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유득공 산문선

청담(靑潭) 2013. 9. 15. 12:15

 

 

유득공 산문선

-누가 알아주랴?

 

지은이 유득공(1749-1807) 옮긴이 김윤조

 

 

  유득공은 서울 출생으로 1774년 생원을 거쳐 1779년 규장각검서관에 임명되었고, 포천현감, 양근군수, 가평군수 및 풍천부사를 역임하였다.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서얼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정조로부터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검서관이 되었고 큰 벼슬을 할 수 있었다. 1778년 심양을, 1790년에 박제가, 이희경과 함께 북경을 다녀오고 1801년에 다시 북경을 다녀왔다.

 

 

1. 만주벌판을 꿈꾼 역사의 시인(역자 편)

○우리나라 문학의 전체 상을 조감하려한 걸출한 안목의 소유자였다.

○<발해고>는 우리가 대륙에 발판을 두어야 하는 당위성을 천명한 위대한 문헌이다.

 

2. 우리나라 사람들의 저서

○더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저서란 반드시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아니니, 가게에서 벽을 바른 것이 태반은 우리나라 문집이고, 약방에서 약을 싸두는 봉지도 모두 우리나라 문집이다.

 

3. 우리나라의 서예가

1. 김생 2. 최치원 3. 승려 영업 4. 승려 탄연 5. 문공유 6. 이암 7. 한수 8. 성석린 9. 신장 10. 최홍로 11. 강희안 12.박팽년 13. 안평대군 14. 성임 15. 정난종 16. 성세창 17. 김희 18. 김구 19. 성수참 20. 황기로 21. 송인 22. 양사언 23. 한호

 

4. 꿀맛

내 경마잡이 종의 어머니는 남양의 섬사람이다. 나이 여든이 넘었는데 그 아들을 찾아왔다. 안채에 들어가서 인사를 하자딸아이들이 그녀가 나이 많다고 벌꿀을 대접하였다. 그러자 크게 놀라 바깥문으로 뛰쳐나와서 그 아들을 외쳐 부르더니.

?내, 벌꿀 먹어봤다. 내 일찍이 꿀이 달디 달다고 듣기는 햇지만 엿보다 더 달지는 않으려니 했더니, 지금 먹어보니 단맛이 비할 데가 없구나. 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하였다.

내가 퇴근해오자 딸아이들이 웃으면서 말을 해 주었고. 나도 한번 웃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엿이 있는 줄만 알뿐 꿀이 있는 줄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어찌 남양 섬 여인네만 그렇겠는가?

 

5. 우리나라의 예속

우리나라 예속은 중국과 다른 것이 아주 많다. 우리나라는 비천한 사람이 길에서 존귀한 자를 만나면 말을 탈 수 없고, 소매를 흔들 수 없으며,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릴 수 없고 담뱃대로 담배를 피울 수가 없다. 서있는 자가 있으면 꾸짖어서 앉히고 吏胥들의 경우는 심지어 부복하기도 한다. 비가 와도 油帽를 쓸 수 없고, 추워도 감히 귀마개를 쓸 수가 없어서 모두 황망하게 벗어나야 한다.

중국은 소매를 흔들지 못하게 한다거나 부채를 펼치지 못한다거나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는 등의 여러 금령이 없고, 앉아있던 이는 기립함으로써 공경을 표하고 卒隸등 지극히 미천한 자 외에는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

<삼국지>에 ?고구려는 무릎 꿇고 절을 할 때 한쪽 다리는 편다.?하였고, <주서>에 ?백제는 배알하는 예가 두 손으로 땅을 짚어 경의를 표한다.?고 하였다. 지급 武弁이 재상을 뵐 때 아직도 이렇게 한다. 그것이 중국과 달랐기 때문에 역사서를 지은이가 기록한 것이다.

