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호적

청담(靑潭) 2013. 12. 1. 23:43

 

 

호적(戶籍)

 

1606-1923

 

호구기록으로 본 조선의 문화사

손병규 지음

●서언

 

학교에 다니면서 『호적등본』,『호적초본』을 면사무소에서 떼어다가 제출한 기억들이 있다. 그만큼 『주민등록조본』,『주민등록등본』과 함께 나의 신분을 보장해주는 가장 중요한 서류로 각인되어 있었다. ?호적도 없는 놈?이라거나, ?호적에서 파버린다?는 말이 있듯이 그 만큼 호적은 한 인간의 존재가치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2008년 1월 1일부터 호주제가 폐지되고 『가족관계등록부』가 만들어져 필요에 가족관계등록부에는 기본 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입양관계증명서, 친양자관계증명서 등을 떼면 된다. 마침, 이제는 폐지되었지만 우리의 호적의 역사에 대한 연구서적이 있어 일고 간단히 주요한 내용만 정리해 보았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 정의

2005년 3월 2일 민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와 같은 달 31일 법률 제7427호의 공포 과정을 거쳐 호주제를 폐지함.

 

2. 개설

호주제도는 호주를 중심으로 한 가(家) 구성, 호주권(戶主權), 호주승계에 대한 규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가족법에 있어 양성평등과 민주적 가족법을 구현하기 위한 가족법 개정운동의 결과 1977년·1990년·2002년에 부분적 개정이 이루어졌고, 2005년에 이르러 마침내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개정안이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3. 역사적 배경

호주제도는 한국사회의 가부장 의식과 악습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여성차별적 제도라는 비판 끝에 결국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폐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제시된 비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호주제는 가족 구성원을 호주에게 종속시켜 개인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부정하고 일률적으로 순위를 정함으로써 평등한 가족관계를 해쳤다. 특히 여성은 혼인 전에는 아버지가 호주인 호적에, 결혼하면 남편이 호주인 호적에, 남편이 사망하면 아들이 호주인 호적에 올라야 하는 예속적인 존재로 규정되었다.

또한 호주제는 호주승계 순위를 아들→딸(미혼)→처→어머니→며느리 순으로 정해 놓아 아들 선호를 조장하였다. 아들을 1순위로 하는 호주승계제도는 아들이 딸보다 더 중요하다는 법 감정이 내재된 것으로써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한다는 남아선호사상을 부추겼다.

부가(父家) 입적과 부성(父性) 강제 계승을 통한 가족제도 유지는 다양해지는 가족형태를 반영하지 못해 한 부모 가족, 재혼 가족을 비정상적인 가족으로 만들었다.

이상의 문제점들에 근거하여 호주제도의 위헌적·반인권적 성격, 민주적 기본질서 위반, 제도와 현실의 부조화, 그리고 한국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제도의 후진성 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지속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폐지되었다.

 

4. 경과

1999년 5월 여성단체연합 호주제폐지운동본부의 발족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같은 해 11월 5일에는 유엔 인권이사회의 호주제 폐지 권고 결의도 발표되었다. 2000년 9월 22일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가 발족하여, 호주제 폐지 국회 청원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11월 28일에는 호주제 1차 위헌소송이 있었다. 2003년 1월 9일 여성부는 호주제 폐지 및 ‘가족별 호적편제’ 도입 방안을 추진하였고, 같은 해 2월 16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호주제 폐지를 ‘12대 국정과제’로 선정하였다. 2003년 9월 4일 법무부는 호주제 폐지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였고, 같은 해 11월 20일 헌법재판소의 호주제 첫 공개변론이 시작되었다. 헌법재판소는 5차에 걸친 공개변론 끝에, 2월 3일 최종적으로 호주제 규정 민법 781조 1항 및 778조의 헌법불합치를 결정하였다.

 

5. 의의와 평가

호주제도는 호주와 다른 가족구성원간의 관계를 종적이고 권위적인 관례로 규율함으로써 남녀차별을 조장하고 가족구성원들의 화합과 복리를 저해하는 전근대적 가족 관념을 형성하여 왔다. 따라서 호주제 폐지는 한국사회의 남녀평등과 민주화의 진전을 의미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주요 내용>

 

●戶籍은 정해진 양식에 따라 조사하여 작성한 국가의 공문서로서 어떠한 서술도 하지 않은 계량사료이다. 조선시대의 호적은 3년에 한 번씩 작성된다.

