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서긍(11세기 말 ∼ 12세기 중엽)
자는 명숙. 1123년(인종 1) 송나라의 사신인 노윤적과 함께 고려에 와서 개성에 1개월간 머물렀다. 이때 보고 들은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가 귀국하여 이듬해에 이를 책으로 엮었는데, 이것이 바로 〈선화봉사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일명 〈고려도경〉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40권으로 되어 있는데, 원래는 삽도가 있었으나 금(金)의 침입으로 삽도는 없어지고 글만 남았다.
이 책은 당시 고려의 실정을 중국에 소개한 유일한 자료로서, 고려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고, 이 가운데 한국말 소개는 우리말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고려도경〉을 편찬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관직도 대종승을 거쳐 장서학에 이르렀다.
※1123년은 중국의 격동기였다. 송나라(북송 : 960~1127) 멸망 직전의 시기였던 것이다. 당시 중국은 동북3성 지역은 거란(요: 916~1125)이 지배하고 있어 중국은 크게 두 나라가 양분하여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이 등장한 여진(금 : 1115~1234)은 1125년에 송과 연합하여 거란(요)를 멸망시키고 서하와 고려를 복속시킨다. 이어 송나라 수도였던 허난성의 카이펑[開封]을 공격하여 1127년 송나라의 상황(上皇) 휘종(徽宗:재위 1100∼1125) ·황제 흠종(欽宗) 등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이로써 금은 만주 전역과 내몽골[內蒙古] ·화베이[華北] 지역 등에 걸친 대영토를 영유하게 되었고 한족은 남송(1127~1279)을 세워 다시 중국은 크게 두 나라로 갈라졌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서(宣和奉使高麗圖經序)
●나는 우매한데도 외람되이 빈 자리를 채우게 되어 사신의 말석에 끼이게 되었다. 큰 일이야 물론 그 장(長)의 결정에 따라야 하겠지만,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소소한 것은 또 조정에서 자격에 따라 시킨 일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기에 부족하다. 물러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성실하게 찾아서 묻고 의논하라’고 황황자화(皇皇者華)의 시에 노래되었으니, 일을 두루 묻는 것은 정사(正使)된 사람의 직책일 것이다. 그래서 삼가 이목이 미치는 데 따라 널리 여러 설을 채택하여, 중국과 같은 것은 뽑아 버리고 중국과 다른 것들을 취하니 도합 3백여 조가 되었다. 이를 정리하여 40권으로 만들었는데, 물건은 그 형상을 그리고 일은 설명을 달아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 명명하였다.
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권
■시봉(始封)
고려의 선조는 대개 주 무왕(周武王)이 조선(朝鮮)에 봉한 기자 서여(箕子胥餘 기는 봉지, 서여는 기자의 이름)이니, 성은 자(子)이다. 주(周)ㆍ진(秦)을 지나 한 고조(漢高祖) 12년(B.C.195)에 이르러 연(燕) 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할 때 무리를 모아 추결(椎結 상투를 가리킨다)하고 와서 오랑캐를 복속시켜 차차 조선 땅을 차지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자성(子姓)이 나라를 차지한 지 8백여 년 만에 위씨(衛氏)의 나라가 되었고 위씨가 나라를 차지함이 80여 년이었다.
이에 앞서, 부여(夫餘)의 왕이 하신(河神)의 딸을 얻었는데 햇빛이 비치어 임신하였으며 알[卵]을 낳았다. 자라서 활을 잘 쏘았는데, 세속에서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 하므로, 따라서 ‘주몽’이라고 이름지었다. 부여 사람들이 그의 출생이 이상했던 때문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제거할 것을 청하였다. 주몽이 두려워서 도망하다가 큰물을 만났는데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게 되매 활을 가지고 물을 치면서 주문(呪文)을 외니, 물고기와 자라가 줄지어 떠올랐다. 그리하여 타고 건너가 흘승골성(紇升骨城만주 혼강(渾江) 유역의 환인(桓仁) 지방으로 비정(比定)된다)에 이르러 살면서 그곳을 스스로 ‘고구려(高句驪)’라 부르고, 따라서 ‘고(高)’로 성씨를 삼고 나라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모두 5부족(部族)이 있었는데, 소노부(消奴部)ㆍ절노부(絶奴部)ㆍ순노부(順奴部)ㆍ관노부(灌奴部)ㆍ계루부(桂婁部)가 그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현도군(玄菟郡)에 소속시키고, 그 군장(君長)에게 고취(鼓吹)와 기인(伎人)을 내려주었다. 고려는 늘 현도군에 가서 조복(朝服)ㆍ의복ㆍ책(幘 머리에 쓰는 건의 하나)을 받아왔고, 현령(縣令)이 명적(名籍 호적)을 맡아 보았다.
2.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권
■국성(國城)
고려는, 당 나라 이전에는 대개 평양(平壤)에 있었으니, 본래 한 무제(漢武帝)가 설치했던 낙랑군(樂浪郡)이며, 당 고종(唐高宗)이 세운 도호부(都護府)이다. 《당지(唐志)》를 상고하여 보면 ‘평양성은 바로 압록강 동남쪽에 있다’ 하였는데, 당 나라 말엽에 고려의 군장(君長)들이 여러 대를 겪은 전란을 경계하여 점점 동쪽으로 옮겨갔다. 지금 왕성(王城)은 압록강의 동남쪽 천여 리에 있으니, 옛 평양이 아니다.
