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정민 지음
휴머니스트
서설
18세기의 미친 바보들
●갑자기 벽(癖)예찬론이 나온다. 일종의 마니아 예찬론이다. 벽이란 무언가에 미친다는 뜻이다. 박제가는 ‘벽이 없는 인간을 쓸모없는 인간’이라 했다. 지금은 낭비벽, 도벽, 수집벽 등의 말이 쓰이고 있는데 당시에는 긍정적 의미로 쓰였다. 또 치(癡), 즉 바보 멍청이를 자처하고 나서는 경향도 생겨났다.
...18세기의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힘은 정보화에 있다.
●다산 정약용은 우리나라 최고의 편집자요, 지식 경영의 귀재다. 그는 정보를 다루는 법을 알았다.
※우리 교육이 오랫동안 모든 과목을 다 잘해야 우수한 성적이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고 성공할 수 있다고 여겨왔다. 정약용의 제자인 이청이 유난히도 시에 약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는 말도 있다. 관료가 되어 나랏일을 하는데 시 짓는 능력이 무슨 소용이 그리도 클까? 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미분과 적분이나 삼각함수가 무슨 큰 필요성이 많을 수 있을까?
김대중 대통령이
“모두를 잘하는 사람보다 잘 할 수 있는 것 하나를 확실하게 잘하는 사람이 크게 성공할 수 있다”
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당시 교사인 나조차도 상당한 거부감을 느꼈다. 초중등 교육은 보통교육인데
“특정한 과목만 잘해서야 되느냐? 전인교육 차원에서 사람이면 갖추어야할 여러 분야의 기본지식을 두루 잘 공부해야 하지 않느냐? 한 가지만 잘하고 지성인으로서의 기본 교양지식이 부족하면 절름발이 지성인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라는 논리였다.
오늘날 두 가지 생각이 모두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김연아는 피겨의 여왕이 되었다. 박지성은 축구 스타가 되었다. 수많은 예체능 분야에서 뛰어남을 드러낸 사람들은 오직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 잘 할 수 있는 것을 택하여 최선을 다했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이 한가지에만 열중했기 대문에 인성에 문제점이 있다는 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머리가 우수하고 학과 시험공부에만 매달리는 인간이, 그래서 수능성적이 우수한 인간이 모두 뛰어난 인재가 될 수도 없고 오히려 문제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수능시험에서 전국수석을 하고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이후 정치에 뛰어든 인사들 중에 여러명이 인격적인 면에서 크게 부족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경우를 보았다.
판사들이 자주 이상한 판결을 내린다. 정치적 이유인지 경제적 이유인지, 변호사들과의 인간관계 때문인지 판단력 부족인지 일반국민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또라이 판사들의 판결이 보도될 때면 큰 분노가 인다. 법관들은 법 공부 한가지 만 잘하는 인간들을 선발하여 임명하면 안 된다는 절대적 증거이다. 법학전문대학원을 설치하는 등 제도개선을 통한 노력이 있었으나 전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법관으로서 부정직하거나 불성실하면서도 이념에 휘둘리거나 정치에 뜻을 둔 또라이 판사가 이상한 판결을 내리고, 그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여 법관직을 그만 두게되면 야당은 그 인간을 국회의원을 만들려 하는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결론하면 이렇다. 초·중·고등학교 시절에 모든 교과를 열심히 공부하는 곳은 옳다. 다양한 분야에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을 쌓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사물과 사안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자연과학에 흥미가 없어 고교시절에 물리와 화학을 잘 못했고 그래서 직므도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대학입시에서 오직 수능성적으로만 선발하는 방법은 옳지 않기에 이제는 수시모집을 비롯한 수를 셀 수 없는 다양한 모집방법이 제시되며 많이 개선되었다. 학과선택에 신중을 기하여 입학한다해도 오늘날 대학을 나와서 자기 전공을 살려 취업하고 종사하며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채 절반이 안 된다. 진정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 매니아가 되어 미치도록 열정을 쏟아낸 사람들이다.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다는 말이 더 이상 틀리지도, 구태여 반박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연유다.
