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why nations fall?)
대런 애쓰모글루(Daron Acemoglu) : MIT 경제학과 교수
제임스 A. 로빈슨(James A. Robinson) :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서언
두 세계적 거두가 까다롭기 그지없는 문제를 파헤친다. 왜 어떤 나라는 잘 살고 또 어떤 나라는 못 사는가? 경제학과 정치 역사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은 <중요한 것은 제도>라는 지금까지 가장 강력한 논거를 제시한다. 도발적이고 유익하면서도 대단히 흡인력 있는 책이다.
조엘 모커, 노스웨스턴대학교 교수
제목이 아주 대단히 흥미롭다. 우리 대한민국은 왜, 어떻게 21세기 후반 짧은 반세기 동안에 정치와 경제를 성공적으로 발전시켜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나라가 되고 얻어먹던 나라에서 도와주는 나라가 되었으며, 대부분의 아프리카와 북한을 비롯한 일부 아시아 및 중남미 국가들은 아직도 여전히 성공적인 변화와 발전을 기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역사학도로서 심증은 있으되 체계적으로 학술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나에게 이 제목은 진정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주제라 아니 할 수 없다. 더욱이 역사학자가 아닌 경제학자와 정치학자가 함께 이 대 역사적 과제를 풀어내는 것이라면 대단한 역작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이 책에 거는 관심과 기대가 보통 큰 게 아니다.
한국어판 머리말
무엇이 남북한의 운명을 갈랐을까?
한국인이 모두 안다고 할 수 없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한반도에서 발생한 어마어마한 제도적 차이에 전 세계 모든 나라가 부국과 빈국으로 나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일반 이론의 모든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다른 가난한 나라들과 북한의 공통점은 대다수 국민의 인센티브를 꺾어 버려 필연적으로 가난을 초래하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면 남한에서 꾸준히 번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경제적 인센티브를 창출하고 사회전반에 정치권력을 분산시켜주는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가 자리 잡은 덕분이다. 이 책에서 북한처럼 나라가 못사는 것은 착취적 경제제도를 가졌기 때문이며, 남한처럼 부유한 나라가 잘사는 이유는 포용적 제도 덕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줄 것이다.
제1장 가깝지만 너무 다른 두 도시
●본디 한 몸이나 다름없는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찌 이토록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양쪽의 제도와 소속 국가가 달라 생겨나는 사뭇 다른 인센티브가, 담장 하나를 두고 두 도시가 경제적으로 다른 발전상을 보여주는 주요 원인이다.
●에스파냐가 미 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내내 비슷한 제도와 사회구조가 생겨났다. 약탈과 금은보화에 눈이 먼 식민지 개척초기가 지나자 에스파냐는 원주민을 수탈하기 위한 제도를 거미줄처럼 뽑아냈다. 원주민의 삶을 연명 가능한 최저 생계수준까지 끌어내리고 그 잉여분은 모조리 에스파냐가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남아메리카는 세상에서 가장 불평등하고 경제적 잠재력을 송두리째 빼앗긴 대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필라델피아에서 미국헌법이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노예제도는 당연히 합헌으로 여겨졌고, 주마다 하원에서 몇 개의 의석을 분배받느냐를 두고 추악하기 그지없는 협상을 벌였다. 의석은 주 인구를 근거로 할당할 예정이었는데 남부 주 의회 대표들은 노예도 계산에 넣어달라고 요구했다. 북부대표들은 고개를 저었다. 결국 하원 의석을 배분할 때 노예한 명을 자유민 대비 5분의 3명으로 인정하자고 타협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불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나라간의차이는 규모가 더 클 뿐 허리가 잘린 노갈레스시(멕시코와 미국의 국경도시로 도시가 양국으로 갈라져 있다)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자나라에서는 개인들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살며 교육도 잘 받는다. 또 휴가나 직업 같은 가난한 나라사람들이 꿈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혜택과 선택권을 누리고 산다. 부나나라 사람들이 차를 모는 도로는 여기저기 푹푹 패여 있지도 않다. 이들은 자기 집에서 화장실과 전기와 수돗물을 마음껏 쓸 수 있다.또 그런 나라의정부는 대개 멋대로 사람을 체포하거나 괴롭히지도 않는다. 부자나라 정부는 오히려 교육, 보건, 도로망, 법질서등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시민이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하여 자신의 나라가 정치적인 면에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일정 수준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부자나라 클럽 회원수는 날로 늘고 있다. 그 대부분을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있고, 호주, 일본, 뉴질랜드, 싱가포르, 한국, 대만등도 속속 부자클럽에 가입하고 있다.
