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정약용과 황상 - 삶을 바꾼 만남

청담(靑潭) 2014. 6. 28. 17:05

 

 

삶을 바꾼 만남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정민 지음

문학동네

 

읽고 나서

무지하게 재미있는 책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일생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는 터이요,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도 한국사시간에 실학에서 배우고, 또는 선생과 관련한 수많은 글을 통해서 다들 피상적으로는 잘 파악하고 있다. 그 만큼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학자로, 저술가로, 유학자로, 천주교를 믿은 선각자로, 강진유배생활 18년으로 널리 알려지고 존경의 대상인 분이다. 다산이 태어난 두물머리 마재도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선생이 11년간 살았던 강진의 다산초당도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나 역시 마재에 두 번, 다산초당은 네 번 찾았다.

내가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손꼽을 때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과 김구선생과 안중근 의사요, 한 분을 더하여 정약용 선생을 정한 것은 단지 실학자나 개혁가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훌륭한 인품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던 때문인데 40여 년 전만 해도 정약용선생에 대한 연구나 저서가 그리 많지 않아 일반사람들에게 그리 크게 부각되지는 못했던 시절이다. 이 책은 다산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직접 쓴 시와 문장 그리고 서신 등의 자료를 제시하며 집필되었다. 이제 이 책을 통하여 선생의 고난의 젊은 시절과, 18년 강진 시절의 모습과, 제자인 황상과의 뜨거운 정 나눔과, 고향인 마재에서의 마지막 고된 18년의 삶을 생생하게 엿 볼 수 있게 되었다. 또 이 책을 통하여 다산의 인간상을 다 그려볼 수 있게 된 듯하여 기쁘기 한량없지만, 덧붙여 다산의 한시와 행서글씨의 뛰어남을 발견할 수 있어서 또한 기쁨이 크다. 이런 기쁨을 선사하신 한양대 정민교수에게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감사드리고 이 책을 구해준 나의 딸 이승원 대리도 고맙기 그지없다. 사랑하는 나의 딸을 생각하면서 간단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귀양 이전의 생애

그는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음사(蔭仕)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삼세(三世)가 포의(布衣 : 벼슬이 없는 선비)로 세상을 떠났으니, 비록 양반이며 그 이전까지는 대대로 벼슬을 했지만, 그의 집안은 당시로서는 권세와 별로 가까운 처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의 생애는 대략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때마침 이 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李家煥)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李承薰)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약용이 어린 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두 번째 단계는, 1783년 그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던 때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이 때 ≪대학 大學≫과 ≪중용 中庸≫ 등의 경전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1789년에는 마침내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이벽(李檗)·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입교 후 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입교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1791년의 일이다. 이후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이 때마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년의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함으로써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다.

 

 

주요 등장인물

●정약용(1762-1836) 75세

●황 상(1788-1870) 83세

●정학연(1783-1859) 77세

●초 의(1786-1866) 81세

●김정희(1786-1856) 71세

 

모두 고희를 넘겼다. 평균수명이 45세정도인 시대에 모두 장수한 것은 이들이 모두 양반이라서 잘 먹고 잘 살아서만이 절대 아니다. 예술(시, 그림 등)을 사랑하고 자연을 벗 삼으며, 욕심을 적게 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장수한다. 오늘날 나이로는 다들 90을 넘겼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아! 과골삼천

다산이 열다섯 살 황상에게 三勤戒를 가르친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

황상이 踝骨三穿(과골삼천)을 말한다.

“ 우리선생님은 복사뼈에 구멍이 세 번 나도록 공부하고 또 공부하셨다.”

 

 

동문 밖 주막집

○1801년 11월, 나주 율정에서 형님과 헤어진 다산은 150여리를 더 걷고서야 서문으로 들어섰다. ...주막집에서 머무르게 된다. 이곳이 四宜齋이다.

 

 

60년간 새긴 말씀

○1802년 10월, 다산은 주막집 봉놋방에 작은 서당을 열었다.

 

 

사의재와 읍중제자

○처음 왔을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문을 부수고 담장을 헐면서 편안히 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文心慧竇를 어찌 열까?

