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그랜드 투어

청담(靑潭) 2013. 4. 29. 15:50

 

 

그랜드 투어(GRAND TOUR)

                                                             저자 : 설혜심(연세대 교수)

                                                             2013.3 웅진지식하우스 간

 

프롤로그

그랜드 투어란 18세기 유럽에서 어린 청년이 교육의 일환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던 관행을 일컫는다. 그랜드 투어는 역사상 최초로 교육을 전면에 내에운 여행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행자들은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서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Chapter 1

그랜드 투어의 탄생

그랜드 투어는 엘리트 교육의 최종 단계로 생각되었다. tour는 원래 원을 그리는 도구를 의미하는 라틴어 <tornus>에서 비롯된 말로 <출발해서 원점으로 돌아오는 周遊주유를 뜻한다.

16세기 중반 이여행의 시조격은 필립 시드니였다.

흔히 서양 역사에서 최초의 여행자는 그리스의 헤로도투스였다.

기원후 1세기말 로마의 부자들은 <빌라>라는 시골 별장을 짓는 일이 대유행이었다.

순례란 본래 <교회에 관련되거나 그에 준하는 사명, 혹은 좀 더 명확하게는 교회의 허가하에 수행되는 사명>을 뜻한다.

중세 말에 가장 먼저 자유여행을 실천한 사람은 기사들이었다. 게다가 지리상의 발견과 발맞추어 모험의 총화라 할 수 있는 특별한 직업군인 탐험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5세기부터는 여행과 독서가 함께 발달하면서 새로운 문제의식들을 만들어냈다. 휴머니즘이 도입되면서 영국에서는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자랑스러운 내 나라를 좀 더 알기 위하여 <문화유산 답사기> 유행했다.

영국정부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카톨릭 국가로의 여행을 반역행위로 규정했다.

해외무역의 발달로 경제적 호황의 수혜자였던 귀족과 새로운 중산층은 해외여행을 떠나기 시작한다. 해외로의 여행이 이제 일종의 신분적 표지로 작용하기에 이른다.

그랜드 투어는 영국의 엘리트가 꼭 밟아야 할 교육의 최종단계로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여행지로 선택된 곳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이상화했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유산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곧 로마를 최고의 목적지로 삼았던 것이다. 중세 1,000년을 이어온 <순례>는 이제 교육을 위한 <대 여행>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Chapter 2

여행 준비와 안내서

새로운 여행 안내서의 선구자인 스위스인 테오도어 츠빙거가 등장한다. 그는 1577<여행 방법>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영국인인 토마스 뉴전트는 1749<그랜드 투어>를 써서 최고의 베스트 셀러가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행비용이 치솟기 시작했다. 17세기에 일기작가 존 에벌린은 매년 300만 파운드(현 한화가치로 7천만 원)정도를 지출했는데 18세기로 접어들면서 매년 그 10배인 3000-4000만 파운드가 들었다. 엄청난 여행비의 주범은 사치와 방탕이었다.

 

 

Chapter 3

여정

프랑스로 건너가 일정 기간 체류한 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거쳐 궁극적으로 로마를 둘러보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스페인과 그리스는 멋진 국제적 문화가 없다고 생각되어 제외되었다.

프랑스에서 꼭 보아야 할 곳은 물론 파리였다. 여행자들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새 옷을 사 입었다. 도시에 영국 여행자가 도착했다는 소문이 들리면 곧 온갖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가장 인기 있는 숙소는 호텔이었지만 여러 명의 하인을 데리고 장기적으로 묵을 수 있는 아파트도 많았다. 파리에서 젊은이들은 한가로운 생활을 하곤 했다.

영국인들에게 베르사이유 방문은 매우 중요한 일정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멋진 궁전 가운데 하나로 불린 이곳에 대해 예상과는 달리 실망한 여행자들이 더 많았다. 무엇보다도 작은 방들이 너무 다닥다닥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도 공식적인 프로테스탄트 국가였지만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제네바는 영구사람들이 보기에도 철저하게 신교적 원칙을 고수하는 도시였다. 영국인들이 제네바에 들르는 또 다른 이유는 볼테르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제네바 근교 페르네이에 칩거하고 있었는데 친영파 인사로 유명한 볼테르는 영국인 방문을 환영했고 영국인들은 그를 보기 위해 계속 몰려들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주요 방문지는 제노바, 밀라노, 베네치아를 꼽을 수 있고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피렌체와 로마가 필수 목적지였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곳곳에도 아카데미라고 불리는 여행자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있었다. 이탈리아 전역에 최소한 700개의 아카데미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피렌체에만도 20개가 있었다고 한다.

