때 2차에 걸쳐 벌어진 예송논쟁을 보면 저들의 자손임이 한 없이 부끄러워진다. 그 중심에 송시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실학정신을 가진 일단의 학자들(한백겸, 이수광, 유형원 등)이 등장하였다하여 17세기와 18세기를 묶어 마치 17세기도 새로운 시대의 黎明期였던 것처럼 미화되고 있다. 실학은 오직 학문적 연구에만 그치고 실제 정책에는 반영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17세기는 우리 역사의 암흑기였음을 확실히 규명하고 국사교육에서도 바로 잡아야 한다.

●임술고변(1682)은 공작정치의 장본인인 김석주와 김익훈이 짜고 연출한 남인 도륙작전이었으나 계획에 차질이 났다. 관련자의 진술이 엇갈리고 혐의가 확인되기도 전에 서둘러 형이 집행되는 등 조작의 냄새가 짙었다. 그 뒤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는 공론이 일어나 초점이 사계 김장생의 손자인 김익훈에 대한 처벌여부로 모아졌다. 김익훈을 처벌하는 경우 불똥이 김석주에게 튈 것을 알고 있는 숙종은 맞불작전에 나선 김석주가 보복인사를 주청하자 이를 수용하는 등 사태를 얼버무리려 했다. 그러나 공론이 국왕의 처사에 납득하지 않고 반발하는 바람에 서로 밀고 당기는 복잡한 사태가 5년이나 계속되었다. 결국 김익훈의 행동(무고)이 정당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이해하고 감싸며 김익훈의 처벌을 반대하는 송시열 등 원로층과 무고로 처벌해야 한다는 젊은 사류들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서인은 노·소론으로 분당 되었다.

→노소분당의 원인이 국가발전과 백성들의 먹고 사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권력쟁탈을 위한 역모조작사건의 주모자 처벌문제이다. 따라서 당쟁은 그 어떤 명분으로라도 그 본질을 덮고 정당정치의 효시니, 붕당정치니. 긍정적 측면이니 하면서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문의 세계에서 공자를 독자적으로 해석할 자유가 있고 자신의 해석을 책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주자도 공자가 죽은 지 2천 년 뒤 자신의 해석을 쓴 것이고 경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수없이 수정하기도 했다. 그러고도 미비하거나 모순점이 드러나 말년의 송시열이 하나하나 주자대전차의라는 최종 결정판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윤휴나 박세당처럼 주자와 관점이 다른 저작은 이단이고 송시열처럼 주자를 보완하는 저작을 쓴 것은 정통이라고 보는 것이 문제였다. 주자의 나라 중국에서도 없었던 교조주의의 그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에 교조주의가 판을 친다. 민주화 교조주의, 노동운동 교조주의, 환경운동 교조주의, 박정희 교조주의. 김대중 교조주의, 노무현 교조주의. 참교육 교조주의, 진보 교조주의, 개혁 교조주의. 통일 교조주의, 지역 교조주의, 배타적 맹신 교조주의(그 중에서도 나로서는 가장 이해 불가능한) 등등.... 자신들의 주장과 의견에는 무조건 옳다하고 무조건 박수치고 무조건 따르고 무조건 지지한다. 비판은 금지다. 왜? 자신들의 주장은 무조건 정당하고 무조건 옳으니까. 대학들은 졸업했다는데 저러들 하니 그저 웃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유교가 기본적으로 하늘과 땅, 남과 여, 왕과 백성 등 이분법적 구조를 기초로 하고 있지만, 주자는 이분법적 사고를 철저하게 이룩한 인물이었다. 남송의 효종에게 올린 상소에도 나와 있듯이 사람은 公과 私, 正과 邪, 是와 非, 得과 失의 기틀 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주자는 그런 인식의 영향을 받아 전부 긍정하지 않으면 전부 부정해야하는 극단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서 당파싸움에 중요한 빌미를 제공했다. 주자는 고종, 효종 등 네 명의 송나라 황제에게 죄를 짓는 일도 있었고, 중신을 모독하는 일도 있었다. 그 때문에 중앙으로 불려 왔다가 지방으로 밀려 나가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주자의 그와 같은 생활패턴은 송시열에게서도 출사와 은퇴를 반복하는 형태로 유사하게 나타난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정치는 지난해의 대선전이후 통합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고집과 불통의 정치스타일에다, 지난 총선에서 자신의 지지자들만 공천하고 박근혜 측 인사들은 철저히 공천에서 배제하는 터무니없는 짓을 한 이후 소통과 통합이 이 사회의 화두로 등장하게 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흑백논리, 이분법적 배타적 사고는 이 사회를 항상 갈등과 분열로 만들어 왔다. 비록 처음은 아니로되 내 판단으로는 노무현 지지자들부터 극심한 배타주의와 독선주의와 흑백논리와 이분법적 사고가 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고 항상 불안한 사회가 되어 버린 느낌을 갖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개인은 지극히 서민적이고 민주주주의 대한 신념이 투철했음은 인정하나 방법론적 측면에서는 너무나 문제가 많은 정권이었고 그 휘하에 모인 정치인들이라 하는 인간들은 차마 정치인이라고 부르기조차 싫었는데 바로 17세기 실리 없는 당파싸움에만 몰두한 저 송시열을 비롯한 관료부스러기들과 별반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민주당의 19대 총선결과보고서 : 친노와 비노의 계파 갈등 역시 총선 패배 원인의 하나로 꼽혔지만 당은 대선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계파 문제로 당내외 비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보고서는 민주당을 "'친노 대 비노' '진보 대 중도 실용' '원내 투쟁 대 거리 투쟁'을 놓고 끊임없이 분열·갈등하는 정당"이라며 "이러한 이분법적 프레임을 어떻게 극복하고 탈피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있다고 분석했다.                                                                                           2013. 1.17일자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 : “우리가 미워할 것은 친노(친노무현)란 이유로, 비노라는 이유로 그들을 미워하는 우리들 속의 당파적 심리, 당파주의"라며 이 같이 말했다. "누가 다음 대표가 될지, 우리 파가 어떻게 될지, 이런 생각을 갖고 빨간 안경을 끼고 보면 모든 사물이 빨갛게 보인다"며 "그러면 당파이기주의가 생기고 아군과 적이라는 군사문화의 잔재인 이분법에 빠진다"고 경고했다.

