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삼국지 다음 이야기 1

청담(靑潭) 2014. 8. 21. 15:50

 

 

 

삼국지 다음 이야기 1

 

 

2의 전국시대, 중원을 지배한 오랑캐 황제들

 

신동준(고전연구가·평론가) · 을유문화사

 

 

독자의 들어가는 말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책은 소설 三國志演義, 일명 三國志만 있는 줄 알았다. 삼국지연의진수(陳壽, 233297)삼국지(三國志)에 서술된 (), (), () 3국의 역사를 바탕으로 전승되어 온 이야기들을 중국 원()과 명()의 교체기 때의 사람인 나관중(羅貫中, 1330?~1400)장회소설(章回小說) 형식으로 재구성한 장편 소설이다. 원래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이다.

  진수(陳壽)삼국지에 서술된 위((() 3국의 역사는 천하의 패권(覇權)을 둘러싸고 3국이 벌이는 힘과 지혜의 다툼이 워낙 치열하게 펼쳐졌기에 일찍부터 중국인들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로 전해져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께서 구해오신 10권짜리 삼국지를 겨울밤에 할아버지와 함께 등잔불 아래서 읽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돋보기안경을 쓰시고 먼저 읽으시기 시작하셨으나 나는 할아버지께서 읽지 않으시는 빈틈을 타서 1권을 재빨리 읽은 후 온 정신이 삼국지에 빠져 이틀 만에 열권을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대본점에서 아마도 두 권으로 된 삼국지를 빌려 다시 읽었고 그 내용은 오래토록 남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다시는 읽지 않았다. 어린 시절 소설을 통해 그려진 삼국시대 영웅들의 웅장한 파노라마가 일순간 사라질 것만 같은 걱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과 캐릭터, 전투상황 등이 거의 잊혀 지거나, 아련해져 언젠가 다시 읽어야지하는 생각은 가지고 있던 참이었다.

  이러던 참에 우리 사랑하는 딸 이승원 대리님이 이 책을 구해주어 읽기 시작하면서 내내 흥분을 감출수가 없었다. 삼국시대를 이어 전개되는 서진과 남북조 시대의 흥미진진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는 겨우 두 권을 읽는데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렸다. 1권만 읽고 촉의 서울인 盛都에 다녀오고 나서 2권을 읽다보니 그리 되었다. 소설 삼국지60여년의 짧은 시기(A.D 221A.D280) ··오 세 나라 간에 전개된 역사소설이라 복잡하지 않고 대화도 많고 스토리가 빠르게 전개되지만 이 책은 무려 300여년 이상의 시기(A.D 265A.D589) 서진 이후 수나라의 남북조통일까지 516국을 비롯한 20여개 나라들의 명멸과 전쟁을 다루고 있어 이해하기 복잡하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너무나 많아 일일이 사건과 인물을 모두 기억하기는 애시 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읽어가면서 또 다시 뒤돌아 읽고 때로는 정리도 해가면서 읽는 시간이 행복했다.

  1권과 2권을 합하면 무려 900여 쪽에 달하므로 내가 기억해야 할 만한 전쟁영웅들의 간단한 생애,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다 죽어간 백성들의 참혹하고도 처절한 이야기, 그리고 악행을 저지르며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어간 악랄한 권력자들의 짧은 수명에 대해서도 기록해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시대 이후의 역사는 삼국시대보다도 더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더 참혹한 피의 역사, 짐승들의 역사였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형제도 심지어 아비도 아들도 죽이고, 천자가 미친개가 되어 죄 없는 백성을 무수히 죽여도 이를 보며 비분강개하고 피가 끊는 인간들을 찾기 힘든 시대가 바로 이 시대였다. 황제는 자신이 무력을 가지지 못하면 언제라도 힘 있는 번왕이나 제후들에게 언제라도 황제자리를 빼앗길 수밖에 없는 봉건제시대였다. 무력을 가진 영웅들의 목표는 오직 황제자리인양 끝없이 전쟁을 치르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의리도 충성도 도덕도 철저하게 무시된 인류역사에 전무후무한 부끄러운 역사였다.