●미국이 오늘날 멕시코나 페루보다 한층 부유한 것도 기업가, 개인, 정치인 모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정치, 경제적인 제도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와 정치제도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정치 및 경제제도의 상호작용이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한다는 것이 우리가 제시하는 세계불평등 이론의 골자다.
제2장 맞지 않는 이론들
●시계추를 50년만 돌려놓아도 상위 30개국과 하위 30개국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싱가포르와 한국은 가장 부유한 나라가 아니었고 하위 30개국에도 여러 다른 나라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불평등은 대개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18세게 후반 태동한 것이다.
●경제적 성패와 기후나 지리적 위치 사이에 확연하고 지속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편에 드는 반면, 북한은 주기적인 기근과 극심한 가난에 시달린다. 오늘날 남북한의 <문화>가 사뭇 다르긴 해도 두 분단국가의 엇갈린 경제적 운명을 가르는 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한반도는 유구한 공통의 역사를 자랑한다. 한국전쟁으로 38선을 따라 허리가 잘리기 전까지는 언어, 인종, 문화적인 면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동질성을 가졌다. 노갈레스처럼 남북한 역시 국경이 문제다. 북쪽에는 다른 제도를 시행하는 다른 정권이 들어서 있다. 당연히 다른 인센티브가 만들어진다. 결국 국경을 사이에 두고 남북 노갈레스나 남북한 간에 목격되는 문화적 차이는 번영의 차이를 초래하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뜻이다.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어떨까? 네덜란드와 영국등 주로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근대에 가장 먼저 경제적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와 경제적 성공 간에는 상관관계가 거의 없다. 카톨릭이 주도하는 프랑스는 19세기 네덜란드와영국의 경제성장을 빠르게 따라 잡았으며, 오늘날 이탈리아 역시 부유한 나라로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동쪽으로 더 멀리 가보면 동아시아에서 경제성장을 일군 나라치고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토교와관련이 있는 사례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성장은 중국인의 가치관이나 중국문화의 변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마오쩌둥이 죽고 나서 덩샤오핑과 그의 측근이 농업에 이어 공업에서까지 차츰 사회주의적 경제정책과 제도를 버리고 개혁을 추진한 덕분에 가능했던 경제적 변혁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계 불평등을 이해하려면 일부사회가 왜 그토록 비효율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짜여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나라는 무지나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빈곤을 조장하는 선택 때문에 잘못된다.
제3장 번영과 빈곤의 기원
●경제성장에는 포용적 시장의 잠재력을 활용하고, 기술혁신을 장려하며, 인재육성에 투자하고, 개인이 재능과 능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경제제도가 필요하다. 왜 그토록 많은 경제제도가 이런 간단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가?
●남한 국민의 생활수준은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와 비슷하다.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부르는 38선 이북의 북한은 생활수준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비등하다. 북한 주민의 건강은 더 열악하다.
1945년 남북한 정부가 판이한 경제운용 방식을 채택하면서 운명이 갈렸다. 남북한이 왜 이토록 완연히 다른 운명의 길을 걸었는지는 <문화>나 <지리적 요인>, <무지>로 설명할 수 없다. 그 해답은 <제도>에서 찾아야 한다.
●포용적인 경제제도가 도입되면 경제활동이 왕성해지고 생산성이 높아지며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 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 사유재산권의 보장이다.
●북한 등의 법 체제를 착취적 경제제도라 부르는데 착취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한 계층의 소득과 부를 착취해 다른 계층의 배를 불리기 위해 고안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멕시코나 페루가 아닌 미국사회에서 토머스 에디슨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오늘날 삼성과 현대 같은 기술혁신 기업을 배출하는 곳이 북한이 아닌 남한이라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국가가 실패하는 이유는 경제성장을 저해하거나 심지어 발목을 잡는 착취적 정치제도를 기반으로 착취적 경제제도를 시행하기 때문이다.