내가 퇴직을 하고 癖으로 선택하여 노력하고자 하는 것은 전원(고향집 예쁘게 가꾸기, 채소밭·과일밭 가꾸기, 토종닭 등 가축 기르기)생활하기와 서예 공부하기 두 가지이다. 정년 이후의 나의 삶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결심을 가능케 한 것은 가까이 고향집을 가졌음과, 새로운 삶을 오래토록 꿈꾸며 구상하였음과, 그런 생활을 꿈꿀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성공한 이들이 볼 때는 가소로울 수 있겠지만 나는 그저 작지만 내가 꿈꿀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가졌음에 항상 감사할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18세기의 인물들은 양반으로서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며 삶의 멋 을 알고 맛보다 간 사람들이라 치고 수명을 적어본다. 40대가 마치 청년세대인 것 같은 세상이 되었다. 18세기엔 40대가 되면 손자가 생기고 50대가 되면 스스로 노인이라 여기며 늙음을 아쉬워했는데 요즈음은 70세가 되어도 스스로 노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큰 욕이 된다. 나의 존경하는 선배들인 이영삼 교장이나 성길호 선생은 일흔 셋, 일흔 둘인데 여전히 그냥 아저씨다. 그러하니 건강연령으로 볼 때 당시의 환갑 61세는 오늘날 80세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80은 오늘날 100세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이런 고사가 있다.
-청성 성대중이 한연의 부귀어를 외우자 이언진이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 같은 시를 지어 벼슬이 일품에 오르고, 80세를 살며, 집안에 만금을 모으면 좋기도 하겠습니다.” -
내 나이가 환갑 진갑을 넘고 보니 수명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다.
♠이서구(1754-1825) 72세 ♠이덕무(1741-1793) 53세
♠유득공(1748-1807) 60세 ♠박지원(1737-1805) 69세
♠이 옥(1760-1815) 56세 ♠이의준(1738-1798) 61세 사고
♠홍한주(1798-1866) 69세 ♠윤양례(1673-1751) 89세
♠신 위(1769-1847) 79세 ♠정철조(1730-1781) 52세
♠정약용(1762-1836) 75세 ♠서유구(1764-1845) 82세
♠심능숙(1782-1840) 59세 ♠이용휴(1708-1782) 75세
♠이규산(1727-1799) 73세 ♠윤광심(1751-1817) 67세
♠정 선(1676-1759) 84세 ♠조수삼(1762-1849) 88세
♠강이천(1769-1801) 33세 옥사 ♠이희천(1738-1771) 34세 처형
♠유 박(1730-1787) 58세 ♠조희룡(1789-1866) 78세
♠조신선(18-19세기) 100세 ♠심상규(1766-1838) 75세
♠심념조(1734-1783) 50세 ♠이상황(1763-1841) 79세
♠이상적(1804-1865) 62세 ♠유만주(1755-1788) 34세 요절
♠황윤석(1729-1791) 63세 ♠심노승(1762-1837) 76세
♠홍현주(1793-1865) 73세 ♠김용행(1753-1778) 26세 요절
♠남종현(1783-1840) 58세 ♠홍양호(1724-1802) 79세
♠신 완(1646-1707) 62세 ♠김매순(1776-1840) 65세
♠이정직(1841-1910) 72세 ♠홍석주(1774-1842) 67세
♠김정희(1786-1856) 71세 ♠권상신(1759-1824) 66세
♠정범조(1723-1801) 79세 ♠이현경(1719-1791) 73세
♠목만중(1727-1810) 84세 ♠장 혼(1759-1828) 70세
♠남공철(1760-1840) 81세 ♠신돈복(1692-1779) 88세
♠이시헌(1803-1860) 58세 ♠조 엄(1719-1777) 59세
♠이덕리(1728-1793이후) 66세이상 ♠이용휴(1708-1782) 75세
♠이가환(1742-1802) 61세 옥사
●제한된 정보가 독점적으로 유지되던 이전의 시기와 달리, 중국에서 쏟아져 들어온 백과전서류 전집들과 총서류 저작들은 정보의 독점적 권위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또 이시기는 정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정보이질이 문제되는 시대였다. 산만하고 부질서한 정보들이 우수한 편집자의 솜씨를 거쳐 새로운 저작으로 재탄생했다. 정보위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졌다. 일상의 허접스런 놀이나, 풍습, 시정의 이야기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지체 없이 편집되었다. 모든 지식이 편집되고 재배열되었다.