여행자들은 피렌체를 <로마 다음가는 세계 최고의 도시로 예술 애호가들이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라고 묘사했다.

베네치아는 오랫동안 영국의 정치적 모델 역할을 했던 곳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에는 지역의 관습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하는 독특한 정부가 발달했다.

베네치아는 도박과 성매매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유럽의 매음굴이라고 불린 베네치아에는 이미 17세기 초반에 2만 명 정도의 코르티잔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들이 매음굴에 드나드는 것을 염려한 귀부인들은 가난한 이웃의 딸과 계약을 맺어 아들의 침실 동료로 들여보냈다. 계약금은 소녀가 얼마나 매력적인가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소녀는 코르티잔으로 성장하기 마련이어서 코르티잔의 수는 계속 늘어만 갔다.

로마는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은 그야말로 국제적인 도시였다.

로마 이남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 곳은 나폴리였다. 영국 여행자들이 특히 나폴리를 찾았던 이유는 18세기 후반 윌리엄 해밀턴(1731-1803)이 오랫동안 공사로 머물면서 안락하게 환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 엠마(1765-1815)는 술집 여급 출신으로 공사의 아내자리를 꿰찬,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신분상승의 주인공이었다.

엠마는 나폴리 사교계의 마스코트였다. 그녀는 나폴리를 지배하던 왕비와 매우 친밀한 관계여서 언제나 궁정에서 환영받으며 파티마다 주인공 역할을 했다. 그녀의 독특한 이력은 그자체로 정열이 넘치는 남유럽에서 어울릴 법한 매우 이국적인 요소였다. 늙은 해밀턴은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손님들에게 고대 그리스-로마의 조각상처럼 누드로 포즈를 취하게 해서 모델로 세우곤 했다. 엠마는 나폴리를 여행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에 올리는 최고의  이야깃거리였다.

  스토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중에 영국 함대가 나폴리에 잠시 정박했을 때 엠마는 넬슨(1758-1805)제독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국 넬슨의 정부가 된다. 넬슨은 이혼을 감행한 반면. 해밀턴은 둘의 관계를 용인해 런던의 해밀턴 집에서 셋이 함께 살게 되었다. 보통사람의 기준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 관계를 두고 런던의 사교계는 들끓었지만 그들은 <하나로 합친 셋>이라고 당당히 말하곤 했다.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면 돌아가는 루트를 결정해야 한다. 파리를 거쳐 왔던 길을 거슬러 가는 방법과, 독일과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가는 대안이 있었다.

17세기 말 독일에서 교육의 중심지로 꼽힌 곳은 하이델베르크였다. 그리고 독일 방향의 루트를 선택한 여행자들에게 파리를 대체할 만한 대도시는 빈이었다. 빈은 <세계에서 가장 호사스럽게 사는 곳>이라는 명성을 누릴 정도로 사치가 만연한 곳이었다.

독일을 거쳐 귀국할 경우 최종적으로 머무는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여행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누구하고나 잘 어울리고 쾌활하며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암스테르담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자선 활동에 앞장섰다. 극장은 수입의 절반을 빈민구제에 내놓았고 거리의 악사들조차 수입의 3분의 1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개인 주택의 문밖에는 대부분 헌금함이 놓여 있어서 집주인은 언제나 양심껏 돈을 넣어 두었다. 이 상자는 매달 시 담당관이 수거해 갔다.

 

Chapter 4

상류계층 만들기

르네상스 시대는 흔히<무대의 시대>라고 불린다. 마치 무대에서 연극을 하듯이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는 언행이 매우 중요했던 시대라는 말이다. 그래서 외모를 가꾸는 일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의미와 중요성이 부여되었다.

