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우리안의 그들

청담(靑潭) 2013. 8. 13. 16:26

 

 

우리안의 그들

 

너머북스 이희근 저

 

서언

우리나라가 지금까지는 세계 200여국가 중 소국을 제외하고 국가의 규모가 제대로 갖추어진 나라 중에서는 예를 찾기 어려운 (韓民族으로 이루어진) 단일민족국가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왔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20세기말부터 우리나라의 경제가 크게 성장하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취업하여 들어오고 국제결혼으로 인하여 수많은 여성들이 들어와 한국인이 됨으로서 이제 다문화시대가 열렸고 단일민족 운운하는 말들은 언급하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체류외국인이 150여만 명으로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 중 외국인이 3%인 셈이다.

우리 역사에 외민족이 한민족과 섞여 살거나, 이주해 오거나 전쟁 중에 피난을 오거나 하는 등 아주 많은 이유로 우리민족과 피가 섞여온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와 정리를 한 서적은 아직까지 접해보지 못했다. 이 책은 다 민족 국가시대를 맞이하여 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학교에서 다문화교육 담당자인 양드리 선생이 다량으로 서적을 구입하였다하며 보여준 책으로 귀하게 여기며 반갑게 읽고 간략하게 정리한다.

1. 한반도 남부로 이주해온 진나라 유민들

후한서 한전

진한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진나라의 망명한 사람들로서 고역을 피하여 韓國에 오자마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고 한다.

삼국지 한전

그들의 언어는 마한과 달라서 나라를 이라하고 활을 라하며 도적을 라하고...서로 부르는 것을 모두 라하여 진나라 사람들과 흡사하다.

2. 위만조선을 건국한 위만과 중국 이주민들

후한서 동이열전

한나라 초기의 대 혼란기에 연··조나라 사람으로서 조선지역으로 피난간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삼국지 동이전

노관이 흉노로 도망한 뒤 연나라 사람 위만도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항복했다. 서쪽 변방에 거주하게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들을 거주어 조선의 변병이 되겠다고 준왕을 설득했다. 준왕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로 임명하고 (으로 만든 :손에 쥐던 패)를 하사하여 1백여리의 땅을 봉해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했다. 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차츰 많아지자 준에게 사람을 보내 속여 말하길한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도서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하고는 마침내 되돌아서서 준왕을 공격했다. 준왕은 위만과 싸웠지만 상대가 되지 못했다.

3. 한반도 남부에 왜가 있었다.

일본서시 신공 49(369)

신공왕후가 황전별, 녹아별 등을 보내 백제의 구저, 목라근자, 사사노궤 등과 함께 탁순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벌, 남가라, ,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가야 7국을 평정하였다.

광개토대왕비 영락 10(400)

영락 9년 기해에 백제가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신라왕)왜의 백성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10년 경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왜적이 가득하였다. 고구려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물러났다. 그 뒤를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성이 곧 항복하였다.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삼국지 한전

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 진한, 변진이며 진한은 옛 진국이다.....지금의 진한 사람들은 모두 납작머리이고, 왜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반진의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

삼국지 한전

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南與倭接)면적은 사방 4천여 리쯤 된다.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 진한, 변진이며 진한은 엣 진국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6(397)

왕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

신라본기 실성왕 1(402)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

한반도내에 있던 왜는 신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맞서 싸웠던 강력한 정치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연구자들이 왜의 위치를 일본열도 내로 간주하면서 생겼던 모든 모순은 왜를 한반도내의 정치집단으로 이해할 때 풀리게 된다.

의미있는 주장이다.