 

6. 수레사용

사람들은 모두 수레 사용의 편리함을 말한다. 하지 만 끝내 수레를 사용하는 일은 볼 수가 없다. 이유를 설명하는 자들은 이를 두고, 길을 닦기가 어렵고, 나루와 배에 판자를 까는 일이 어려우며, 가게마다 대문을 높이고 마당을 넓히기가 곤란해서라고 한다.....

다만 우리나라는 체면을 몹시 중시한다. 이제 만약 수레 탄자에게 말에서 내리는 예를 요구해서 부랴부랴 피해주기에도 불편하고 자주자주 뛰어 내려야 한다면 수레를 타지 않음만 못할 텐데, 어찌 수레를 탈자가 있겠는가?.....우리나라 습속은 조급하고 잰 체하기를 좋아하여, 먼적 h나중이고 따지지 않고 좁은 골목길에서 충돌하고 때리고 해서, 말이 놀라고 수레 축은 부러져 낭패를 본 뒤에야 그만둘 것이다. 어찌 수레를 탈자가 있겠는가? 제도는 바꿀 수 있어도 풍속은 갑자기 바꾸기 어려운 듯하다.

 

7. 양호의 풍속

지금 호서, 호남 지방은 다옛 백제 땅이다. 지금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시하지는 않지만 그 나머지는 모두 능한데, 호남사람들은 점과 관상및 오행술을 아주 좋아하고 바둑에는 국수가 많다.

 

8. 광대

사람의 양 볼 위쪽에서 튀어나온 뼈를 광대뼈라 부르는데, 광대들이 쓰는 가면과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9. 사나운 새

사나운 새에는 매우 많은 종류가 있다. 매 중에서 태어난 그 해에 길들여진 것을 보라매라 하는데, 보라란 淡紅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니 그 깃털의 빛깔이 엷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 산에서 나이 묵은 것을 산지니라 하고, 인가에서 나이 묵은 것을 수지니라 한다. 매 가운데 가장 뛰어나면서 그 털빛이 흰 것을 송골이라 하고, 털빛이 푸른 것을 해동청이라 한다. 수리 가운데 작으면서 매처럼 생긴 것을 독수리라하고 매 가운데 커서 노루, 사슴을 잡을 수 있는 것을 가막수리라 하는데, 가막이란 ?검다?라는 우리말이다. 독수리 비슷하면서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것을 육덕이라 하는데 생김새가 웅대하여 사람도 업고 날아간다. 호랑이를 보면 호랑이 머리에 날아가 앉아서 그 눈동자를 쫀다.

매 같으면서 양 깃털이 길쭉하고 날카로운 것을 난춘,

매 같으면서 눈이 검은 것을 조골,

매 같으면서 붉은 가슴에 흰 등, 검은 눈을 가진 것을 방달이,

매 비슷하면서 작은데 깃은 날카롭고 다리가 긴 것을 결의(곧 새매)이다.

결의나 비둘기 비슷하고 눈이 검은 것을 도령태,

도령태 같으면서 참새를 잡을 수 있는 것을 구진의(발람갑),

결의 비슷하면서 부리 곁이 칼로 새긴듯 갈라진 것을 작응,

매 비슷하면서 꼬리 끝에 흰 깃이 있는 것을 마분략이라 한다.

 

10. 인삼

근년 들어 약방에서 家蔘을 많이 파는데, 영남 사람이 재배한 것이다. 산삼에 비해 효과가 조금 덜하지만 값은 삼분의 이나 싸서 약을 복용하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여긴다. 충주 사는 심옹경이 화서 하는 말이, 충주 사람들도 이를 배워서 재배한다고 한다. ......

삼은 이웃 나라와의 교역에서 중요한 물품이어서 강계 백성들은 삼을 태어 바치느라 곤궁해져 떠돌이가 되어 도망가 버린 자가 태반이다.

 

11. 평양사람들은 대동강 물을 마심

종일 물을 져서 대동문을 들어가므로 문안의 흙이 항상 젖어 있다.

