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아이를 그리워하며
홍경모(洪敬謨, 1774~1851)
밝은 달은 너희 얼굴과 같아
밤마다 동쪽 정원에 떠오르누나.
지난 일들 다 한스럽기만 하여라
저 하늘에 원통함 하소연하고 싶네.
머리맡에 눈물은 새로 더해만 가고
꿈속에 떠도는 넋 마주하곤 한다.
아직도 쇠잔한 꽃의 향기가 남아
서글프게 술병으로 들어오는구나.
月華如汝面 夜夜上東園
萬事皆成恨 九天欲訴寃
新添枕邊淚 時接夢中魂
猶有殘花馥 凄然入酒罇
올해(1800년) 늦봄에 마마가 돌았다. 첫째 아이 경증(慶曾)이와 셋째 아이 복증(福曾)이가 앓다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첫째는 6살, 셋째는 돌을 열흘 남짓 남긴 때였다. 3월 25일 우이동(牛耳洞) 선영에 둘 다 장사지냈다. 깊은 산 속 덩굴로 뒤덮인 곳에 아이들을 두고 오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아픔에 짓눌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멍하니 앉아 정원 동편으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노라니 아이들 얼굴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살갑게 얘기하며 함께 놀아주지 못한 것만 같아 가슴이 사무칠 뿐이다. 부친을 2살에 여의고 형제도 없는 내게 아직 피어보지도 못한 아이들마저 빼앗아 간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눈물로 얼룩이 진 베개에 새 눈물을 다시 적시며 지새우는 밤들, 흐느끼다 지쳐 설핏 잠이 들면 꿈속에서 다시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을 본다. 깨어서는 술을 부으며 잔인한 현실을 잊으려는데, 아이들을 조문하는지 봄의 조락(凋落) 속에 시든 꽃의 향기가 술병 속으로 퍼져 온다.
……지난해 오늘 밤 너희 형제가 난간에 기대어 등불을 바라보며 이곳저곳 가리키면서 웃던 소리가 귓가를 울리는데, 올해 오늘 밤에는 다시 어디에 있단 말이냐. 너희를 그리워하고 너희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잠긴 나는 시를 통해 그 슬픔을 풀어보고 싶었다만 차마 붓을 들지 못하였다. 힘겹게 붓을 들어 써 내려 가려니 먼저 울음이 쏟아지고, 울려니 먼저 목이 메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구나. 오늘 이 밤이 되자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배나 더하여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애통함을 자아내는구나.
「곡아 병서(哭兒幷序)」
……너와 동갑인 아이를 보면 생각하고 너와 함께 놀던 아이를 보면 생각한다. 지선(紙扇)과 필묵(筆墨)을 보면서도 생각하고 진기한 물건, 아름다운 그림을 보면서도 생각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생각하고, 비가와도 생각하고 바람이 불어도 생각하고, 달빛 아래 생각하고 꽃들 아래 생각한다.……만약 내가 생각을 할 수 없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내가 생각이 있다면 끝없이 이어지는 나의 생각을 어느 때인들 그칠 수 있겠느냐. 아, 애통하구나.
「제망아생조문(祭亡兒生朝文)」
홍경모는 문형(文衡)을 지낸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손자로, 4남 5녀를 낳았는데 이때 처음 두 아들을 잃었다. 3년 뒤 2월에는 넷째 아들과 첫째 딸 역시 마마로 잃는 등 3남 3녀를 일찍 보내고 아들 하나와 딸 둘을 겨우 성가(成家)시킬 수 있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내일은 없다. 어제, 지난달, 지난해, 그때만이 있을 뿐이다. 아이의 얼굴, 몸짓, 웃음을 떠올리고 되새기면서 슬픔과 회한(悔恨)에 사무치는 마음만이 잔해처럼 남는 것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하(子夏)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 너무 눈물을 흘린 나머지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시력만 잃었겠는가. 자식을 잃은 슬픔은 지워지지 않은 채 죽을 때까지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글쓴이 : 변구일(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 단원고학생들을 비롯한 304명이 참혹하게 세상을 떠나갔다.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12명의 사체를 찾지 못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다닌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의 슬픔을 내가 어이 다 헤아릴 수 있으리? 모두 저 홍경모의 마음 같지 않을까?
옛날에는 피임이 없던 시대라 자식들을 많이 낳지만 모두들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천연두, 콜레라 등 전염병이나 홍역 등으로 수없이 희생되고, 가난한 집에서는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흉년이 계속되면 온 가족이 떠돌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함께 죽어갔다. 전쟁이 나면 피난길에서 너도나도 죽어가고 적에게 아무 죄도 없이 희생되기 일쑤였다. 폐렴이라도 앓게 되고, 위생이 불결하던 시기에 종기라도 도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유아사망율이 4.08명(2012년, 유아 1천명 당 사망률)으로 세계 26위이며 이 역시 선진국에 속한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51년 전, 나는 사랑하는 동생을 잃는 큰 아픔을 겪었다. 1963년 가을, 이제 돌이 다 된 셋째 동생인 대승이가 잠을 자던 새벽에 갑자기 고열이 나고 많이 아파서 아버지가 안고 시오리나 되는 부용의 의원을 찾아 뛰셨으나 낫지 못하고, 그 다음날 참으로 어이없게도 세상을 떴다. 오늘날이면 상상이 안가는 일이다. 속히 전주의 도립병원이나 군산의 개정병원으로 입원시켰으면 결코죽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 집이 아주 가난하지만은 않은 집인데도 저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전화도 없고, 자가용도 없으니 우선 밤중에 문을 열어주는 병원을 찾을 수 밖에 없고 의사의 처방만 의지하다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아버지는 소리 내어 크게 슬피 우시고 나는 아버지를 따라 앞산 기슭에 동생을 묻었다.
오늘날 119만 부르면 종합병원 응급실로 당장에 이동하는 시대이니 우리가 정말 행복한 세상에 살고 있음이다. 우리 승원이가 세살 때 심한 열로 고생했으나 정읍아산병원에 입원하여 잘 나았고, 초등학교 2학년 때인 1993년 예방주사 부작용으로 의식을 잃고 응접실에서 쓰러졌을 때 내가 잠든 줄 알고 방으로 옮기려다 의식불명임을 바로 알아차리고 즉시 내 차로 원대병원으로 옮겨 무사하였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나 가난하던 시절이면 우리 승원이가 어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 딸이 건강함에 감사하고, 선진 대한민국에 살고 있음에도 항상 감사한다.
100세 시대가 되니 팔십 구십이 다 되어 죽어도 슬픈 일이 되었는데 하물며 가난한 나라, 내전이 벌어지는 나라의 어린아이들이 병이 들거나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을 우리 어른들, 잘사는 나라의 국민들이 남의 일이라 좌시해선 안 된다. 실천하는 지성만이 참 지성이다.
'시모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행 (0) | 2014.12.15 |
---|---|
사천성 유람외 1편 (0) | 2014.10.20 |
자경(스스로 경계함) (0) | 2014.09.23 |
떠나간 아내를 그리며 (0) | 2013.11.14 |
첫눈 (0) | 2013.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