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둠

권근 : 봄날 성남에서 읊다

청담(靑潭) 2016. 7. 25. 19:24

 

 

春日城南卽事 춘일성남즉사

 

양촌 陽村 권근(權近 1352-1409)

 

春風忽已近淸明 춘풍홀이근청명

 

細雨霏霏晩未晴 세우비비만미청

 

屋角杏花開欲遍 옥각행화개욕편

 

數枝含露向人傾 수지함로향인경

 

 

 

봄날 성남에서 읊다

 

양촌 권근

 

봄바람 느닷없이 불어 청명이 가깝고

보슬비 부슬부슬 저물도록 개지 않네.

집 모퉁이 살구꽃 활짝 피려고

몇 가지 이슬에 젖어 나를 향해 늘어졌구나.

 

제19회 전북서예전람회 입선(2016.11)

 

 

 

어구(語句)

卽事 : 지금 당장의 사물을 즉흥으로 읊는 일.

淸明 : 24절기의 하나로 양력 4월 5, 6일 경이며 한식날과 비슷하게 있음.

霏霏 : 비나 눈이 계속 내리는 모양.

屋角 : 지붕 모서리.

遍 : 두루. 널리. 고루 미치다.

 

감상(鑑賞)

봄바람이 예고 없이 불더니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린다. 청명 좋은 계절이 다가와 살구꽃이 피려고 꽃봉오리가 한껏 부풀어 보슬비를 이기지 못하고 나를 보라는 듯 휘어 늘어져 있구나.

 

양촌 권근

1352(공민왕 1)∼1409(태종 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소오자(小烏子). 보(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고(皐), 아버지는 검교정승 희(僖)이다.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 :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화친함)을 주장했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몰래 뜯어본 죄로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

그 뒤 영해(寧海)·흥해(興海) 등을 전전하여 유배되던 중,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한때 청주 옥에 구금되기도 했다. 뒤에 다시 익주(益州)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1393년(태조 2)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 : 태조의 아버지 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바쳤다. 그런데 이 글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로부터 유문(諛文)·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했다.

그 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 :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속에 표현된 내용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함)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 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했다. 그리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 정종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했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4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고,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한편,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 : 저술하여 정리함)하고, 하륜(河崙) 등과 ≪동국사략≫을 편찬하였다. 또한, 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임해 유생 교육에 힘쓰고, 권학사목(勸學事目)을 올려 당시의 여러 가지 문교시책을 개정, 보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해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했다.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학문적 업적은 주로 ≪입학도설 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으로 대표된다. ≪입학도설≫은 뒷 날 이황(李滉) 등 여러 학자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오경천견록≫ 가운데 ≪예기천견록 禮記淺見錄≫은 태종이 관비로 편찬을 도와, 주자(鑄字)로 간행하게 하고 경연(經筵)에서 이를 진강(進講)하게까지 했다.

 

이밖에 정도전의 척불문자(斥佛文字)인 ≪불씨잡변 佛氏雜辨≫ 등에 주석을 더하기도 했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 40권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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