위대한 사상가 존 로크는 무척이나 옷을 좋아해서 다른 지출은 줄여도 옷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상류사회, 특히 궁정에서는 남자도 <유행동물>이라고 불리 만 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남색가이자 용감한 군인이기도 했던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1640-1701)은 당시 손꼽히는 패션 리더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머리 모양에 대해 터무니없는 집착을 가지고 있다. 퐁뇌프 다리에서 일하는 구두닦이도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고, 심지어 노새에 거름을 싣고 가는 농부조차도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700년경부터는 머리 위에 매일 흰색 파우더를 뿌리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주로 밀가루를 뿌렸기 때문에 밀의 작황이 나빴던 1770년대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귀족들의 행태에 분노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여행자들은 프랑스 궁정에서 <페인트>라고 알려진 백연을 얼굴과 목과 가슴에 바른 귀부인들을 만났다. 백연을 너무 두껍게 말라 시간이 지나면 갈라지고 회색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백연 중독으로 치아를 잃거나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사마귀, 즉 무쉬를 붙이는 것도 유행했다. 이 애교점은 별이나 초승달, 심지어 사륜마차까지 다양한 모양을 띠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애교점을 너무 많이 붙여서 얼굴이 파리 떼에 뒤덮인 것처럼 보였을 정도였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애교점을 붙였다.

오늘날의 어학연수와 마찬가지로 그랜드 투어의 일차적 목적은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외국어는 유럽 전역에서 상류층의 언어로 통용되던 프랑스어였다.

그랜드 투어가 유행할 무렵, 유럽에는 새로운 남성상이 등장했다. 근엄하고 은근한 이탈리아식 남성에서 벗어나 좀 더 가벼운 기사와 같은 남성, 즉 프랑스 남성이 새로운 남성상의기준으로 떠올랐다. 이 멋진 남성은 무엇보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우아함이 있고 승마, 펜싱, 춤에 능하며 상류층의 여자를 유혹하는 기술을 갖춘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아한 매너를 갖추기 위해 가장 필요한 과목으로 을 꼽았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펜싱이었다. 펜싱은 당시 상류사회에서 가장 필수적인 운동이었다. 승마학교나 아카데미의 오후 수업을 통해 멋지게 말을 타는 방법도 배워야 했다.

고급스러운 대화에 가장 필요한 것은 풍부한 지식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대화술과 관련된 독서와 글쓰기가 권장되었다.

구체적인 대화의 스킬은 이렇다.

논쟁하지 마라. 특히 종교같이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상대방의 말을 많이 듣고 스스로는 적게 말해라.

자랑을 해서는 안 되지만 자학적인 발언도 하지 마라.

한 가지 주제만 계속 이야기하는 인간은 마치 전염병과 같은 인간이다.

경멸의 반대편에는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는 말, 즉 칭찬과 아부가 있다. 칭찬과 아부 같은 대화의 기술은 르네상스 시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체스필드(1694-1773)경은 오늘날 까지도 널리 회자되는 명언은 남겼다.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는 기술은 매우 필요하며,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이 그것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어떤 사람에게서 애정이나 우정을 이끌어 내려면 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라는 충고가 덧 붙여졌다.

비슷한 시기에 동행교사로 프랑스를 여행하던 애덤 스미스(1723-1790)(1711-1776)보다 덜 유명했다. 1675년 프랑스에 발을 디딘 로크(1632-1704)는 이미 43세였지만, 신분적 제한 때문에 높은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라이프니츠(1646-1716)는 암스테르담에서 스피노자(1632-1677)와 대화를 나누었고, 런던에서는 왕립협회 회원들과 토론을 했다. 볼테르(1694-1778)는 영국에서 수많은 지성과 교류를 나누었고 바이마르에 온 사람들은 괴테(1749-1832)실러(1759-1805)를 방문하고자 했다.

