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물의(物議)’에 민감했던 조선조 문화

청담(靑潭) 2013. 11. 29. 16:58

 

 

서언(오늘의 한국 정치를 생각하며) 

 

  어제(2013.11.26) 감사원장 임명동의안을 새누리당이 단독 처리하였다는 이유로 오늘부터 민주당이 국회를 전면 보이콧한다고 한다. 이쯤 되면 국회가 국가와 국민을 위한 나라의 큰 기둥이 아니라 정쟁의 도구로 완전 전락되어 버리고 만다.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폐해가 뭐 별다른 것인가?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자당의 권력쟁취와 자신들의 자리보전을 우선시하며 정치에 임하면 그것이 바로 붕당의 폐해요 나쁜 표현으로 당파싸움이라 일컫게 되는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새로운 출발선상에 서 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오직 중국()만을 대국으로 섬기며 의지하다 임진란을 당하고, 400년 후에는 결국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해방이 되었으나 미·소 양 대국의 대결구도 속에서 기어이 한반도는 둘로 갈라졌고, 김일성은 영원히 용서치 못할 민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키는 죄악을 저질렀다. 오천만 동포의 생명과 삶보다는 오직 공산주의 통일만이 최선이라는 한 권력자의 오만한 역사관 앞에서 수백만의 동족이 죽어가고 다치고 가족이 헤어져야만 했다. 그 어떠한 이유로도 이해할 수도 이해하여서도 그리고 용서되어서도 아니 되는 죄악을 그는 민족통일이라는 간단한 명분으로 서슴없이 저질러 버렸다.

 

  통일은 되지 아니하고 오직 죽음과 파괴와 가난만 남았다. 이후 국가를 재건하고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남북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60년대까지는 모두가 가난했지만, 그래도 공산주의 이념으로 어느 정도는 인민이 평등하고 중공업과 지하자원이 앞선 북한이 잘살고 있었다.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는 비록 정상적인 정치행위는 아니었으나 우리 한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성계의 조선건국이 비록 무력에 의한 양위라는 정당하지 못한 형식을 빌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것과 다름 아니다. 오천년 동안 우리 백성들은 가난한 나라에 살았다. 봉건국가 정부에 온갖 세금으로 착취당하고, 탐관오리 지방관의 탐학에 빼앗기고, 양반지주에게 수탈당하며 처절한 삶을 살았던 백성들이 이제 쌀밥을 먹고 살게 되고 자식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재건운동과 새마을 운동으로 우리도 잘 살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우리 국민들의 의지와 노력과 능력은 실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그 결과는 쉽게 나타났다. 30여년이 지나자(1990년대) 중산층이 형성되고 너도 나도 꿈에 그리던 아파트에 살게 되고 상상이 안되던 자가용을 가지게 되고 꿈 같은 해외여행을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서독으로 중동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우리 동포들이 돈을 벌기 위해 피땀을 흘리던 때가 엊그제인데, 우리의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되자 이제 거꾸로 가난한 나라의 근로자들이 너도나도 일자리를 찾아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여성들은 장가 못간 나이 많은 한국남성들과 결혼하면서까지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찾아오는 세상이 되었다. 이미 공산주의는 70여년 만에(1990년 전후) 소련부터 그 운명을 다하고 80년대말 90년대 초 동구유럽의 공산국가들은 일당독재를 버리고 너도나도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하는 역사의 대 전환점이 찾아오고 말았다.

 

  북한은 쿠바와 함께 여전히 공산주의를 고집하며 일인 일당독재를 넘어 마치 국가의 정체가 왕정제인양 3대 세습까지 이어지며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일당과 일인 세습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 속에 경제는 파탄 나고 회복능력을 상실한 채 2만 5천명이 넘는 동포들이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행을 택하였고 성공하지 못한 수많은 동포들이 온갖 핍박과 고통 속에 중국등지에서 숨을 죽이며 살아가고 있다. 비통한 일이다.