●경제성장과 기술변화에는 위대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지적한 이른바 <창조적 파괴>가 수반된다. 포용적 경제제도 및 정치제도를 반대하는 이면에는 창조적 파괴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다.
●성장유형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포용적 경제제도의 발달을 허용하는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시절 한국이 급속도로 산업화한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대단히 적극적으로 경제성장을 추구했다. 1980년대 들어 착취적 정치제도 역시 포용적 정치제도로 변모한다. 한국사회가 비교적 고르게 소득 균형을 이루면서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엘리트층의 두려움도 줄어들었다.
●전성기의 소련과 마찬가지로 중국역시 고속 성장을 경험하고 있지만 여전히 착취적 제도 하에서 포용적 정치제도로 이양할 기미가 거의 보이지 않는 정부의 통제를 받아가며 이루어지는 성장이다. 중국의 경제제도는 포용적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한국과 같은 변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 가능성은 낮다는 뜻이다.
●고도의 중앙집권화로 정치권력을 확실히 장악하지 못했다면 한국의 군부 엘리트층이나 중국공산당은 의미 있는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도 권력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의 사례처럼 착취적 정치제도에도 불구하고 경제제도가 포용적 성향을 띤 덕분에 성장이 가능하다 해도, 경제제도가 더 착취적으로 바뀌거나 성장이 멈춰버릴 위험이 상존한다. 정치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결국 그 권력을 이용해 경쟁을 제한하고 자신들의 파이를 키우거나, 심지어 다른 이들로부터 훔치고 약탈하는 것이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챙기는 방법이라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제 4 장 작은 차이와 결정적 분기점
●빈곤과 번영이 어떤 차이에서 비롯되는지 그 연원에 대한 이론을 완성하려면 역사적으로 경제 및 정치제도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 사회의 힘의 균형을 뒤흔드는 대형사건의 영향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명예혁명으로 왕과 가신의 권한은 약화되었고 경제제도를 결정한 권한은 의회에 귀속되었다. 동시에 사회각계각층이 폭넓게 참여하는 정치체제가 마련되었다. 사회전반이 정부의 기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명예혁명은 다원적 사회를 만드는 발판을 마련했고 더 나아가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세계 최초로 포용적 정치제도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명예혁명이었다.
●기술혁신의 물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가난에 시달릴 것인지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달성할지 엇갈린 운명을 걷게 된다.
●흑사병과 1600년 이후 세계무역의 확대는 유럽열강에 대단히 결정적인 분기점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상이한 제도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심각한 차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미국전함의 위협에 일본은 근본적인 제도적 변혁으로 대응했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정치혁명으로 정체상태에 있던 나라가 초고속 성장으로 들어선 사례이다. 반면 중국은 절대주의 체제를 고수한 탓에 한참 뒤처지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한국과 대만에 이어 마침내 중국도 일본과 유사한 길을 걸으며 초고속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제 5 장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
●착취적 제도하에서 달성한 성장은 포용적 제도하에서 창출된 성장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그 성격상 창조적 파괴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기술적 진보역시 제한적인 수준에 그친다. 따라서 착취적 제도를 통한 성장은 단명하고 만다. 소련의 경험은 이런 한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역사속에서 착취적 제도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그 만큼 이면의 논리가 탄탄하기 때문이다. 제한적인 번영을 이룩하면서도 소수 엘리트의 손에 그 결실을 쥐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1920년대, 30년대, 40년대, 50년대, 60년대, 늦게는 70년대까지도 소련의 경제성장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련보다 서방세계에 많았다. 요즘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중국의 경제성장을 바라보며 탄복하는 이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중국 역시 공산당 통치하에 있기 때문에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을 경험하는 또 다른 사례일 뿐이며 포용적 정치체도를 향한 근본적인 정치변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질 리 만무하다.
제 6 장 제도적 부동
●역사는 제도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제도적 부동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은 차이일지라도 결정적 분기점과 상호작용을 통해 역사의 큰 물줄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워낙 작아 되돌려질 때가 많으므로 반드시 단순한 축적과정의 산물이라 할 수 도 없다.