                                                                                                     2013. 1. 17일자

 

 

12. 탕평의 기회-숙종(1674∼1720)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19대 숙종전후 1백여 년을 본격적인 당쟁기간으로 보고 있다. 숙종시기 45년간은 확실히 일반적인 권력투쟁의 범주를 벗어난 양상이었다. 정치권의 권력투쟁이 나라의 안위를 흔들 정도였으니 정치적 위기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당쟁이 정치보복의 살륙극으로 악순환 되기 시작한 것은 숙종6년(1680)년 경신환국 때부터이다. 서인주도의 이 환국에서 영의정 허적, 좌찬성 윤휴 등 남인출신들과 복성군 형제들이 극형을 당하는 등 1백여 명이 화를 당했다. 남인이 정권을 잡은 기사환국(1689)때는 모두 103명의 서인들이 죽고 유배되는 등 크고 작은 보복을 받았다. 다시 서인이 집권한 갑술환국(1694)때는 14명의 남인이 죽고 67명이 위리안치 되었으며 54명이 삭탈관직 되어 모두 135명의 남인이 화를 당했다.

   피의 정치보복이 피의 정치보복을 부르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기 시작하였다. 서인가 남인들은 환국이 있을 때마다 국왕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을 처벌하게 했다. 박세채는 숙종9년(1683)에 이어 세 차례나 탕평책을 제시한다. 자기편을 군자의 당으로, 상대당을 소인의 당으로 복 무조건 상대를 헐뜯거나 배척할 것이 아니라 상호가 군자당임을 인정해서 인물본위로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숙종은 탕평론을 채택하지 않았다.

●숙종은 말년에 장희빈 소생의 왕세자(경종)를 연잉군(영조)으로 바꾸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대리청정을 시키고 실하면 세자교체를 강행할 계획을 노론의 거두 이이명과 세운다. 1720년 34세로 경종이 즉위하자 다음해에 노론들은 아들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왕세제를 책봉하자고 주장한다. 노·소론간의 온갖 싸움 끝에 왕은 소론과 함께 대리청정 주창자 조성복과 이를 추진한 노론 4대신(조성복,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제)을 처벌하니 이것이 신축환국이다. 다음해에는 소론들이 반역죄를 꾸며 노론 4대신 등이 죽임을 당는 등 50여명이 죽고 가혹한 형벌을 받으니 이것이 임인옥사이다.