○문심은 글자 속에 깃든 뜻과 정신이고 혜두는 슬기구멍이다.

○아이가 글을 읽는 것이 대개 9년이다. 여덟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가 그때다. ....실제로는 열두 살부터 열네 살까지 3년간 독서한다.

※다산은 아직 어린 시절은 맛을 모르고 오늘날 중학생 시기가 되어야 독서의 맛을 안다고 보았다. 오늘날 영특한 초등학생들은 벌써 우주만물과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 시작한다고 한다.

○조선의 학동들이면 누구나 읽는 『통감절요』는 중국의 일개 시골의원이자 훈장에 불과한 강지가 엮은 책이다. 그런 책을 온 조선천지가 2백년 간 육경처럼 받들어 이 책만 읽게 했다. 해괴하다. 다산은 이어지는 글에서 박제가가 중국에 가서 『사략』과 『통감절요』에 대해 물어 보았지만,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일을 적었다.

○지금 세상의 책이 쇠등에 실으면 소가 땀을 뻘뻘 흘릴 만큼이나 많으니 어찌 모두 읽을 수가 있겠니? ...그저 소리 내어 읽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시는 남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

○1803년 봄, 바닷가 노전리에 사는 백성이 칼로 제 남근을 자라버린 참혹한 사건이 있었다. 열여섯 살 황상이 지은 시이다.

 

노전사는 젊은 아낙 곡소리 길고 길다.

가진 아이 못 기르고 지아빈 남근 잘라

시아버지 죽던 해에 포수로 차출되고

올해는 봉군에다 충군까지 겹쳤구나.

칼을 갈아 방에 들자 피가 자리 가득하니

민 땅 아이 잔혹함이 실로 또한 근심겹다.

돼지와 말 불알 까도 오히려 구슬픈데

하물며 사람으로 혈맥을 자르다니

부잣집은 일년 내내 세금 한 푼 안 걷고

종과 거지 부류들은 착취하여 상케 하네.

이 법을 안 바꾸면 나라 필시 약해지리

한밤중 이 생각에 속이 부글 끓는구나.

 

다산도 공분을 못 이겨 나중에 같은 시를 지었다.

 

노전 마을 젊은 아낙 곡소리도 길구나

현문 향해 곡하면서 하늘 보며 울부짖네.

전쟁 나가 못 오는 법 그래도 있다지만

남근을 잘랐단 말 옛날에도 못 들었소.

시아버지 상 끝나고 아인 아직 핏덩인데

삼대의 이름이 군보에 올랐구나.

가서 암만 호소해도 문지기는 범과 같고

이정은 으르대며 외양간 소 끌고 가네.

칼을 갈아 방으로 가 피가 자리 그득하니

자식 낳아 곤액 당함 한스러워 그랬다오.

잠실의 음형이 어이 허물 있으리오

민 땅 아이 거세함은 실로 또한 슬프도다.

생생의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라

하늘 도는 아들 되고 땅의 도는 딸이 되네.

말과 돼지 불알 깜도 서럽다고 말하는데

은혜로 차례 이을 생민이야 오죽할까.

부잣집은 1년 내내 풍악소리 잡히면서

곡식 한 톨 비단 한 치 내는 법이 없다네.

다 같은 백성인데 차별 어이 이리 하나

객창에서 자꾸만 시구편을 외우누나.

 

 

학질 끊는 노래

 

새벽의 생각

 

동기부여 학습과 칭찬교육

 

20년 공부가 물거품입니다

 

채마밭을 일구고픈 욕망

○다산은 늘 가구고 꾸미고 정돈하기를 좋아했다. 서울 생활 당시 다산의 명례방 집은 아주 좁았다. 연못은커녕 정원도 꾸밀 처지가 못 되었다. 그는 눈을 딱 감고 좁은 마당의 절반을 나눠 대나무 난간을 설치했다. 워낙이 마당이 좁아 각종 꽃나무와 과일 나무를 땅에 심지 못하고 화분에 심어야 했다.