 

12. 열하일기

상이 요즈음의 문체가 비속하다고 여러 차례 말씀을 내려 詞臣을 책망하여 패관소설을 엄금하고 또 여러 검서관들은 新奇를 힘써 높이지 말라 타일렀다......서영보, 남공철, 두 直閣과 이서구가 그 자리에 참여하였으니 모두 당대 시문의 대가들이고, 검서관으로는 나와 이무관(덕무)이 참석하였으니, 지극한 영예라 이를 만하다. 이 날(1792년) 남직각은 성상의 뜻으로 편지를 써서 서 안의현감 박지원에게 하유하기를,

<열하일기는 내가 이미 읽어 보았다. 다시 단정하고 바른 글을 짓되 길이가 열하일기와 비슷하고 회자되기가 열하일기와 같이 될 수 있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벌을 내릴 것이다.> 하였다.

연암은 약관에 글을 잘 지어 이름이 서울에 떠들썩하였고 이윽고 낙척해서 과거를 보지 않은 채 연경에 가는 사신을 따라 ....열하에 갔다 돌아와서 일기 20권을 지었다. ...극히 해학적이고도 기이하여 일시에 사대부들이 전하여 베끼고 빌려보아 여러 해가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이 책이 마침내 임금에게까지 들어가서 이런 분부가 있게 된 것이다.

연암은 평소 우리들과 가까운 분이다. 그는 일기를 짓고 나서는 그 이전에 지은 글을 모두 없애 버렸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 일기가 있으면 나머지는 꼭 전할 것 없다고 여긴 듯하다.

 

13. 꽃

초록의 꽃, 공작새의 깃, 저녁하늘의 노을,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

아하! 한 채 훌륭한 정자를 지어 미인을 들여앉히고 병에는 공작새 깃을 꽂고 정원에는 화초를 심어두고서, 난간에 기대어 저무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될꼬? 하나 미인은 쉬 늙고 노을은 쉽게 사그라지니, 나는 김군(김홍도)에게서 이 화첩을 빌려 근심을 잊으련다.

 

14. 한국 고대사 인식의 시작(渤海考 序)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고려가 떨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다....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함에 김씨는 남쪽을 차지하고, 대씨는 북쪽을 차지하였으니 발해다. 이를 남북국이라 부른다. 당연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는 이를 편찬하지 않았다. 잘못이었다.

저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이 차지한 영토는 어떤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인데 동으로 넓히고 서로 넓히고 북으로 넓혀서 더 크게 만들었을 뿐이다.....

장건장이라는 사람은 당나라 사람인데도 『발해국기』를 지었다. 그런데 고려 사람으로서 유독 발해사를 편찬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15. 우리 고대사 이해의 방법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두고 사람들은?빠지고 소란해서 볼 것이 없다.?고들 탓하지만 명산과석실에 간직한 역사서가 전혀 없었으니, 제 아무리 김부식인들 무슨 수가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제대로 된 역사서는 오로지 정인지의 <고려사>가 일을 뿐인데, 고려 이전은 무엇으로 살펴볼 수 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간해 말하기를? 우리나라 역사서로 평양에 있던 것은 이적에 의해 불탔고, 전주에 있던 것은 도 견훤이 패퇴할 때 불에 탔다.?고들 하니, 이 역시 아무 근거가 없는 말이다. 우리나라에 어찌 역사서가 있었겠는가? 기자조선은 당우(요순시대)및 위만조선 이전으로 구획하여 역사서를 편수하지 않은 시기에 붙여도 좋을 것이다. 한사군 4백 년간은 중국에 복속되어 있었으니, 낙랑태수가 어찌 사관을 둘 수 있었겠는가? 바로 이점이 逸事와 異聞을 반드시 중국에서 찾아야만 알 수 있는 까닭이다. 영동의 濊와 한강 이남의 韓, 개마산 동족의 沃沮는 진실로 陳壽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있었나를 알 수 있겠는가?

