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청담(靑潭) 2013. 5. 4. 20:30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저자 : 전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원

                                                                                       간송미술관 연구위원

                                                                               출판사 : 솔

 

첫째 이야기 옛 그림 감상의 두 원칙

●선인들의 그림을 잘 감상하려면 첫째,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둘째,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림을 볼 때 사실, 다른 미술품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만, 그 대각선의 1내지 1.5배 정도를 유지해서 거리를 두고, 오른쪽에서 왼쪽 아래로 쓰다듬듯이 바라보며, 왠지 마음이 끌리는 작품을 느긋하게, 천천히 마음을 집중해서 감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옛날 그림을 보실 때는 오른쪽에서 왼쪽 아래로 보셔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림을 찬찬히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홍도의 25장으로 이루어진 풍속화첩의 그림들은 작품 속에 종종 손이나 발이 뒤바뀌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아주 찬찬히 뜯어보았더니 여기저기에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세부 그림들이 많습니다......다름 아닌 틀린 그림 찾기 예요! 보는 사람 들 재미있으라고 일부러 장난을 친 것입니다.

●북, 장구, 피리 둘, 대금(젓대), 해금을 합해서 삼현육각이라고 하는데, 옛날 사또가 부임행차를 하거나 큰 대갓집에서 잔치를 벌일 때 바로 이 삼현육각 풍류를 베풀었지요.

●젓대라는 악기, 즉 대금은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는 특멸한 악기예요. 가로피리야 종류가 많지만, 젓대처럼 숨구명 옆에 갈대청 구멍이 따로 있어서 휙휙 하면서 거친 듯 박력 있게 떠는소리가 나는 피리는 우리나라에만 있습니.

 

●우리 뇌는 우뇌와 좌뇌로 나뉘는데, 죄뇌는 수학적, 논리적, 이성적 뇌이고, 우뇌는 언어나 예술 등을 다루는 감성적인 뇌입니다. 일본인들은 좌뇌가 발달해서 수학을 잘하고 대체로 규칙을 잘 따르는 성향이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뇌가 발달해서, 그릇 하나를 만들어도, 그림 한 장을 그려도, 또 소리를 하더라도 뭔가 저만의 특색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요.

 

그런데, 우뇌가 우세한 사람, 즉 감성적이고 예술적인 사람들은 조형적으로 전후좌우를 뒤바꾸는 실수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단원의 풍속화첩은 일반 서민용으로 빠르게 척척 그려낸 저가의 대량생산작품이 틀림없습니다.

<기로세련계도>에 보이는 꽃들은 생화가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산 꽃을 잘라서 꽂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궁중에서 잔치를 해도 전부 종이꽃을 만들어 꽂았지요. 이것을 紙花라 하고, 그 지화 만드는 과정을?지화를 피운다 ?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500송이가 필요하면 그500송이를 다 손으로 만들어 썼습니다. 겸상을 하는 것은 천하게 여겼습니다. 격이 있는 잔치이기 때문에 병풍치고 차일을 쳤는데 음식시중도 남자 아이들 즉, 동자들이 합니다.

 

둘째 이야기 옛 그림에 담긴 선인들의 마음

●동양화는 여백이 특징이라는데 탱화는 왜 이렇게 화면을 가득 채워 그렸을까요? 불교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온 세계 구석구석까지 스며든 붓다의 깨달음, 그 진리로 우주가 화려하고 장엄한 세계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에서 근대까지 동아시아 문화전반에 깔려있었고 관통했던 사고방식, 혹은 생각의 틀은 陰陽五行입니다. 음양오행은 하나의 관념 혹은 하나의 철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주와 인생을 바라보는 일종의 사유의 틀입니다.

그것도 자연현상 그 자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생각의 방식이지요. 전통문화는 이 음양오행을 빼놓고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서울 이름이 왜 漢陽입니까? 漢江의 북쪽에 있는 도시인 까닭에 한양입니다. 산의 남쪽을 陽이라 하고, 강은 북쪽을 陽이라고 합니다. 서울은 한강 북쪽에 있기 때문에 한양이에요. 따라서 지금의 강남은 한양이 아니라 漢陰인 셈이지요 