●16세기에 이르면 유럽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및 아메리카 대륙과 제도적으로 완연히 다른 길을 걷는다. 인도나 중국 등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아시아 문명에 비하면 크게 잘사는 것도 아니었지만, 유럽은 어려 중요한 면에서 이들 정체체제와는 달랐다. 가령 당시까지 유례가 없던 재의제도를 발전시켰으며 이들 제도는 포용적 제도를 발전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제 7 장 전환점
●산업혁명이 유독 잉글랜드에서 싹이 터 가장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포용적인 경제제도 덕분이었다. 물론 이런 경제제도는 명예혁명이 가져다 준 포용적 정치제도의 기반위에 마련된 것이다. 명예혁명은 경제적 필요성과 사회의 열망에 힘입어 한층 더 민감한 개방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어 주었다.
●헨리 8세는 수석 장관이던 크롬웰을 통해 정부에 가히 혁명적인 일을 실천한다. 1530년대 크롬웰은 기초적인 수준의 관료주의 정부를 도입했다. 더 이상 왕의 개인 살림을 도맡아 하지 않고 꾸준히 이어질 만한 독립된 제도로서 정부를 설립한 것이다.
●정치권력의 중앙집권화 과정은 왕과 막료가 권력을 틀어쥐고 사회의 다른 권력집단을 탄압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정대왕정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제 8 장 발달을 가로막는 장벽
●중앙집권정부의 부재 또는 미약한 중앙집권화는 절대주의 체제만큼이나 산업혁명의 확산을 저해한다. 이는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해서 비롯되는 현상인데다 중앙집권화 과정이 흔히 절대주의 체제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에서는 잉글랜드의 경제성장과 제도적 변호를 이끌었던 과정이 현실화 되지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후 이사벨라와 페르디난트는 세비야의 상인길드를 통해 새로운 식민지와 에스파냐간 무역을 통제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얻는 부의 일전 지분을 왕실이 차지할 수 있도록 했다.
●영국의 박애주의자 로봇 오언이 어느 정도 사회개혁을 채택해 곤궁한 인민의 고충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오스트리아 정부를 설득했을 때, 메테르니히의 측근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 폰 겐츠는 이렇게 대꾸했다.
“일반 대중이 모두 자립해 잘사는 걸 전혀 바라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통치할 수 있겠는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황제가 산업화와 증기기관차 철도에 반대한 것은 근대 경제 발달에 수반되는 창조적 파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체제를 유지해 주던 착취적 제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기존 엘리트층의 이권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농노는 영주의 땅에서 일주일에 사흘을 아무런 대가없이 일해야 했다. 거주지를 옮기지도 못하고 직업의 자유도 없었으며 영주가 내키는대로 사고 팔 수 있었다.
-비극적인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남녀를 불문하고 가족과 헤어져 고향을 떠나 팔려가기 일쑤였다. 도박에서 돈을 잃었거나 사냥개 몇 마리와 맞바꾸어 러시아의 외딴곳으로 끌려간 이들도 있었다.
●절대주의 체제는 유럽 대부분 지역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군림했으며 혁명으로 결정적 분기점의 기회가 주어진 시기에도 산업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명․청왕조가 해외무역을 반대한 이유도 쉽사리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역시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지도층의 주된 관심사는 정치적 안정이었다.
●북동부의 이른바 <아프리카의 뿔>이라는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소말리아는 중앙집권정부의 부재가 어떤 폐단을 낳는지 여실히 증명해준다. 역사적으로 소말리아를 지배한 것은 여섯 개 부족이었다.
소말리아 씨족과 디야 집단(집단의 일원을 살해한 대가로 지급하는 보상금이 <디야>이며 이 디야를 지급하고 수금하는 가까운 친족으로 구성된 집단)은 역사적으로 희소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한시도 싸우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이다.
●산업혁명은 19세기 이후 온 세계가 변화를 맞이할 수 있는 결정적 분기점을 만들어 냈다. 시민의 신기술투자를 허용하고 그럴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했던 나라는 획기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여러 나라가 그렇지 못했거나 노골적으로 변화를 거부했다. 착취적 정치·경제제도 아래 신음하던 나라는 그런 인센티브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정권의 지배층은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한 나머지 경제발전을 장려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산업의 확대 및 산업화를 초래할 신기술 도입을 막기 위해 노골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절대주의가 다원주의 및 경제 변화를 향한 행보를 가로막듯이 중앙집권정부가 없는 나라에서는 권력을 쥐고 있는 전통적인 엘리트층과 씨족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중앙집권화를 경험하지 못한 나라들이 산업화 시대에 가장 큰 불이익을 당한 이유다.