●이덕무는 자신의 시에서 “나는 지금사람이라 또한 지금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정약용의 시대정신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고 본다.
●박지원의 생각에 눈 뜬 장님들은 조선의 지식인들이었다. 눈만 뜨면 무엇 하는가? 자신의 주체를 세울 수 없다면 눈을 뜬 기쁨은 새로운 비극의시작일 뿐이다. ...확장된 세계, 혼돈스런 정보 앞에서 주체의 확립보다 절박한 건 없다. ‘나’없는 세계는 카오스일 뿐이다.
●당시에는 꽃에 미친 사람들이 많았다. ...화훼상인들이 생겨났다. ...호남에서 조운선이 쌀을 싣고 올라올 때면 치자와 석류, 동백과 영산홍, 백일홍과 종려, 왜 철쭉, 유자 같은 남방의 화훼들이 가득 실려와 불티나게 팔렸다. ...국화재배도 크게 성행했다.
※주로 관료들에 의한 거래들이지만 18세기네는 어찌됐든 상업이 발달하고 상품이 전국적으로 이동하며 거래가 활발하였음을 보여준다.
●중국에 간 사신행차의 중요한 일은 서책구입이었다. 역관은 물론 사행원과 비공식 수행원들은 북경의 서점가인 유리창의 서사를 저전하면서 구입하고자 하는 서목을 들고 다니며 값을 아끼지 않고 희귀본과 신간서적을 싹쓸이 했다.
●유만주의 <흠영>과 황윤석의 <이재난고>는 일기로써 한마디로 18세기 생활사 자료의 보고다.
●18세기에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118세기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도 확실히 특별했다. 지식의 패러다임이 변화화하면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해석의 틀도 바뀌었다. 근대의 조짐은 서양에서만이 아니라 조선에서도 똑 같이 일어났다. 역사가들이 <거대한 용트림>이라고 표현하는 18세기의 변화는 전 세계적이고 누가 먼저랄 것도없 었다.
1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과 세계 인식
1. 18세기 문화개방과 조선 지식인의 세계화 대응
●편집광적인 정리벽, 정류를 가리지 않는 수집벼, 사소한 사물에까지 미친 애호벽은 이 시기 지식인들을 특징짓는 중요한 표징의 하나였다. 성형의도를 실현하는 군자적 삶의 이상은 시정의 목소리에 점차 파묻혔다. 서울과 지방의 문화 격차는 하루가 다르게 벌어졌다.
●경세제민, 이용후생의 실학담론과 사치성 소비문하에 바탕을 둔 경화세족의 문화활동은 서로 다른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세계화 체험이 가져온 문화충격과 지식 재배치과정에서 빚어진 다기한 현상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다.
●현실 생활에서 요구되는 가치 있는 정보를 발 빠르게 편집하여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한다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가 작동되고 있었다. 18세기 새로운 지식 경영에 의한 저작들 중에는 한 작가 안에도 실학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공존한다. 실학 코드만으로 이 시기 지식시장을 관통하는 원리를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 저작을 관통하는 저술원리는 한 가지다. 널려 있는 정보를 수집, 배열해서 체계적이고 활용 가능한 지식으로 탈바꿈 한다는 것, 이것은 실학의 범주 구분을 넘어서는 이 시기 지식시장의 가장 강력한 원리요, 기본원칙이었다.
●집체작업에 의한 편집서는 제자들과 함게 500여권에 이르는 각종 저작을 펴낸 정약용의 작업이 그 대표적인 예다. 대부분의 작업은 제자들과의 집체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경우 다산은 작업 목표와 편집지침만 내렸다. 정리가 끝나면 다산은 그 내용을 감수하고 서문을 얹어 책으로 묶었다. 문제의 핵심은 지식을 편집하고 경영하는 안목에 있었다. ...다산의 위대성은 그의 작업량이 아니라 작업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저변에 깔린 정신은 爲國愛民 네 글자뿐이었다. ...고리타분한 경학 주제를 다루면서도 실제의 쓰임을 초우선 순위에 두고 작업했다. 그는 이론을 위한 이론, 논쟁을 위한 논쟁을 극도로 혐오했다.
●다산의 생각에 구리로 된 기어 장치를 제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가장 중요한 기어 장치를 포기 하고나면, 남는 건 도르래 장치뿐이었다. 다산은 복잡한 역학계산을 거쳐, 기기도설에는 있지도 않은 도르래 장치의 효율을 극대화한 조선형 기중가 모델을 만들어냈다.