 

16. 가락국

살펴보건대 北史에?신라는 가라국에 附庸國이다.?하였고 ....가락은 독자적으로 중국과 교통하였고 신라는 그 부용국이었으니 삼한의 큰 나라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지 고려의 승려가 엮은 바 古記(三國遺事)만을 보고 더 이상 여러 사서를 고증해 보지 않으므로 삼한 이전은 모두 미개한 시대로 되어 버렸으니 한탄할 노릇이다.

...이 때가 과연 어느 시대인데 진한, 변한사람들이 그때까지도 알에서 태어나고 있단 말인가?

 

17. 만주벌판의 형세

무릇 요동은 천하의 큰 벌판이다. 한, 당, 명나라가 차지했을 때에는 斥候와 亭障이 천리에 뻗쳐 있었으니 그 사람들의 好惡를 알 수가 있고 요, 금, 원나라가 차지했을 때에는 이름난 도시와 큰 성들이 번듯하게 서로 연하였으니 그 사람들의 好惡를 알 수가 있다. 지금은 심양에다 盛京을 설치하고 建州에 興京을 설치하였다. 흥경은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하였으나 성경의 인사들은 내가 만나 보았다....심양은 옛 읍루국이므로 나의이 기행문을 <읍루여필>이라 부른다.

 

18. 양대박

호남은 옛 백제 땅이다. <북사>에는

-백제는 습속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시하고 겸하여 책도 좋아해서 빼어난 사람은 제법 글을 지을 줄 알고 吏事에도 능하며 점치기와 음양오행법을 안다.

하였다....왜는 백제의 속국이었고 이 속국은 감히 상국과 겨루지 못한지가 오래 되었다.

임진년(1592)에 왜가 동래를 통해 바다를 건너 쳐들어 왔는데.....이통제는 수군으로 쫒고 권원수는 육군으로 섬멸하였다. 게다가 양청계 대박은 대방의 평민으로 천여명 의병을 이끌고 운암 벌판에서 싸워 풀을 베듯 새를 잡듯 어쩌면 그렇게도 쉽게 왜병을 무찔렀던가? 관군이나 의병이나 다 옛 백제 땅의 용사요, 奇才며 검객들이었다.

 

19. 박의

朴義(1600-1653)는 호남 고창현 사람이다. 침착, 용맹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익숙하여 무과에 뽑혀 부장에 임명되었다. 인조 병자년(1636)에 병마절도사 김준룡이 근왕병을 이끌고 수원까지 갔다가 청나라 군대와조우하여 광교산에서 크게 싸웠다. 박의는 이때 준룡의 막하에 있었는데 양고리를 쏘아 죽였다. 양고리라는 자는 만주 정황기 사람인데 영원, 금주사이에서 전투를 할 때 명나라의 용맹한 장수들이 아무도 맞서지 못하였다. 여러 번 공로를 세워 품계를 뛰어넘어 公에 이르렀고 노아합적(다루가치)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전사한 뒤 무훈왕에 봉해졌다. 이는 저들과 우리 쪽에 믿을 만한 사료가 있으므로 살 펴 볼 수 있다.

...박의는 한 갓 편비로서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분투하여 곧장 전진하여 저들의 이른 바 액부대장을 쏘아 죽였다. ...청나라 사람들은 이 문제르르 꺼내는 사람이 있으면 도리어 성을 내어 놀리고 희롱한다 여기니 ...이것이 박으ㅟ의 공로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까닭이다.

...고려 때 김윤후는 처인성의 승려로 몽고의 원수 살례탑을 쏘아 죽이고 대장군에 임명되었는데 박의 같은 사람은 관직이 직동만호에 지나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를 더욱 비분해 하지만 그러나 그의 뛰어난 공로는 윤후와 같다고들 한다.

 

20. 서북지역의 목재

서북지역은 새로 짓는 고을 청사가 매우 커서 다른 道의 선화당도 그만 못하니 큰 재목이 많기 때문이다. 온 산 가득 아름드리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한데 몇 백 년을 베어낸 적이 없어서 혹은 선채로 마르기도 하고 혹은 땅에 쓰러져 썩어 간다.