 

 

 

 

저자의 서문

필자는 본서를 집필하면서 역사적 사실에 가장 충실한 자치통감의 기록을 토대로 삼았다. ...각 시기별 사건과 그 배경 및 특징을 인불중심으로 기술해 놓은 까닭에 독자들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역사를 거시사의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장 위진남북조 시대의 구분

오호 십육국은 4세기 초부터 1백여 년 간(316-439)화북에서 흉노, 흉노의 별종인 갈,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동호 즉, 퉁구스계에 속하는 선비, 티베트계인 저와 강등의 5호가 잇달아 정권을 수립해 명멸한 것을 말한다.

지난 사천성 여행에서 찾은 족은 족과는 다르지만 5호에 해당하며 티베트족(장족)에 속함을 알 수 있다.

중국사는 결코 한족의 역사로만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내막을 보면 북방의 호인을 중심으로 한 비한족의 정복왕조 역사가 훨씬 길다.

291년 서진의 진혜제 사마충이 거대한 용상위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대신들은 밖에서 빚어지고 있는 화난을 앞 다튀 보고했다. 당시 수많은 백성들이 먹을 양식이 없어 굶어 죽었다. 사마충이 커다란 눈알을 부라리며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같이 말했다.

먹을 양식이 없으면 왜 고기로 죽을 쑤어 먹지 않는 것인가?”

팔왕의 난에 따른 후유증이 극심했던 311년의 어느 날, 갈족의 우두머리 석륵(274-333)이 이끄는 군대가 영평성에서 인간사냥을 했다. 난을 피해 황급히 도주했던 서진의 왕공과 사대부를 포함해 일반 백성 10여만 명이 도살됐다. 그다음 날 흉노 부장 유연(?-310)이 이끄는 군사가 사방에 불을 놓아 요행히 죽음을 면한 20여만 명의 서진 군민을 모두 산 채로 불에 태운 뒤 그 고기를 먹었다.

349, 과거에 석호 휘하에 있던 대장 염민과 이농은 갈족이 반기를 들자 살호령을 내렸다. 하루사이에 업성의 봉양문 밖 광장에 수만 명에 달하는 갈족의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며칠 동안 살호령에 의해 목숨을 잃은 갈족의 수가 20여 만 명에 달했다.

549년 여름, 건강성을 지키던 군민 가운데 10여 만 명이 죽은 뒤 대장 후경(503-552)이 입성했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86세의 양무제는 승냥이를 안방으로 불러들인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때가늦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삼국지연의를 통해 삼국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적잖은 문제가 있으나 삼국지연의자체가 7할 가량 역사적 사실에기초해 있는 만큼 크게 문제 삼을 것은 없다. 보다중요한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역사에서 도입부분에 해당하는 1백년의 삼국시대만 이해하고 정작 알맹이에 해당하는 3백년의 서진남북조 역사를 도외시하고 있는 현실이다.

 

2장 조씨 위나라의 성립과 패망

조조(155-220)는 생전에 지나칠 정도로 검박한 생활을 한 사람이다....그는 생전에 자신이 평생에 걸쳐 이룬 업적은 난세를 평정해 백성을 구한데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조조에 대한 왜곡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삼국지연의는 유비집단을 주인공으로 삼은 까닭에 도원결의에서 시작한다. 조조는 약간 뒤에 동탁을 척살하려는 자객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삼국지는 역사상의 긍정적인 인물로 서술해 놓았다. ...중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조조를 난세의 영웅으로 대접하며 객관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은 마오쩌둥과 궈모뤄(곽말약) 정도밖에 없다.

조조의 리더십에는 탁월한 바가 있다. 주어진 정황을 냉철히 진단하는 통찰, 인재를 알아보는 지감, 상과 벌을 분명히 하는 신상필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미련 없이 포기할 줄 아는 결단, 기존의 가치 및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파탈, 상황에 따라 대응을 달리하는 임기응변, 전장에서도 책을 놓지 않는 등 부단히 노력하는 자강불식 등이다.

1959년 궈모뤄가 조조의 찬역을 이렇게 해석했다.

한나라 조정은 외척과 환관들의 온갖 비행으로 부도독한 지배계급이었을 뿐이다. 부도덕한 지배계급을 몰아낸 것이 어찌 찬탈인가?”