●연암그룹은 북학의 코드로 대변된다. 이들은 중국의 선진문물을 과감히 받아들여 우리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이용후생의 주장을 펼쳤다.
다산학단은 위대한 스승의 리더십에 따라 국가 경영의초석이 될 경세제민의 정보를 정리하고, 기존의 경학 이해에 획기적 진전을 가능하게 하는 정보화 작업을 완수했다.
●헤게모니를 쥔 지배계층은 여전히 기득권의 그늘 아래서 향락적인 소비문화에만 탐닉했다. 이들에게 실학의건강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민족문화의 주체성과 외래문화의 건강한 결합을 모색했던 지식인들은 양지로 나오지 못하고 익명성의 그늘아래서 잊혀져갔다. 여기에 우리 18세기의 비극이 있다.
2.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벽>과 <치>의 추구 경향
●군자로 표상되던 획일화된 도덕적 표준대신,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 집단이 대두하였던 것이다.
●박지원 자신도, 주변에서 억지로 권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과거시험을 보러가기는 했지만, 번번이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고 나왔다. 지식인이 세상에 나서서 자신의 경륜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癖은 의학적으로 오른쪽 갈비뼈 아래 脾臟(비장 : 지라)에 나쁜 기운이 쌓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어떤 것에 대한 기호나 집착이 너무 지나쳐 이성적으로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런 인식이 이 시기에는 일부이긴 해도 지식인들에게 타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없어서는 안 될 미덕으로 변모하게 된다.
박제가는 “사람에게 벽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이다.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건 왕왕 벽이 있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벽이란 그 일을 하는 행위자체가 즐겁고 기뻐서 온전히 자신을 잊고 몰입하는 순수한 행위이다,
●痴란 상식적으로 볼 때 어리석은 정도가 지나쳐 바보로 보이는 상태이다. ...이덕무는 “가난해 반 꿰미의 돈조차 저축하지 못하면서 천하에 가난하고 춥고 질병과 곤액에 시달리는 이에게 베풀고 싶어 한다. 노둔해서 한 권의 책조차 꿰뚫어보지 못하면서 만고의 경사와이야기 책을 보려한다. 바보로구나. 아, 이덕무야!”라고 하여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임하기도 했다.
●벽과 치를 추구했던 이들이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기억, 정철조, 김군 등 주로 몰락한 지식인이나 서얼집단이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들에게 있어 벽과 치의추구란 정상적으로 자신의 포부를 펼 쳐볼 수 없는 왜곡된 현실에 대한 저항적 몸부림이도 했던 것이다.
3.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 변모와 그 방향성
●1. 도를 추구하던 가치지향이 진실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뀐다.
2. 옛날로 향하던 가치지향이 지금으로 선회했다.
3. 저기에 대한 관심이 여기를 향한 관심으로 변모한다.
●박지원이 공부를 시작하는 젊은이에게 주는 충고
눈앞에 참다운 정취 있거늘
어쩌자고 먼 옛 날에서 찾아 헤메나.
漢唐과 지금 세상 거리가 멀고
風謠도 중국과는 같지 않다네.
사마천과반고가 되살아나도
사마천과 반고를 안 배우리라.
새 글자 만들긴 어렵다 해도
내 품은 생각은 써내야 하리.
어이해 옛 법에 얽매이어서
두고두고 여기에만 매달리는가?
지금이 淺近타 말하지 말라
천년 뒤엔 마땅히 높을 터이니.
●정약용“나는 조선 사람이니, 즐겨 조선의 시를 짓겠다.”
●박지원“내 시를 읽는 사람이 내시에서 조선 사람만의 체취와 풍습을 볼 수 없다면 그런 글은 쓰나 마나 한 글이다.”
4. 18, 19세기 문인 지식층의 通辯 인식과 그 경로
●이정직은 <부어만편빈어일자론>에서 이렇게 부연한다.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때 무릇 <서경>의 일을 적으면서 克자만 만나면 대부분 能자로 바꾸었다. ....서경에는 서경의 체제가 있고 사기에는 사기의 체제가 있다. 사마천은 그 체제를 잃지 않음을 알았을 뿐이니...