○시골에 살면서 원포를 가꾸지 않으면 천하에 쓸모없는 사람이다. 만약 내가 집에 있었다면 뽕나무가 수백그루에 접붙인 배가 몇 그루요, 옮겨 심은 능금도 몇 그루는 되었을 것이다. ...국화 한 두둑이면 가난한 선비 몇 달치 양식을 지탱할 수가 있다. ...비용을 절약하면서 근본에 힘쓰고, 아울러 아름다운 이름마저 얻는 것이 바로 이 일이다.

○하지만 농사란 것은 천하에 이문이 박한 것이다. 게다가 근세에는 토지세가 날로 무거워져 농사를 많이 지으면 오히려 더 낭패를 보게 된다. ...진기한 과일을 심는 것을 園이라 하고, 좋은 채소를 기르는 것을 圃라고 한다. ...이것은 가난한 선비가 마땅히 알아두어야 할 일이다.

※가난한 선비는 오직 농사를 지어야 노인을 봉양하고 아이를 기를 수가 있으니 과일나무와 채소를 가꾸어 먹고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아도 능히 일하고 생산하여 당당히 가계를 꾸려가는 능력 있는 생활인임을 엿 볼 수 있다. 그의 실용주의 정신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과일을 파는 것은 본래 맑은 이름을 지키는 일이기는 해도 장사꾼에 가깝다. 뽕나무 같은 것으로 선비의 명성을 잃지도 않고 큰 장사꾼의 이익을 얻게 되니, 천하에 이 같은 일이 다시 있겠느냐?

소동파(1036-1101)가 황주로 귀양 가 있을 때 일이다. 곤궁에 시달려 기니거르기가 일쑤인 그를 안쓰럽게 여긴 친구마정경이 군에 요청하여 버려진 땅 수십 무(畝)를 얻어 농사를 짓게 한 일이 있었다. 소동파는 그 버려진 땅을 불하받아 자갈밭을 일구어 직접 농사를 지었다. 겨우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버려진 동쪽 언덕이 하도 고마워 그는 자신의 호를 아예 東坡로 지었다.

 

 

내외가 따로 자라

○다산은 승려 제자 중에서도 초의를 특별히 아꼈다.

 

 

이제부터 詩社가 원만하겠다

 

우물우물 시간을 끌었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낙담에 빠진 두 아들을 격려하고 고무했다.

黃花雨는 국화철에 내리는 가을장마다.

 

 

한겨울의 공부방

○세모의 생각(1805년 44세)

네 아내와 네 동생 네 누이들도

지금 한창 네 어머니 곁에 모시고

소소하게 등불 아래 가만 앉아서

아득한 남쪽 하늘 생각하겠지

...

침침한 눈 어느새 반년 넘었고

근육 시어 한 손은 쓰질 못하네

...

전적안에 온 힘을 쏟아 부어서

백세의 후대를 기다리리라

...

죽을 날 남았대도 얼마나 되리

대대로 수명도 길지 않았네

...

숨어 살며 원포를 가꾼다 해도

벼슬길을 사양할 필요는 없네

...

천한 자와 친하게 지내지 말고

벗 사귐은 신중하게 가려야 하네

 

 

시 짓기 시합

 

두륜산 유람

○1777년 다산은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화순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 정제원을 따라 내려가 만연사에서 한겨울을 나며 책을 읽은 일이 있다.

○작년 가을에 순사 심상규 공이 이곳에 올랐었지요. 망원경이란 신기한 물건을 지니고 오셨는데, 30-40리 떨어진 마을의 행인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더이다.

 

 

다산의 아들 노릇

○내 집은 서울에 있지만 해마다 닭 한 배씩을 기르며 병아리를 즐겨 관찰하곤 한다. 막 알을 까고 나오면 노란 주둥이는 연하고 노란 털은 송송 돋았다. 잠시도 어미 곁을 떠나지 않고, 어미가 마시면 저도 마시고, 어미가 모이를 쪼이면 저도 쫀다. 화기애애하여 새끼를 사랑하는 마음과 어미에게 효도하는 마음이 모두 지극하다. 조금 자라 어미 곁을 떠나면 형제끼리 서로 따른다. 어디를 가도 함께 가고, 깃들 때도 같이 깃든다. 개가 으르렁거리면 서로 지켜주고, 솔개가 지나가면 함께 소리친다. 그 우애의 정 또한 기쁘게 관찰할 만하다.