●戶主制란 한 가족의 대표를 호주로 세워서 그에게 가족 구성원의 入籍과 除籍에관한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를 말한다. 당연히 이제도에는 하나의 가족을 戶로 묶어서 공적부에 기록하는 戶籍制度가 전제되어 있다.

새 민법호주계승에 관한 조항을 삭제하고, 배우자의 부모형제를 가족의 범위에 포함하며, 자녀가 어머니나 새아버지의 성씨를 따르거나 양자를 친자로 등록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주요내용이다.

家父長制란 가족 가운에 남성 연장자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제도이다. 남편이 아내에 대하여 아버지가 자식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며 제도로써 이 점을 인정한다.

 

 

●제1부 호적을 찾아서

 

●호적은 개별 호구를 지역단위로 묶어서 하나의 장부로 작성한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에는 <守護人煙戶>330家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 고구려는 왕릉을 지키는 데 필요한 인원을 지역마다 수 호씩 배정하였다. 여기서 煙이란 한자는 굴뚝을 위미하는데 원칙적으로 공동취사를 행하는 가족을 대상으로 戶가 구성됨을 말한다.

●고려의 兩班은 문관과 무관 양 반열에 선 관직자를 말하며, 鄕吏는 향촌에 거주하면서 지역의 통치, 재정업무를 수행하는 관리를 말한다.

四祖란 부, 조, 증조, 외조를 말한다.

●조선초기의 호적은 고려시대의 호적과 같이 족보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호적의 양식도 고려의호적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호의 대표자를 戶主라 불렀고 조선후기에는 戶首등으로도 불렀으나 主戶가 공식적인 호칭이다.

●호적대장은 면별 호적중초를 지방관청으로 모아서 새롭게 하나의 책자로 필사하여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907년부터 작성된 호적을 <광무호적>이라하며 <신식호적>이라고도 하고 통감부가 1909년부터 시행한 호적은 <民籍>이라 한다. 1920년대 이후의 호적으로 정착된다.

●군역자의 자제들이 鄕校에 들어오면서부터 양반자제들은 사설교육기관인 書院으로 옮겨갔다.

●지방관청 산하에 지방의 행정 및 재정실무를 담당하는 향리들의 조직체인 作廳이 있고 首領의 자문기관으로서 양반들이 조직한 鄕廳이 있다. 이들이 수령과 더불어 지방행정통치 수행의 3대 구성요소이다. 鄕案에 오른 양반들의 자치조직은 鄕廳에 鄕正(座首), 別監 등의 鄕任을 출원하여 실질적으로 지방통치에 관여하였다. 향교에 鄕案堂이 있고 이곳에 향안과 함께 관공문서인 戶籍臺帳이 보관되어 있었다.

 

 

●제2부 조선의 주민등록

 

호적은 지역주민을 등재한 주민등록이며 지역 단위로 호구수를 조정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3년에 한번 치르는 정기시험인 식년시

에는 향촌에서 보는 초시(향시)가 있었다. 여기에 합격한 자를 生員이라 하고 이듬해에 성균관에서 보는 복시에 응시할 자격을 준다. 복시에 합격한 자를 進士라 하는데 진사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주고 실적인 관원으로 등용하기도 한다. 소과에 합격한 진사는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가진다.

▶내용이 바르지 않다. 소과는 생원과와 진사과가 있어 초시를 거쳐 복시에 합격하면 각각 생원과 진사가 되고 이들에게는 성균관 입학자격과 동시에 대과에 응시할 자격도 주어진다.

 

●조선시대의 호적은 등재시기가 늦을 뿐, 오늘날의 호적이 아니라 주민등록에 가까운 문서이다.

●3년마다 호적을 새로 만들기 때문에 한번 호적을 올리는 데에는 비용이 들기 마련이다. 주민이 정규적으로 내는 세금에서 일부 보조되기는 하지만, 이 비용은 원칙적으로 호적에 등재되는 호가 부담하여야 했다.