만일 장진강에서 띄워 압록강으로 나가서 뗏목으로 엮어 강물을 따라 바다로 내려가면 얼마 안되어서 강화도 어구에 닿을 테고, 경강으로 끌어들이면 재목을 이루다 쓸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비단 장진강 뿐만 아니라 갑산의 허천강, 강계의 독로강이 모두 압록강으로 들어가므로 이런 수로가 있는데도 서북지역의 재목은 모두 썩은 채로 내버리니 너무도 개탄할 일이다.

...압록강 일대는 저쪽과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데 저들은 강을 이용해서 재목을 운반하지만 우리는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일은 몰라서는 안 된다.

 

21. 서해의 여러 섬

...무릇 우리나라 지형은 동북쪽은 두만강이고 서북쪽은 압록강이며 동서남 사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이 이른바 2강 3해다. 그 안쪽은 한자 한 치라도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22. 같은 시대를 사는 중국 시인들

..우리 동방은 중국과 요동 벌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발해 한 바다를 건너 있어서 이름은 외국이지만 운남, 귀주 등 여러 省과 비교해 본다면 지극히 서로 가깝다. 다만 국경으로 한계를 짓고 내외로 구별을 하였으므로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도 아득히 멀기가 천 년이나 되는 것 같아서 종종 형편없이 견문이 적으로면서도 잰 체하며 스스로 만족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평생을 농어나 귤맛을 알지 못하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앞선 시대가 아닌 나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어떤 이가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십수 년 이래 여러 동지들이 말을 타고 요동 벌판을 가로질러 연경에 노닐지 않은 이가 없다.

...뒷날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이 내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아니하였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23. 일본에 대한 이해

방문을 나가지 않고도 사방 오랑캐의 사정을 아는 것은 독서하는 이가 아니고는 할 수가 없고, 설령 독서를 하더라도 의지가 있는 인재가 아니면 또한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사대부라는 사들은 바다방비를 맡아 나가서 표류선박이 떠밀려 오면 그 을 바라보고 그들의 옷차림을 보고 말을 듣고 용모를 보고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모르고 한 번 신문을 하고는 법률 조문을 살펴 처리하고 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몽고인을 만나면 누린내가 난다고 싫어하고 만주인을 만나면 고기 먹은 냄새가 난다고 싫어하니, 아마도 몽고인들은 우리를 만나면 비린내가 나는 것일까?

 

24. 나의 어머니

아! 우리 어머니는 열일곱에 아버지께 시집오셨다. 외할아버지 이원(利原)공은 재능과 지략으로 공경(公卿)들 사이에 이름을 떨쳤는데 수천 금의 재산이 있었고, 우리 집은 대대로 선비가문이었다. 평소 이원공은 우리 어머니를 특별히 사랑하시어 혼수로 보낸 화장품이며 경대가 매우 사치스러웠다. 외할머니이신 정부인은 가르침이 엄하셔서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여자가 해야 할 노동을 배우고 익히셨다. 글씨와 편지를 잘 쓰셨지만 일찍이 자랑하는 기색이 없으셨고, 온화하고 순종하여 효도와 공경의 마음을 갖추셨니, 우리 할머니께서도 몹시도 사랑하시었다.

....외할아버지는 노년을 보내려고 남양의 백곡으로 돌아가면서 유독 우리 어머니가 서울에 계신 것을 생각하고는 종 하나를 뽑아 돈의문(서대문) 밖에다 가게를 차려주고 밑천을 대주어 살게 하였다. 그리고 약속하셨다.

?나 한테서 사람이 와서 유씨마님을 모셔갈 때 그 종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말을 먹여주어서 유씨 집안에 수고를 끼치지 말아라. 너는 지방고을의 경저리라는 것을 알테지? 경저리와 같은 일을 하면 된다.?

