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그리움

군산월명여자중학교

청담(靑潭) 2015. 1. 27. 16:19

 

 

군산월명여자중학교

 

 

 

 

 

19923월에 군산월명여자중학교에 부임하게 되었다. 1980년에 개교한 학교로 소룡동에 위치하며, 학년 당 10학급 500여명이나 되는 큰 학교로 전교생이 무려 1500여명이다. 지난해 6월 동산동 삼성아파트로 이사하였으므로 그곳에서 19892월에 구입한 중고 로얄 프린스로 30km를 통근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줄 곳 남녀 공학에만 있다가 처음으로 여중에 근무하게 되었다. 학교장은 유귀호 선생님이신데 아주 소탈하시고 어른스러우시면서도 교직원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시지 않는, 도량이 크신 존경스런 분이시다. 교사가 54명이다. 전주에서 다니시는 분들이 15분 정도, 익산에 사시는 교사는 류용규, 이명재 선생님, 문정아 선생님 정도였고 대부분은 군산출신으로 군산에 사시는 분들이다. 우리 자양중학교에 현재 근무하시는 노은옥 선생님, 박종복 선생님의 부인이 된 김순임 선생님, 도교육청 혁신학교담당 장학사이신 이경자 선생님이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지는 분들이다.

 

 

1992

  첫 헤부터 3학년 담임이다. 학년부장은 아주 열정적이시고 리더십이 강하며 후일 교장으로 퇴임하신 정태정 선생님, 2반은 미남신사 박종남 선생님, 3반은 후일 교감으로 퇴임하신 함용선 선생님, 4반은 미혼이신 두귀숙 선생님, 5반은 매우 여성적인 이난희 선생님, 6반은 대선배이신 이규세 선생님, 7반은 청년 신규교사인 이민구 선생님, 8반은 현재 고교 교감이신 전만배 선생님, 9반은 내가 담임이고, 10반은 매력적인 이승주 선생님이시다. 우리 반 실장은 김은정, 부실장은 윤별인데 모두 참한 아이들이다해마다 학년당 아이들이 500여명이나 되어서인지, 10개 반을 모두 가르쳤어도 앨범을 보니 모두 얼굴을 기억하기는 어렵다. 이 해에 우리 담임들은 밤 10시까지 야간학습을 실시하면서 입시지도와 학력신장에 최선을 다 했다. 나는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이면 학생들 집에 자주 전화하여 휴일에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부모에게 확인까지 하는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매우 지나쳤다. 그래서인지 그 결과 군산여고 장학생의 대부분을 우리 아이들이 차지하였고, 특히 우리 반에서만 3명이나 나왔다. 세 명이 200점 만점에 190점 이상을 맞은 것이다. 그리고 단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원한 학교에 합격했다.(영광여고에 합격하지 못한 그 아이 때문에 마음이 한참 아팠다.) 나의 교직생활 중 가장 학력신장에 심혈을 기울이고 좋은 결실을 맺은 것이긴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선생님으로 기억에 남지는 못했을 듯 싶다. 두 아이가 자주 무단결석하거나 생활태도가 바르지 않아 이를 지도하는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던 것도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 아주 오래전에 6반의 김민정이와 7반의 김영신으로부터 반가운 안부메일을 받은 기억이 있다.

 

 

1993~ 1997

 

학생지도

  대학동문인 채선배가 학교장에게 학생부장으로 추천을 했다더니 학생부장으로 임명되어 무려 5년간을 맡게 된다. 이때부터 사실상 담임은 멀리 하게 되었고 부장 업무만 주로 맡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업무가 힘들고 또 많은 3부장인 교무부장, 연구부장, 학생부장은 일반적으로 담임은 주지 않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승진에 꼭 필요한 담임점수가 있어 전혀 다르다.