고려말 권문세족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고, 그들이 전국의 농토를 약탈하고 백성들을 수탈하여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살아감에도 무능한 왕들은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고 새로운 조선을 건국한 것이 단지 왕위를 찬탈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역성혁명이다. 정몽주등 온건 개혁파들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나 권문세족을 척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임에도 그들은 오직 고려에 대한 충성만을 고집했다. 그들에 대한 부정적 측면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백성을 편안히 살아갈게 할 수 없는 나라와 임금은 바꾸어야 한다. 따라서 2만 명이 넘는 북한 동포가 북한을 탈출하여 우리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고, 민주주의를 가장한 철저한 비민주적 정치체제하에서 평양을 제외한 북한 동포들은 거주이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도 없고, 아직도 기아와 결핍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도 오직 김일성 일가에 대한 충성을 바치는 노예상태에 있는 저 북한을 그대로 두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그들 인민 스스로 우리의 4.19혁명처럼, 5월 민주혁명처럼 떨쳐 일어나야만 한다. 김정은을 내세우며 권력을 움켜쥔 권력층과 늙은 장군들은 보기만 해도 그 몰골들이 가관이다. 이미 북한의 화폐는 중국의 위안화가 대신하고 있고 노동자들의 월급은 1달러 가치밖에 없다는데 평양의 최고 유흥시설에서는 지배층들을 위한 수 십 달러 따리 고급식사에 10달러짜리 전신 맛사지도 있다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언제인가? 25백만 동포들이 저 공산 11당 독재권력을 무너뜨리고 우리와 함께 살아갈 날은...

사마의(179-251)는 조조와 조비, 조예, 조방 등 4대를 섬기며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사마의는 결국 조상 집단에게 모반의 죄목을 씌워 3족을 멸한 뒤, 위나라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16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 사마의의 뒤를 이어 사마사와 사마소 등 사마씨 부자가 조씨의 위나라를 손에 넣고 멋대로 주물렀다. 두 차례의 폐립과 살육적 끝에 마침내 조씨의 위나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대신 사마씨의 진나라가 등장했다. 이게 사가들이 말하는 서진이다.

  242(고구려 동천왕 16) 고구려가 요동지방을 공략하자 243(동천왕 18) 위의 관구검이 정벌군의 장군이 되어 고구려를 침입해 비류수에서 동천왕의 방어군을 무찌르고 국내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동천왕은 피신하여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내지는 못했다.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의 공을 기념한 관구검 기공비(紀功碑)1906년 만주 집안현 판석령에서 발견되었다

 

3장 사마염의 방탕과 팔왕의 난

사마염(236-290)은 호색한이었다. 후궁의 수가 만 명을 넘어선 것은 확실히 지나쳤다.

사실상 천하를 거머쥔 가남풍(256-300)은 황음무도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병을 핑계로 태의령 정거와 함께 기탄없이 음란한 짓을 벌였다. 이것도 모자라 사람을 밖으로 보내 미소년들을 궁으로 잡아들여 갖은 음란한 짓을 벌인 뒤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

세자와 황족 48명이 전부 난병의 손에 죽었다. 동해왕의 왕비 배씨는 병사들에게 끌려가 윤간을 당한 뒤 팔려 나갔다. 3106월 진회제는 흉노 유연의 한나라 군사에게 포획되었다가 2년 뒤 피살됐다.

 

 

4장 서진의 패망과 5호의 등장

중원으로 들어온 흉노족은 모두 19개 부족이었다. ...한고조 유방 때부터 황실의 공주를 흉노에게 시집을 보낸 까닭에 도각 부족의 각 귀족은 다투어 성을 유씨로 바꿨다.

劉漢을 세운 유연(?-310)은 장군 유경이 여양을 점령한 후 3만여 명의 한족 백성을 황하로 몰아넣어 익사시켰을 때 이 소식을 듣고는 크게 화를 내며 곧바로 유경의 직책을 강등시켰다.

진회제는 원래 구희의 의견을 좇아 창원으로 도읍을 옮길 생각이었다. 공경들은 낙양의 가재 등에 미련이 남아....며칠이 지난 후 양식이 모두 떨어지자 성안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 참상이 빚어졌다.