호적대장에는 면리마다 통호를 설정하여 호마다 구성원을 등재한 다음, 면 단위로 호구의 총수를 기재한다.

●20세기 전반에 출생한 자들 가운데세도 3-5촌 이내에서 계자를 세운 경우가 전체 계자의 70%를 넘어선다.

일가는 일정 분파의 모든 후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고조를 동일한 선조로 하는 8촌 이내 좁은 범위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다.

●양인 첩에게서 낳은 자식을 <庶子女>라 하고, 賤人 즉 婢 출신 첩에게서 낳은 자식을 <孼자녀>라 하며, 이들 모두를 庶孼이라 통칭한다.

●과부로서 집안일을 주관하더라도 아들이 장성하면 아들을 주호로 삼는다. 19세기에 와서 호적대장상 여성주호의 비율은 급기야 17세기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국가가 호의 대표자를 파악하는 것은 그 자가 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역사의 전면에 女性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근대사회가 되어도 여성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가부장제란 <家>라는 공동체의 구성원 가운데 남성연장자가 가부장으로서 권위를 갖는 제도를 일컫는다.

●불평등하게 배분된 가족 내부의 권력관계로 말미암아 여성은 어떠한 사회조직에서도 전면적인 활동을 차단당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제3부 호적의 직역

 

●국가적인 신분규정인 직역과 사회적인 신분이라 할 수 있는 사회계층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괴리되어 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국역은 원칙적으로 양인에게 부과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노비에게도 국역이 부과되었다.

●鄕中이란 지방양반들이 자치단체에서 결정권을 갖는 회의체를 말한다. 이들은 지역의 풍속을 바로 세운다는 명분으로 鄕約을 제정한다. 군현 전체의 양반들을 대표하는 조직을 鄕會라 한다. 향회의 구성원들은 정기적 선출과정을 거쳐 鄕案에 입록된다. 그래서 향회는 향안조직으로 불린다. 수령을 보좌하기 위해 (儒)鄕所가 조직되는데 鄕廳이라고도 한다. 향회는 향청을 통해 지방행정과 관련된 여러 가지 官事에 간여하였다.

●身役은 본래 군사기관의 병사로서 부병하는 데서 유래하므로 軍役이라 통칭하기도 한다. 조선왕조 초기에는 중아이나 변방에서 番을 서는 정병에게 남은 가족들의 경제생활을 보조할 奉足을 지급하였다. 16세기에는 이 봉족을 대신하여 정병의 부병을 돕거나 소속기관의 재원을 충당할 保人이 성립하였다.

●지방관청 소재지를 邑治라 하며, 향촌의 양반들이 거주하는 곳을 外村이라 한다.

●향촌 양반들의 모임인 향회의 규칙 가운데 <사사로이 관아의 일에 간섭하는 자>에 대한 벌칙조항이 있다.

●지방관청 주변에는 관아의 행정, 치안, 재정사무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는 자들이 살았다. 人吏(鄕吏)와 將校가 있다. 그리고 관노비가 있다.

●토지세를 부과하여 국고수입으로 삼는 공전에 대해 토지세를 면제받는 대신에 직역이나 개별 기관이 징수권을 갖는 토지를 사전이라 한다.

●지속적으로 지역의 실무자들을 감시하고 견제할 세력이 필요하였다. 지방양반들이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이 주도하는 향청은 수령을 보좌하는 고문기관일 뿐만 아니라 지방관청의 실무자인 향리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향리들이 잡비의 운영을 담당하였으며, 그 일부를 자신들의 수당으로 돌렸다. .....지방통치 및 징수업무 수행과정에서 향리의 비정규적인 재원징수는 어느 정도 묵인되었다. 향리들의 업무수행을 향역으로 규정하는 대신에 업무활동에 대한 보수를 자체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국고수입을 절약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경주 옥산서원에는 서원이 창설될 당시부터 지방관이 임의로 인력을 지급하고 있었다.....전란 직후에는 지급된 인원이 200명을 넘었다고 한다. ....17세기 말까지 서원은 지방관청및 지방군영과 원속을 둘러싸고 경합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노비와 전답을 상속하는 문서를 일반적으로 分財記라 한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적자녀에 한해서 남녀균분으로 재산을 상속하되 제사 모시는 장자에게 각자에게 배분되는 상속량의 5분의 1을 더해주는 것이 원칙이다.

