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문견록, 바다밖의 넒은 세상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제주 르포
정운경(1699 - 1753) 지음
정민 옮김
서설
●1731년 9월, 정운경은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정필영을 따라 제주도로 건너온다. 그는 이곳에 머물며 딱히 할 일이 없으므로 이 낯설고 물선 땅의 문화와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여 기록으로 남길 작정을 했다.
막상 제주에 와서 보니 이곳 백ㄷ성 가운데 뜻밖에 일본과 대만은 물로, 멀리 베트남까지 떠내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바깥세상의 소식이 궁금하여 표류민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을 차례차례 만났다. 그는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또 섬을 일주하고 한라산을 등반했다. 여행에 앞서 이전에 제주를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을 꼼꼼히 읽고 주제별로 편집하여 제주의 인문지리적 특징들을 정리했다.
●탐라견문록에는 해외표류가 13건, 1건은 국내표류다. 해외표류는 안남국이 1건, 대만이 2건, 일본이 9건, 유구국이 1건등이다.
●표류민들은 예외 없이 제주도사람임을 숨기려 한다. 이는 1612년에 제주로 표착해 온 유구국 태자가 탄 상선을 제주목사 이기빈과 판관 문희현 등이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그들을 죽인 사건의 여파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이 얼마나 국제관례에 무지하고 해외정보에 어두웠는지 알 수 있다.
●표류지점은 대부분 추자도 근해였다.
●정약용의 글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에 표류하면 일본인들이 매번 새로 배를 만들어서 돌려보내주었는데, 배의 제도가 몹시 정밀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우리나라에 도착하는 즉시 그것을 부수어서 일본의 방법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다산은 상대의 좋은 점조차 배우려 하지 않는 조선인들의 편협한 시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탐라문견록
1. 1687년 조천관 주민 고상영의 안남국 표류기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하다가 물을 맘껏 마신 세 사람은 모두 마치 술에 어리 취해 혼절한 것처럼 인사불성이 되었다.
...이들은 잇달아 병으로 죽었다.
○21명은 중국상인을 따라 중국을 거쳐 1688년 12월에 제주에 돌아왔다. 안남국에서는 우리 표류민들을 돌려보내며 편지를 보내며 답신을 선주에게 교부하여 받아보고 싶은 뜻을 전하고 있다. 표류민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엿볼 수 있다.
2. 1729년 신촌 사람 윤도성의 대만 표류기
●9월 초8일(표류 20일)에 큰 선박 두 척이 돛응ㄹ 펼친 채 우리 배를 스쳐 갔다. 우리는 일제히 소리치며 목숨을 구해달라고 했으나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복색을 보니 중국 배였다.
●다음해 5월 20일에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다.
3. 1679년 관노 우빈의 일본 취방도 표류기
●통사가 말한다.
“내 할아버지는 본래 경상도에 거주하던 백성이었다. 임진년 난리 때 포로로 왔다. 같이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아주 많아 한곳에서 함께 살았다. 도망갈까 염려하여 나가서장사하지 못하게 하고 도자기 빗는 것만 허락하여 먹고 살게했다. 마을이름은 옹점이라 한다. ....지금까지 조선말이 전수된 것은 온 마을이 말을 바꾸지 않았고, 제사때는 조선의 의복을 입고, 평소에도 망건과 상투, 패랭이를 하여 옛 습속을 따랐기 때문이다. 왜도 그것을 금하지 않는다.”
3. 1698년 성안 백성 강두추·고수경의 일본 옥구도 표류기
●산천포 통사가 말했다.
“ 포로로 잡혀온 사람의 자손이 지금 수천 호에 이릅니다. 선대로부터 서로 전하여 집 안에서는 조선말을 씁니다.”
●왜의 법이 대마도의 조선통사 한 사람을 교대로 번을 세워 장기도에 머물러 있게 하다가, 만약 조선 사람이 표류해 오면, 그들에게 접대케 했다.
●통사가 말한다.
“ 일본의 법으로 말하면 도주의 자리가 자손에게 전해져서 재물이 남아돌아 넉넉하므로 백성을 침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아주 편안합니다. 조선은 외관이 3년마다 한 번씩 교체되니, 빈한한 양반이 요행이 100리 고을의 수령이 되면 온통 자손의 먹고살 도리에만 마음을 쏟아 과외로 징수하여 거두어 절제함이 없습니다. 이런 법이 좋습니까?”
4. 북포백성 김구남·부차웅의 유구국 표류기
●2월초 9일, 이들이 물건을 팔려고 배로 떠났다. 동행은 모두9명이었다. 추자도를 지나는데 동북풍이 크게 일어서 키가 다 부러졌다. 배는 이미 진도 서쪽 바다로 벗어났다.
●우리 가운데 글을 아는 자가 없었으므로 알 수가 없었다. ...<언해천자문>이 있어 꺼내 주니 저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저들이 손으로 하늘천자를 짚으며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우리 음으로 이를 말했다. 다른 글자를 짚으면 또 우리 음으로 불렀다. 이에 서로 큰 소리로 떠들며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 말을 배운 뒤에 그 말을 생각하며 말했다.
“중국의 음과 한가지다.”
그러자 그들이 ‘고려! 고려!’하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는 고려가조선의 옛 이름인줄 몰랐다.
