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삼국지 다음 이야기 2

청담(靑潭) 2014. 8. 27. 15:06

 

 

 

삼국지 다음 이야기 2

 

 

 

2의 전국시대, 중원을 지배한 오랑캐 황제들

 

 

신동준(고전연구가·평론가) · 을유문화사

 

    1장 남조 송무제 유유의 창업

남연(400-410)은 약탈해 간 동진의 백성 중 25백명의 동남동녀를 선발한 뒤 이들을 교방사에 보내 강제로 악기와 가무등을 익히게 했다.

북한에도 김일성 수령과 대를 이은 수령들을 위한, 그리고 공산독재집단의 권력유지를 위한 선동 선전을 하기 위해 조직된 무슨 가무단 같은 것들이 아주 많이 있어 최고로 선망하는 직업이라고 하지요? 근대 자유주의, 민주주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거지요.

유유(송 건국)는 남연과 노순을 평정한 뒤 타도대상을 안으로 돌렸다.

요장(후진 건국)은 부견이 비수의 전투에서 패하자, 이내 반란을 일으켜 부견을 신평의 절에서 액살했다.

유유는 요흥(후진 황제) 이외의 종실과 부녀를 현장에서 곧 바로 처결했다. 이어 요홍을 함거에 태워 건강으로 압송한 뒤 저저에서 목을 베었다.

사마덕문은 독살을 두려워해 늘 부인 저황후가 만들어준 음식만 먹었다. 유유는 1년 뒤 저 황후의 두 남동생을 시켜 독주를 갖고 가 사마덕문을 독살케 했다.

유유는 보위에 오른지 2년 만에 60세의 나이에 병사했다. ...그는 무공에 뛰어나 가히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본인은 절검한 생활을 영위했다. 욕심이 적었고 행동이 엄정했다. 칭제후 에도 낡은 나막신을 계속해서 신었고, ....한미한 가문 출신인 까닭에 서민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는 조치를 취하고 호강한 자들의 횡포와 토지 겸병행위를 엄히 다스렸다.

 

2장 탁발선비의 흥기와 북위

몽골지역에 거주한 선비족의 지족인 탁발부는 물과 풀을 찾아 유목생활을 하는 작은 부족이었다. ...원래 흑룡강과 눈강 유역의 흥안령 일대에서 살았는데 ...338년 우두머리인 십익건은 자신을 대왕이라 칭하면서 지금의 내몽골 성락에 도읍을 정했다. 이를 대국이라 한다.

탁발식군(십익건의 서장자)은 이내 그와 함께 사람들을 이끌고 가 왕비 모용씨가 낳은 6명의 이복동생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이어 장막 안으로 난입해 십익건도 단칼에 목을 베었다. ...이기회를 틈타 철군했던 전진의 군사들이 다시 운중으로 들어와 일거에 대국을 멸망시켰다.

실제로는 십익건은 아들 탁발식군에 의해 포로로 팔려간 뒤 부견 밑에서 구차하게 몇 년 동안 잔명을 이어가다가 죽은 것으로 드러났다.

전진은 북방의 최대 경쟁자인 정연을 멸망시킨데 이어 여세를 몰아 동진을 토벌하러 나섰다가 비수의 대전에서 패함으로써 순식간에 기울기 시작하였다.

탁발규(십익건의 아들)은 아비가 죽을 때 여섯 살이었다. ...국호를 대에서 위로 바꿨다. 이 나라가 바로 북위이다.

탁발규가 이를 좇아 근 5만 명에 달하는 후연의 군사를 모두 산 채로 매장했다. 이 숫자는 중국 역사상 산 채로 매장한 숫자로는 네 번째에 해당한다.

첫 번째는 전국시대 말기에 진나라 장수 백기가 장평의 싸움에서 조나라 군 사 40만을 매장한 사건이다.

두 번째는 초패왕 항우가 투항한 진나라군 20만 명을 매장한 일이다.

세 번째는 당나라 설인귀가 철륵군 13만 명을 매장한 일이다.

북위는 후연의 모용보의 군사를 대파해 1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12-13만 명의 군사는 산속으로 도주했다가 큰 바람을 만나 얼어 죽거나 굶어죽었다.