 

  21세기 우리 대한민국은 이제 또 다시 새로운 미래의 역사를 창출하는 출발선상에 서 있다. 짧은 시간에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의 문턱이라는데 사실 많은 가난한 나라들은 우리를 선진국으로 보고 돈을 벌기 위해 일하러 가고 싶어 하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여성들이 시집을 오려 한다. 우리 국민 모두가 선진국처럼 잘살지는 못하지만 이만큼 복지도 자리를 잡아가면서 우리 모두 당당하고 대한민국 국민임에 큰 자부심이 넘친다. 이러한 당당함과 자부심은 경제성장에 따른 국가의 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가난한 대한민국이 220여개 국가 중 제 15위의 경제대국이 되고 10위권의 수출대국이 되고 외환보유국이 될 줄 상상이나 하였던가? 오직 금메달 하나만을 고대하던 한국이 올림픽에서 10위권을 당연히 유지하는 것이 상상이나 되었던가? 한국인이 유엔사무총이 될 줄은 또 상상이나 되었던가? 한국의 K-popTV연속극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한류가 전 세계로 흐를 줄은 상상이나 되었던가? 나는 일직이 초등학교시절부터 신문을 읽어왔고 대학이후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70년대까지는 미처 전혀 예견치도 상상치도 못하였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능력을 과시하고 월드컵까지 유치하는 저력을 전 세계에 보이며 정치는 살벌하고 시끄러워도 교육의 성장과 과학의 발전과 수출성장과 경제발전을 쉬지 않았다. 그리고 80년대의 군사권력도 민주주의투쟁으로 끝내는 종식시키고 이제는 민주주의 발전도 자타가 공인하는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 올려졌다. 그러나 민주주의 제도는 선진형임에도 일부 정치인들과 일부 국민들의 정치적 수준을 결코 그러하지 못한다. 2000년대 들어 새천년이 시작되었음에도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는 선동정치(좋은 표현으로 포퓰리즘)의 물결이 지배하는 저질 후진민주주의로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투쟁이 결코 아님에도 정치 및 사회단체 선동가들이 그렇다고 주장하면 덩달아 그렇다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어 항상 광장과 거리는 시끄럽고 시위대의 위법은 용서되어야 하는 것으로 강요되며 주변상가는 막대한 피해를 보고 경찰은 희생당해도 이는 당연시하는 이상한 법치는 그대로 유지되어 대한민국의 사회질서는 여전히 위기에 놓여 있다. 법과 질서를 무시하며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시위대는 많은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어도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있어 정당하고, 직무와 충실하다 다치는 경찰과 전경들은 직업으로 일하다 다쳤으니 모르쇠 하는 풍토가 만연하여 안타까워하거나 동정하는 정도일 뿐 조금도 바로 잡아지지 않는다. 직업이 투쟁인지 정치인으로, 사회단체회원으로 너도나도 피켓과 프랑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투쟁세력이 떠드는 소리는 요란하고 이를 걱정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먹고살기에 바쁜 평범한 시민들은 직장에서 일하고 학교에서 공부하며 그저 묵묵히 살아가기 때문이다. 무서운 저들과 차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한다. 통탄할 일이다. 정권쟁취와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고 보는 정치 선동가들은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단언한다.

 

  2002년의 미선이 효순이 사건, 2003년의 부안방폐장 사건, 2008년의 광우병 촛불시위 파동, 2010년의 4대강정비사업 반대운동(대운하는 본인도 결사반대), 2011년의 북한의 연평도 포격 불신운동, 2012년 제주해군기지 반대운동, 그리고 오늘의 대선불복운동 등을 지켜보면서 과연 그러한 반대운동들이 사실에 입각하고 과학적인 근거가 분명하고 합리적이며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하늘에 맹세코 정의롭고 바람직한 일인지 그들 선동가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제 안철수의원이 신당창당을 선언하였고, 최근의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각 당의 지지도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는 새누리당 37.9%, 안철수신당 27.3%, 민주당 12.1%으로 나오고 있어 어쩌면 제1야당인 민주당은 곧 제3당으로 전락해버릴지도 모른다. 국민들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국회무용론에 이어 국회해산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제 여야정당 및 정치인들에게 특히, 민주당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인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사안마다 무조건 반대부터 하여 논쟁을 만들어내고 확산시켜 나가고 싸우다 안 되면 장외투쟁이요, 국회 보이콧이다. 일하는 국회가 아니라 싸우는 국회를 만들어 낸다.