○내가 수년 이래로 독서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저 읽기만 해서는 하루에 백 번 천 번을 읽는다고 해도 안 읽은 것과 다름없다. 무릇 독서는 뜻 모르는 글자를 만날 때마다 모름지기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해서 근원이 되는 뿌리를 얻어야 한다. ...格이란 밑바닥까지 끝장을 본다는 뜻이다.

 

 

귀한 것을 알아주는 일

○본섬에는 산개가 백 마리 천 마리만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형님 같은 처지라면, 닷새마다 한 마리씩 삶아 반드시 거르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네 아들은 내 손자다

정학연이 황상에게 준 시의 일부

슬프다 궁벽진 고장에 나서

돌아보며 자취 썩음 탄식하누나.

부귀는 모두 다 대 이어 누려

큰 재주도 불우함 이미 오랠세.

경전에도 어둡고 역사 몰라도

부귀를 겨자 줍듯 취하는구나.

다시금 죽림 속에 물어보노니

몇 이랑의 밭뙈기가 거기 있는가?

고상하게 제 몸뚱이 보전하고서

큰 즐거움 덤불속에 내맡긴다네.

고구마를 심어서 밥 대신 삼고

멥쌀 빻아 술 담그기 마침맞다네.

 

 

취생몽사

○1806년 다산은 동문 밖 주막을 떠나 제자 이학래(이청)의 집(묵재)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전의 자식인 이학래(이청)는 제자 중 단연 두각을 나타냈고 스승의 작업에 실질적이 도움을 준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다산의 여러 저작 중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입신출세에 대한 이학래(이청)의 과도한 집착은 훗날 그가 다산 해배이후 서울로 올라와 다산에게 등을 돌리고 추사의 식객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던 듯하다. 그는 나이 일흔이 되던 해에도 과거시험에 응시했다. 그는 부에 능했으나 시에 약하여 늘 고배를 마셨다. 끝내 낙방의 고배를 마시자 회한에 차서 마침내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로 삶을 마쳤다.

※이학래는 다산의 제자 중 학문이 가장 뛰어난 사람 중의 하나이다. 입신출세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끝내는 스승을 버리고 추사의 집에서 식객노릇하며 과거만 치르다가 끝내 자살하는 불행한 인간이 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공부 잘하는 수재들은 서울법대(아니면 고대법대)에 가서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해마다 각각 수십 명 내지 일백 명 이내의 수만 선발(외무고시는 고작 십여 명)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부분 법원장이 되고 검사장이 되고 공사나 대사가 되고 도지사나 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30대까지도 고시에 합격하지 못하면 허다하게 끝내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 법대 나와서 7급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는 것도 큰 수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법고시와 행정고시 외무고시 회계사 변리사 등 수많은 자격시험이 있고 해마다 수천 명씩 선발한다. 법학대학원을 나오면 변호사가 되고 변호사들이 포화상태가 되어 중견기업의 과장급에도 채용되고 있다. 옛날과 달라서 이공계는 너도나도 의사가 된다. 의사도 포화상태라서 개업을 두려워 할 정도이다. 폐업하는 변호사와 의원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제 고시니 의사니 하며 인생을 걸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으니 정말 좋은 세상이 된 것 이다. 나와 종정초등학교에서 6년간 함께 공부하고 남성중학교로 같이 진학한 친구 송하진은 전주고와 고대 법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도국장및 도기획관리실장과 행자부 국장을 거친 뒤 용감하게 민선 전주시장에 도전했다. 관광객 하나 없던 우리 전북에 연 500만 명이 찾는 한옥마을을 만들어 내고, 지난 6.4지방선거에서 이제는 총리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진 도지사에 당당히 당선되었다. 종정초등학교와 남성중고등학교 동기회장을 맡은 나로서 훌륭한 친구를 가진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많은 동기동창들과 그 기쁨을 함께 하는 축하연을 전주에서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다산은 술을 잘 마셨지만,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그는 술이 狂藥이라며 자식들에게도 지나친 음주를 극구 못하게 했다.