●만약 이름이 난징 ▶한 번만 죄인의 명부에 오르면 관가에서 비록 형벌을 시행하지 않더라도 부모와 친족들이 모두 내쳐서 사람숫자에 꼽지 않는다.
○표류과정
1726년 2월 9일 표류 ▶ 50여일 후 유구의 어느 섬에 도착 ▶ 왕도에서 70-80여일 ▶11월 9일 중국으로 출발 ▶1727년 1월 27일 복건성(푸젠성) 천해진 도착. 10월초 복건 출발 ▶ 항저우 ▶쑤저우 ▶ 난징 ▶ 양저우 ▶ 2월 9일 베이징 도착 ▶동지사 행렬을 따라 귀국, 1728년 4월 18일 제주도착
5. 1704년 관노 산해의 일본 양구도 표류기
●산천포에 닿았다. 포구근처의 가옥을 보니, 문이 모두 물가를 향해 있었다. 한 사람이 문앞에 서서 물결속을 가만히 살피더니, 허리 사이를 더듬어 그물을 꺼내 던져서 한자 남짓 되는 고기 한 마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그물을 걷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통사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고기 한 마리만 잡고 다시 그물을 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집안 식구를 헤아려서 한 끼로 충분하므로 그만두는 것이오.”
“어째서 한꺼번에 많이 잡아두고 부엌에 태워두고 여러 날 먹기를 꾀하지 않는 것이오?”
“애를 써서 부엌에 채워두면 상해서 먹을 수가 없소. 물에다 놓아두고 필요할 때 잡으면 힘도 덜 들고 음식도 낭비되지 않으며, 물고기가 줄어들지 않게 되오.”
하루는 대광주리를 짊어지고 면화를 파는 자가 있었다. 서로 교역하는데 면화의 무게를 달지 않고 돈도 세지 않았다. 통사에게 묻자 이렇게 말했다.
“정한 가격이 있어 서로 속이지 않기 때문이오.”
6. 1729년 도근천 주민 고완의 일본 오도 표류기
●1729년(영조 5) 9월 그믐날, 도근천에 사는 주민 고완이 배를 타고 바다가운데에 이르렀다. 그때 갑자기 고래가 배를 등에 지니, 배가 기우뚱하여 몹시 위태로웠다. 그러다가 키의 끝 부분이 고래 몸뚱이에 부딪치자 고래가 놀라서 꼬리로 물결을 치더니 몸을 잠그고 가버렸다. 그 때문에 파도가 소용돌이쳐서 사면에서 무너져 내리니, 배가 갑자기 빙빙 돌다가 한참 만에 가라앉았다.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했다. 잠시 후 서북풍이 크게 일어나더니 배를 몰아 동쪽 바다로 떠내려갔다.
영해기문
●장수한 노인이 많고 도적이 없다. 사투리는 알아듣기 어렵다.<지지)
●세 고을 모두 한라산 기슭에 있다. 평지는 밭을 갈만한 땅이 반 이랑도 없어, 마치 물고기 배를 발라낸 것 같다. <풍토록>
●조공하는 배나 장삿배가 그 가운데 잇따르는데, 표류하여 침몰하는 것이 열에 대여섯입니다. ...여염의 사이에는 여자가 남자수보다 세배는 많지요. ...부모된 사람이 딸을 낳으면 기뻐하며 ‘요녀석이 내게 효도하고 잘 봉양해 주겠지.’하고, 아들을 낳으면 모두 ‘ 이 물건은 내 새끼가 아니라 고래나 악어의 밥이다.’라고 합니다. <표해록>
●백록담 북쪽 모서리에는 단이 있다. 분읍에서 보통 때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다. <남사록>
순해록
●흙구덩이를 파서 비르 ㄹ받아 마시는 자가 반이 넘는다.오직 이곳 높은 목에서만 활수가 난다.
해산잡지
●해마다 기근이 들어 백성 먹이기가 극히 어렵다. 육지 사람이 하루 먹을 양식을 2-3일에 나누어 먹는다. ...땅에 맞는 목식이라고는 조와 보리와 메밀 등 몇 종류뿐이다.
●뽕나무가 있어도 누에는 치지 않는다. 면포도 사서 쓰므로 매우 귀하다. 아녀자들은 옷감 짜는 것이 무슨 일인지조차 모른다.
●전복은 이문이 많이 남는다. 그래서 물질하는 여자라야 능히 신랑감을 고를 수 있다.
●거주하는 백성 중에 오래 산 사람이 많다. 이때는 108세 된 이도 있었다. 70세나 80세 먹은 사람도 능히 가래를 잡고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대개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다 보니 먹는 것이라고는 풀뿌리뿐이고, 옷은 몸을 가리지 못한다. 마을 집에는 온돌이 없다. 다만 몇 간의 집을 만들어 놓고 사방에 벽을 세워 바라만 막는다. 중앙에 흙난로를 설치해 불을 땐다.
●세간의 일체기교와 이해를 따지는 일은 듣도 보도 못한지라
수고롭게 일하고 쉰다. 편안하게 만족하니 마음 쓸 데가 없다. 그래서 능히 그 삶을 보전하여 늙어도 쇠하지 않는다.
탐라귤보
●상품 5종
유감 2. 대귤 3. 동정귤 4. 당유자 5. 청귤
●중품 5종
당금귤 2. 감자 3. 소귤 4. 왜귤 5. 금귤
●하품 5종
등자귤 2. 석금귤 3. 신귤 4. 유자 5. 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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