노비가 전답과 같이 개인에게 소유되고 상속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더구나 노비의 자식들은 노비 자신의 상전에게 소유권이 있었다. 17세기까지의 법제적 규정으로는 一賤卽賤이라 하여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이라도 천인, 즉 奴나 婢이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되었다. 단, 상전이 서로 다른 노와 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어미의 상전에게 귀속되었다....그런데 천인 남성, 즉 노와 양인 여성사이에서 출생한 자식은 천인인 아비의 상전에게 귀속된다. 특히 이경우의 자식들을 良妻所生이라 부른다.

17세기 이후에는 從母法에 따라 노비의 혼인관계 여하를 불문하고 출생자는 어미의 신분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아비가 천인이어도 어미가 양인이면 그 소생은 양인으로서 군역대상자가 되었다.

●호적에서는 상전의 호에서 나와 다른 호에 적을 두는 노비들을 外擧奴婢라 하고, 상전의 호에 적을 둔 노비들을 率去奴婢라 한다.

●60세 이상이면 상속대상에서 제외되었던 늙은 노비들은 老除라 하여 납속을 하지 않고도 노비의 역을 면제 받았다.

양반이라는 계층은 지역사회의 인식에 기초하여 설정되는 것으로, 전국규모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지역의 양반이 저 지역에서도 반드시 양반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적으로 법제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계층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양반가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야만 했다. 그것은 일방적인 권력행사나 경제력만으로 이룰 수 없었다.

 

 

●제4부 호적의 변화와 가족

●조선시대, 대한제국기, 식민지 초기를 거치며 호적정책이 변화한다.

●조선시대의 호적장부는 개별 인구의 변동을 그때마다 수시로 기록하는 번거로움을 감당하지 못한다. 단지 3년마다 그 동안의 변동사항을 포함시켜 일제히 호구를 재편할 뿐이다.

●태조 4년(1395) 전국규모 호구수는 15만 3,403호, 32만 2,746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때(1420년)에는 22만 호, 80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종38년(1543)에는 83만 6,669호, 416만 2,021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대략 1,0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양란 후 1693년에는 154만 7,237호, 704만 5,115명으로 기록한다.

●대한제국 내부에서 조사한 1906년도 호구수는 138만 4,493호, 579만 3,576명이었으나, 1907년 경무고문부에서 조사한 호구수는 233만 3,987호, 978만 1,671명이었다. 1909년 조사로는 274만 2,263호, 1,293만 4,282명이고 1923년에는 호구수가 328만 2,792호, 1,744만 6,913명이 되었다.

호적은 현재 인구에 대한 기록이며 족보는 과거 인구에 대한 기록이다. 호적장부는 실재하는 주민을 호 단위로 기록한 주민등록 형태를 띠고 있다. 족보는 혼인및 양자관계로 형성되는 가족이 동일한 부계선조로부터 계승되는 상황을 계보로 기록하였다.

●족보라는 물적 증거에 기초하여 동족결합을 시도함에 따라 작게는 가부장제의 가족에서, 크게는 동성동본을 일가의 혈연으로 여기는 대동인식이 형성되었다. 대동보라는 족보명은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중국 漢式 성씨를 쓰게 된 것은 빨라야 삼국시대부터이다.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중국역사서에 쓰인 <신라국왕 김진홍>이 최고이다. 왕족이 성을 쓰기 시작하고, 이것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자, 왕족과 혼인관계에 있는 상층 귀족들 사이에 성씨사용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름 앞에 성을 쓰는 형식에 맞추어 고유한 성씨를 창출하기도 하고 중국에서 사용하는 성씨를 따오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성씨가 지배층 일반에 확산된 것은 고려왕조 들어서이다.