※방금 원광대 건강검진센타에서 위내시경을 하고 왔다. 위 모습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술 조심할 것을 양드리님이 강조하여 요청한다. 술을 마시거나 과식한 경우 자고나면 눈 밑에 오돌토돌하게 피부가 돌기하면서 나타나는 붉은 현상이 의심스러워 두 달 가량 술을 삼갔더니 몸무게가 4kg이 줄었다. 다행이 속병이 아니고 피부알레르기 현상이라서 안심하였지만, 지방간이 심해지고 위의 색깔과 모습이 정상이 아니며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이 있으므로 환갑 진갑이 넘은 내가 정말 술을 조심하고 그저 소량으로 즐기는 다산의 태도를 잘 본받아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만 말한다.

○아전 황인담은 1807년 끝내 술병으로 세상을 떴다. 장례는 3일장으로, 시묘는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 황상은 아버지 유언을 따랐다. ...다산은 삼일장 이야기를 듣고 노발대발했다....삼우제를 지내지 않았다는 말에 다산은 아연실색했다. 편지를 썼다.

“네가 하루에 두 끼 밥을 먹으면서도 편안하냐?”

...결국 두 달간 황상이 시묘살이를 하는 것으로 장례를 둘러싼 사제간의 소동은 겨우 진정되었다.

※다산 가문은 아버지가 목사를 지냈고, 자신도 부사와 참의 벼슬을 한 양반가문이다. 황상은 아전의 아들이다. 재산도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아전의 아들에게 양반들이나 지킬 수 있는 장례절차를 강요하는 다산의 태도는 성리학적 예학을 신앙처럼 숭상하는 조선 후기 양반들의 정신에서 한발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의 한계를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내가 4대 장손이다. 아버지가 주관하시던 고조의 시제를 내년부터는 내개 주관한다. 시제자금이 거의 없는데다가 세 당숙들이 80대가 되셔서 참여하지 못하시고, 재당숙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참석하시며 정읍 작은댁은 삼형제가 세사을 뜨는 아픔을 겪고 기독교를 믿어 안 오면서부터 참석자는 겨우 15명 내외이다. 전주에서 시제에 쓰는 음식 한 반상을 주문하고(30여만원), 점심식사 15인 분(15만원)을 김제에서 주문한다. 시제를 모시는 음식을 차리는 일이나 점심준비는 여자들이 하게 되는데 지난 4월 시제때는 양드리와 삼기아주머니와 우리 승원이가 해냈다. 내년부터는 점심도 주문하지 말고 식당에 가서 먹기로 양드리와 약속한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합동으로 지내는 증조부모와 조부모 제사도 적당한 날을 정하여 산에서 지내려 한다. 장차 아버지와 어머니도 별도의 집안제사 없이 일 년에 단 한번 합동제사로 치르고자 한다. 승수 때는 승수가 알아서 할 일이다.

묘의 형식이나 제사형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어느 누가 욕하지 않는다. 요즈음은 매장을 하거나 화장하거나, 봉분없이 묻거나, 수목장을 하거나, 강물에 띄우거나, 납골당에 모시거나 절에 모시거나 제 각기 자식들이 편한 방법을 택한다. 살아생전에 효도하는 것이 99% 중요한 일이요, 장례나 제사는 그저 1%의 형식일 뿐이다. 형식은 어떤 방식을 취해도 좋고 설령 남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하여 욕할 일도 아니다. 자식을 낳아만 놓고 가출하여 평생 자식을 찾지도 돌보지도 않은 부모나, 평생 바람만 피우고 아내와 자식들을 학대하고 노름만 하고 술에 취해 살며 집안을 망친 아비를 제사 지낼 마음이 생길 수 있는가? 지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유인의 삶이 어떠합니까?

○땅을 고를 때에는 산 좋고 물 맑은 곳을 얻어야 한다. ...장식은 지극히 정교해야 한다. 순창에서 나는 설화지로 도배를 하고...뜰 앞에는 가림벽 한 겹을 몇 자 높이로 세워둔다. ...남새밭 정리는 맷돌처럼 평평하게 해서 마치 고인 물 같아야 한다. ...마당 왼 편에는 사립문을 세운다 ...시내를 따라 1백여 보 쯤 거리에 좋은 전답 수백 이랑을 장만한다. ...하지만 제 손으로 직접 농사일을 하지 않는다. ...집 뒤에는 쭉 뻗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어, 용이 움켜쥐고 범이 낚아채는 형세를 짓는다. ...이윽고 문 밖에서, 조정에서 부르는 조서가 왔다는 소리가 들려도 웃기만 하고 나아가지 않는다.