유한의 유총(?-318)은 낙양을 함락시켜 진회제를 포로로 잡은 이후 날로 포악해졌다. 생선과 게를 수라에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신들을 주살했다. 유요 등은 밤낮으로 장안성을 포위한 채 연일 패하고 있었다. 패퇴하면서 이들은 10여 만 명의 한족사녀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흉노 5부에 분재돼 노예로 일했다.

313년 유총은 포로가 된 진회제를 온화하게 대했던 것과는 달리 노예복장인 푸른 옷을 입힌 뒤 좌석의 흉노, 귀족들에게 술병을 들고 술을 따르게 했다. ...화를 참지 못한 유총은 좌우에 명해 연회에 참석한 유민 등 10여명을 끌고 나가 목을 치게 했다. 다시 사람을 시켜 독주를 들고 가 진회제 사마치를 짐살시켰다.

 

진민제 사마업이 장안에서 보위에 올랐을 때 유총은 사람을 유요에게 보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게 했다....장안성 밖에서 유입되던 양초가 점차 끊어지자 백관들은 배를 곯기 시작했다. 분분히 밖으로 나가 들풀을 뜯어먹으며 간신히 허기를 채웠다. ...포로가 되어 평양성으로 보내진 진민제는 광극전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희안후에 봉해졌다.

318년 유총이 군신들을 광극전에 모아놓고 연회를 베풀며 관대들의 연회를 관람했다. 이때 진민제에게 이전처럼 술병을 들고 다니며 술잔을 따르게 했다. 몇 순배가 돈 뒤 유청이 측간으로 가 소변을 보고 와서는 진민제에게 자신의 뒤로 가 의장용 부채를 들고서 있게 했다. 이 모습을 보고는 진나라 신하들이 모두 통곡했다. 상서랑 신빈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달려 나가 어린 진민제를 껴안고는 통곡하다 목이 잠기고 말았다. 이 모습을 본 유총은 대로한 나머지 좌우에 명해 신빈을 끌고 나가 목을 치게 했다. 이날 밤 유총은 사람을 보내 진민제를 죽였다. 그의 나이 18세였다.

劉漢의 황제 유찬은 하루아침에 형제 왕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것이다. ...318년 유찬이 즉위한지 두 달만에 벌거벗고 후궁들과 동시에 교접을 하던 중 근준이 이끄는 친위병들의 칼에 맞아 즉사했다.

...근준은 유찬을 제거하자마자 이같이 하령했다.

유씨 남녀는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동시로 끌고가 참수토록하라.”

유요가 근준을 제거하고 前趙(318-329)를 세웠다.

유요는 後趙(328-352)의 군사를 대파하고 석타와 갑사 15백여 명의 수급을 얻었다. 5천여 명의 후조군사들이 황하에 빠져 죽었다. ...전조의 15천여 병사는 모두 산채로 땅속에 파묻혔다....329년 석감이 유요를 사로잡아 석륵의 대영으로 압송했다. 후조의 군사는 5만여 명에 이르는 전조 군사의 목을 베었다.

 

 

5장 북벌에 나선 유곤과 조적

316년 서진의 대왕으로 봉해진 선비족 추장 탁발의려가 피살됐다. 막내자식을 총애하는 선비족의 관습대로 탁발비연을 후사로 삼고자했다. 이에 장자인 탁발육수를 신평성으로 보내고 그의 생모를 폐출해 냉궁에 연금했다. 탁발육수에게는 하루에 5백리를 내달리는 준마가 있었다. 이 또한 빼앗아 막내아들에게 주었다. 탁발육수는 화가 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났다. 대로한 탁발의려는 군사를 이끌고 가 탁발육수를 쳤으나 오히려 아들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는 낡은 옷으로 갈아입고 전장을 빠져 나욌으나 도중에 시골여인이 그의 신분을 알아채고 탁발육수에게 알렸다. 탁발육수는 급히 말을 타고 달려와 부친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6장 후조의 한족탄압과 반동

석륵(274-333)은 후조(328-352)를 세운 인물이다. 무향출신의 갈족이다. 그들 집안은 서역의 호인으로 언어는 이란어에 속한다....석륵은 사람들에게 말과 소처럼 부림을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무장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석륵이 1년사이 땅을 가는 노비의 신세에서 일약 유연 휘하의 존귀한 왕이 되어 수천 명의 군사를 지닌 무장세력의 우두머리가 된 배경이다.