  학생부는 별도의 실이 있어 부장인 나와 홍현철, 김진태, 윤상환, 두귀숙, 이민상. 김정식 선생 등이 함께 근무했다. 미술교사인 홍현철 선생과 음악교사인 김진태 선생은 5년 내내 학생부를 함께 하였으니 실로 내 인생의 5년간을 그들과 同苦同樂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이면 김영삼 정권시대인데 이때는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상당히 안정되어 중산층이면 32평 맨션으로 이사하기 시작하고, 대부분 자가용을 가지게 되었고, 집집마다 에어컨을 구입하는 때였다. 대외적으로는 개혁개방의 시대가 되어 해외문화가 쏟아져 들어오고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해외유학도 자유화되어서 중산층들은 해외여행을 다녀오기 시작했다. 대변화의 시대여서인지 학생들의 생활지도가 매우 힘들어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저소득층 학생들의 일탈이 유난히 많았다. 가출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남녀학생들이 어울려 음주를 하거나 함께 밤을 새거나 해서 학생부는 어느 하루 조용할 날이 없었다. 한 학급 50명 중에 무단결석을 하거나 가끔 가출을 하거나 음주와 흡연을 하거나 하는 일탈학생들이 평균 3명 정도였으니 학생부가 항상 주의를 요하는 학생들이 무려 90여명이나 되어 아이들을 불러다 조사하고 처벌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이때 아이들을 체벌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학생부교사로서 일탈학생들의 바르지 못한 행동을 지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체벌을 행하였을 뿐, 전혀 학생 개개인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체벌을 가한 것은 아니었기에 양심에 크게 부끄러움은 없으나 체벌이 없어진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지나쳤던 점이 크고 결코 바람직 하지 않은 지도였다고 하겠다. 가족들은 5년 동안 학생들의 비행사실을 조사하고 회의를 열어 처벌하고, 처벌에 따른 관리를 하느라고 나의 눈빛이 마치 형사들처럼 매서워졌다하여 학생부장 이제 그만두라고 종용하였으므로, 월명여중을 떠난 뒤로는 일체 학생들에게 체벌을 하지 않는 교사가 되었다.

※며칠 전 당시의 어느 학생으로부터 강력한 항의(증◯를 넘어 저◯가 담긴)의 글을 받고 제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어느 날 아침등교시 사소한 이유로 나에게 큰 폭력적 체벌을 받았고 오늘날까지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는 가슴 아픈 사연입니다. 비록 생활지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체벌이라해도 폭력행위에는 그 어떠한 변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억울하게 당한 폭력은 평생 잊기 힘들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인지 모르는 그 학생에게 솔직한 마음으로 크게 사죄하였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그 아픔을 함께 나누어 갖고 싶습니다. 저에 대한 막힘없는 원망의 토로와 저의 용서구함을 받아들이면서 하루빨리 상처가 아물기를 기원합니다. 아울러 제가 생활지도를 담당하던 5년동안 저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를 받은 모든 학생들에게도 용서를 구합니다. 생활지도를 담당하던 5년이 결코 보람만 있었던 시절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억울함을 토로한 그 학생의 입장으로 바꾸어 생각하니 오히려 후회되고 슬픈 시절이 되었습니다. <이게 인생이구나>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그 학생이 받은 상처와 저의 아픈 심정을 공개합니다. 2020.9.12

 

  학생부교사들로서 비행학생들을 불러 조사하고, 호통을 치고 체벌도 하고 반성문도 받고, 처벌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으나 기실 학생부교사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항구도시인 군산이기도 하지만, 우리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쾌활하고 명랑하며 애교가 많고 표현이 적극적인지 학생회간부들을 비롯하여 학생부 선생님들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학생부실에 무시로 놀러왔다. 어느 해인가는 갓 입학한 학생들이 40대의 학생부장인 나에게까지 몰려와 싸인을 받아가는 기분좋은 해프닝도 있었다. 아침마다 정문과 후문에서 등교지도를 하고, 종종 나타나는 바바리 맨을 잡느라 졸지에 뛰어 나가기도 했다. 내가 몸무게 80kg에 운동을 좀 해서 자신 있게 뒤쫓아 잡기도 했지만, 30세 전후의 바바리청년을 잡아 멱살을 잡고 혼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5년동안 학생부장으로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학생회의 활발한 운영과 중도탈락 예방및 최소화였다. 학급회의나 학생회의 건의사항은 학생부장을 거쳐 반드시 그 내용에 따라 교감이나 교장 또는 행정실까지 전달이 이루어져 반영되도록 하였고, 선도부 학생 선발은 꼭 모범학생을 추천해주시도록 담임들에게 간곡히 요구하였다. 모범생이 아닌 학생들에 의한 지도는 3학년이나 후배들이나간에 결코 긍정적 효과를 볼 수 없다는 나의 확신 때문이었다.학생생활지도의 새로운 변화로 보신 담당 장학사의 추천에 의해 도내 학생부장 연수시 발표할 기회도 가졌고, 사례집에 수록되기도 한 바 있다. 무단결석을 자주하고 비행을 하는 자기 반 학생을 미리 퇴학시켜버리려는 어느 선배 담임과는 얼굴을 붉히며 중도탈락을 막아내기도 했다. 