●동쪽은 봄에 해당하는데 봄은 만물을 어질게 키워내기 때문에 봄의 덕을 어질다고 해요. 그래서 동대문을 <흥인지문>이라합니다. 남쪽은 여름에 해당하는데 산천초목이 제자리에서 정연한 질서를 이루며 자라나며 분수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를 높이는 남대문을 <숭례문>이라 했습니다. 서쪽은 가을에 의를 배당해서 의를 돈독히 한다라는 뜻에서 서대문을 <돈의문>이라 했습니다. 북대문은 겨울이며 겨울은 춥고 그 다음해를 기약하려면 씨앗은 땅속에 묻혀 있어야만 하죠. 이건 참 슬기롭다고해서 원래는 알지자에다가 엄숙할 숙자를 써서 숙자문이라 할 것이었는데 지혜란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에서 숙청문이라 했다가 나중에 중종때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정자로 바꾸었습니다. 동서남북, 춘하추동에 인의예지가 다 들어있죠. 가운데는 보신각이 있습니다. 두루보자에 믿을 신자, 이 보신각 종이 아침에 뎅 하고 33번 울리면 33천이 열리고 밤에 28번 울리면 하늘의 28수 별자리가 뜨게 됩니다.

김홍도의 시조 한수

봄 물에 배를 띄워 가는대로 놀았으니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우히 물이로다.

 

이중에 늙은 눈에 보이는 꽃은 안개속인가 하노라.

 

선비는 은은하고 점잖은 것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표구를 할 때에도 우리나라에선 비단에 이렇게 무늬가 요란한 것을 쓰지 않고 그저 단색으로 옅은 옥색 바탕을 위아래에 민패로 깔고 말아요.

국립박물관이나 호암미술관이나 옛 그림을 전시한 곳에 가 보시면 우리 옛 그림은 거진 70% 정도가 다 이런 일본식으로 표구되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렇게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셋째 이야기 옛 그림으로 살펴본 조선의 역사와 문화

 

●옛 문집을 들쳐보면 조선시대 우리나라에는 엄청나게 많은 중국그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찾아보기 어려워요. 어디로 갔겠습니까? 일본입니다ㅣ 일본식 표구를해서 일본에 갖다놓으면 화폭위에 우리 선조들이 쓴 글씨라도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전부중국에서 직접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 국민들이 우리 문화재 상황을 잘 모르고 그저 맹목적인 애국심에 불타가지고 옛 날 우리 물건이라면 무조건 소중하고, 훌륭하다, 이렇게 치켜 올리는 얘기들도 하는데 실제로 썩 좋지않은 작품을 가지고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경향까지 있습니다.

제가 율곡선생의 일기를 보니 이런 대목이 있어요. 하루는 선조가 엄청나게 화를 냈습니다. 어떤 불학무식한 백성이 경복궁 담벼락에 잇대 가지고 자기 집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일입니까? 법전의 규정을 찾아보니 궁궐 담장으로부터 100(30m)의 간격을 띄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현상을 보고하라 하니 30m는 커녕 궁궐 근처까지 벌써 민가가 많이 들어서 있더랍니다. 선조는 원칙대로 100자 이내의 민가를 철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대답하기를 이번에 일을 낸 그자는 참으로 무엄하므로 크게 혼을 내야 마땅합니다. 당사자만 처벌하시고 규정대로 100자 이내의집을 모두 철거한다는 말씀만은 거두어주십시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조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30자 이내의 집은 헐어내라고 지시합니다. 신하들이 또 이렇게 대답합니다. “ 지금 민가들이 근접해 있는데 그 중에는 10m이내에도 심지어 100년이 넘은 고가가 여러 채 있습니다. 작금의 현황이 이러한 것은 모두 저희 들이 부덕한 소치라 뭐라 말씀드릴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기실 선왕들께서 이제까지 그것을 용인해 오신 까닭도 없지는 않습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조는 끝내 30자 안쪽의 집들을 헐어내어 장안 백성들이 울고불고 대단했다고 합니다. 율곡선생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번에 주상께서 취하신 조치는 덕이 부족한 일이었다!”

요즘 역사서술의 원칙은 근대사, 현대사로 올수록 , 즉 우리시대와 가까울수록 더 많이 상세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대사는 아무리 자랑스러워도 좀 덜 가르쳐야 하고 근대사는 아무리 본받을 것이 적어도 많이 가르쳐야 된다는 기계적인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혹시 교과부에 근무하고 계신 분이 있으면 그 점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이며 영조, 정도때에 배울 만한 훌륭한 사례가 많은데 그 부분은 대충대충 가르치고, 나라 망하는 부분인 19세기 말 20세기 쪽만 잔뜩 가르쳐서 열등감을 주면 우리학생들은 도대체 무얼 배우고 느끼며 무슨 자부심을 키우라는 겁니까? 참 이상한 발상입니다.