※석정 이정직(1841-1910) 선생은 나와 같은 신평이씨다. 고손자인 이창석(1952- )이 나와 동기동창으로 장손이다.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부락의 생가는 전라북도기념물 제 21호로 정해져 있다. 서예가 강암 송성용(1913-1999)선생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고 강암선생의 막내아들이 오늘(2014.7.1) 취임한 송하진(1952- ) 전북지사이며 역시 나와 동기동창이다. 강암의 아버지인 유재 송기면(1882-1956) 선생도 석정과 간재 전우(1841-1922)의 제자로 대 유학자였다.
●박지원은 <공작관문고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글이란 나타내면 그만일 뿐이다. 저 제목에 임해 붓을 잡기만 문득 옛 것을 생각하고, 억지로 경정의 뜻을 찾아 생각을 꾸며 근엄하게 하고 글자마다 무게를 잡는 자는, 비유하자면 화공을 불러 眞影을 그리는데 용모를 고쳐서 나가는 것과 같다.
●정약용의 <조선시 선언)
노인의 한 가지 통쾌한 일은
붓 내달려 미친 노래 짓는 것일세.
험한 韻字 반드시 구애치 않고
퇴고하며 구태여 끌지도 않네.
흥 이르면 그 자리서 뜻을 펼치고
뜻 이르면 그 즉시 베껴 낸다네.
나는야 누군가 조선의 사람
즐거이 조선의 시를 지으리.
....
배와 귤은 그 맛이 제 가끔이니
嗜好는 마땅함을 따를 뿐이네.
2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지적 경향
1. 18세기 산수유기의 새로운 경향
●명·청 소품문과 패관소설의 성행은 이전 같으면 금기시도던 유흥문화를 부추겼고, 서화골동품이나 산수 유람에 대한 열광적 애호를 낳았다.
●권상신의 <남고춘약> 제1조 상화
작은 술잔에 순배를 돌리는 것은 나이 순서대로 한다. 술이 술잔에 따라지면 예에 따라 사양해선 안 된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자는 술잔이 자기 차례에 오면 술잔을 잡고 꽃 아래에 따르면서 꽃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꽃의 신께서는 술집을 굽어 살피소서. 술집이 실로 좁아 땅에 따릅니다.”
라고 해야 한다. 함께 노는 이를 불쌍히 여겨 그 괴로운 형편을 면해준다. 만약 그 술잔을 깊거나 얕게 하여 가져다가 시간을 오래 끄는 데 마음 쓰는 자는 다음과 같이 벌을 준다.
●이옥의 중흥유기
...사흘 만에 다시 성에 돌아와 푸른 깃발 내걸린 동네 주막과 붉은 먼지 날리는 수레와 말을 보게 되니 더욱 아름답다. 아침에도 아름답고, 저녁에도 아름답다. 날이 개도 아름답고 흐려도 아름답다. 산 또한 아람답고 물 또한 아름답다. 단풍도 아름답고 바위도 아름답다. 멀리 바라봐도 아름답고 가까이 다다가도 아름답다. 부처님도 아름답고 스님네도 아름답다. 비록 좋은 안주와 막걸 리가 없어도 아름답고, 비록 어여쁜 여인이나 나무꾼의 노래가 없어도 아름답다. ...어디를 가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니, 아름다움이 이처럼 많단 말인가? 아름답지 않으면 오지 않았다.
2. 18,19세기 문인 지식인층의 원예 취미
●<花國三史>는 1781년 이옥이 22세 때 지은 책이다. 누군가 가져다 준 <花史>를 보고 성에 차지 않아 사흘 만에 지었다고 한다.
●한양의 남쪽과 북쪽에 꽃 파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었다. 네 계절의 이런저런 수요에 맞추어 각종 화목들을 공급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돈을 아끼지 않고 이들에게 꽃나무를 사들여 으리으리한 장상의 집에 가져다 바친다고 했다.
●가을철 호남에서 조운선이 쌀을 싣고 올라올 때에 치자와 석류, 그리고 동백 같은 남쪽의 화훼들도 화분에 심겨 함께 올라와 부잣집에 다투어 팔려 나갔다.
●심능숙의 글
...근세에 일본 국화가 많이 흘러나오지만 북실북실하여 볼 만한 것이 없다. 갑오년(1834)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한 종을 구입해왔다. ...
