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훈민정음

청담(靑潭) 2014. 7. 23. 15:22

 

 

훈민정음

 

 

사진과 기록으로 읽는 한글의 역사

 

김주원(서울대교수) · 민음사

 

들어가는 말

 

훈민정음에 관한 한 새로운 것은 없다.

한글이 최고라는 인식이 근거 없이 확산되어 왜 최고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남들이 그렇다니까 당연히 최고겠지 하고 생각한다.

 

1장 한글에 대한 세 가지 오해

 

한국인 대다수는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에는 훈민정음’ ‘정음또는 언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20세기 초반부터 쓰이기 시작한 한글이라는 용어를 써야 할 것인가...

첫 번째 오해 : 세종대왕은 우리말을 발명했다?

두 번째 오해 : 한글은 세계문화유산이다?

세 번째 오해 : 한글로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다?

 

2장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와 목적

 

조선왕조실록 세종 25(1443) 121230

(이 달에 임금이 친히 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篆字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창제과정에 대해서는 어느 문헌에도 언급이 없기 때문에 훈민정음 만들기는 일종의 비밀 프로젝트였다고 말할 수 있다.

최만리 등의 상소문은 15세기 중엽의 시대 분위기를 잘 담고 있다.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행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 하고 법도를 같이 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최만리 등의 주장은 당시의 대외상황으로 보면 일면 타당성이 있는 듯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철저한 중화주의에 의한 사대주의 정신이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외교와 군사, 문화면에서까지 오직 미국에만 절대적으로 의지하여 온 모습이나 점차 다원외교로 바뀌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중국이 미국과 빅2 兩强구도를 만들고 우리와는 최대의 무역국이자 인적교류가 엄청난 나라가 되었고, 러시아가 공산주의를 버리고 무섭게 다시 강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으며, 일본이 다시 군사력을 강화하려 하는 상황이니 우리도 점차 세계정세의 변화에 따라 네 강국 모두와 치우치지 않는 협력관계를 잘 유지하되 우리의 국력신장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여야만 한다. 강대국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는 무시해버리며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 발전에 의한 經濟强國의 위상이 튼튼할 때만이 統一韓國을 능히 이루어 낼 수 있다.

 

홍양호1783년에 쓴 상소문이다.

(무릇 사방의 언어와 갖가지 구멍에 나오는 소리들을 모두 붓끝으로 그려 낼 수 있게 되는데, 비록 길거리의 아이들이나 항간의 아낙네들이라 하더라도 또한 능히 통하여 알게 될 수 있는 것이니...)

훈민정음 반포에 반대하는 학자들과의 토론에서 세종이 말한다.

(그대들이 말하기를 음을 써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엣것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을 달리한 것이 아니냐? 만일 백성을 편안케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언문도 역시백성을 펀안케 함이 아니냐? 그대들이 설총이 한 일은 옳다고 하고, 그대들의 임금이 한 일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임금이 좌우근신에게 말하기를

(그렇다면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 백성에게 법은 알지 못하게 하고, 그 범법한 자를 벌주게 되면, 朝三暮四의 술책에 가깝지 않겠느냐?)

조선왕조실록 세종 32(1450) 13

사신이 말하기를

장원한 자를 무엇이라 부릅니까?”

하매, 대답하기를

을과 제1인이라 합니다.”한즉, 사신이 말하기를,

어째서 甲科라 하지 않고 乙科라 부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명나라에서 갑과라 부르는 까닭으로 감히 같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그렇소?” 하였다.

 

처음 듣는 말이다. 부끄러운 일이라 누구도 밝히려 하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한다. 세조 12(1466)에 비로소 문과 1등의 명칭을 갑과로 하여 명나라와 같게 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글자인 漢文, 또는 眞書에 비해 우리글을 常談, 또는 諺文, 諺字 등으로 지칭한 것이다. 이들 용어에는 비하의 뜻이 없다. 상말 , 속된 말 日常, 매일 그렇게 하는의미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쓰는 말을 적는 글자라는 뜻이다.

태종 17(1417)에 우리나라 말(俚語)을 가지고 양잠방 귀절에 夾註를 내게 하고 또 판각하여 광포하였다.

우리말을 표기하는 수단이 바로 吏讀였다. 라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胥吏들이 사용하던 글로서 한자를 이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이었다. , 한자를 이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다.