 

 

 

13. 탕평시대의 허실-영조(1694∼1776)

●대탕평은 인사탕평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제도탕평으로 연결되었다. 영조 17년 1백 70여개의 서원이 철폐되었다. 주자,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윤선거, 윤증 등 유현을 모시는 서원도 예외가 없었다. 영조는 당쟁을 지원하고 증폭시키는 진원지는 서원이며, 서원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탕평정치가 뿌리를 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해서 그 같은 결단을 내린 것이다. 18세기 중반의 정치감각으로 볼 때 그것은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 들어 서원은 더 이상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군역을 피하려는 자들을 대거 학생으로 받아들였다. 당인을 모집하고 규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중앙당파가 지시하는 공론조성을 빙자해 사론을 좌지우지하는 형편이었다.

   숙종 때 정치와 서원간의 유착관계는 더욱 심해졌다. 서원의 존재는 정치보복의 중요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당쟁이 서원을 타락시키고 서원이 당쟁을 부추기는 악순환의 연결고리가 되어 있었다.

 

 

 

14. 분기점에 선 철인군주-정조(1752∼1800)

●누가 보아도 정조 즉위 후 최대 공신은 29세의 홍국영이었다.

□남이(1441∼1468)

정선공주(태종의 4녀)의 아들, 좌의정 권람의 사위

1457(17세) 무과 장원급제

1467(27세)공조판서

1468(28세)오위도총부도총관, 병조판서(정2품)

모반혐의로 거열형

□조광조(1482∼1519)

1510(29세) 사마시 장원급제

1515(33세)알성문과 갑과 2등 급제

1518(37세) 부제학, 대사헌(종2품)

기묘사화로 사약 받고 죽음

□홍국영(1748∼1781)

정명공주(영창대군의 누이)의 6대손

1772(25세)과거 급제

1776(29세) 동부승지, 도승지(정3품)

1778(31세) 이조참의, 대제학, 이조참판, 대사헌(종2품)

1779년 자진 은퇴 후 화병으로 죽음

●정조는 유럽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서학(천주교)이 급속히 전파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고, 삼국지, 수호지 같은 청나라의 패관소설을 유행시킨 북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서학과 북학을 邪學으로 규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이해서는 正學을 중흥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정조는 17세기에 완성기였던 조선성리학이 자신의 시대에 들어와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보았고, 그 이유는 사림이 주자학의 心性論에만 지나치게 기운 나머지空理空論을 반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유교의 原經典에 어둡게 된 조선 성리학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조선성리학의 공리공론문제를 거론한 것이 정조가 처음은 아니다. 16세기 이항과 쌍벽을 이룬 남명 조식이 처음 공리공론경향을 철저하게 배척한 성리학자였다. 조식의 문도가 주력이었던 대북이 인조반정을 계기로 철저히 몰락한위 조식의 학풍은 같은 동인의 뿌리였던 남인을 통해 계승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원시유학의 중요성을 갈파하고 주자의 주해대신 자신의 주해를 써서 사문난적으로 몰린 백호 윤휴가 남인이었고, 원시유학에서 노장사상까지 섭렵했던 서계 박세당도 남인의 학풍에 가까웠다. 경전의 심오한 뜻을 주해한 주자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학문의 근본은 원시유학에 있다고 주창한 미수허목 역시 남인이었다. 예론이나 심성론에ㅐ 치우친 노론의 주자 편식에 동의하지 않고 원시유학공부에 열중하는 남인의 정통은 영정조 대에도 채제공, 이가환, 정약용에게 전수되었다.