루소(1712-1778)는 영국을 방문해 데이비드 의 집에 머물게 된다. 이때의 인연으로 보즈웰은 루소의 정부 마리-테네즈 르바쇠르(1721-1801)를 영국으로 데려가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

볼테르(1694-1778)는 탁월한 저술 감각으로 많은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유럽의 여러 곳에 집을 구입했다. 1758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4마일 떨어진 페르네이에 영지를 사서 아예 들어앉았다. 그곳은 프랑스식의 사회적 자유와 제네바의 정치적 자유를 모두 누릴 수 있는 곳으로, 곧 자유사상가와 만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 귀족 정치가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볼테르 스스로 <유럽 여관 주인>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그를 찾아 왔다. 벨기에의 리뉴공, 유명한 연애꾼인 카사노바(1725-1798), 디드로(1713-1784), 달랑베르(1717-1783), 에드워드 기번 등 많은 사람들이 페르네이의 영주인 볼테르를 방문했다.

   

Chapter 5

예술과 쇼핑

세속적 차원에서 예술품을 수집하고 전시하여 최대의 효과를 꾀했던 사람들은 르네상스시대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한 지배자들이다. 특히 메디치 가문처럼 신흥 상인 출신으로 지배자로서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가문들은 미적 동기보다는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 예술을 후원하고 열성적으로 미술품을 구입했다.

고급문화는 사람과 부가 집중된 곳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진정한 상류계급이 되려면 감식안을 지녀야 했다. 그것은 타고나기 보다는 학습되는 것이었다.

여행자들 사이에는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일이 크게 유행했다. 그리스-로마 유적,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거장이 남긴 수많은 그림 앞에서 영국인들은 문화적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찬란한 예술적 전통이 숨 쉬는 곳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야말로 그 문화의 일원이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초상화는 고국에 돌아갔을 때 현관이나 서재에 걸려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음을 증명하는 멋들어진 이력서 역할을 할 터였다.

해외에 머물고 있는 영국 화가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큰 수입원은 영국인 여행자를 위해 거장의 그림을 복제하는 일이었다.

스몰렛은 이탈리아에서 영국 젊은이들을 상대로 예술품 사기를 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같은 고국 출신이라는 사실에 개탄했다.

대륙여행에서 영국 여행자들에게 가장 흥미진진한 구경거리 중 하나는 오페라였다. 이탈리아어로 <작품>이라는 뜻을 가진 오페라는 고대 그리스 비극, 연극, , 극장의 볼거리, 전원극 등의 온갖 요소가 한데 섞인 당시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였다. 1600년경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오페라는 왕족과 귀족의 사적 행사를 통해 형태를 갖추어나갔다. 1620년대가 되면 로마가 오페라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오페라 가수는 그랜드 투어를 떠난 젊은이들에게는 연모의 대상이었다. 당시 디바에 대한 열광은 대단했다.

카스트라토도 여가수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로마에서는 여자들이 무대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여자역할은 거세한 남자가수인 카스트라토들이 맡았다.

그랜드 투어는 대륙의 진기한 물건들이 영국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 여행자들에게 쇼핑의 중심지는 파리, 로마, 암스테르담이었다.

영국인들은 이탈리아에서 집중적으로 미술품을 구입했다. 최고급 회화로부터 수채화, 데생, 석판화 컬렉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술품을 사들였다. 이탈리아를 방문한 여행자라면 고대 미술품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Chapter 6

여행의 동반자들

그랜드 투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교사가 전체를 책임지고 어린 청년의 여행에 동행했다는 점이다. 나중에 동행교사는 베어 리더(bear-leader)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조련사가 입마개를 쓴 곰을 데리고 유럽 도시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던 것에 빗댄 말로 천방지축인 학생을 끌고 여기저기 조련하며 여행했다는 풍자다.

실존 인물중 동행교사의 원조는 아리스토텔레스다. 알렉산드로스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왕의 원정에까지 동행해 교육과 자문을 담당했다. 장 케이야르는 디오게네스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훨씬 위대한 철학자였던 이유를 그의 동행교사 경력에서 찾았다. 궁정에 살면 절대로 철학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디오게네스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자 궁정인으로서 바깥 세상에 나가보았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에게 비단 학문뿐만 아니라 삶의 지혜와 통치의 기술을 가르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행교사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조건은 해외여행 경험이다. 차선책으로 이것만은 꼭 갖추어야 한다는 조건이 나왔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외국어 능력이었다. <널리 쓰이면서 유럽 궁정에서 사교어로 통용되는 프랑스어는 학식 있고 재치 있는 외국인 수준으로 완벽하게 구사해야 한다. 또 이탈리아어는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외국어 구사능력이 동행교사의 자질에서 결정적인 요소였기 때문에 언제나 현지 사정에 밝은 대륙출신의 외국인 동행교사들에게 많은 기회가 돌아갔다.