제 9 장 발전의 퇴보
●유럽의 팽창정책은 세계도처에서 기존 착취적 제도를 강요하고 더 나아가 한층 더 강화하면서 해당지역에 저배발의 씨앗을 뿌렸다. 그 결과 다른 지역에서는 산업화가 한창일 무렵에도 유럽 식민지 지배아래 있던 지역은 이런 신기술로부터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로마시절에는 흑해 주변의 슬라브족, 서아시아, 북유럽 등지로부터 노예를 공급 받았다........
1400년 무렵이 되자 유럽인은 더 이상 서로 노예로 전락시키지 않았다. 16세기 대서양을 통한 노예무역은 30만 정도에 그쳤을 것으로 보인다. 17세기에는 대서양을 통해 팔려가는 아프리카 노예의 수는 135만에 달했고 18세기에 접어들자 또 한 차례 큰 증가세를 보여 대서양을 건너는 노예의 수는 약 600만에 달했다.
-노예무역이 시작된 이래 모든 처벌은 노예로 귀결되었다.
콩고왕국 자체가 내전으로 몰락하기 전까지 아마도 최초로 백성을 노예로 팔아넘긴 아프리카 정권이었을 것이다.
●노예무역의 철폐는 아프리카에서 노예제도를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노예의 재배치로 이어졌을 뿐이다. ......나이지리아 일부 지역에서는 납치가 워난 심각한 문제여서 부모들은 붙잡혀 노예로 팔려 갈까봐 아이들이 밖에서 놀지도 못하게 할 정도였다. ......가령 시에라리온에서 노예제도가 마침내 철폐된 것은 1928년이 되어서였다.
●남아프리카 백인의 경제발전 역시 궁극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놀랄 일은 아니다. 흑인을 착취하기 위해 백인이 수립한 착취적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착취적 경제제도가 고도로 착취적인 정치제도 기반위에 수립되었다는 사실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1994년 전복되기 전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 정치제도는 모든 권력을 백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공직출마와 투표 역시 백인의 전유물이었다. 경찰, 군대는 물론 정치제도까지 모조리 백인 일색이었다.
●오늘날 세계 불평등이 존재하는 이유는 19세기와 20세기, 산업혁명과 그에 수반된 신기술 및 조직화 방법을 적극 활용한 나라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나라도 있기 때문이다.
제 10 장 번영의 확산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절대왕정이 무너지자 포용 제도를 향한 새로운 길이 열렸고, 궁극적으로 산업화에 착수해 고속 성장을 누릴 수 있었다. 혁명은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과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도 산업화에 불을 지폈다.
●프랑스 국민제헌의회 헌법(1789년 8월 4일 제안)
제 1조
국민의회는 이로써 봉건제도를 전면 철폐한다. 봉건제와 정액지대에 관련된 기존 권리와 세금 중 부동산이든 동산이든 농노제에서 유래하는 것은 전면 철폐되며 보상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제9조
동산과 부동산을 가리지 않고 세금과 관련된 금전적 특혜는 영구히 폐지된다. 온 시민이 모든 재산에 대해 세금을 납부하여야 하며 그 방법과 형식에 차등을 두지 않는다. 모든 시민이 균등하게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계획을 검토해야 하며 올해 남은 여섯 달도 예외로 인정하지 않는다.
제11조
태생과 관계없이 온 시민은 성직, 공직, 군대를 가리지 않고 어떤 직위나 품위라도 누릴 자격이 있으며 어떤 직업도 천하게 여기지 않는다.
●특별세를 부과할 수 있는 교회당국의 특권도 철폐했고 사제는 국가에 고용된 공직자로 전락시켰다. 길드 등 직업적인 걸림돌이 모조리 척결되어 도시에서는 한층 더 공정한 경쟁 환경이 조성되었다.
●종합해 보면 프랑스군이 유럽 대륙에 큰 고통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이들이 유럽의 형세를 획기적으로 뒤바뀌어 놓은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봉건질서가 자취를 감추었고, 길드가 무너졌으며 군주와 제후의 절대권력 역시 송두리째 흔들렸고 경제, 사회, 정치 등 모든 면에서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교회마저도 맥을 못 추게 되었다.