   정조 16년 正學에 위배되는 邪學에 대한 실력행사가 바로 文體反正이다. 청나라의 패관잡기 내용을 인용한 남공철을 강등시키고 청에서 구입한 패관소설 등을 읽다가 적발된 이상황, 김조순 등에게 반성문을 받아내는 등 쇼크요법을 쓴다. 정조의 한계였다. 그의 학문적 폐쇄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요, 노론을 견제하는 정치적 포석으로 활용한 것이다. 정조가 패관문학에 대해 진산사건 등 천주교사건을 미봉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다면 북학과 서학이 한줄기가 될 수도 있었다. 북학과 서학을 아우르면서 남인의 경세학파와 소론의 실용주의노선인 양명학파까지 함께 수용하여 조정을 꾸려갈 수 있었다면 정조는 근대화의 문을 여는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유교의 도통은 요·순·우·탕·문·무왕 등 하·은·주의 고대 중국 삼대를 거쳐 공자에게 전수되고 맹자와 정자(정이·정호형제)를 거쳐 주자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조선유학계는 남송이 망한 뒤 주자성리학을 제대로 이어받은 것은 조선이라고 해석해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정몽주를 조선성리학의 시조로 설정한다. 이어 길재·김종직·조광조·이황·이이로 도통이 이어진다는 것이 대체적인 통설이었다. 중기조선이후 계속 집권한 서인 노론계는 도통을 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의 순으로 전승된 것으로 보았고, 이황의 수제자인 유성룡·김성일 등을 이은 남인계열이나 조식을 이은 정인홍 등 대북계열은 그 같은 도통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의 황제들은 광대하나 지역을 효율적으로 지배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수많은 관료들을 규찰하는 감찰기구를 크게 발전시켰다.

   君弱臣强의 나라인 조선에서는 감찰보다 간쟁기구가 더 발전한다. 고려에서는 대간들이 중서문하성의 하부조직이었으나 조선에서는 한 단계 발전하여 사간원으로 독립하게 된다. 사간원은 왕권과 재상권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장을 받았다. 사간원은 그 업무의 중요성 때문에 사헌부보다 우위에 있었다. 나중에 사헌부와 홍문관이 간쟁 업무에 참여함으로써 언론삼사를 이루지만 사간원이 업무를 주도했다.

   대간제도의 문제점은 탄핵에 의한 부작용과부당한 탄핵에 대비한 견제제도가 없다는데 있었다. 자율규제에 맡길 수박에 없었는데 모든 대간들이 공정하고 중립적으로 처신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들은 한 번 물고 늘어지면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할 때까지 릴레이로 상소를 올리면서 국왕을 압박해 가는 것이 관례였다. 국왕이 그런 압력을 견뎌내며 언관제도가 계속 유지되어왔던 것을 보면 조선왕조는 언론자유의 선진국이었던 것이다.

●공자는 일찍이 천하를 공공의 것으로 보았다. 천하는 백성의 것이라는 개념이다. 따라서 공자는 천하가 세습되는 것보다 현자에게 물려주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大道에 가깝다고 보았다.

맹자는 ‘백성은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고 정의했다. 군주와 社稷은 바꿀 수 있지만 백성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군주는 變數인데 반해 백성은 常數라는 것이다. 유가사상에서 백성은 이같이 정치의 중심이고, 정치의 핵심은 民生에 있었다. 이것이 유가의 民本思想이다.

→대한민국 정치의 핵심은 대한민국의 발전과 대한민국국민들의 복리에 있다. 그런데 핵심을 통일로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종북주의자들이다. 통합진보당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되어 세비를 받고 온갖 혜택을 누리며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박근혜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면서 이정희를 대통령 후보로까지 내세워 국고 27억을 강탈하였다.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토론회에서 이정희를 제어하지 못한 문재인은 여야 모두로부터 큰 질타를 받았고 마치 그들과 은근히 연대하려는듯한 모습을 지켜본 많은 5· 60세대가 이심전심으로 국가의 안보를 우려하며 박근혜 지지로 돌아섰다는 분석은 이미 결론이 났다.

●지배층인 국왕과 사대부들은 초기에는 국왕과 勳臣, 중기에는 국왕과 훈신, 사림, 중기이후에는 국왕과 사림으로 나뉘어 권력투쟁을 벌이게 되는 君臣共治시대를 맞는다. 이 같은 군신공치시대에서 백성은 정치에서 소외된 채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존재였을 뿐이다. 성리학은 그 같은 양반지배체제를 합리화 시켜주는 체제수호이념이 되었다.