이로부터 우리 어머니께서 친정에 다니러 가실 때면 많은 노복들이 뜰에 줄을 지어 절을 하고 편지를 바치고는 대답을 듣고 물러갔다가 첫닭이 울면 말을 먹여 재갈을 물려 왔다. 가마를 꾸리고 짐을 싣고 하루에 일백이십 리 길을 도달하면 십여 명의 노복은 횃불을 켜고 십리 밖에까지 마중을 나왔다. 친정에 당도하면 형제들이 다 모여 기쁘게 담소하며 즐거워하여 친척 부녀자들이 이를 듣고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지금까지 아름다운 일로 전해진다.

....임신년(1752)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이때 나는 일곱 살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이보다 앞서 이미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아직 계셨는데, 몇 년만에 역시 돌아가시자 가산이 점점 몰락하여 어머니는 둘째 외숙모 김씨와 함께 지내셨다.

...나의 외가는 무(武)를 업으로 삼아서, 외숙들은 말달리고 매로 사냥을 하며 뜻과 기개를 길러 호방하였고, 아이들도 모두 복숭아나무 활에 가시나무 살을 깎아 참새를 쏘며 놓았다.

....우수(雩岫)아래 집에 도착하니 옛날의 기와집이 초가가 되어 비바람을 가리지도 못했는데, 할아버지는 해서(황해도)에 계시고 숙부와 계부는 모두 장가를 들지 않았다. 옛날 장만해 두었던 의복이며 살림살이는 거의없어졌고 성(城)서쪽에 있던 밭도 이미 주인이 바뀌었으며 물감가게의 노비들도 다 흩어져 버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태연하셨다. 얼마 안되어 경행방으로 집을 옮겼는데 경행방에는 부귀한 집들이 많아 삯바늘질을 하여 조석 끼니를 마련하셨다.

....큰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가 다 돌아가신 뒤 후손이 없어서 대신 받드는 신주가 좁은 방에 넘쳐났다. 설날이나 명절이 되면 어머니는 그게 걱정하시어 기름을 더 많이 사서 등불을 더 켜두고 바느질을 하시어 새벽종이 울리도록 잠들지 않으셨다.

.....경인년(1770)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나는 승중(承重)의 복을 입었고, 복을 벗은 다음 성균 생원이 되었는데 거룩한 밝은 시대를 만나 내각의 검서로 발탁되었다. 이루 20년 간 차례차례 여러 관청에서 벼슬하다가 포천현과 양근, 가평 두 군의 원으로 나가 임지에 부임하여 봉양하였고, 이윽고 3품에 올랐다.

....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고 이때부터 병색이 보여서 자리에 누우셨지만 여전히 억지로 일어나셔서 변소에 가시고 부축 받지 않으셨다.

....애통하도다! 어찌 차마 말로 다하겠는가? 아! 괴로움과 즐거움, 영광과 쇠락이 서로 인연이 되어 번갈아 바뀌는 것은 고정불변의 이치다. 가득차도 자랑하지 않고 모자라도 근심하지 않으며 나에게 본디 갖추어져 있는 것을 잘 닦아 저 이른바 운명을 기다리는 것은 군자에게도 어려운 일인데 우리 어머니는 잘도 하시었다. ...우리 어머니는 끝까지 잘하셨다. 그아름다운 행실은 의도적으로 힘쓰지 않고도 법도에 맞아 언제나 여자로서 행동의 본보기가 되셨다.

 

25. 역사로서의 시

시(詩)란 포괄적 의미의 역사다.

...역사가 기록하는 대상은 조정의 일에 그친다. 그러나 시가 싣는 것은 조정에서 시골까지, 천지에서 인불까지, 실제의 사실에서 허탄(虛誕)한 일까지, 자잘한 일들을 한 가지도 갖추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시에 실리는 숨은 이야기 기이한 소문에는 종종 역사가 빠뜨린 일들이 허다히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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