452년에 한반도 남부의 왜를 진압한 가야는 이제 그들을 통제할 기구가 필요했을 것인데 그것이 바로 안일 역사학계의 최재 쟁점인 일본서기에 보이는 일본부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 응략기 8(464)

신라왕이 임나왕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고구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고합니다. 이때를 당하여...나라의 위태로움이 累卵의 위기보다 더 합니다. 일본부의 행군원수 등에게 도움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임나왕은 선신반구, 길비신소리, 난파길토적목자에 권하여, 신라로 가서 도와주도록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왕 3(481)조에서는 아예 신라 구원군을 왜병이 아닌 가야병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측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은 왜를 가야의 예속집단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 국제도시 경주에 뿌리내린 아랍인

경주시 외동면 괘릉리 원성왕(785-798)의 무인석 및 흥덕왕(826-835)의 무인석

신라인과 전혀 다른 생김새를 지닌 사람들이 신라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유물이다. 우람한 체격에 오똑하고 큰 코, 곱슬머리에 크게 부릅뜬 눈, 튀어나온 광대뼈, 귀 밑부터 흘러내린 길고 숱 많은 곱슬수염, 머리에 쓴 아랍식 터빈의 얼굴 모습은 아랍인의 형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5. 한반도의 여진(숙신, 읍루, 말갈, 흘길, 만주)

남북국시대 신라에도 여진인이 정착해 있었다. 중앙군사조직인 9서당에는 말갈인이 1개부대로 편성되었다.

발해(698-926) 멸망 직전 한반도의 북부지역은 無主空山이었는데, 이곳은 주로 여진인의 터전이 되었다.

고려사 태조 년(918)

평양 옛 도읍이 황폐화된 지 비록 오래되었지만 고적은 아직 남아있다. 그데 가시넝쿨이 무성하여 번인들이 거기서 술렵을 하고 있으며, 또 수렵을 계기로 변방 고을들을 침략하여 피해가 크다.

대체로 남북한 학자들은 대조영이 고구려 출신임을 밝히려 하는 반면에, 중국 및 일본학자들은 그가 말갈인임을 입증하려는 경향이 있다. 대조영집단은 본래 속말말갈 지역에 살다가 그 본거지를 떠나 고구려 영역 내에 옮겨와 살았다. 최치원의 謝不許北國居上表

신이 삼가 살피건대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는 본디 사마귀만한 부락이었지만, 말갈의 족속이 번성해지자 그 무리 중 속말이란 소번이 있었는데, 일찍이 고구려를 추종하여 고구려 영내로 옮겼다.”는 구절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글은 발해가 존재하던 때에 씌어 진 것이며 게다가 신라왕의 이름으로 당 황제에게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믿을 만한 기록이다.

구당서에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라거나 신당서에 발해는 본애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붙은 자라는 표현에서 대조영이 순수 말갈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수 고구려인도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그는 말갈의 혈통을 이어받았지만 고구려로 귀화하여 상당한 정도로 고구려화가 진전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고려사><고려사절요>에서는 발해가 본래 속말말갈이라 하면서도 대조영을 고구려인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6. 고려의 거란인 사회

서긍의 고려도경 工技條

또 듣자니 투항하거나 포로가 된 거란인 수만 명 가운데에는 장인이 열중 하나가 있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조

揚水尺(후일 禾尺으로 개칭).....본시 관적(호적)도 부역도 없으며 수초를 따라 옮겨 다니며 사는 것이 일정치 않아 오직 사냥을 일삼고 유기를 제조하여 파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다.....대체로 기생 무리는 유기장 집안에서 나왔다.

고려도경 漁條

고려에는 양과 돼지가 있지만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했으며,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

거란인의 후예인 화척이 몽골인과 함께 소 등의 도축을 주도함으로써 예전에는 일부계층만이 육식문화를 향유했지만 고려후기에 와서는 각 참의 모든 곳에서 손님접대에 소고기를 이용할 정도로 육식이 일반화되었다.

7. 몽골인의 후예, 달단

韃靼은 본래 만주 흥안령 서쪽 기슭이나 陰山산맥 부근에 살던 몽골족의 한 부족인 타타르(Tatar)를 가리켰는데, 몽골 고원 혹은 몽골인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달단은 조선초기에도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등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정착해 살고 있었다.