 

  비록 박근혜대통령의 불통과 보수강경파의 등용이 마음에 안든다 할지라도 그것은 대통령의 운영 방식이므로(다른 대통령들도 역시 그러했음을 국민들 모두 알고 있다.) 국가정책에 대한 토론과 논리적 대결에서 승리하여 국민의 지지를 받고 차후에 안철수 신당을 누르고 제1야당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 진보정권을 탄생시킬 수도 있을 텐데 도대체 무슨 정치적 속셈인지 2007년의 노무현 정권 퇴진운동마냥 끈질기게 대선불복운동을 확산시키며 급기야는 전라도 어느 못난이 신부가 의도적으로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정당시하는 발언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까지 부르짖는 막다른 상황으로까지 몰아가고 있다. 일부 정치성 짙은 성직자들과 일부 젊은 지지자들이 그러한 허무맹랑한 선동에 휩쓸린다하여 대통령이 하야하거나 대한민국이 무너지지도 않겠지만 오늘도 정치는 실종되어가고 행정은 효율성을 잃어 국가발전이 위태로워지고 있다. 통분할 일이다.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떨쳐 일어나 국민소득이 4만 달러가 되고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권력투쟁거리들이 진정한 당위성과 가치를 확보할 수 있는 것들인지 시민들은 차분히 심사숙고하여야 할 때이다.

 

  소통이 안 되는 대통령, 보수적인 정부, 모든 자리 차지하는 경상도정권이니 야당과 재야세력이 일으키고 투쟁하는 사안이면 일단 지지부터하고 보는 자신이 아닌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중국의 급부상과 군사력 확대, 일본의 우경화, 미국의 대응, 북한의 핵보유 등 급변하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의 정세는 우리에게 조금도 허튼 시간낭비를 허락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강성과 현명한 미래지향적 외교전략만이 저들의 어떤 야욕도 능히 꺾을 수 있다. 다투고 분열하면 우리는 또 다시 죽는다. 대한민국의 꿈과 희망이 사라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이미 수만 명의 국민이 탈출하여 국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존재이유조차 의심되는 북한과의 문제에 매달리며 또 다시 일어날 동족상잔의 전쟁에 북한을 지원하기위한 준비를 해온 사실이 명백한 반 국가세력인 이석기 일당이 종북이니 아니니, 진보세력의 탄압이니, 법원의 판결을 지켜보자느니 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내가 보기에 모두 정치계에서 도태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며 선동하는 무리들이 이 나라를 결코 책임질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국민들의 복지와 평화와 안녕이 최고의 가치요, 최고의 선일진대 오늘의 정치상황에서 정순우 교수의 글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크고 실로 담대하기에 크게 공감하며 이곳에 게재한다.

 

 

 

물의(物議)’에 민감했던 조선조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정순우

 

 

 

물의(物議) : 부정적인 뜻으로 쓰여 어떤 사람 또는 단체의 처사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논평하는 상태를 말한다.‘물의를 일으킨다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인다.

 

 

 

 

1. ‘물의라는 괴물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세상 사람들의 평판에 민감하다. 외부의 시선에 민감한 까닭에, 자신으로 인해 사회적 물의가 발생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물의란 여러 사람의 평판을 뜻하는 말로, ‘물론(物論)’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물의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뚜렷한 실체도 없고 나타남과 사라짐의 지점을 포착하기 힘든, 마치 유령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이 정체 모를 물의를 다루는 데 상당한 공력을 들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 괴물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천하의 재사로 꼽혔던 다산(茶山)도 이 세상의 물의앞에서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가 형인 약현(若鉉)에 대해 쓴 묘지명에는, “신유년의 화에 우리 형제 3인이 모두 기괴한 화()에 걸려서 하나는 죽고 둘은 귀양 갔다. 그런데 공은 조용하게 물의가운데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우리 문호를 보전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물의의 한가운데에 들어가면 자칫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웠던 것이 당시의 엄혹한 현실이었다.