탁발규는 청년이었을 때 모친 하란태후의 여동생이 매우아름다운 것을 보고 모친에게 작은 이모를 처로 삼고 싶다고 자신의 속마음을 전했다. ...모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탁발규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 작은 이모의 남편을 죽이고 왕비로 맞아들였다. ...409년 하루는 탁발규가 공연히 하란비를 크게 욕하면서 궁 안에 가둔 뒤 죽이려고 했다. 하란비가 급히 아들 탁발소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16세의 탁발소는 환관 및 궁인들과 밀모한 뒤 밤에 궁궐 담장을 넘어 곧바로 천안전 안으로 뛰어 들었다. ..결국 그는 탁발소가 휘두른 칼에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3장 남조 송문제의 원가지치

가장 애석한 것은 송문제(유의륭)가 태자인 유소에게 피살당한 점이다. ...오랫동안 수나라의 양광이 부친인 양견을 시해한 것에 비유도 하였으나 최근 후대사가의 의도적인 왜곡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주유규가 후량의 태조인 부황 부온(주전총)을 살해하고, 안록산과 사사명 부자가 서로 죽인 적이 있다.

송문제의 치세(424-453) 30여 년 동안 백성들이 크게 풍요로워졌다. 백 호 단위의 마을마다 市邑이 있었고, 노래와 춤이 그치지 않았다. 실로 송나라의 전 기간을 통해 가장 극성한 시기였다.

도연명은 평택령으로 81일 동안 근무하다가 5두미의 녹봉을 위해 호리를 굽힐 수 없다는 이유로 사직한 뒤 전원으로 나아가 밭을 갈며 생활했다.

450년 북위 탁발도가 침입하여 송나라군 사는 연이어 대패했다. “위나라 군사가 지나간 군현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모든 마을이 황량해지면서 원가의 정사 또한 쇠해지기 시작했다.” ...말년에 북벌을 가벼이 생각했다가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송문제의 태자 유소는 이복형제인 유준과 함께 밤낮으로 귀신을 찾아다니며 유의륭이 죽기를 기원했다. ... 이를 안 송문제는 유소를 폐하고 유준을 사사하는 문제를 논의한 뒤 이 얘기를 유준의 어미인 반숙비에게 흘렸다. ...유소는 심복을 시켜 송문제 유의륭을 죽였다. ...유소는 사람을 시켜 송문제의 측근 수십 명을 죽인 뒤 다시 안으로 들어가 반숙비를 죽였다. 그는 좌우에 명해 반숙비의 배를 갈라 그녀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게 했다. ...유소의 어린 네 아들 모두 목이 떨어졌다. 네 자식의 처참한 모습을 본 유소가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동생 유삭에게 이같이 탄식했다. ...유준도 병사들에게 이끌려 돌아가다가 이내 살해되었다. 두 사람의 자녀와 시첩들은 모두 옥중에서 사사되고 동궁은 이내 허물어졌다.

 

 

4장 북위 태무제의 북중국 통일

북위의 창업자인 탁발규는 아들 탁발사를 태자로 삼았다. 탁발규는 한무제의 고사를 좇아 이른바 <子貴母死>의 전통을 세운 바 있다. 한무제는 여러 황자 중 한 명이 보위에 오를 경우 제국의 안녕을 위해 그 생모를 죽였다. 외척이 발호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탁발규는 자귀모사를 받아들여 탁발사를 태자로 삼으면서 그의 생모인 유귀인을 사사했다. ...탁발사는 천성이 효순한 까닭에 이 얘기를 듣고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 전쟁의 시기에 지위가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무수한 사람들이 마치 가축처럼 도살되고, 집단으로 생매장당하고, 또는 수장당하는 것도 나치의 유태인 집단 학살을 제외하고는 세계역사에 거의 전무후무한 일이지만, 단 한명의 왕비가 죽을지언정 子貴母死도 끔찍한 일이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가 행한 일이니 그는 참으로 무서운 인간이다.

당시 여러 장군들의 신장이 자주 기록되는데 1자는 1이고 110()이다. ()나라 때는 23cm 정도, ()나라 때는 24.5cm 정도로 되었고 현재는 30.3cm이다. 따라서 8척 장신은 184cm가 된다.

대하(407-425) 황제 혁련발발은 재위말년에 흉포한데다 황음했다. 신하가 그를 직시하면 그의 눈은 파 버렸다. 한 신하가 조회할 때 웃자 칼로 그의 입술을 양분해 버렸다. 감히 진언하는 자는 혀를 자른 후 목을 베었다.

후연(384-407)의 황제 모용성(재위398-402)은 칭제 후 면모를 일신했다. 그는 늘 요서의 동북쪽 변경을 침공하는 고구려와 고막해를 대파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391-413) 시기이다.