동행교사들에게 언어만큼 중요시 되었던 것은 매너였다.

가정교사와 마찬가지로 동행교사도 여행을 하면서 기초적인 교양과정을 직접 가르쳤다. 여행경비의 지출을 책임진 사람도 동행교사다.

프랑스나 이탈이아등지에서 수개월 이상 머무를 경우 동행교사는 펜싱, 승마, 춤 등을 지도할 교사를 현지에서 직접 고용했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군사부일체라는 말처럼 교사, 즉 스승을 부모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라는 말이 당시 영국에서도 널리 쓰였다는 이야기다.

뛰어난 학자의 자질을 지녔던 일부 동행 교사들에게 그랜드 투어는 일생일대의 기회이기도 했다. 최소 세 차례에 걸쳐 그랜드 투어를 한 것으로 알려진 홉스(1588-1679)가 좋은 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갈릴레오(1564-1642)를 만났고, 다른 유명한 과학자들과도 교류하면서 자신의 학문 세계를 한층 심화시킬 수 있었다. 애덤 스미스(1723-1790)는 파리에서 케네(1694-1774), 튀르고(1727-1781) 볼테르(1694-1778) 등 이른바 프랑스 유물론자들과의 친교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더욱 세련되게 다듬었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많은 학자들이 교수직을 그만두면서까지 동행교사로 전업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보수 때문이었다.

1763년 애덤 스미스(1723-1790)는 어린 버클루 공작(1746-1812)를 데리고 유럽여행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여행중 연봉 300파운드와 여행 이후평생 연금 300파운드를 보장받았는데 이는 그가 당시 대학에서 벌어들이던 수입의 두 배 정도의 액수였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공공기관의 교사는 통제를 덜 받기 때문에 근면하지 않고 의무를 등한시 하며 부패했다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업이 사회생활에 요구되면서 공교육기관의 교사들이 사교육 교사들보다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스미스가 보기에 공교육기관의규율은 학생의 편익보다는 교사의 이익과 안일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교사의 위엄을 유지하고 학생의 반발을 막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아담 스미스는 인쇄술이 발달되기 이전에는 문필가가 보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업무가 교육이어서 교사의 업이 명예롭고 유용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쇄술로 인해 글을 쓰는 문필가가 따로 생겨나면서 그들이 교육이라는 큰 시장에서 교사와 경쟁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교사는 향후 훨씬 더 적은 보수를 받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동행교사 말고도 여행에 동반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하인들이다. 대륙에서 고용한 하인들은 대부분 뻔질거린다는 평이 일반적이었다. 진짜 골치 아픈 경우는 영국에서 데려간 하인이었다.

 

 

Chapter 7

코스모폴리탄으로 거듭나기

● 영국인들에게 그랜드 투어는 다른 나라를 직접 봄으로써 영국인으로서의 특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애국심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사람들이고 공통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싹트게 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이라고 불리는 범세계주의적인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헨리 파머슨(1730-1802)은 1764년 그랜드 투어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여행이 가져다 주는 장점은 다른 나라를 보고 그곳 사람들을 만나서 비교해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우리나라의 우수한 가치에 대해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그랜드 투어는 영국 역사의 특성이라고 알려지는 <영국 예외주의>를 오히려 더 키워나갔던 면이 있다. 예외주의란 어떤 나라가 독특한 기원과 역사발전과정을 가졌고, 다른 나라와는 다른 정치제도와 문화를 지닌 특별한 나라라는인식이다. 

이탈리아에서는 기혼여성이 사교 모임에 젊은 애인을 동반하는 <치치스베이십>이라는 관습이 있었다. 이 관습은 기혼여성의 불륜을 부채질했다. 그랜드투어에 나선 젊은이들은 종종 애인으로 초대받았고 심지어 그것을 기대하거나 매우 즐기기도 했다. 이 관습은 애정없는 정략결혼이 만연한 탓에 가문의 대가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한다.