 

이러니 당시의 지식인들은 당연히 이 종잡을 수 없는 중론(衆論)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에 부심하였다. 백호(白湖) 윤휴(尹鑴)물의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삼자(三刺)의 계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첫째는 여러 신하에게 묻는 것이고, 둘째는 여러 관리에게 묻는 것이고, 셋째는 백성들에게 물어서 몽롱한 상태의 물의를 좀 더 명료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세간에 떠도는 중론이 과연 백성들의 여론을 얼마나 적실하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으로, 오늘날 정치권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 즉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물의가 발생하면, 더 크고 강력한 또 다른 물의를 터트려 앞선 물의를 덮어 버리는 태도와는 구별된다.

 

2. 조선조 정치와 물의(物議)’

 

조선왕조실록을 펴 보면 조선조 정치인들이 야기했던 수많은 물의들이 눈길을 끈다. 정치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속성은 지금이나 예나 다름이 없는 것 같다. 또한 매 앞에 장사 없다.”라는 말처럼, 조선 시대에도 물의앞에 무너지지 않는 관료들은 없었다. 태종 대의 실록 기록에는 겁 없이 군자(軍資)에 속해 있던 양전(良田)으로 친한 사람의 척박한 전지와 바꾸고, 또 남의 양전을 흠씬 빼앗아 친한 사람에게 주었다가 사회적으로 큰 물의가 발생하고, 이내 하옥되어 영어의 몸이 된 관료의 행적이 소상하게 담겨 있다.

 

성군인 세종의 치세 기간 중에도 세간의 물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겁 없는 고위관료들이 없어지지 않았다. 세종 11(1429)의 기록에는 해주 목사로 제수된 인물이 매양 수령이 될 때마다 물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제 뜻대로 관물을 낭비하고, 오직 술 마시는 것만을 일삼으며, 권귀(權貴)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못 하는 일이 없는 자라고 혹평하는 내용이 나온다. 세간의 평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윗사람들의 비위나 맞추는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사간원 좌사간이었던 유계문(柳季聞)은 아예 국가에서 중요한 인선을 할 때에는 반드시 물의에 맞는 자를 택하여 임명할 것을 계청(啓請)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제는 정치에 물의를 적절히 이용하려는 자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였다. 정적을 억누르고 배척하는 데에 세간의 평판인 물의만큼 좋은 무기도 없었다. 말하자면 조선판 포퓰리즘의 출현이다. 누구누구는 세평이 흉흉하니 당상관으로서는 적임이 아니고, 어떤 인물은 물의가 없는 인물이니 중용해도 무방하리라는 진언이 잇달아 나타났다. 특히 사림파들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중종, 명종 대에 이르면 훈구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에서는 이 물의의 해석을 놓고 치열한 논전이 전개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측의 주장이 공의(公義)에 근거한 해석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는 난타전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사헌부에서는 필선(弼善) 아무개는 평소 물의가 있었기 때문에 지난번 필선으로 있을 때 논박 받아 체직된 경력이 있습니다.”라고 물의를 무기로 삼아 상대편을 한사코 세자시강원에서 몰아내고자 획책한다. 또 다른 진영에서는, “우후(虞候)첨사(僉使)대호군(大護軍)을 모두 실직(實職)으로 논하여 함께 당상으로 올려주었는데, ‘물의가 지금까지 그르다고 합니다.”라고 하여 물의를 무관직에 대한 견제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한다. 일견 뚜렷한 실체가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 이 물의라는 유령은 동굴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수시로 정치의 공간에 출현하여 그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물의라는 괴물은 과연 민의를 대변하고 있었는가, 아닌가? 모를 일이다.

 

3. ‘물의(物議)’, 과연 공론인가?