모용성은 죽기 직전 숙부 모용회를 불러들여 후사를 당부했다. 모용회는 모용수의 막내아들로 항렬은 높았으나 모용성보다 열두 살이나 아래인 17세였다. 당시 어린 모용회와 통간한 모용전의 처 정태후는 모용성의 태자 모용정을 폐하고 모용회를 보위에 앉혔다. 모용회는 보위에 오르자마자 모용성의 동생 모용원을 주살하고 자신의 즉위에 반대한 대신들을 제거했다. 이듬해인 40218세인 모용회는 부씨의 두 딸을 비로 맞아들여 밤마다 함께 지냈다. 당시 30세 전후의 정태후는 대로한 나머지 친정집 조카인 정신과 밀모하여 모용회를 폐하고 다른 사람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모용회가 이를 알고 정신등을 죽인 뒤 정태후를 압박해 자진케 했다. 부씨의 두 비는 전진의 종실로 미모가 절륜했다. 모용회는 두 미녀를 위해 수만 명의 백성들을 동원해 궁정에 화원을 조성했다.

  그러나 언니 융상은 이내 병사하고, 동생 훈영도 얼마 안돼 병사한다. 이에 모용회는 큰 슬픔에 빠져 통곡하다 혼절했다. ...당시 그는 대신들에게 엄명을 내려 곡을 하게 한 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참했다. 아직 고추가 전래되기 전이라 대신들은 마늘등을 눈가에 뿌려 눈물을 흘렸다. ...사방 수리에 달하는 분묘를 조성했고 영구수레가 너무 큰 까닭에 성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자 성문을 헐어 지나가게 했다. 그가 성 밖으로 나가 영구를 호송하자 금위군 통령 풍발이 곧 성문을 닫고 모용보의 아들 모용운을 보위에 앉혔다. 모용회는 도주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 짧은 역사기록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왕자인 모용회는 17살에 이미 아마도 형수로 추정되는 정태후와 통정하고 있다. 정태후와 모용회는 모용성의 당부를 배반하고 황위를 찬탈한다.

  모용회는 미모의 부씨 자매를 왕비로 맞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문종때(1052) 이자연이 세 딸을 문종에게 시집보낸 일이 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관점에서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지만 신라와 고려에서는 왕실 내에서 삼촌지간이나 사촌지간 결혼도 자주 있었다. 조선이후로 동성동본 결혼이 불허되다가 논쟁을 거쳐 법적으로 허용된 것이 겨우 10여 년 전이니 참으로 무지몽매한 나라였다. 오늘날도 근친인 8촌이내는 제한하고 있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에는 病死가 정말 많았다. 두 왕비는 젊어서 죽게 된다. 20대 초반의 왕이 왕비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왕비사후 취하는 행동은 일국의 왕이 아니라 인간이 아닌 이성을 가지지 않은 짐승이나 할 일을 하고 있다. 위진 남북조시기의 수많은 황제들이 20세 이하에 보위에 오르고 있으니 난세가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아무리 머리가 우수하고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해도, 아무리 다양한 경험을 한다 해도 한 나라를 다스리려면 적어도 나이가 20대 후반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구매력기준 국민소득이 이탈리아를 앞선 대한민국에서, 의학기술이 세계최고수준인 나라에서, 의료보험이 가장 잘 된 나라라고 하는 대한민국에서 바야흐로 100세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할머니께서 백세에 돌아가셨으나 나는 본래 87세까지만 살고자 했다가 최근 ‘90까지 건강하게로 바뀌었었는데, 요즈음 TV90대 할아버지들께서 건강하게 살아가시는 모습이 자주 방영되어 자극을 받게 되니까 마음이 흔들리려 합니다. 나도 우리 할머니처럼 ‘100까지 건강하게로 욕심을 부려봐?

  권력자가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나라의 재물을 함부로 사용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 죽음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백성들은 항거하지 못한다. 진정 부당한 권력에 맞서고 도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자리와 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권력자의 횡포에 당당히 맞서지 못한다. ! 인간의 나약함이여! 그럼 나는?

모용운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국명으로 여전히 연을 내세웠지만 사가들은 이를 후연이 아닌 북연(407-436)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모용운의 원래 성이 고씨이고 고구려 출신이기 때문이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 그의 무예가 뛰어난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양자로 삼았다. 모용운은 황제가 된 후 자신의 성을 다시 고씨로 바꾼 뒤 스스로 대연천황으로 칭했다.

고구려인이 중국의 왕조인 북연을 세운 일은 금시초문이다. 중국인들이 동북공정에 이를 악용할 소지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북위의 군사들은 철군하면서 수천 명에 달하는 북연의 士女들을 약탈해 돌아갔다. 당시 풍흉은 은밀히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고구려 장수왕(413-491)이 이를 받아들였다. 436년 풍흉이 일족과 후궁 및 용성의 백성을 이끌고 밤을 세워 고구려 땅으로 망명했다.