후일 전조를 세우는 유요는 311년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서진 혜제의 양황후를 손에 넣은 뒤 진회제의 태자 사마전을 비롯해 3만 여명에 이르는 관원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후일 후조를 세우는 석륵의 군사가 323년 동진에 투항한 청주자사 조의를 사로잡아 목을 친 뒤 3만 여명을 갱살했다. ...결국 석호는 석량을 함락시켜 유악등 전조의 장령 80여명을 포로로 잡고 병사1만 여명을 갱살했다. ...;한번은 고구려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석륵이 취흥에 겨워 옆에 있던 근신 서광에게 물었다.

후조의 황제 석호(재위 335-349)는 특별히 여자의장대를 좋아했다. 1천명의 미녀가 자색의 윤건을 쓰고 금은실로 짠 띠를 맸으며, 면직으로 된 채색바지를 입었다. ...멀리서보면 오색이 현란했다.

..석호의 태자 석수는 황태자에 책봉된 뒤 부친보다 더 잔학한 모습을 보였다. 태자궁에 미모의 여인을 납치해 와 일을 벌인 뒤 돌연 산채로 목을 베었다. 이어 피를 깨끗이 닦은 후 얼음을 채워 금 쟁반위에 올려놓고 좌우의 근신들을 불러 이를 감상케 했다.

석수가 듣지 않자 석호는 마침내 석수의 폐서인을 선언했다. 이날 밤 화를 참지 못한 석호는 병사들을 시켜 동궁으로 쳐들어가 석수와 태자의 비첩, 석수의 딸 등 26명을 죽인 뒤 이들 시체를 모두 커다란 관에 한꺼번에 집어넣어 더러운 땅에 묻게 했다. 또 동궁의 신료 2백여 명을 주살하고 석수의 생모를 폐한 뒤 동해태비로 삼았다.

모용선비에게 커다란 손실을 입었는데도 석호는 계속 대군을일으켰다. ....곡식 30만 곡을 해도로 운반해 저장하고 다시 3백만 곡을 고구려로 운반했다. ...기주의 8개군에서 메뚜기 재해가 심했다. 굶어죽는 자가 수만 명에 달했다....백성들은 세금을 조달할 길이 없어 처자식을 팔아야 했다. 후조의 경내에는 자진한 사람들의 시체가 길 양편에 널릴 지경이었다.

석호13세 이상 20세 이하의 여인은 모두 명부에 이른을 올려 간택을 기다리게 했다. 미모가 뛰어난 경우는 출가했을지라도 이내 선발되어 입궁했다. 각지에서 선발해 올린 여관의 수가 무려 4만여 명에 달했다.

석호는 태자인 석선의 뺨을 뚫어 쇠고리를 끼우고 사지에 쇠고랑과 족쇄를 채우게 했다. 그러고는 나무 구유에 죽을 넣어 준 뒤 개돼지처럼 먹게 했다. 석호는 석도를 지나치게 총애한 나머지 석도의 선혈이 묻어있는 칼을 수지 않고 핥으며 애통해했다. 그는 진세를 크게 벌인 뒤 석선의 처형을 공개적으로 거행했다.

 

 

 

  

7장 동진(317-420) 원제 사마예의 창업

동진의 건립자 낭야왕 사마예(276-322)는 사마의(179-251)의 증손이다. ....흉노의 군사가 낙양을 함몰시키자 수많은 중원의 사족들이 분분히 남쪽으로 내려갔다...서진의 진민제 사마업이 흉노장수 유요(후일 전조를 세움)에게 포로가 되자 ...사마예가 보위에 올라 개원했다. 그가 동진의 창업주가 되었다.