일제 때 그려진 그림인데 보세요. 지금 우리가 이어 받고 있는 문화가 어떤 건지 보여 줍니다. 지금 미술대학 교수로 있는 화가들의 선생님 뻘 되는 김은호 화백이란 분이 그린 건데, 당시 나라안 최고의 화가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호랑이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언 듯 보기에는 잘 그린 듯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니 귀엽게 생겼죠? 이건 호랑이가 아니고 고양이입니다. 또 귀는 지나치게 커서 멍청해 보이고 꼬랑지는 아주 쩨쩨합니다. 그리고 앞다리가 이게 뭡니까? 송아지의 목을 일격에 꺾어 버린다는 호랑이 앞다리 살이 너무나 투실투실해서 아예 다이어트를 해야 될 지경입니다. 몸의 줄무늬를 그린 것도 해부학적 정확성을 없이 고만고만하게 반복해서 대충 시늉만 했죠. 흰색으로 성글게 친 터럭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언 듯 겉보기에는 잘 그린 듯하지만 아까 보았던 단원의 호랑이 그림과 꼼꼼히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200년 전 정조시대의 문화수준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분위기만 그럴듯하게 살려내는 일본식의 화풍이 끼친 악영향입니다.

   이 그림은 김은호 화백이 그린 논개, 진주 남강에서 왜장을 끌어 안고 물에 빠져 즉은 논개의 영정입니다. 국가 공인 영정이라 해서 김은호 화백에게 맡겼는데 그림이 이렇습니다. 참 예뻐 보이죠? 예쁘지만 이건 정신이 빠진 그림이에요. 남원에 있는 춘향이 그림은 또 이렇게 생겼습니다. 역시 같은 분이 그렸는데 예쁘지요? 그런데 얼굴이 거의 비슷하죠! 두 작품의차 이는 이렇습니다. 논개는 를 아는 기생, 의로운 인물이니까 얼굴에 약간 각을 약간씩 더 줘서 굳센 느낌을 살리고 치마를 푸른색으로 입혔습니다. 춘향이는 열정적이니까 선을 더 곱게 그리면서 綠衣紅裳으로 다홍치마를 입혔어요. 그런데 얼굴판이 내내 같지 않습니까? 어떻게 논개와 춘향이 같을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겉으로만 예쁘게 그려 내는 것이 일본식 그림입니다.

더구나 두 그림에서 놀라운 것은 초상 주인공의 얼굴이 모두 화가 김은호 선생의 부인 얼굴이란 점이에요! 당신 부인 얼굴 가지고 논개도 만들고 춘향이도 만들었습니다. 호암미술관에 가보면 <황후대례복>이란 그림이 있는데 황후 옷을 입혀 가지고 부인을 황후로 만든 것도 있습니다.

 

조선의 왕은 반드시 <日月五峯屛>앞에 앉습니다. TV연속극에서 뒤에 이 병풍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조선의 왕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대궐 안에서는 물론이고 멀리 능행차를 하실 때에도 따로 조그만 병풍을 휴대했다가 멈추기만 하면 이걸 치지요. 그리고 御眞, 임금의 초상화를 건 뒤에도 이를테면 태조 초상화를 모신 전주의 경기전 같은 곳입니다 반드시 이 병풍을 칩니다. 한마디로 <日月五峯屛>은 조선 국왕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의궤 그림들에서 국왕이 위치한 자리에는 사람을 직접 그리는 대신, 바로 이 병풍만 그려 넣는 것입니다.

景福宮의 뜻이 무엇입니까? <시경>君子景福이란 구절이 있는데 덕을 갖춘 군자는 큰 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경복궁 안에 사시는 임금은 큰 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무언의 뜻이 숨어 있죠.

靑瓦臺푸른 기와를 얹은 높은 건물 이란 뜻입니다. 외형에 대한 물질적 묘사만 있을 뿐 아무 뜻도 없습니다. 이런 것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미국사람들이 대통령 관저를 <White House> , 白堊館(하얀 진흙)이라 고 부르니까 그걸 본받은 것이 아닐까요?

정선의 金剛全圖 題詩

일만 이천 봉 겨울 금강산의 드러난 뼈를

뉘라서 뜻을 써서 그 참 모습 그려내리.

뭇 향기는 동해 끝의 해 솟는 나뭇가지 떠 날리고

쌓인 기운 웅훈하게 온 누리에 서렸구나.

암봉은 몇 송이 연꽃인양 흰 빛을 드날리고

반쪽 숲엔 소나무 잣나무가 玄妙을 가렸어라.

설령 내발로 직접 밟아 보자 한 들 이제 다시 두루 걸어야 할 터,

그 어찌 베갯맡에 기대어 실컷 봄만 같으리오!

 

 

 

 

'독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제가-궁핍한 날의 벗  (0) 2013.06.20
이조시대 서사시  (0) 2013.05.29
그랜드 투어  (0) 2013.04.29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0) 2013.03.06
위기관리의 리더십  (0) 2013.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