 

조선 후기에 들어, 정치의 공간에 유령처럼 출몰하는 물의에 대해 날카로운 창끝을 겨눈 학자가 등장하였다. 바로 우서의 저자인 유수원(柳壽垣)이다. 그는 아예 논물의(論物議)라는 글을 작심하고 썼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의 요점을 논할 때는 반드시 물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훼예 통색(毁譽通塞)이 이로부터 비롯되고, 바른 품행과 거취가 여기에 매여 있어, 세도(世道)를 유지하는 것에 큰 힘이 된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유수원은, 여론에는 일정한 공의가 들어가 있으므로 잘 살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일단 물의에도 상당히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의 영역에서 이 물의가 가져오는 부정적 영향에 더욱 주목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른바 물의라는 것은 여러 중인(衆人)들의 말인데, 중인들의 여론은 사실 공정(公正)한 경우도 있고 또 잘못된 것인 경우도 있으나, 이는 굳이 따지면 사사로운 의견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를 다스리는 데 어떻게 이 사사로운 견해에 따라야 할 이치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물의의 생성은 결코 자연발생적이고 무의지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하면서, 물의의 배후에는 그것을 만들어 내는 이른바 주론자(主論者)들이 있다고 보았다. 이 주론자들은 대부분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문벌들이거나 당시의 벌열 가문들이며, 이런 힘 있는 자들이 자의로 여론을 조작해 낸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언관의 막중한 책임을 맡은 삼사(三司)마저도 자기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등한히 버려두고, 스스로 시비를 분별하려는 노력도 포기한 채, 분주하게 주론자의 말만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무리로 보았다. 이에 따라서 소위 명류(名流)라고 하는 자들이 기껏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앉아 오직 시론(時論)이 어떠하다거나, ‘물의가 어떠하다하는 것에 변죽만 울리는 일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언론이나 지식인이나 할 것 없이 주론자들이 만들어 낸 물의를 좇아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견이 없고 자기 의사가 없이 물의를 좇아 움직이다 보니, “시비 가운데 또 새로 나온 시비가 끝이 없고 기관(機關) 가운데 또 새로 나온 기관이 무수하여 사단(事端)은 한이 없고 시끄럽게 구는 것은 끝이 없어서 조정의 체면이 말이 아닌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당론(黨論)이 생기기 이미 오래전의 폐습이라는 것이 유수원의 진단이었다. 그는 온 세상이 비난하는 것이라고 하여 다 참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며, 온 세상이 칭찬한다고 하여 모두가 다 참으로 칭찬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물의에 덜렁거리며 따라가다가는 우중 정치(愚衆政治)의 덫에 걸릴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였다.

 

4. ‘물의(物議)’가 공의(公議)가 되려면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정체모를 물의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미성년 상태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평범한 사람들은 대체로 항상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곁눈질하고, 사실상 모두 빌린 의견들만을 갖고 다닌다고 꼬집는다. 사람들은 물의를 손에 넣을 기회가 생기면 탐욕스럽게도 이것을 자기 것이라 사칭하며, 뽐내는 것에 열중한다는 것이다. 또한 가장무도회에서 복장을 대여하는 사람들이 가짜 보석들만을 내주듯 직업적인 의견 대여자, 언론들은 대개 가짜 상품들만을 내주고 있는 것이 쓸 데 없는 물의를 만드는 주범이라고도 꼬집는다.(랄프 비너) 지독한 엘리트주의자인 그의 허세가 묻어나는 독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태를 보면, 이 따끔한 비아냥거림 속에는 마냥 웃어넘길 수 없는 진실이 있다. 요컨대 본인이 스스로를 신뢰하고, 주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부질없는 물의가 사그라진다는 것이다.

 

유수원은 물의에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사사로운 원한을 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공적인 입장을 빌린 물의이다. 둘째는, 자신의 당파(黨派)를 위해 상대를 배척하려는 물의이다. 셋째는,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사의(私意)만이 횡행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가끔 공정하지 못함을 항의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공심(公心)과 공언(公言)의 물의라는 것이다. 이 세 번째 물의가 바로 참다운 물의, 공의가 될 것인데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렇게 공심과 공언에서 나온 물의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오로지 사사로운 원한이나 당파를 위한 물의만이 나날이 성해져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 유수원의 지적이다. 그는 물의가 참된 공의가 되려면 우선 정치문화와 정치시스템의 개혁부터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정치에서 물론(物論)을 중시하는 이유는 관제(官制)가 허술하고 관리의 임명에 법도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으로 신복(信服)하지 않고, 신복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서 이른바 물의라는 것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만약 유수원이 오늘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이 온갖 치졸한 물의를 목도한다면 과연 어떤 처방을 제시해줄까? 과연 처방을 내릴 수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