왕돈은 진무제의 사위이다. ...322년 병사를 이끌고 건강을 향해 진군했다. ...왕돈으로 인한 동란은 사실 사마예가 조협과 유외등의 말을 듣고 왕씨를 배척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왕돈은 대군을 이끌고 무창(무한)으로 돌아간 뒤 멀리서 조정을 통제했다....왕돈은 사후에 관에서 꺼내져 꿇어앉은 모습으로 목이 잘렸다.

328소준의 군사가 건강성의 코앞에 있는 복주산까지 육박해 왔다. ...소준은 술에 취해 객기를 부리다가 말 아래로 끌어내려졌다. 이미 여러 곳에 창이 관통하여 숨이 끊어졌다.

 

8장 권신 환온의 야심과 좌절

환온(312-373)의 등장은 위기에 처한 동진의 수명을 수십 년 더 연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명제 사마소는 그를 사위로 삼았다.

이웅은 스스로 성도왕을 칭했다. 305년 황제를 자칭하였고, 영역은 지금의 사천과 섬서 서남부, 운남과 귀주 북부 등이다. 대략 삼국시대 촉한의 범위와 비슷하다. 이를 성한(305-347)이라 칭한다.

동진의 환온이 성한 토벌을 상주한 것은 성한이 멸망하기 직전의 일이다. 346년 정벌을 결심한다.

349년 후조의 석호가 병사하면서 내부에 대란이 일어난다. 환온은 즉각 북벌준비에 들어갔다. 당시북방은 사분오열된 모습이었다. 갈족 석지의 후조(328-351)와 한족 염민의 염위(350-352), 선비족 모용황의 전연(352-370), 저족 부건의 전진(351-394)을 비롯해 훗날의 후진으로 성장하는 강족 요양의 세력 등이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354년 환온의 제1차 북벌이 시작되었다. ...356년 강족의 용양이 허창을 점거한 후 여세를 몰아 낙양을 치고자 했다. ...요양을 토벌하기 위해 출격한다. 2차 북벌이다. ...365년 전연의 명장 모용각과 모용수 형제가 대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진공했다. ...환온은 3차 북벌에 나섰다. ...그는 건강으로 돌아와 병사했다,

 

9장 전진(351-394) 부견의 자만과 패망

서진이 패망한 후 황하유역은 흉노와 선비, ,, 강 등 5개 민족의 각축장이 되었다. ...부견은 전연(337-370)을 멸망시키고 북장을 통일했다. ...그는 천시를 어기고 군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기간 내 87만 대군을 동원해 일거에 동진을 삼키고자 했다.

전진의 부생은 소나 양등의 짐승들을 산 채로 껍질 벗기는 것을 좋아했다. 껍질이 벗겨진 짐승들이 비명을 지르며 궐내를 뛰어다니는 것을 보며 즐겼다. 사람도예 외가 아니었다. 사형수의 얼굴 가죽을 벗겨낸 뒤 그들에게 이를 뒤집어 씌우고 노래와 춤을 추게 하고는 대신들을 불러 함께 감상했다.

오호 16국 가운데 선비족이 세운 나라는 전연과 후연, 남연, 남량, 서진 등이다.

서진 멸망시 모용외가 스스로 선비대선우를 칭하고 독립했다. 337년 그의 아들 모용황이 연왕을 칭하고, 후조의 석호가 이끄는 대군을 격파한 뒤, 8만 여명의 병사를 몰살시켰다. 이를 계기로 모용씨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전연 : 337-370)가 북중국 최고의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342년 전연 모용 황의 침입으로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어, 고국원왕은 단기(單騎)로 산속에 피신하였다. 황은 미천왕릉(美川王陵) 발굴, 왕모(王母) 납치, 남녀 약 5만 납치, 보물 약탈 및 궁실을 불사르고, 도성(都城)을 파괴하는 등 노략질을 하였다. 이로써, 343년 고구려는 수도를 동황성(東黃城:江界)으로 옮기고, 왕제(王弟)를 연나라에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화의를 청하는 한편, 부왕의 유해와 왕모의 송환을 청하였다. 그러나 유해는 돌려 받았으나, 왕모는 억류되어 12년 뒤에 송환되었다.