풍흉이 망명하자 장수왕은 그를 북퐁에 안치했다.L 그너나 풍흉은 고구려를 업신여기며 상벌과 正刑을 북연때처럼 행사했다. ...장수왕은 북풍일대를 포위한 뒤 그를 포함해 풍씨 일족을 도륙했다. 4374월의 일이다.

흉노는 이른바 兄死取嫂의 전통으로 인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함께 사는 것을 당연시했다. 저거목건은 부인인 무위공주를 보살처럼 모시면서 매일 과부 형수 이씨와 통간했다.

우리나라의 고구려와 부여에도 있었던 혼인풍습이다. 형이 죽으면 형수와 조카들의 보호와 부양을 책임지는 긍적적인 측면을 보아야 한다. 결코 여자 하나를 더 취하려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북위 황제 탁발도(재위 424-452)는 총애하는 태감 종애가 태자인 탁발황의 휘하 인물들을 모함하자 모두 도륙한다. 이를 본 태자는 걱정으로 자리에 누웠다가 이내 병사했다. 얼마후 탁발도는 태자를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종애는 탁발도가 자신을 추궁할 까 두려운 나머지 밤에 사람들을 데리고 영안궁으로 침입해 탁발도를 죽였다.

공민왕의 죽음과 흡사하다. 1372(공민왕 15) 음력 10, 정비 노국대장공주가 죽고 심질(心疾)을 앓던 공민왕은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모아놓은 자제위(子弟衛)에게 자신의 왕비들을 강간하게 하고, 만약 아이가 잉태되면 공민왕 자신의 아이로 삼으려 하였다. 당시 혜비 이씨(惠妃 李氏), 정비 안씨(定妃 安氏), 신비 염씨(愼妃 廉氏) 등은 이 명령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처음에는 익비도 이를 거부하였으나, 왕이 칼로 위협을 하여 어쩔 수 없이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자제위의 한안(韓安), 홍륜(洪倫) 등은 왕명을 빙자하여 계속해서 익비와 관계를 가졌고, 익비도 이에 못 이기는 척 하며 이들과 함께 했다. 한편 이때 익비와 관계를 가지라는 왕명을 끝까지 거역한 윤가관(尹可觀)은 잠시동안 폐서인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1374(공민왕 17) 익비는 홍륜의 아이를 임신하였다. 당시 내관 최만생(崔萬生)이 변소에서 익비의 임신 소식을 고하자 공민왕은 매우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이의 생부인 홍륜을 살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왕이 홍륜뿐 만 아니라 이 일을 알고 있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 하므로 최만생은 이 일을 홍륜 무리에게 미리 발설하였고, 결국 1374(공민왕 17) 음력 922일 최만생과 홍륜 등은 공민왕을 시해하였다. 익비는 이때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은 1376(우왕 2) 음력 12월 대신들의 건의를 받은 우왕의 명으로 살해되었다.

 

 

5장 남조 제고제 소도성의 창업

소도성이 세운 제나라(479-502)는 불과 422년 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그사이 그 자손들이 서로 도륙하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졌다.

송의 후폐제(473-477) 유욱12세에 즉위했다. ...저녁에 출궁했다가 새벽에 들어오고 새벽에 출궁하면 저녁에 늦게 입궁했다. 종자들은 긴 창과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그를 뒤따르면서 길에서 거치적거리는 것이 있으면 남녀노소와 犬馬牛驢를 막론하고 쳐 죽였다. 유욱이 출궁할 때마다 참살이 벌어지니 이내 길거리에 행인이 없게 되었다. ....진태비가 여러 번 훈계를 하자 이에 한을 품고 독주를 먹여 죽이고자 했으나 좌우에서 만류했다. ...왕경칙 등은 양옥부 일행과 연락해 ...한밤중에 장막 안으로 들어가 유욱을 죽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6세였다.

제나라 황제 소소업은 어릴 때부터 숙부를 따라 움직인 까닭에 특정 선생 밑에서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20여명의 무뢰한과 함께 먹고 마시며 놀았다. 그의 부인 하비도 경박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소소업과 놀던 몇 명의 미소년과 사통했다. ...현지의 부자들로부터 돈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하고 좌우의 무뢰배에게는 누런 종이에 미리 관작을 써 주었다. 황위에 오른 후 즉각 임명하겠다는 취지였다. ...초고가의 싸움닭을 사들여 투계를 즐겼다. 황후 하씨 역시 매우 자유로웠다. 매일 좌우와 난교를 즐겼다. ...근신들이 모반한 까닭에 어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 이내 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병사들이 단칼에 소소업을 베어 버렸다.