쌍성총관부(1258-1356)의 관할지역에는 대체로 고려인과 여진인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

조선 세종 때에 이르기까지도 달단의 후예인 수유적은 도축을 직업으로 삼았고 그들이 생산한 수유는 왕실의 약에 사용되었으며 때론 늙어 병든 신하들에게 내려지기도 했다. 이들 달단도 그 직업이 화척과 유사해서 백정화되었다. 조선정부가 공식적으로 이들 집단을 백정으로 명명한 시기는 1440(세종5)이었다.

8. 조선의 무슬림 집단

세종실록 944

회회교도는 의관이 우리들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우리백성이 아니라하여 혼인하기를 꺼려합니다. 이미 우리나라에 귀화한 사람들이니 마땅히 우리나라 의복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숭인의 시

예성항구(벽란도)여기가 해문인데

고기잡이배, 장삿배들이 베 짜는 듯 드나들었네.

동국이상국집 이규보의 시

아침에 (벽란도의)누각 밑을 출발하면

한 나절 못되어 南蠻에 이를 것이다.

원의 會試에는 원제국의 각지의 鄕試에서 선발된 총 300명을 대상으로 해서 그 중 100명을 합격시켰다. 여기에는 지방 혹은 종족에 따른 정원이 정해져 있었다.

고려를 관할하던 정동행성에는 몽골인 1, 색목인 1, 그리고 중국인을 포함한 고려인 1명이 배당되었다. 이는 고려에 거주하고 있던 서역인 즉, 무슬림이 상당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고려사 충렬왕 510월조

回回人들이 왕을 위하여 새 궁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고려사 樂志

충렬왕때 유행한 雙花店에는 회회아비가 떡의 일종인 쌍화를 사러 간 여인의 손목을 쥐더라는 구정이 있다. 이는 회회인, 즉 무슬림 가운데 개성에서 가게를 열고 있는 자들도 존재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조성왕조가 개창하자 유구의 중산왕 찰도가 태조원년에 사신을 보내 수고하였다. 유구는 중종 19(1524)까지 130여 년 동안 50여 차례에 걸쳐서 신하라 칭하며 방물을 바쳤다.

조선정부는 이주 무슬림 등 다른 민족들의 생활방식 등을 그대로 인정하는 열린 자세가 아니라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세종실록 세종944일조에서처럼 무슬림의 고유한 생활방식과 종교 등을 바꾸려고 시도했으며 실제로 이런 정책은 관철되었다. 이 후 이들의 존재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만큼 조선왕조는 문화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은 페쇄적인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9. 북방 유목민, 백정이 되다

세조실록 세조 2328일자

대개 白丁은 혹은 禾尺이라 하고, 또는 才人 혹은 韃靼이라 부르며,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닙니다.

몽골인들 가운데 일부는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상당수는 고려에 그대로 머물러 살았다. 특히 牧胡라고 불리던 달단의 목자가 말을 키우기 위해 고려로 보내졌는데 그 인원수는 대단히 많았다. 고려사 공민왕 234월조에 따르면 고려조정은 제주도 목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무려 25천명 이상의 군사를 동원했는데, 이는 몽골인 출신의 목호역시 이러한 고려군의 숫자에 버금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 목호를 포함하여 수많은 몽골인들이 고려에 정착해 살았다는 것이다.

성종실록 성종41218

재인이 한 고을에 사는 수는 평민에 비교하여 3분의 1, 혹은 4분의 1이나 되는데도 홀로 身役이 없고 마음대로 한가하게 놀고 있습니다.

중종실록 중종 7114

남원에서는 품관들이 강성하여 부내의 재인과 백정이 본래 2,000여명이었는데 모두품관에게 부리는 바 되어 한 품관이 20-40명씩 거느려 자기 집 울안에 살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제 백정은 평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재인, 화척을 지칭하는 말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10. 조선의 백성이 된 일본인

선조실록 선조 27217

중국의 장수는 사로잡은 왜적을 죽이지 않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잡으면 문득 죽여 투항하는 길을 끊어 버리니, 도량이 좁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 다른 나라의 기술을 傳習할 수가 없다....한 사람은 염초(화약원료) 굽는 기술을 가르쳐주었고, 한 사람은 조총 제조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선조실록 선조 27616

(강첨)이 일찍이 이원익을 따라 영남에 갓을 때 항왜 60여명이 밀양땅에 모여 한 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었습니다.