고려시대에는 결혼하여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처가에서 생활하는 서류부가의 결혼형태가 일반화되어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지속적으로 그 흔적이 나타난다. 자식들에 대한 재산상속은 조선중기에 이르도록 남녀균분으로 행해졌으니 딸자식을 멀리 시집보내도 시가에서 기가 죽어지내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평민들에게 동성동본 혼인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전국규모로 동성동본을 같은 혈연으로 인식하고 선조로부터 동일한 세대의 이름자에 같은 항렬을 쓰기 시작하는 19세기 후반 이후에야 동성동본 금혼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었을 뿐이다.

●16세기 이후 족보를 처음 만드는 성씨들이 증가하여 18세기에 많은 동성동본 성씨들이 족보를 처음으로 편찬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오래전에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서로 연락이 끊어진 계파는 족보에 등재되기 어려웠다.

●족보편찬이 성행하기 시작하는 18세기부터 조선사회에도 중국과 같은 종법질서가 일반화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종법질서는 혼인으로 형성되는 가족을 동일지역, 동일계층의 사회집단으로 결집하기 위한 이념에 지나지 않았다.

●종법질서에 기초한 부계혈연의 결집이 강조되는 것은 근대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오랜 전통으로 인식되던 많은 것들이 사실 그리 오래되거나 낡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호적에 가족을 기록하는 틀은 중국 고대사회에서 연유하여 한국 고대사회에 적용되고 고려시대에 널리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호적의 호는 한 쌍의 부부와 미혼의 자녀들로 구성된 단혼가족을 기본단위로 하지만, 그 가족에 부수적이고 종속적인 구성원들을 호 구성원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經國大典의 戶口式에는 첫 번째로 등재되는 자를 戶의 대표자로 간주하여 主戶로통칭하며 주호 부부에게는 본관과 사조를 기재한다....또한 처에게 氏 호칭을 쓰는 것만 제시하고 기타 서민층 이하의 여성칭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조선초기에는 정군의 군역자가 부병하였을 때 남은 가족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하여 정군호의 가계를 돕도록 奉足울 책정하여 주었다. 그러나 16세기경부터 이들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정군이나 소속기관에 軍布를 납부하게 되면서 保人으로 불렸다. 17세기에 보인은 각각 독립호를 구성하여 호적에 올랐다.

●조선전기에는 아들과 딸을 구분하지 않고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하였으며, 18세기 초까지도 이러한 자녀균분상속이 존재하였다. 17세기에 아들과 딸을 차등분배하는 재산상속이 일반화되기는 하였으나 딸의 시가로부터 항의가 계속되어 쉽사시 상속문화가 바뀌지는 않았다.

●족보는 부계로 연결되는 가족의 계승과 혼인관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계층적으로 연대하는 근거가 된다. 혼인관계를 설정할 때 족보에 근거하여 양가의 사회적 위상을 확인하는 것이다. 가계계승은 부모의 사회적 위상을 계승하는 일이었다.

●모든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은 각자에게 가족형성에 드는 최소한의 경제적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더구나 장남이 부모의 사회적 위상을 확실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형제․자매와 방계가족들이 동일한 계층 내에서 혼인하고 동일한 사회적 위상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도 높다고 할 수 있다. 장자우대 재산상속은 이렇듯 가족을 재생산하고 가족의 사회적 위상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분산적인 재산상속은 자식들이 혼인하여 독자적으로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치소한의 조치이지만, 가산의 세분화가 반복 진행되면 장자 외의 형제들과 그 후손들은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고 독립된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가족이 분화하는 과정에서 가족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거나 혼인과 가족형성조차 어려운 사태를 극복하는 방안이 바로 系子의 설정이다. 계자는 선조의 제사를 명분으로 하는 계보를 승계할 뿐만 아니라 가계의 재산과 사회적 위상을 상속받는다. 계자는 차남이하의 형제로서 다른 가계의 장남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 가계의 재산경영권을 가지게 된다. 친형제들의 입장에서도 형제의 수가 줄어 아버지로부터 배분받을 재산의 양이 증가한다. 여기서 장자를 우대하는 분산적인 재산 상속의 약점이 완화될 수 있다.

日本은 주로 장자가 이에(家)를 단독으로 상속받는다. 이는 모든 가산과 가족에 대한 감독권을 물려받는 것으로, 家督相續이라고도 한다. 나머지 형제들은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어려워 끝내 혼인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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