소도성의 아들들은 모두 19명이었다. 그중 7명은 칭제하기 전에 죽었고 4명은 일찍 죽었다. ...나머지 8명은 제명제 소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제무제 소색은 모두 2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여섯 명은 일찍 죽고 ...나머지 16명은 모두 도살되었다....역대 왕조의 황실내부에서 일어난 골육상잔중 제명제의 경우가 가장 참혹했다.

황제 소보권16세에 즉위했다. 그는 태자시절부터 혼군의 조짐이 완연했다. 책을 읽거나 글 쓰는 것을 싫어하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한밤중에 몇몇 태감들과 함게 굴을 파 쥐를 잡는 것으로 쥐잡기 놀이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매번 출행할 때마다 백성들은 사방으로 황급히 달아났다. 별견되는 즉시 머리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최대의 화재는 화림에서 비각까지 3천여 칸을 태운 화재이다. 소보권은 그때마다 새로운 전각을 대대적으로 영건했다.

남조는 한마디로 노장의 청담풍조를 이어받은 까닭에 480개에 달하는 사찰이 암시하듯 세상일에 무관심한 행보를 보였다. 혼군과 폭군이 잇달아 배출되고 백성들의 삶이 처참한 상황에 빠진 암흑시대였다. 황제들의 황당하고 포악한 행보는 정상적인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들이었다.

   

6장 북위 효문제의 한화정책

풍태후의 조부 풍홍은 북연의 최후 황제였다. ...문성제 탁발준이 즉위하고 나서 열네 살이 된 그녀는 미모가 뛰어나 귀인에 발탁되었다가 이내 황후가 되었다. ...탁발준이 26세에 죽자 ...탁발홍12세에 보위에 올랐다.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황자 탁발굉이 태어났다. ...수렴청정하는 채 30세가 되지 않은 풍태후는 풍류를 아는 이혁과 관계를 맺었다. 이 사실을 안 탁발홍은 크게 화를 냈다. ...탁발굉에게 선양했다. ...풍태후와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4768월 어느 날 풍태후가 사람을 시켜 독약을 탄 술은 탁발홍에게 갖다 주었다. 영명한 청년 탁발홍은 이내 숨을 거두었다. 당시 23세였다. ...효문제 탁발굉은 자신의 생모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490년 풍태후가 태화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49세였다.

효문제낙양으로 천도했다. 선비족에게 낙양의 기후는 매우 낯설었다. 평성에 비해 너무 습하고 더웠다. 그러나 탁발굉의 목표는 정치와 문화의식의 변화였다. ...4957월 조명을 내렸다. (변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선비어를 포함한 모든 북방어를 금지하고 한어로 통일해 쓴다.

동전을 사용한다.

국자감과 태학, 사문소학을 둔다.

선비족의 성명을 모두 바꾼다. (탁발씨는 원씨로 한다.)

한족 대성의 딸들이 왕비가 되었다.

6진을 수비하던 선비족 장병들이 점차 국인의 지위를 잃었다.

태자 원순이 이에 반대하자 .....폐서인한 뒤 낙양에 구금했다. ....하양의 감옥에서 사사됐다. 당시 15세였다.

효문제는 친정과정에서 엄격한 군율을 만들어 북위의 백성은 물론 남조의 백성들까지 동일하게 대했다. 국공 내전 때 마오쩌둥이 인민들로부터 바늘하나 빼앗지 말 것을 당부한, 이른 바 <3대 기율과 8항주의>를 만들어 인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것도 바로 이를 본 뜬 것이다.

탁발굉이야말로 남북 민족이 하나로 융합해 현대의 중국 민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는게 21세기 중국 학계의 일반적인 평이다.

 

7장 호태후와 이주영의 발호

호태후는 하주자사 호국진의 딸로 10여세에 입궁했다. ..북위의 자귀모사의 관행 때문에 궁내의 비빈은 모두 자신이 낳은 황자가 태자로 책봉되지 않기를 빌었다.. 그러나 호씨는 대담하게도 주변에 이같이 말했다.

천자에게 후계자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황상의 후사를 생각하면 태자를 낳는게 가장 좋은 일이다.”

호씨는 황자를 낳은 후 충화빈으로 진봉됐다. 선무제 아들들은 태어나자마자 이내 고조(외숙)과 그의 조카딸인 고황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515년 선무제가 병사했다.