●오쿠보 도시치미는 1830년 사쓰마번의 중심지인 가고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무라이가 되었고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눈에 띄었고 관료로 등용되었다. 이 무렵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사쓰마번의 병력을 이끌고 쇼군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아시아 및 유럽과 통상을 확대하고 구시대적 봉건 경제제도를 철폐해 일본에 근대국가를 수립하고 싶었던 것이다.
1863년 1월 3일 메이지 유신이 선포되고 1869년에는 법 앞에 모든 사회계층의 평등이념이 도입되었고, 국내 이주 및 직업에 대한 제한이 전면 철폐되었다.
1890년에 이르자 일본은 성문헌법을 채택한 아시아 최초의 국가로 자리매김했고 선출 의회를 갖춘 입헌국주제를 창설했으며 독립적인 사법부도 들어서 있었다.
●중국과 일본은 제도적 차이 때문에 19세기에 직면한 도전에 서로 다르게 대응했다.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결정적 분기점을 맞아 일본과 중국은 서로 크게 엇갈린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제도를 개혁한 일본의 경제는 고속성장의 길로 들어섰지만, 중국은 제도적 변화를 꾀하는 세력이 그 만큼 강하지 못해 착취적 제도가 고스란히 존속하다 1949년 마오쩌둥의 공산혁명을 계기로 개악의 길을 가게 된다.
●19세기에 시작된 산업화 및 기술변화의 조류에 몸을 길었던 나라가 오늘날에도 잘사는 반면, 그렇지 못했던 나라는 여전히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 11 장 선순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포용적 정치제도가 포용적 경제제도를 뒷받침 해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포용적 정치제도 덕분에 포용적 경제제도가 마련되면 소득이 더 공평하게 분배되고 힘을 얻은 사회계층이 한층 더 넓어지며 정치면에서도 더 공평한 경쟁의 장이 펼쳐지게 된다.
●명예혁명은 한 엘리트 집단이 다른 엘리트 집단을 전복시킨 것이 아니라 젠트리와 상인, 수공업자는 물론 위그파와 토리당 파벌까지 가세한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절대왕정에 반기를 들고 일으킨 혁명이었다. 이 혁명의 결과로 태동한 것이 바로 다원주의 정치제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뒤 1918년 <인민대표법>이 통과되어 21세 이상의 모든 성인 남성과 30세 이상의 납세자 혹은 납세자와 결혼한 여성이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마침내 남성과 마찬가지 조건으로 모든 여성이 보통선거권을 누리게 된 것은 1928년에 이르러서였다.
●포용적 정치·경제제도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경제성장 및 정치 변화를 거부하는 엘리트층과 기존 엘리트층의 정치·경제적 권력을 제한하려는 계층간의 갈등의 산물인 때가 많다.
제 12 장 악순환
●악순환은 착취적 정치제도에서 비롯된다.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낳고 이어 경제적 부와 권력으로 정치권력을 살 수 있으므로 착취적 경제제도 역시 착취적 정치제도를 뒷받침 한다.