●당시 영호남과 충청도 등 삼남지방과 경기, 강원, 평안도 등 6道의 民호수는 134만 호였다. 이 중 실제로 군역을 담당할 수 있는 호수는 62만 호였다. 여기서 양역을 부과할 수 없는 양반 등이 빠져 나가면 실제로 양역에 응하는 호수가 10여만 호에 불과했다. 이10여만 호에 해당하는 농민들의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다.

→국가는 국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경영된다. 오는 날 재산이 많음에도 세금을 납부하지 않고 온갖 핑계를 대며 체납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TV를통해 재산을 가족들에게 분산시키거나 은닉하고는 재산도 수입도 없다면서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요즈음 세무당국에서상당히 강경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세금을 내지 않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이미 우리 국민이 아니지 않은가? 재산압수는 물론이고 가능하다면 해외추방도 추진해 봄이 마땅하다고 본다. 지난 대선후보 2차 토론에서 이정희는 박근혜후보가 정수장학회라는 큰 재단을 받고서도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맹공하였는데, 정작 선관위에서 전 유권자에게 보낸 홍보유인물(후보 자신들이 만든)에는 후보 7명중 이정희만이 남편과 함께 2011년도 세금미납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저런 사이비 정치인이 대통령후보가 될 수 있다는 것 자체부터 우리나라 정치모습은 심히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할 것이다.   

                              

→동아일보 2013.1.19 윤평중 교수 대담 내용

《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57)는 여야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이 강점인 칼럼니스트로 정평이 나 있다. 윤 교수는 대선 전 일간지 칼럼에서 민주통합당이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문재인 대선후보의 ‘노무현 아바타’ 이미지 극복 △대선 캠프의 과감한 인적 혁신 △인물과 정책 차원에서의 민주당 전면 쇄신이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조언했다. 공교롭게도 윤 교수가 지적한 3가지의 실패는 민주당이 꼽는 ‘3대 패인’이다. 17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윤 교수를 2시간 반 동안 만나 갈팡질팡하고 있는 민주당호의 항로에 대해 물었다. 윤 교수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에게서 길을 찾아야 한다. DJ의 재발견이 절실하다. DJ가 강조했던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으로 무장하고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생활정치에 전념해야 한다”고 여러 번 얘기했다. 》

―DJ의 어떤 점을 배워야 하나.

“DJ는 자신만의 정치 철학이 있었다. 그러나 고집하지 않고 그때그때 맞게 변형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도입한 기초적인 복지 정책(의료보험제도)을 토대로 빈칸에 여성, 사회보장정책을 채워 넣었다. 최대 정적(政敵)의 정책까지도 자기화하는, 이것이 상인의 현실감각이다.”

―민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DJ를 ‘정신적 지주’로 내세우고 있는데….

“지금 민주당에는 ‘서생의 문제의식’만 있다. 그것도 협소하고 편향돼 있다. ‘진보’를 참칭(僭稱)하는 세력과 손을 잡고 골방에 들어앉아 미국이라면 무조건 반대하는 식이다. DJ 연구부터 해야 한다.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란 이 멋진 덕목을 2017년 식으로 버전 업해야 한다. 그래야 집권할 수 있다.”

―대선 패배 이후 노선과 정체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어떻게 가야 한다고 보나.

“‘중도자유주의’로 가야 한다. 민주당은 창당(1955년) 때부터 ‘중도 정당’을 표방했다. 또 한국 야당의 뿌리, 민주당의 뿌리에 해당하는 분들이 강조했던 것이 자유주의다. 북한, 분단이란 제약 때문에 ‘진보’란 용어에 대해선 반감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민주당 내에선 더 좌(左)클릭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는데….

“독일의 민주사회당은 고데스베르크 강령(1959년·‘우리는 노동자 계급 정당이 아니라 국민의 정당이다’란 내용)을 채택해 대중 정당으로 거듭났고, 영국 노동당은 ‘제3의 길’을 내걸고 집권했다. 정권 창출을 위해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DJ 식으로 치면 상인의 현실감각을 발휘한 것이다. 반면 프랑스 공산당은 우(右)클릭을 거부하다 사라졌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수구(守舊)요, 반동(反動)이다.”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 내부에는 ‘지려야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졌다’라는 말이 많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강점을 너무 무시한 표현이다. ‘지기 쉽지 않은 선거에서 졌다’ 정도가 적절하겠다. 정권 교체를 바라는 국민이 절반을 훨씬 넘었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환멸, 반감도 심했는데도 패했지만.”