효명제는 마침내 하나의 계책을 냈다. 이주영에게 밀조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진격케 하는 방안이었다. 호태후를 압박해 친정을 실현시킬 심산이었다. ....결국 효명제 원후는 528년 생모인 호태후에 의해 독살됐다. 당시 그이 나이 19세였다. ...호태후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구구히 변명하자 이주영이 냉소를 지은 뒤 사람을 시켜 호태후와 임도왕을 황하에 내던지게 했다.

이주영의 딸인 이주황후 역시 효장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효장제도 하음의 변 당시 자신의 친형제와 대신들이 도륙을 당한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가 효장제를 보고 축하의 말을 하려는 순간 홀연 2명의 자객이 명광전 동문 쪽에서 칼을 들고 뛰쳐나왔다. 이주영이 순간 어좌쪽으로 달려가 효장제를 붙잡고 저항하려고 했으나 효장제는 이미 무릎아래 칼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는 이주영이 달려오자 곧 바로 칼을 들어 찔렀다. 칼은 그의 복부를 관통했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이주영 일족들이 쳐들어왔다. 효장제는 곧바로 생포됐다. ...이주영의 당질인 이주조는 궁안에서 궁안에서 숙영하며 이주황후 소생의 젖먹이 황자를 쳐 죽인뒤 궁내의 비빈과 공주를 두루 겁탈했다. ...얼마후 이주조는 효장제 원자유를 진양의 사찰안에서 직접 죽였다. 당시 나이 24세였다.

이주조는 고환의 공격을 받아 산속으로 숨었으나 더 이상의 활로가 없었다. 그는 좌우에게 명해 자신의 목을 갖고 가 투항토록 했으나 좌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먼저 자신이 타고 다니던 백마를 죽인 뒤 나무에 끈을 매달고 자진했다.

...당시 조조의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 바로 고환이었다. 북위의 패망하는 과정역시 후한이 패망할 당시의 모습과 흡사하다.

 

8장 북위의 쇠락과 동서분열

북위의 원신 이주영이 전횡할 당시 도독 고환은 이주영에게 황제를 창할 것을 권한 바 있다. 고환은 발해의 수현 사람이다. 중국 사가들은 그를 한족으로 보고 있으나 북연을 세운 고윤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출신일 공산이 크다.

북위는 마침내 효정제 원선견과 효무제 원수 등 두 명의 황제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른바 동위와 서위로 나뉘게 되었다.

서위(535-556) : 효무제 원수(장안, 우문태)북주(556-581)

동위(534-550) : 효정제 원선견(낙양, 고환)북제(550-577)

우문태는 술에 독양을 풀게 했다. 독살당할 당시 효무제 원수의 나이는 25세였다.

동위는 옥벽성을 50여 일 동안 공격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반격을 받아 죽거나 병사한 숫자가 7만 여명에 달했다....5505월 고양은 동위의 마지막 황제인 효정제 원선견을 폐한 뒤 제나라를 세웠다.

 

 9장 양무제의 인신공양과 패망

502양무제 소연(502-549)은 제나라 마지막 황제인 화제 소보융으로부터 선양받고 양나라를 창건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얻었다가 스스로의 잘못으로 나라를 잃게 됐다.

...동위는 서위를 견제하기 위하여 남조의 양나라(552-557)에 우호적인 몸짓을 보였다. 이로 인해 두 나라 사이엔 사절이 끊이지 않았다. 다만 후경이 동위에 반기를 든 후 양무제 소연이 후경을 받아들이면서 다 나라 사이의 우호관계가 끝나고 말았다. 후경과 고환의 아들 고징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불안해진 후경이 마침내 반기를 들고 서위에 투항했다.

후경은 갈족이다. ...후경이 양무제에게 서신을 보내 동위와 화해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549년 후경이 수양에서 반기를 들었다. ...후경은 대성공략이 여의치 않자 크게 초조해했다. 소정덕을 황제로 삼은 뒤 ...소정덕은 ...자신의 딸을 후경에게 보내 첩으로 삼게 했다.

당초 대성 안에는 10여 만 명의 쥔과 2만 여 명의 병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열에 아홉이 죽어 거리는 시체뿐이었다. ...황제의 위엄에 후경이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지방의 일개병사 출신인 그는 천자와 대면한 적이 없었다. ...그는 대성내의 시체들을 모두 화장하고 이 와중에 기아로 인해 병이 든 자들도 산 채로 불속에 집어 던졌다.