농사직설을 지어서 각 고을에 나누어주었으나 그 실효가 없었다고 한다. 농민은 한문으로 된 농서를 읽을 수 없는데다 각 고을의 수령이나 서리들이 적극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군왕으로서 양민과 천인을 구별하지 않고 다스려야 한다는 근대적 국민관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9(1427) 829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니, 만물이 그 처소를 얻지 못하여도 대단히 상심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일 경우야 어떠하겠는가. 진실로 차별 없이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과 천인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

세종은 총명한 자를 선발하여 중국의 북경 또는 요동에 보내어 현지에서 한어를 배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여 중국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명황제는 책을 하사하며 넌지시 거절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임금은 의주에서 요동을 왕래하면서 한어를 학습하게 하고 매년 북경까지 정식으로 내왕하는 제도를 이용하여 사역원 근무자를 함께 보내어 한어 학습을 하게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은

1. 한자를 모르는 백성의 편리한 언어생활

2. 한자음의 정리

3. 백성의 계몽

여기에 기밀유지를 위한 기록으로 이용하는 부수적 기능이 발생한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9(1478) 1013일조 양성지가 올린 상소문에는 조선의 기술력과 중국에서 전수받은 기술을 아울러서 독자적으로 구축한 화포제작기술 등이 일본으로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한문으로 된 책을 한글로 번역하고 한문으로 된 책은 모두 태워 없애 버려야 한다고 건의한다.

또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란을 갔고, 그 와중에 왕자가 왜적의 손에 잡혔는데, 왕자의 탈출을 도모하는 계략을 한글 편지를 이용하여 전하였다고 한다. ...전쟁시 한글이 긴요하게 쓰인 것이다.

 

 

3장 책 훈민정음

 

훈민정음 원본은 안동의 이한걸 씨 댁에서 전해 온 책이었다. 이 책이 우리 앞에 나타난 해는 1940년이었는데, 당시 명륜전문대(성균관대 전신)에 다니던 이한걸 씨의 삼남 용준씨가 그의 선생이었던 김태준 교수에게 자신의 집에 훈민정음이 있음을 알렷다. 문화재수장가인 전형필 씨로부터 귀중한 서화가 있으면 무엇이든 구입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김태준 교수는 이용준과 함께 안동으로 향했다. 책은 낡았고 볼품이 없었다. 원래 33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표지가 없는데다가 첫 두 장이 없어졌고, 각 장의 뒷면에는 붓글씨로 쓴 한글이 가득했다.....훈민정음이 간행된 지 494년 만의 일이었다.

이 책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미술관 소장본은 앞면에는 훈민정음이 인쇄되어 있고, 뒷면에는 십구사략언해가 필사되어 있는 책임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 요역

우리말은 중국과 달라서 중국글자, 즉 한자를 빌려서 생활하기에는 불편하다.

임금께서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는데 간명하고 정치하여서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다. 임금의 명을 받아서 집현전 신하들이 를 지었다. 임금의 지혜로 자연의 원리를 따라서 지은 것으로 임금은 하늘이 내신 성인이다. 바람소리, 학의 울음, 닭의 홰치며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일지라도 모두 이 글자를 가지고 적을 수 있다.

훈민정음, 즉 한글에 대한 찬사는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이전에는 주로 우수성에 대한 한국학자들의 주장이 있었지만 국수주의적인 차원의 발언정도로 이해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1965) 배운 국어 문법책은 외솔 최현배 선생(1894-1970) 이 편찬하신 책이었다. 김연태 국어선생님께서 최현배 선생님의 엄청난 우리 글 사랑에 대해 강조해서 가르치셨기에 최현배선생님이 세종대왕만큼이나 존경스러웠다. 동화는 강소천선생과 윤석중 선생, 한글은 최현배 이희승 정인보 선생, 소설은 이광수 선생, 영화배우는 김승호, 신성일, 신영균, 김지미, 태현실, 가수는 현인, 남일해, 위키 리, 이미자, 현미, 한명숙 등이 크게 각인되던 시절이었다. 아아! 벌써 50년 세월이 흘렀다.

 

서양 학자로 한글을 극찬한 이는 샘프슨이다(1985). 그는 인류의 문자 체계를 재분류하여 자질문자 체계를 설정했다. 한글이 이에 속하며 기존의 음소문자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문자체계하고 보았다.

토머스는 아리스토첼레스로부터 시작하는 언어에 관한 획기적인 사상을 전개하여 인류문화를 발전시킨 공이 있는 학자들을 선정했는데(2011), 이 가운데 47명이 서양권의 학자이고 단 세 명만이 동양권의 학자이다, 여기서 그는 세종의 업적과 훈민정음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평을 소개하면서 서양에서 줄곳 받아들여진 문자가 말을 반영한다라는 개념이 세종의 한글로 인하여 도전을 받고 있다고 보았다. ....한글은 말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구성 자질을 기록하는 것이며 각 낱자는 말소리 자체보다는 그 말소리의 조음동작을 비자의적인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본떠서) 나타낸다. 그 점에서 한글은 서구의 음소문자 대 비음소문자의 이분법을 뛰어 넘은 것이다.

 

 

 

 

'독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지 다음 이야기 2  (0) 2014.08.27
삼국지 다음 이야기 1  (0) 2014.08.21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0) 2014.07.03
정약용과 황상 - 삶을 바꾼 만남  (0) 2014.06.28
고대 로마인의 성과 사랑  (0) 2014.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