 

간부수련회

  여름방학이면 간부수련회를 갔다. 수학여행 이외에는 학생들이 단체로 합숙하며 지내는 것은 오직 간부수련회 밖에 없어서인지 학생들의 호응은 컸다. 실장, 부실장, 대의원만 해도 120명이고, 선도부까지 모두 150여명이나 된다. 보통 120여명이 참가하는데 우리 학생부에서 장소(주로 시골의 초등학교)를 섭외하고 버스로 이동하여 여름방학 기간 중 23일 동안 무더위 속에서 밥을 해 먹으면서 프로그램에 따라 교사들이 직접 진행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30대 초반의 홍현철, 김진태. 윤상환 선생 등이 젊기도 하고 학생들과 수련회를 하는 것을 크게 즐겁게 여기는 사람들이어서 해낸 일이지만, 요즈음은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지금 우리 학교는 혁신학교로서 학생들에게 일체의 경비부담 없이 연중 수많은 다양한 체험학습을 그리 힘들지 않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1996년부터는 학교장에게 강력하게 건의하여 무주리조트로 가게 되고 야외훈련은 전문 지도자들이 맡아주어서 교사나 학생 모두가 아주 행복한 수련회가 되었다. 

 

대전엑스포

  1993년에 대전엑스포(세계박람회)가 열렸는데 1995에는 전국의 학생들에게도 단체참관을 장려하여 우리학교도 전교생이 참관하게 되었다. 지난 해 겪은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세월호 참사가 아니더라도 진즉부터 학생들의 체험활동은 3개 반 이하로 묶어 실시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당시의 분위기로는 마땅히 학년별로 3회 실시하여야 함에도 새로 부임하신 학교장이 교육과정의 운영상 복잡하다는 이유로 전교생을 하루에 참관시키도록 하고 학생부장인 내게 총 인솔지도를 지시하였다. 무려 34대의 버스로 군산을 출발하여 고속도로에 진입하는데 내가 봐도 장관이었다. 학생들은 각자 준비한 도시락이 있지만 기사들의 점심은 단체로 도시락을 준비하여 이를 배분하는 일도 정말 힘들었다. 나는 밥을 먹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1500여명의 학생들과 60여명의 교직원들이 34대의 버스를 타고 체험학습을 나가 사고는 일절 없었지만, 정신 장애아 학생 하나가 길을 잃고 늦게 오는 바람에 나는 그 아이를 찾아 출발하였기에 가장 늦게 도착하였는데 교장은 수고했다는 말 대신에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며 힐란하였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고 계획에서부터 관리에까지 혼자 계획하고 명령하고 인정과 칭찬보다는 책망부터 하는 전형적인 지시형 교장이었기에 훗날 反面敎師가 되었다.

 

 

수학여행

  요즈음 수학여행은 당연히 학년부장 몫이다. 그런데 당시 2학년 학년부장을 대개 여교사가 맡게 되어 수학여행 시 인솔지도만큼은 학생부장이 맡도록 하여 23일의 설악산 수학여행은 으레 긴장 속에서 다녀왔다. 아이들이 여관에 든 뒤 방안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밖에 나가 남학생들과 접촉을 시도하거나 외출금지시간에는 지나가는 남학생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몰래 나가기 위해 온갖 술수를 쓰니 12시까지 통제하느라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었다. 물론 교사들과 함께 하지만 사고가 날까봐 여간 걱정되고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학생회지《월명

 

  개교한지가 무려 15년인데 교지가 발행되지 않고 있다. 마침 학생부 예산이 여유가 있어 학교장의 허락을 받아 학생회지를 발행하기로 하였다. 표지는 홍현철 선생의 작품을 컬러로 장식하였고, 학생들이 읽기 좋게 잡지형 4·6배판으로 정성을 기울여 1994년 12월 창간호를 간행하였다. 내가 2호까지 발행하였을 때 이항근 선생이 넌지시 “학생부에서 힘들게 발행하지 말고 업무 담당자를 두고 발행하고 교지로 발전시키면 어때요?”라는 건의를 해와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이후로는 담당교사가 발행하게 되었다. 내가 4호까지 잘 보관하고 있다.

 

 

 

 

 

  6년 동안에 수년간 함께 근무한 또래 교사로는 민순희 선생님, 소용섭 선생님, 이봉희 선생님, 김문기 선생님 등이 있었고, 후배로는 현 고교 교장인 이항근 선생 등이 있다.