 

 

봄을 잡아둘 방법

○궁하게 지내고부터 문득 절집에 숨어 살고픈 생각이 들곤 했다. 불교의 도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날은 저무는데 길은 막힌 신세로, 시끄럽고 낮은 곳에 살면서 개 짖고 닭 우는 소리를 듣기도 염증이 난 까닭에 저쪽을 선망하게 되었다.

 

 

적막한 숲속의 집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다.

○윤단을 이곳에 유자동산을 가꾸고 있어 동네 이름을 아예귤동이라 했다.

 

 

리모델링 공사

 

꽃에 대한 탐닉

○다산을 꽃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국화는 빼어난 것이 네 가지가 있다. 꽃을 늦게 피우는 것이 하나요, 오래 견디는 것이 하나며, 짙은 향기가 하나요, 곱지만 야하지 않고 깨끗하나 쌀쌀맞지 않은 것이 하나이다. ...꽃에 대한 탐닉이야말로 정신을 살찌우고 마음을 길러주는 자양이 된다.

 

 

구걸하지 않겠다

○초당으로 거처를 옮기자 윤씨 집안 자제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사람에게 귀한 것은 신의다

○1810년 9월, 큰 아들 정학연은 꽹과리를 두드려 아버지의 사면을 요청해, 임금에게 석방 약속을 받았다. 방해세력의 집요한 공작으로 막상 석방 명령서가 집행된 것은 그로부터 무려 8년이 지난 1818년 8월의 일이었다.

○다산은 18년 간 강진에 있으면서 어느새 다섯 곳에 열여덟 마지기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구입 당시의 가격이 91냥이었다. 91냥은 서울에서 집을 두 채쯤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떠나는 날 강진고을이 온통 떠들썩했다. ...책을 실은 수레만 해도 한 대로는 어림도 없었다. 꽤 규모가 큰 이삿짐이었다. 그 끝에 홍임 모녀가 따라갔다. 홍임 모녀! 홍임은 다산이 초당에서 둔 소실에게서 얻은 딸이었다. 소실의 본가는 남당포에 있었다. ...소실을 맞이한 것은 1812년경으로 보인다.

 

 

홍임모녀

○다산의 소실이 쫒겨남을 당해 양근의 박생이 가는 편에 딸려 남당의 본가로 돌아가게 하였다. 박생이 호남의 장성에 이르러 부호인 김씨와 은밀히 모의하여 뜻을 빼앗으려 했다. 소실은 이를 알고 크게 곡을 하면서 마침내 박과 결단하여 끊고 곧장 금릉으로 달려가 남당본가로는 가지 않았다. 다산의옛 거처로 가서 날마다 연못과 누대와 꽃나무 주변을 성성이며 근심스런 생각과 원망과 사모하는 마음을 부쳣다. 금릉의 악소배들이 감히 다산(초당)을 한 발짝도 엿보지 못했다.

 

 

강진 제자들과의 갈등

○이학래(이청)은 다산의 집사처럼 모든 편집 정리 작업을 책임지고 있었다. ...제자들은 이후 서울을 들락거리며 스승이 자신들의 뒷배를 봐줄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祠簾(사렴 : 대나무 발) 세 개와 靑竹 서른 개는 혹 약속을 지킬 수 있겠는가? 여름이 다 되어 서로 알리는 것은 기필할 수 없을 테니, 모름지기 배가 떠나는 날을 탐문해서 힘을 써서 배에다 옮겨 실어 너무 늦게 오는 탄식이 없도록 해다오. 이 같은 데서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니 소홀히 하지 않기 바란다. ...윤씨 자제들의 벼슬길을 돕는 일은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는 이런 과정이 몇 차례 되풀이 되면서 사제간에는 보이지 않는 앙금들이 쌓여갔다.