●유럽인은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의 정치·경제 제도를 착취적 방향으로 몰아갔고, 유럽인과 경쟁 가능성을 아예 뿌리 뽑기 위해 식민지 법률과 제도를 사용해 아프리카의 상업적 농업 발달을 가로 막았다.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었는데도 남부의 정치·경제적 향배가 전혀 바뀌지 않았던 이유는 흑인의 정치적 힘과 경제적 독립성이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 솔로몬 왕조는 1974년 쿠데타로 전복되고 말았다. 멩기스투 정권의 각료 중 하나인 기오르기스는 이렇게 회고했다.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우리는 모두 과거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배격했다. ......그러다가 1978년경,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최고의 집, 최고의 위스키, 샴페인, 음식 등, 혁명의 이념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멩기스투도 본색을 드러냈다. 걸핏하면 앙심을 품었고, 잔인했으며 권위주의적이었다. 동료의식을 느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그와 대화를 나누던 이들도 이제 단정한 차렷 자세를 했고, 그의 주변에서는 늘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예전에는 멩기스투를 친근하게 <자네>라고 불렀지만 이제 격식을 차린 제3자 존칭인 <각하>라고 불렀다......우리의 혁명 목적은 평등한 사회건설이었지만, 멩기스투는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자이르를 가난에 찌들게 하며 썩을 대로 썩은 모부투의 숨 막히는 정권을 종식하고 온 인민을 그의 독재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며 군대를 일으킨 로랑 카빌라가, 모부투만큼이나 부패한 정권을 수립해 더 끔찍한 재앙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은 정말 슬픈 희극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숙명이 아니며 악순환 역시 절대 끊어지지 않을 불멸의 고리가 아니다. 하지만 끈질긴 내성을 자랑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악순환은 갈력한 부정적 순환고리를 생성해 착취적 정치제도가 착취적 경제제도로 이어지게 한다 착취적 경제제도는 이어 착취적 정치제도가 존속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
●포용적 제도를 향한 거대한 행보가 시작된 명예혁명이나 메이지 유신에서 발견되는 핵심적인 요인은 절대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고 절대주의적 제도를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제도로 갈아치우겠다는 각오를 한 광범위한 연합이 힘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광범위한 연합이 혁명을 일으키면 그 만큼 다원주의적인 정치제도가 태동할 가능성도 커지게 된다.
제 13 장 오늘날 국가가 실패하는 이유
●오늘날 국가가 실패하는 원인은 착취적 경제제도가 국민이 저축이나 투자, 혁신을 하겠다는 인센티브를 마련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로 이득을 보는 세력의 권력을 강화해주는 식으로 착취적 경제제도를 뒷받침해준다. 착취적 정치·경제제도는 상황에 따라 다를지 몰라도 국가가 실패하는 근본 원인일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앞으로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이집트의 사례에서 보듯이 부진한 경제활동의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자원을 착취하는 데만 혈안이 된 정치인이 자신과 경제 엘리트층을 위협하는 독립적인 경제활동은 무조건 짓밟아버리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태동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원칙적으로 엘리트의 지배에 반대하며,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소수 엘리트층으로부터 권리와 기회를 빼앗아와 고루 재분배하려고 애쓰는 듯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착취적 제도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착취적 정권하에서 수세기동안 지속된 불평등 때문에 신생 민주주의국가의 유권자들은 극단적인 정책을 내세우는 정치인에게 표를 몰아준다.
둘째, 효율적인 정당체제를 통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대안을 만들어내기 보다 페론이나 차베스 등 독재자로 기울게 되고 또 그런 인물이 정치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은, 역시 기저에 깔린 착취적 제도 때문이다.
●2009년 11월, 북한정부는 경제학자가 말하는 이른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60년 프랑스처럼 북한정부는 자국 화폐에서 끝자리 수 두 개를 떼어내기로 결정했다. 100원이 하루아침에 1원의 가치로 전락한 것이다. 북한정부가 단숨에 국민의 사유재산을 대거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북한정부는 시장이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엘리트층은 시장이 가져다주는 풍요를 탐닉한다. 북한지도자 김정일은 바와 노래방 기계, 소형극장이 딸린 7층짜리 아방궁에 살았다. 지상층에는 파도설비를 갖춘 거대한 수영장이 들어서 있는데 김정일은 작은 모터가 달린 보디보드를 즐겨 탔다고 한다.
●20세기 말 세계의 여러 지역이 왜 그토록 가난에 찌들었는지 이해하려면 20세기 신 절대주의에 대해 알아야 한다. 바로 공산주의다. 마르크스는 불평등이 사라진 한결 인간적인 조건 속에서 번영을 일구어내는 체제를 꿈꾸었다. 레닌과 그의 공산당은 마르크스 이론에 감명을 받았지만 이론과는 전혀 딴판으로 실천한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은 그야말로 피바다였고 인간적인 면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평등 역시 기대하기 어려웠다. 레닌과 그의 측근은 가장 먼저 새로운 엘리트층을 만들었는데, 바로 자신들이 볼셰비키 당의수뇌부에 앉은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이들은 비공산 불순세력만 숙청하고 살해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할 만한 다른 공산당원까지 제거했다. 하지만 더 끔찍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전을 겪는가 싶더니 스탈린이 정권을 잡자 집산화와 잦은 숙청이 자행되어 최대 4,0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와 공산주의는 잔혹하고 억압적이었으며 피로 얼룩졌지만, 특이한 사례는 아니었다.