3. 18세기 지식인의 玩物 취미와 지적 경향
●유득공의 <발합경>은 비둘기에 대한 책이다. 이서구는 <녹앵무경>을 지었다
4. 18세기 원예문화와 유박의 <화암수록>
●필사본 화암수록은 저자가 확인되지 않았다. ...유득공은 저자인 백화암이 금곡(황해도 배천군 금곡포)에 있고, 주인은 유씨이며, 벼슬 않은 포의의 선비임을 밝히고 있다. 또 이현경이 <백화암기>를 지었다. 그 서두는 이렇다.
유박군은 백주의 금곡에 집이 있다. 언덕과 동산, 섬돌과 뜰 할 것 없이 온통 꽃나무로 덮여 있다. 대개 백 가지쯤 되므로 그 사는 집을 백화암이라 이름 지었다. 사람을 서울로 보내 내가 잘 아는 이를 통해 나에게 기문을 청했다.
●목반중의 <백화암기>에
“내가 유화서군을 알지 못하나 그가 서해 가에 머물러 살면서뜰 가득 꽃을 심고 백화암이라 자호하니, 대개 꽃 속에 숨은 자이다.”라고 하였다.
●저자 유박의 <화암기>
나는 타고난 성품이 졸렬하나 데다 天分이 쓸모없다. 사는 곳의 사수도 너무 탁해 유람할 만한 승경이 드물다. 궁벽한 골목에서 문을 닫아거니 , 한 해를 마치도록 높은 사람의 수레가 가까이 이르는 법이 없다. 네 계절의 화훼를 모두 백가지 구했다. 큰 것은 재배하고, 작은 것은 화분에 담아 둑을 쌓아 백화암 가운데 두었다. 몸을 그 사이에 두고 소견하며 세상을 잊고 기쁘게 자득하였다. ...장차 늙음이 이르는 줄도 알지 못할 뿐이다.
5. 이덕리가 지은 <동다기>의 차 문화사적 자료 가치
●<동다기>의 저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정약용이 아니라 이덕리라는 사람이다. ...이덕리(李德履·1728~1793이후)는 죄를 지어 진도에 유배와 있으면서 지은 것이다. 이덕리(李德履·1728~1793이후)는 진도의 유배지에서 '상두지(桑土志)'도 지었다. 상두(桑土)는 뽕나무 뿌리다.
●이덕리의 <상두지>에서
차는 천하가 똑 같이 즐기는 것이다. 우리나라만 유독 잘 몰라 비록 죄다 취하여도 이익을 독점한다는 혐의가 없다. 국가로부터 채취를 시작하기에 꼭 알맞다. 영남과 호남에는 곳곳에 차가 있다. 만약 한 근의 차를 한 말의 차로 대납하고 10근의 차로 군포를 대납하게 허락한다면, 수십만 근을 힘들이지 않고 모을 수 있다.
●이덕리의 <동다기>에서
○우리나라의 차산지는 영남과 호남에 산재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작설차로 약용에 쓸 뿐 마실 줄을 모른다. 경진년(1760년 영조 36) 차 파는 중국 배가 표류해 와서 온 나라가 비로소 차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후10년 간 그 차를 마셨다. 하지만 차는 우리에게 그다지 긴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이후로도 차를 만들어 마실 줄 몰랐다.
○차는 잠을 적게 하므로 숙직서는 사람이나 혼정신성하며 어버이를 모시는 사람, 새벽부터 베틀에 앉는 여자, 과거공부하는 선비들에게 모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에 차가 나는 것을 중국에서 알면 반드시 차를 공물로 바치라 할 것이니 새로운 폐단을 만드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만약 수백 근의 차를 중국에 보내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에서 차가 생산되는 것을 알게 하면, 중국 남북의 상인들이 수레를 몰고 책문을 넘어 우리나라로 몰려올 것이다.
○차의 전매와 시장을 열어 국제무역을 하여 국부 창출을 한다.