  근엄한 영국인들의 기준에서 보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불같은 성격을 지녔으며 질투의 화신이었다. 게다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에게 가장 지배적인 열정이란 질투와 복수다. 그들은 쾌락과 게으름에 너무 중독되어 있고 사랑에 관한 한, 놀랄만큼 격렬하다.

  네델란드 사람들에게 지닌 생각은 이중적이었다. 부지런하고 상업적인 감각이 발달되었다고 칭찬하는 한편, 너무 돈만 밝힌다고 생각했다.

●체스필드는 <자신은 카톨릭 국가를 여행할 때마다 교히에서 무릎꿇는 관행을 거부한적이 없었다면서 여행을 갔으면 그곳의 관습을 존중하는 융통성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몬터규도 <인류는 어디에서나 똑 같다. 체리나 사과처럼 자란 토양과 기후, 혹은 문화에 따라 크기, 형태, 색깔이 다르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 같은 종이다>라는 철학적인 말을 남겼다.  

●사실 18세기 유럽 전역에서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강력한 가문끼리의결혼을 통해 외국 태생의 지배자들이 많이 등장한 것도 그 이유로꼽을 수 있다.

  사회전반에서 <유럽>이라는 어휘가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까지 유럽을 하나의 단위로 삼은 인쇄물이 갑자기 많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랜드 투어가 무르익어가면서 저통적인 루트를 벗어나 유럽의 변방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진취적인 일부 여행자들은 스칸디나비아. 러시아, 그리스처럼 최소한 어느 정도는 유럽이라고 볼 수 있는 곳으로 떠났다.

 

 

Chapter 8

해외여행의 득과 실

●영국인들에게 1786년 괴테는 “내가 로마 땅을 밟게 된 그 날이야말로 내 제2의 탄생일이자 나의 진정한 삶이 시작된 날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그랜드 투어는 본질적으로 여행과 교육을 결합시켜 사춘기 소년들의 비행을 막고 올바른 성장을 도모하려는 기획이다. 그랜드 투어의 평균 연령은 18세쯤으로 알려져 있다.

●언어교육은 어린 시절에 이루어지는 것이 좋기 때문에 일찍 해외에 내보내야한다는 의견과 그렇지 않다는 의견 역시 팽팽하게 엇갈렸다.

●논쟁에서 제기된 많은 내용은 해외 유학뿐 만 아니라 영국 내 교육에서도 논란이 되어온 문제들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공교육이냐 사교육이냐, 학생들은 왜 버릇이 없으며 가톨릭 문화에 현혹되는가, 혹은 엘리트는 왜 방종한 문화를 추구하는가 등의 문제였다.

●영국에서 마카로니는 원래 여행자가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맛보게 되는 음식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다가 그랱드 투어와 연관되어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악덕에 물들고 겉멋만 든 젊은이를 지칭하게 되었다.

●그랱드 투어의 효과는 비단 영국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대륙 곳곳을 누비던 엘리트들이 몸에 익히게 된 국제적 문화는 유럽의 귀족계급에게 동질성을 가져다 주었고, 유럽의 상류사회는 국제적 취향, 지식, 교양, 교육등을 공유했다. 또한 그 과정은 사상의 전파를 용이하게 했고 게몽주의를 법유럽적인 현상으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존 밀턴(1608-1674) 은 1638년부터 2년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렀는데 그 여행은 그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가 자주 방문한 문학회에서 토론했던 내용이 결국 <실낙원>의토대가 되었다. 밀턴은 이탈리아 여행을 생애 가장 즐거웠던 추억으로 간직했다. 영국을 방문한 볼테르의 감상은 <영국민에 대한 서간>으로 나오게 되었다. 몽테ㅐ스키외도 어릴 때 영국과 저지대 지방을 여행했는데 그 경험이 <법의 정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진다.

  터키 대사로 부임한 남평을 따라갔던 메리 워털리 몬터규는 영국에 최초로 종두법을 도입하게 된다. 흔히 유럽에서 최초로 종두법을 시행한 사람은 에드워드 제너(1749-1823)로 알려져 잇지만 사실은 그가 종두법을 발표한 1798년보다 무려 80년 전에 뫁터규가 영국에서 시행했던 것이다. 뫁터규는 턴영두로 남동생을 잃었고 자신도 가까스로 살아나기는 하였으나 미모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천영두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컸다. 2년 뒤 터키 제국을 여행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종두법이 시행되는 것을 본 몬터규는 나름대로 공부한 뒤 런던으로 돌아와 종두법 캠페인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먼저 자신의 아들과 딸에게 접종했고, 1722년에는 캐롤라인 공주의 두 딸에게도 성공적으로  접종할 수 았었다.