●국가가 경제적으로 실패하는 이유는 착취적 제도 때문이다. 이런 제도 때문에 가난한 나라는 빈곤을 벗어날 수 없고 경제성장의 길로 들어서지도 못한다. 아프리카에서는 짐바브웨와 시에라리온 등의 나라에서 이런 사실을 절감할 수 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콜롬비아와 아르헨티나가 대표적인 사례다. 아시아에는 북한과 우즈베키스탄이 있고, 서아시아에서는 이집트가 그런 나라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착취적 제도다. 그런 제도의 이면에는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사회의 나머지 대다수를 희생시켜가며 권력을 영구히 유지하려는 엘리트층이 도사리고 있다.
제 14 장 기존 틀을 깬 나라들
●한 나라가 한층 더 포용적인 제도를 향해 한 발짝 성큼 다가갈 수 있으려면 특히 결정적인 분기점이 마련되어야 한다. 개혁이나 다른 유리한 제도를 추구하는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존재해야 하는 때가 많다. 얼마간 행운도 뒤따라야한다. 역사는 늘 우발적인 방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보츠와나는 누가 보아도 성공하기 힘든 나라였다. 하지만 이후 45년 동안 보츠와나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중 하나로 발전했다. 오늘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가 바로 보츠와나이며 에스토니아와 헝가리 등 성공적인 동유럽 국가와 코스타리카 등 가장 성공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 견줄 만하다.
보츠와나가 독립 이후 괄목할 만한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세레체 카마, 퀘트 마시르, BDP(보츠와나민주당)가온 나라를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를 향해 이끌었기 때문이다. 보츠와나가 기존의 틀을 깰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해방이라는 결정적 분기점을 놓치지 않고 포용적 제도를 수립한 덕분이었다.
●대약진운동으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혁명 당시 대단히 출세한 장군으로 <반우익>운동을 펼쳐 <반혁명 세력>을 숱하게 처형했던 공산당 간부 덩샤오핑이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다. 1961년 광저우의 한 회담에서 덩샤오핑은 이렇게 주장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다.”-黑猫白描猫論
모든 정책이 꼭 공산주의 색채를 띠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뜻이었다.
제 15 장 번영과 빈곤의 이해
●우리 이론의 실체는 포용적인 정치·경제 제도와 번영의 관계다. 사유재산권을 보장하고, 공평한 경쟁의 장을 마련하며, 신기술과 기능에 대한 투자를 장려하는 포용적 경제제도는 소수가 다수로부터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고안되고, 사유재산권을 보장해주지 못하거나 경제활동에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못하는 착취적 경제제도에 비해 경제성장에 훨씬 유리하다. 포용적 정치제도는 다원주의적 정치권력을 고루 분배하고 법과 질서를 확립할 수 있도록 일정 수준 이상의 중앙집권화를 달성하며 안정적인 사유재산권의 토대를 마련하고 포용적 시장경제를 뿌리내리게 한다.
●현재 중국경제는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포용적이지만, 중국의 경험은 착취적 정치제도하의 성장사례에 불과하다. 최근 혁신과 기술을 강조하지만, 중국의 성장은 기존 기술의 채택과 신속한 투자에 의존하는 것이지 창조적 파괴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 이런 성장 모형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중국에서 사유재산권이 완전히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시모어 마틴 립셋의 <근대화 이론>은 모든 사회가 성장할수록 한층 더 근대적으로 발전한 문명화된 체제를 지향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근대화 이론은 옳지 않다. 착취적 제도로 실패하는 국가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해법을 고민한다면 근대화 이론은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근대화 이론은 더욱 옹색해진다. 번영을 경험한 나라 중에서도 억압적인 독재정권과 착취적 제도에 무릎을 꿇거나 아예 지지를 보낸 사례가 적지 않다. 독일과 일본은 20세기 전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산업화된 나라에 속했고, 국민의 교육수준도 비교적 대단히 높았다. 하지만 독일은 나치의 국가사회당이 득세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일본에서는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군국주의 정권의 발호를 막지 못했다. 정치·경제 제도 모두 급격히 착취적 성향을 띠게 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