―패인, 뭐라고 보나.

“부관참시(剖棺斬屍) 하는 것 같지만 문재인이란 약체 후보가 최대 패인이다. 워낙 급조돼 파괴력이 약했다. 독자적인 매력이 부각되지 않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모라는 이미지는 너무 강했다. 경제 위기, 북한 문제 등이 중차대한 상황에서 ‘왜 내가 대한민국이란 거함을 끌고 가야 하느냐’에 대한 답변, 카리스마를 보여 주지 못했다. 변화에 대한 국민의 욕구를 담아 내기엔 여물지 못한 상태였다. 또 민주당은 정치의 요체인 ‘책임정치’를 보여 주지 못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 해군기지에 대한 말과 행동을 바꿔 국민의 신망을 잃었다. 이 두 가지 사안은 국민이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 있겠나’를 묻는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노무현 정부가 잘한 것도 많은데 친노(친노무현) 세력이 완장 찬 듯 설치면서 민심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대선 바로 몇 달 전 총선 때도 ‘이렇게 가선 안 된다’라는 얘기가 많았는데도 무시했다. 그러니 질 수밖에.”

―박 당선인의 강점을 무시했다는 건 무슨 뜻인가.

“흥미롭게도 이번 대선 때 DJ를 벤치마킹한 것은 박 당선인이다. DJ가 최대 정적 박정희 전 대통령을 벤치마킹했듯 박 당선인이 부친의 최대 적수였던 DJ를 연구한 것이다. ‘경제민주화’라는 민주당의 이슈, 민주당이 가장 점수를 많이 딸 수 있는 의제를 빼앗아 자기화했다. 새누리당은 구성원 면면이 수십억 원을 가진 자산가들인데 박 당선인은 경제민주화란 이슈의 중요성을 포착하고, 그 이슈의 상징적 인물인 김종인 박사를 영입했다. 민주당으로서는 분통이 터져야 할 일이다.”

―만약 대선후보가 손학규 상임고문이었다면 이겼을까.

친노 패권주의가 당을 지배하고 있고, ‘국민 참여’라는 미명 아래 모바일투표라는 친노에 절대 유리한 룰로 경선이 치러졌는데 가능했겠나. 그것 말고도 손 고문은 절대 대선후보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소위 ‘변절’(한나라당 출신) 때문이다.”

―친노 패권주의란 언급을 했다. 그러나 친노로 지목되는 이들은 ‘친노는 없다’라고 하는데….

“궤변이다. 민주당엔 당 운영, 공천권을 장악해 온 실권 세력이 있다. 바로 주류인 친노다. 자꾸 ‘친노의 실체는 없다’라고 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과반이 넘는 국민이 정권 교체를 원했고, ‘이길 수 있다’라고 자신했는데 졌다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민주당에 기대를 걸고 5년 후엔 정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믿는 48%의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정치적 행동을 보여 줘야 한다. 민심과 괴리된 패권주의는 도전받고 무너져야 한다.”

―친노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비주류의 목소리는 높지만 파장은 크지 않은데….

“목소리만 컸지 의사 결정 과정에 반영되지 못하니까…. 친노란 주류가 공천권 같은 권력을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기 때문에 비주류는 공개적으로 국민의 힘을 빌려 노선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해야 한다. 담대하게 국민을 믿고 당내 권력을 교체해야 한다. 이해찬-박지원 담합 체제도 완전히 깨야 한다. 그래야 민주당의 미래가 담보될 수 있다.”

―비주류는 수도 적고 인물도 마땅치 않은데….

“DJ-YS(김영삼 전 대통령)가 ‘40대 기수론’을 외쳤을 때(1970년대 신한민주당)를 생각해 보라. 당시 유진산이라는 노회하고 막강한 당수가 있었지만 DJ와 YS는 비전을 제시하고 투쟁해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국민의 검증이 끝났는데도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퇴장을 거부하는 친노들과 당시 ‘구상유취(口尙乳臭)’ 운운한 유진산이 뭐가 다른가. 국민과 역사를 보고 가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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