양무제는 86세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서법과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고 기사 등 무예에도 뛰어났다. ...하루에 한 끼 식사만 했고 수라에는 생선과 고기가 없었다. ...술도 마시지 않았고 가무음곡을 즐기지도 않았다.

후경은 <우주대장군, 도독육합제군사>를 칭했다. 우주의 총사령관을 자칭한 것은 중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후경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곡바로 건강성 내에 있는 태자 소대기와 심양왕 소대심, 서양왕 소대균 등 20여명의 종실 자제를 도륙했다. ...551년 후경은 더 이상 시간을 늦출 수 없어 스스로 구석을 내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장왕 소동으로부터 보위를 넘겨 받았다.

후경의 휘하장수 노휘는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보고는 이내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후경이 대성까지 도주했으나 감히 입궁할 수 없었다. 그가 말 위에서 왕위를 부른 뒤 욕을 해댔다. ...후경의 측근들이 포로로 잡혔다. 커다란 흙가마니로 간문제 소강을 압살한 팽준도 그 안에 있었다. 후진은 자신의 형제와 자식 등이 학살당한 것을 보복하기 위하여 팽준을 꽁꽁묶고 칼로 그의 배를 가를 뒤 내장을 꺼냈다. 팽준의 생명력은 대단했다. 반나절이 지나 팽준이 자신의 창자를 끌어당겨 뱃속으로 집어넣자 후진이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도주하는 중 후경은 자신의 두아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게 부대 속에 넣어 불에 빠뜨렸다. ...후경이 황급한 나머지 선창으로 돌아가 칼로 배 밑바닥을 뚫을 때 양곤이 긴 창을 들고 갑판위에서 그를 찔렀다. 결국 후경은 죽고 말았다. 그 후 시체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었다. 양나라군사는 시체 뱃속에 소금을 가득 채워 급히 건강으로 보냈다. ....백성들이 곧바로 몰려와 다투어 시체를 먹었다. 뼈까지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후경에게 보내진 간문제의 딸 율양공주 역시 이를 먹었다. 얼마 후 율양공주가낳은 후경의 자식도 거리에서 기름에 튀겨지는 팽살을 당했다.

후경이 강남에서 곤겨에 처해 있을 장시 동위의 고징은 동위에 있는 다섯 아들을 모두 잡아들인 뒤 큰아들부터 학살했다. 먼저 그의 얼굴 껍질을 벗겨내고 큰 솥에 넣은 뒤 미지근한 기름을 부어 서서히 튀겨냈다. 채 열 살이 되지 않은 나머지 4명의 아들은 모두 잠실에서 거세했다. ... 불길한 생각이 든 고양은 다음날 새벽 거세당한 후경의 네 아들을 모두 감옥에서 끄집어 낸 뒤 커다란 솥에 집어넣고 기름을 부어 하나하나 튀겨 죽였다.

 

10장 북제와 북주의 성립과 대치

북제의 경우 황실의 성씨는 고씨이다. 중국 사가들은 하나같이 선비화된 한족출신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성씨인 고씨를 쓰고 출신 지역이 발해인 점을 감안하면 요동에서 요하를 건너 요서로 넘어간 고구려 출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후경은 걸출한 무장이자 음모꾼이었다. 그는 5년여 동안 동위를 배반한 후 양나라를 뒤엎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결국 자신은 물론 일족이 도륙을 당하는 화를 입었다.

...후경의 난으로 인해 많은 지역이 동위와 서위의 땅으로 편입됐고, 나머지 대다수 지역도 사실상 독립한 것이나 다름없는 제후왕의 관할 하에 있었다.

양원제 소역은 이어 조카 소원조와 소원정 형제를 옥에 가둔 뒤 음식을 주지 말게 했다. 이들 형제는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자신들의 팔뚝 위의 살을 씹어 먹다가 13일 만에 아사했다.

...고금의 도서 14만권을 모두 불태우게 했다. 이어 그가 불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자 궁인들이 좌우에서 만류했다. 죽게 되었을 때 책을 불태운 군주는 소역이 첫 번째 인물에 해당한다.

...서위 조정이 양왕 소절에게 명해 소역을 살해케 했다. 결국 양원제 소역은 조카가 보낸 커다란 흙 가마니에 압살을 당했다.

강릉(양의 말기 수도)에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은 24년 만에 자유인이 된 셈이나 진정한 자유를 향유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강남에서 끌려온 대다수 사족은 종신토록 밭을 갈고 말을 기르는 노비의 신세로 살았다.