 

 

내가 많이 아프다

○황상은 겉으로 꾸밀 줄 모르는 질박한 사람이었다. ...백적산 깊은 골짜기로 가족과 함께 들어가 돌밭을 일궈 농사를 지었다....황상의 동생 황경은 백석동으로 숨어버린 형을 대신하여 그때까지 아전노릇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후 이학래(이청)은 언젠가부터 아들 학연과 잦은 왕래가 있던 추사 김정희 집에 식객으로 들어 앉아 버렸다.

○다산이 강진을 떠난 지도 어언 17년이었다. 다신계의 구성원은 이미 뿔뿔이 흩어졌다. 스승이 계실 때도 함께 모이기 힘들었으니 이때 쯤 다신계는 거의 와해 상태였다. 그 와중에 토지 사기 매매사건까지 터진 것이다. 다산은 이런 일을 당하자 이게 무슨 茶信契냐며 차라리 無信契로 바꾸는 것이 옳겠다고 실망감과 배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스승의 상경이후 사제간 학문의 고리는 이미 끊어졌고 경제적 수수 관계만 남은 채로 오랜 시간이 흐른 결과였다.

○윤씨가의 막내였던 윤종진이 마침내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 진사로 이름을 올린 것은 다산이 세상을 뜬지 무려 31년 뒤인 1867년 이었다.

 

 

18년만의 재회와 영결

○1836년 2월 22일은 다산의 회혼연이 열리는 날이었다. ...황상이 18년 만에 찾아왔다.

하피첩은 1810년, 아내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빛바랜 낡은 다섯 폭 치마를 강진으로 보내와 이것으로 공책을 만들어 아들에게 주는 훈계의 말을 적었던 필첩이다.

 

 

정황계

○황상은 1845년 다시 마재를 찾았다. 18일을 꼬박 걸어 올라왔다.

※강진에서 마재까지 현재의 국도로 360km 정도이다. 당시는 가장 큰 길로 걸어도 직선로가 아니며 고개를 넘기도 해야 한다. 하루에 6시간 걸으면 60리이다. 하루도 쉬지 않고 60리씩 걸어야 했다. 강진에서는 배를 통해 물건은 보내지만, 사람은 육로를 이용한 것이며 서울 한번 가는 길이 얼마나 큰 고행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양반이면 나귀를 타고 하인을 대동하였으련만... 오늘날 자가용으로 5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다.

 

 

이 사람을 대적할 수 없겠다

○추사는 쉰다섯 살이 되던 1840년 9월에 제주로 귀양을 떠나 장장 9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다.

 

 

일지암의 초의선사

○초의는 추사와 단짝인 벗이었다.

 

 

꿈에 뵌 스승

 

고목에 돌아온 봄

 

득의의 시간

○1853년 9월, 황상은 네 번째 상경을 결행했다. ...이듬해 3월까지 근 반년 동안 두동에 머물렀다.

 

 

슬픈 해후

 

사다리는 치워지고 다리 끊겼네

○1855년 8월, 황상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상경했다. 68세때이다. 이 해 정학연은 73의 나이에 內贍奉事의 벼슬을 제수 받았고, 아들 정대림은 마침내 진사시에 급제하는 기쁨이 있었다.

 

 

일속산방을 꾸며보렵니다

○황상이 강진군 대구면 백적동으로 처자를 이끌고 온 것은 다산의 해배 직후인 1818년의 일이었다. ...일속산방은 백적동에 들어온 지 30년이 지난 시점에 집 뒤편 골짜기 언덕에 새롭게 지은 한 칸짜리 작은 산방을 가리킨다. ..만년의 삶이이만하면 넉넉하고 안온했다.

 

 

호사다마

○마침내 황상은 고을 관아로 붙들려가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힐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이런 사람이 있었네

○저는 산야에 사는 몸으로 서울에 놀러가서 외람되이 한 시대의 이름난 분(추사 김정희, 이재 권돈인 등)들을 모신 것이 10여년입니다. 종유했던 여러 분이 차례로 세상을 뜨매, 비유컨대 다락에 올라갔는데 사다리가 치워지고, 산에 들어가자 다리가 끊어진 격이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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