○경제 규모가 작은 우리나라가 갑작스레 수백만 냥의 세수가 생기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김대렴이 828년(흥덕왕 3)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차의 종자를 가지고 왔고, 흥덕왕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부터 번성하게 되었고. 그가 가지고 온 차의 처음 재배지는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라 전해진다. 고려시대만 하여도 찻집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일반인들이 즐겨하지 않았다가 영조 때 와서야 차를 싫은 배가 표류해와 널리 알려지고 구입하여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차츰 사람들이 즐겨하게 된 것이 아닌가한다.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자주 졸랐는데 남쪽 지방에서만 재배되고 전국적으로 상품화되어 유통되지는 못했기에 김정희가 채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과 내면 행간
1. <동사여담>에 실린 이언진의 필담 자료와 그 의미
●동사여담은 1764년 2월 계미사행에서 이루어진 이언진(1740-1766)과 일본인 유유한의 필담이다. ...당시 이언진은 25세(1740년생)였고, 유유한은 46세였다.
●유유한이 근대 일본에서는 열에 일고여덟은 왕세정과 이반룡을 배운다고 하자, 이언진은 조선의 문사들은 과거시험에만 골몰해 고문을 배워 익히려는 자가 없다고 한다. ...유유한이 이언진을 왕세정을 숭상하는 단 한사람이라고 치켜세우자, 이언진은 스승인 이융휴의 가르침을 받은 것일 뿐이라고 겸양한ᄃᆞ.
●당대문단은 박지원과 이용휴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2. 18세기 시단과 일상성의 시세계
●혜환 이용휴(1708-1782)는 18세기 한문학사에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름이다.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롭고 독특한 작품 세계로 한 시대 문단을 이끌었다. 몰락한 기호남인 문학을 대표하면서 연암 박지원과 함께 당대 문단의 두 축을 이루었다. ...추한 것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었다. 겉꾸민 아름다움은 더럽다고 외면했다. 전통적인 형식에는 미련이 없었다. 꼭 해야 할 말이면 틀을 깨고라도 했다. 주체할 수 없는 광기와열정이 문단을 떠돌았다. 그 중심에 이용휴가 있었다. ..이가환(1742-1801)은 그 아들이다.
●이용휴가 쓴 <진사 신사권에 대한 만사> 제5수
그 아비 자식이 놀랄까 보아
자식 시신 만지면서 곡을 못하고,
소리 삼켜 벽 향해 드러누우니
뱃속으로 눈물이 뚝뚝 흐른다.
●이용휴의 시 <농가>
며느린 앉아서 아이 머리 땋는데
등 굽은 늙은이는 외양간을 쓰누나.
마당에 우렁이 껍질 잔뜩 쌓였고
부엌엔 마늘 접이 걸리어 있네.
3. 18세기 우정론의 맥락에서 본 이용휴의 生誌銘考
●묘지명이란 장례를 치를 때 능곡의 변천으로 인해 실묘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 일생의 대략을 새겨 壙中에 넣어둠으로써 후인이 망인을 상고할 수 있도록 쓴 글이다. ...생지명은 생묘지명으로서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써준 묘지명을 이른다.
●여항시인 김숙의 문집에 써준 서문
지위가 높은 사람은 겨우 시를 읊조리고 짓는 것을 알 정도만 도어도 경솔하게 문집을 간행하기도 하지만, 한미한 사람은 비록 재주가 풍소를 다하고 문명한 때를 만나더라도 홀로 굽히어
펴지 못하니, 땅의 다스림이 공정하지 않음이 심하다. 그러나 진실로 이를 펴고자한다면 세력과 지위를 가릴 것 없이 다만 하나 문장가의 필력을 얻으면 될 것이다.
●허연객생지명
허연객은 이름이 佖이고 汝正은 그의 자다. ...집이 가난하여 뒤주가 자주 비었으나 태연했다. 간혹 옛 기물이나 좋은 칼 같은 것을 보면 그자리에서 옷을 벗어 그것과 바꾸었다.
●승암허군생지명
허승암은 이름이 晩이고 자가 成甫이다.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어, 겉모습은 질박하고 어눌한듯하였으나 속마음은 해맑았다. 남의 허물 말하기를 싫어하여 비록 이따끔 마음에 맞지 않는 바가 있어도 그 마음에 맞지 않는 바를 드러내지 않고 마치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집안이 본시 도탑고 화목하여, 아이들은 함께 키웠고 옷도 서로 돌려가며 입었다.
.......허만은 이용휴의 맏사위로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自誌, 自銘은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기술한다는 점에서 생지명과 다르지만, 그 의미나 의식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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