서위의 뒤를 이은 북주(후주)가 마침내 북제를 멸하고 북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기초가 바로 이때 마련됐다. 북주의 뒤를 이은 수나라가 들어설 당시 남조의 진나라는 이미 촉 땅등의 중요한 군사 요충지를 상실한 까닭에 멸망할 수 밖에 없었다.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여인의 미색은 시간이 지나면 쇠해지고 이에 따라 총애도 식기 마련이다. 시비에서 몸을 일으켜 황후에 오른 목씨가 자신의 시비를 엄히 방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하늘은 종종 사람을 놀리기 마련이다. 그녀의 시비 풍소련은 매우 총명하고 영리했다. 북제의 후주 고위의 시중을 들던 중 5월의 꽃피는 봄날 황제와 함께 무양으로 갔다가 은총을 입게 됐다. 이후 두 사람의 애정행각은 거침이 없었다. 심지에 북제가 망하는 그 순간까지 두 사람은 사랑을 불태웠다. ....후주 고위는 풍소련의 몸매를 혼자 감상하는 것이 아까워 그녀로 하여금 나체로 조당에 누워 있게 하고 대신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포로가 된 군왕은 푸른 옷을 입고는 술잔을 씻고 술병을 든 채 술을 권하며, 춤을 추고, 황후의 傘蓋(우산)를 드는 게 정례로 굳어졌다. 훗날 송나라의 휘종과 흠종 역시 이런 치욕을 당했다. 이로부터 반년 뒤 고위는 모반을 꾀했다는 참소를 당해 종족 1백여 명을 포함해 30여 명의 직계 모두 독약을 먹고 죽었다. ...북주의 제왕 우문달 역시 풍소련을 본 후 넋을 잃고 극히 총애했다. 이로 인해 우문달의 왕비 이씨는 거의 질투로 미칠 지경이었다. ....몇 년 후 수문제 양견이 북주 정제의 보위를 찬탈한 후 우문달의 정비인 이씨의 오빠 이순에게 하사했다. 이순은 풍소련에게 낡은 옷을 입고 방아를 찧게 했다. 얼마 후 이순의 모친이 풍소련을 핍박해 자진케 했다.

 

11장 남북조의 종언과 천하통일

북조는 북주의 무제 우문옹 때에 이르러 하나로 통일됐다. ..그는 절검을 숭상해 평소 베로 만든 옷과 이불을 사용했다. 금은보옥 장식도 몸에 지니지 않았고 궁궐과 의복 역시 사치를 일절 금했다. ...행군 때 병사가 맨발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친히 자신의 신발을 벗어 신겨주기도 했다, 적과 대치 했을 때에도 선봉에 섰다.

북주는 북제와 남조 진나라가 서로 견제하는 틈을 타 일거에 577년 북제를 멸한다. 양견은 581년에 보위를 찬탈하여 수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589년에 진을 멸한다. 드디어 통일제국이 완성되어 370여년에 결친 위진남북조 시대가 끝이 난다.

당시 나라의 국경은 매우 축소되어 있었다. 인구는 2백만 명, 호수는 50만 호에 불과했다. 동진의 뒤를 이은 송나라와 비교하면 거의 절반에 불과했다. 실제의 인구는 사서에 나오는 통계보다 많았으나...

남조의 인구가 대략 100여 만호, 5백여 만 명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시의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로 삼국의 인구를 모두 합하면 그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양견은 매번 아침 연회가 열릴 때마다 진의 마지막 황제인 진숙보가 상심할 것을 우려해 악사에게 강남의 음악을 연주하지 말도록 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진숙보는 조회 때마다 자신의 官號가 없는 것에 불만을 품고 양견에게 實封의 관직을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수문제 양견이 쓴 웃음을 지으며 좌우에게 말했다.

진숙보는 심장과 간이 아예 없는 사람이다!” 

 

이 책에 나타난 제왕과 영웅들의 수명 기록

이 시대의 많은 제왕들은 제 명대로 살지 못했다. 끝없는 전쟁과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으로 젊은 나이에 죽어갔다.

후진

문환제 요홍(30)

후연

소무제 모용성(29) 소문제 모용회(23)

북연

혜의제 고운(36)

북위

태자 탁발황(24) 문성제 탁발준(26) 헌문제 탁발홍(23)

태자 원순(15) 선무제 원각(33) 효명제 원후(19) 권력자 이주영(38) 효장제 원자유(24) 효무제 원수(25)

명제 유욱(16)

울림왕 소소업(22)

원제 소역(47)

동위

황제 고징(29) 황제 고징(29) 황제 고양(31)

황제 고연(28) 황제 고담(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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