태종실록 태종 16823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왜인이 100여명이나 되니, 이것이 두렵다. 또 하늘이 가뭄의 재앙을 내리면 구제하기가 어렵다.

선조실록 선조 34113

降倭 同知 김향의, 김귀순, 이귀명 등이 비변사에 와서 호소하기를, “우리들은 이미 조정의 관작을 받았으니 당연히 본국의 신민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다. 지금 듣기에 다른 관원들은 모두 을 받는다는데 우리들만 를 받고 있어 부당한 듯하다. 바라건대 바른 예대로 우리에게도 녹을 받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2115

김응서가 항왜를 평안, 황해도의 궁벽한 곳에 나워 보내서 살게 하자고 본사(비변사)에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온 항왜들이 본사에 와서 호소하기를 저들 무리들이 나온 지가 오래 되어 각각 처자와 전토가 있으므로 편안하게 살면서 농사에 힘쓰고 있다. 지금 만약 갑자기 移徙시키면 다른 지방으로 멀리 옮겨가게 되어 생활근거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이런 엄동설한에 길에서 얼어죽을까 염려된다. 따라서 연한을 두어 그대로 머무르게 함으로써 생명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하였습니다. 이러한 부당한 공권력 행사는 철회되었다.

세종 1(1419) 619일의 대마도정벌을 위한 정지작업차원에서 경상도 각 포에 와서 머물고 있는 왜인과 장사하는 왜인을 수로에는 병선으로, 육지에는 기병과 보병으로 에워싸고 구주절도사가 사신으로 보낸 것 이외에는 모두 잡아서 각 관청에 분치하니 경상도에 355, 충청도에 203, 강원도에 33명으로 모두 591명입니다. 포로로 할 때 죽은 자와 해변의 여러 섬에서 수색하여 잡을 때에 몸을 던져 자살한 자가 136명입니다.

11. 요동사람들 조선에 피난 오다

광해군 일기 광해군 14(1622) 44

듣건대 피난한 중국 사람들이 畿邑(경기도 각 읍)關東(강원도)에 두루 가득 차 있다고 하니, 이들이 필시 온 나라 안에 점점 가득 찰 것이다. 비록 적이 아니더라도 어찌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빨리 각별히 의논하여 처리하라.”

후금이 요동을 침략한 지 불과 6년 만에 중국인 피난민이 서북 국경지방을 넘어 경기도와 강원도의 각 고을에까지 유입되었다.

모문룡은 10만 명의 조명연합군이 1619(광해 11) ·청 분수령이 되는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에게 패한 이후 남은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피신했다. 평안도 철산 앞의 가도에 동강진을 설치하여 주둔하면서 명과 조선으로부터 식량, 무기 등을 공급받아 후금의 후방에서 견제작전을 폈다.

인조실록 인조 4(1626) 326

모문룡이 수십만의 남녀를 거느리고 우리 변경에서 살고 있다....수십만 명에 이르는 중국인이 조선으로 피난해 왔다.

망명자 송환을 둘러싼 조선과 후금간의 갈등은 이미 광해군 때부터 일어났다. 후금은 여러 차례 중국 망명자의 소환을 요구했다. 심지어 1621(광해 13) 12월에는 조선정부가 그들의 송환 요구를 무시하자 직접 5,000여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모문룡 진영을 공격하기도 했다.

인조실록 인조 1925

비변사가 아뢰기를, ‘3건의 쇄환할 사람으로 이미 들여보낸 자가 544명이니 모자라는 수가 66명입니다....’왕이 따랐다.”이처럼 3차에 걸쳐 보낸 송환자 총인원이 600명 이하일 정도로 그들에 대한 송환은 아주 소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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