  학생부장이라고 특별히 앨범을 주어서인지 무려 4권을 가지고 있는데 1993학년도와 1995학년도 앨범은 없다. 1994학년도에 3학년으로는 함께 학생부장을 하던 모 고교의 박부장님의 딸인 박민리가 기억이 크고, 학생회장이던 두선아와 강민연은 최근에 두 어 차례 만났다. 둘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군산에 근무 중인데 만나서 너무나 반가웠다. 그리고 오래 전에 메일을 보내온 김선영이가 있다. 아마 당시의 학생이라면 그 누구라도 그들처럼 반가울 거다.

 

학교급식

  아주 옛날부터 우리 학생들은 엄마가 싸주시는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등교하였다.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보리밥이 부끄러워 점심시간이면 도시락 뚜껑을 덮고 먹는 아이들이 많았고, 통학버스 속에서 가방 밖으로 김치 국물이 흘러 창피함에 몸 둘 바를 모르는 학생들도 많았다. 모두 가난하던 시절의 모습들이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여전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8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가 눈에 띠게 좋아짐에 따라 간식거리가 풍부해지자 학생들이 도시락 들고 오는 것을 기피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어려운 형편에 엄마가 직장에 나가는 가정의 아이들이 더욱 심했다. 우리 교사들도 도시락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도시락 들고 다니기가 귀찮아 남교사들은 대부분 매식을 했는데 짧은 점심시간에 식당에 다녀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월명여중에서는 학교장이랑 7-8명의 교사들이 매일 두 대의 자가용으로 산업도로에 있는 대중식당을 다녔었다.

  1995년 봄 학교장으로부터 도시락 급식을 검토해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학생들을 조사해보니 약 20%의 학생들이 도시락을 가져오지 않고 굶고 있어 자라는 아이들의 건강과 발육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다, 도시락 급식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3분의 2에 달했다. 갈수록 엄마들까지 직장에 나가는 가정의 비율이 급증하는 추세이므로 교무회의를 통하여 도시락 급식을 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군산의 몇몇 중고교에서 이미 전년부터 시작하고 있었고 우리 학생부에서 급식인원 조사 및 교실로의 운반 관리를 맡았다. 익산의 도시락 업체에서 운반해오면(아직 군산에는 급식업체가 없었다.) 각 학급의 당번들이 날라다가 교실에서 먹고 다시 급식운반차에 반납하는 방식이다. 도시락은 플라스틱으로 되어있고, 밥과 반찬 서너 가지가 들어있으며, 국물은 별도로 하나씩 지급되었다. 우리 교사들도 절반은 급식도시락을 이용했는데 요즈음 가격으로 3천 원 정도에 부인을 귀찮게 하지 않거나 또는 밖에 나가 먹고 오는 번거로움 없이 간단히 점심을 해결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가끔씩 이물질이나 파리가 나타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여 곤혹스러웠지만 하루 900명 이상이 이용하는 급식을 중단하기는 어려웠고, 내가 부안여상으로 이동한 후에야 전국의 모든 학교들이 학교급식을 하게 됨에 따라 도시락 급식은 곧 중단되었다고 들었다.

 

매점

  1996년 학생회에서 매점설치를 강력히 건의함에 따라 매점설치를 검토하였다. 기왕에 운영하는 여러 학교를 조사한 결과 학교의 직접 운영은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금전문제가 자주 발생하므로 위탁운영이 바람직하다는 권고에 따라 위탁운영으로 결론을 내렸다. 교무회의를 통과하고 운영자를 공모했는데 학교고용직 근무자도 가능하다는 교육청의 해석에 따라 우리학교에 근무하는 고영효 주사가 운영권자로 선정되어 그의 부인이 운영하게 되었다. 학용품과 과자 및 음료수만 판매하기로 하고 물건 값은 시중보다 싸게 판매하며 일정액의 장학금을 학교에 납입하기로 정하였다. 학생들의 희망에 따라 설치한 매점이지만 아이들의 군것질이 너무 많아지는 문제점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1992학년부터 1996학년도까지는 국사를 담당하였으나 1997학년도는 3학년이 무려 13개 반에 학생수가 620여 명이었고, 나는 학교에 한문교사가 없어 한문을 가르치는 기록을 남겼다. 덕분에 한문 기초를 공부하게 되어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다. 이 해에 실장이었던 정수현이와 문영신, 고교졸업 이후에도 연락을 해오던 윤은정, 그리고 홍유라는 내게 편지를 담은 CD를 선물하여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모두 그리운 학생들이다.   

  월명여중에서 6년간 장기근무를 마치고 1998년 신 학년에는 다시 고등학교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집에서 통근하기 쉬운 지역으로 지망하니 부안여상으로 전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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