부견의 최대목표는 천하통일이었다. 동진을 ...각주 에 보기 25만 명을 구성하여 모용수에게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60만 명의 보병과 27만 명의 기병을 친히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군대의길 이가 천리에 달했다. ...그러나 전진의 백만 대군중 비수의 싸움에 동원된 군사는 10만 여명에 불과했다. ...강족 수령 요장은 이내 사람을 시켜 신평에 있는 절로 끌고 가 부견을 교살하게 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10장 남조 동진(317-420)의 문약과 혼란

효무제 사마요는 장귀인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장귀인, 당신도 곧 30세가 되겠구려. 나이로 따지면 응당 폐출될 나이요. 나는 젊고 예쁜 여인들이 좋소!”

..장귀인이 태감들을 불러 취해 잠든 효무제를 숙소로 모시게 했다. 얼마 후 그녀는 몇 겹이나 되는 이불을 덮은 뒤 사면의 귀퉁이를 단단히 묶게 했다. 그녀는 효무제의 머리를 깔고 앉았다. ...효무제는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황당하게 죽은 사람으로 기록되 었다.

사마도자 역시 친형인 효무제와마찬가지로 주색을 밝혔다. 예쁜 비구니들이 그의 좌우에 두루 깔렸다.

399년 말, 도적 손은이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 해도에서 출병했다. 그는 상우현 현령을 죽인뒤 곧 바로 회계를 쳤다. 이때 이른 바 書王으로 불리는 당대의 명필 왕희지(303-361)의 아들 왕웅지 등을 죽였다. ...원래 오두미도는 후한 말기에 나타난 것으로 교리 자체는 위험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邪敎로 발전했다. ...자신들을 좇지 않는 현지의 士庶는 영아를 포함하여 그 일족을 모조리 주살했다. 이들은 관원을 죽인 뒤 시체를 큰 솥에 넣어 끓인 뒤 관원의 처자식에게 먹게 했다.

종교가 아니라 악마의 집단이다. 2014416일 발생한 세월호 사건으로 304명이 죽고 또 수색과정에서 7명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발생이유는 무엇보다도 사이비종교집단 구원파 교주인 유병헌이 온갖 감언이설로 신도들의 돈을

긁어내고, 유령 같은 회사들을 운영하면서 공금을 착복하는 과정에서 해운회사의 부실운영이 따르고 그로 인하여 참사는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유병헌이 죄 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고 시체로 발견되었고 세월호 문제는 4달이 지난 오늘까지도 해결이 안 되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국정운영을 옥죄고 있는 이 세월호 사건은 문제의 발단이 바로 사이비 종교다. 대한민국 국민들 중 아직도 사이비정치인들과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현혹되고 아주 꽉 사로잡혀 그들이 진실한 지도자이고 진실한 구원자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아닐까?

환현(369-404)은 입성하자 곧 좌우에 명해 사마원현과 사마상지, 유해, 장법순 등을 모두 저자로 끌고 가 참수케 했다. 사마도자는 안성군으로 내쫓은 뒤 사람을 보내 독살했다. ...그는 환온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아했을 뿐만 아니라 머리도 비상했다.....마침내 동진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이다. ...조정의 대사가 모두 그의 재가를 받은 후 실시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환현도 몸에 여러 발의 화살을 맞았다. 그의 아들 환승이 울면서 손으로 화살을 뽑아내려 애썼다. ...환현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당시 36세였다.

 

 

이 책에 나타난 제왕과 영웅들의 수명 기록

300여년의 대 혼란 시기에 봉건제와 같은 정치구조속에서 황제권이 극도로 약화되고 정치는 끝없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제명대로 잘 살다간 황제나 제후가 극히 드물 정도이다. 도대체 정치권력이 무엇이관대 짧은 권력을 맛보고는 저리도 어리거나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단 말인가? 100세 시대에 이르러 저 시대 저 인간들의 영욕의 삶을 바라보면 애처럽기도 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내 마음까지 착잡하기 그지없다.

曺魏

황제 조비(40) 황제 조예(34)

西晉

성도왕 사마영(28) 황제 혜제(48) 황제 회제(30) 황제 민제(18)

후조

황제 염민(28)

동진

황제 사마소(27) 집권자 환현(36)

강족 추장 요양(27)

전진

황제 부생(23) 황제 부견(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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