그녀는 실명과 익명으로 종두법에 대한 여러 편의 논고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안데르센(1805-1875)은 오래된 <카페 그레코>에서 이후 전 세계 어린이들이 사랑하게 될 아름다운 동화를 집필했다. 1760년에 문을 연 카페 그레코에는 괴테와 스탕달같은 문인을 비롯하여 멘델스 존(1809-1847), 로시니(1792-1868), 리스트(1811-1886), 같은 음악가들도 단골로 출입했다. 로마에 그레코가 있었다면 1638년부터 커피가 판매되기 시작한 베네치아에는 이탈리아 최초의 카페인 <카페 플로리안>이 있었다.

 

 

 

Chapter 9

엘리트 여행에서 대중 관광으로

●19세기 중엽 그랜드투어의 시대는 끝났다. 그 후로는 관광(tourism)의 시대가도래했다고 여겨진다. 투어리스트(관광객)라는 말은 1800년경에 처음 나타났다. 곧이어 영국에서 발행되는 <스포팅 매거진>에 최초로 관광이라는 단어가등장했다. 여행은 크게는 <회귀를 전제로 한 인간의공간적 이동>으로 다양한 목적을 지니고 길을 떠나는 행위를 광범위하게 지칭한다면, 관광은 <일상권을 떠나 다시 돌아올 것을 목적으로 하는 즐거움을 위한 여행으로 정의된다.

●교통 인프라의 발전은 근대적 관광이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했으며 노동생산성의 급격한 향상, 도시화, 중산층의 빠른 성장, 교육 수준의 향상, 자유시간의 증대 같은 변화가 여행수요를 크게 증가시켰다.

●귀족계급의 그랜드 투어를 종식시킨 것은 철도와 증기선의 발달이었다. 1956년에는 안트베르펜, 브뤼셀, 쾰른, 프랑크푸르트암마인, 하이델베르크, 스트라스부르, 파리, 사우스햄프턴 등을 기착지로 하는 최초의 대륙여행이 시작되었다.

  철도가 등장하기 전 대륙여행은 최소 2-3개월이 걸리는 값비싸고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새로운 교통수단은 엄청나게 많은 충하층 사람들을 여행의 장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출판과 여행이 결합되면서 새로운 유행이 만들어 지기도 하였다. 루소 투어바이런 투어로 불리는 여행이 그것이다. 1778년 루소가 사망하자 열혈 팬들은 루소를 그리며 순례를 시작했다. 하지만 진정한 여행의 신은 바이런이었다. 첫번째 여행은 포르투갈, 그리스, 터키를 여행했다.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돌던 바이런의 두 번째 해외여행은 훨씬 호화로운 것이었다.

●쿡은 1872년에, 슈탕엔은 1878년에 세계일주 여행 상품을 내 놓았다.

 

  

 

여행은 계속된다.

●원칙적으로 여행이 금지되었던 중세 유럽에서 학생은 상인, 군인, 성직자와 더불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소수 특권자들이었다. 라틴어와 프랑스어등 외국어 습득은 그들이 유학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제일 요소였다. 이 전통은 그랜드 투어로 이어졌고, 오늘날에는 어학연수나 교환학생 제도가 그 목적을 계승하고 있다.

●대학생들의 배낭여행도 순수하게 쾌락적 목적만을 지닌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관광의 범주에 넣기보다는 그랜드 투어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유럽 패키지 투어나 단체관광도 그랜드 투어의 여정을 답습하기는 마찬가지다. 비록 가이드가 인솔하면서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유럽 대륙을 돌지만 파리와 이탈리아등의 주요 목적지는 동일했고, 그랜드 투어리스트들의 여행 지침서에 나온 명승지는 단체 관광객들 역시 잠시라도 들러보는 관람 포인트가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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