■민거(民居)
왕성이 비록 크기는 하나, 자갈땅이고 산등성이여서 땅이 평탄하고 넓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과 개미 구멍 같다. 풀을 베어다 지붕을 덮어 겨우 풍우(風雨)를 막는데, 집의 크기는 서까래를 양쪽으로 잇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부유한 집은 다소 기와를 덮었으나, 겨우 열에 한두 집뿐이다.
■방시(坊市)
왕성(王城)에는 본래 방시가 없고, 광화문(廣化門)에서 관부(官府) 및 객관(客館)에 이르기까지, 모두 긴 행랑을 만들어 백성들의 주거를 가렸다. 때로 행랑 사이에다 그 방(坊)의 문을 표시하기를, ‘영통(永通)’ㆍ‘광덕(廣德)’ㆍ‘흥선(興善)’ㆍ‘통상(通商)’ㆍ‘존신(存信)’ㆍ‘자양(資養)’ㆍ‘효의(孝義)’ㆍ‘행손(行遜)’이라 했는데, 그 안에는 실제로 시장 거리나 민가는 없고, 적벽에 초목만 무성하며, 황폐한 빈터로 정리되지 않은 땅이 있기까지 하니, 밖에서 보기만 좋게 한 것뿐이다.
■무역(貿易)
고려의 고사(故事)에, 매양 사신이 이르게 되면 사람들이 모여 큰 저자를 이루고 온갖 물화(物貨)를 나열하는데, 붉고 검은 비단은 모두 화려하고 좋도록 하려고 힘쓴다. 그러나 금과 은으로 만든 기용(器用)은 모두 왕부(王府)의 것을 때에 맞추어 진열한 것이지 실제로 그 풍속이 그런 것은 아니다. 숭녕(崇寧)이나 대관(大觀) 때의 사자는 이런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한낮에 시장을 벌여 남녀ㆍ노소ㆍ관리ㆍ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交易)하고,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紵布)나 은병(銀鉼)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일용(日用)의 세미한 것으로 필(疋)이나 냥(兩)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치수(錙銖)를 계산하여 상환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중간에 조정에서 전보(錢寶 화폐)를 내려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부고(府庫)에 저장해 두고 때로 내다 관속(官屬)들에게 관람시킨다 한다.
3. 선화봉사고려도경 제4권
■광화문(廣化門)
광화문은 왕부(王府)의 편문(偏門)인데, 동쪽으로 향했고, 모양과 제도는 대략 선의문과 같은데, 유독 옹성(甕城)이 없고, 문채나게 꾸민 공력은 더하다. 역시 문 셋을 냈는데, 남쪽 편문에는 의제령(儀制令) 4가지 일을 방시(榜示)했고, 북쪽 문에는 《주역》 건괘(乾卦)의 요사(繇辭) 5글자 건(乾)ㆍ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을 방시했으며, 또한 춘첩자(春帖字 입춘날 대궐 안 기둥에 써 붙이는 주련(柱聯))에 이렇게 썼다.
눈 자취 아직도 삼운폐에 있는데 / 雪痕尙在三雲陛
햇살이 비로소 오봉루에 오르네 / 日脚初升五鳳樓
제후들 잔 올려 축수하니 / 百辟稱觴千萬壽
곤룡포 자락에 서광이 어렸도다 / 袞龍衣上瑞光浮
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5권
■궁전(宮殿)
고려는, 전대(前代)의 역사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데,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며, 농지가 적어 힘써 지어도 자급(自給)할 수 없으며 그 풍속은 음식을 절제하고 궁실(宮室)을 짓기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구조는 둥근 기둥에 모난 두공(頭工)으로 되었고, 날아갈 듯 연이은 용마루에 울긋불긋 단청으로 꾸며져 바라보면 담담(潭潭 깊고 넓은 모양)하고, 숭산(崧山) 등성이에 의지해 있어서 길이 울퉁불퉁 걷기 어려우며, 고목(古木)이 무성하게 얽히어 자못 악사(嶽祠)ㆍ산사(山寺)와 같다.
5. 선화봉사고려도경 제8권
■수태사상서령(守太師尙書令) 이자겸(李資謙 : ? ~ 1126)
고려는 본래부터 족망(族望)을 숭상하고 국상(國相)은 거개 훈척(勳戚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과 임금의 친척)을 임용한다. 왕운(王運 선종(宣宗))으로부터 이씨(李氏)의 후손에게 장가 들었는데, 왕우(王俁 예종)도 세자(世子) 때에 또한 이씨의 딸을 맞아 비(妃)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문호(門戶)가 빛나고 드러나기 시작하여, 자겸의 형 자의(資義)가 전대(前代) 왕 때에 이미 국상이 되었다가 일에 연좌되어 유찬(流竄 귀양보내는 것)되었기 때문에 자겸이 형의 일을 경계삼아 매양 스스로 조심하였으므로, 왕우가 깊이 신임하고 중히 여겨 춘궁(春宮 세자)의 스승이자 벗을 삼았다.
이때 왕해(王楷 인종)가 아직도 어렸지만, 자겸이 박식하고 견문이 많은 선비 8인을 선발하여 지도하게 하였다. 이를테면 김단(金端) 같은 무리는 그 무렵 본조(本朝)로부터 사제(賜第 임금의 명령으로 특별히 급제한 사람과 똑같은 자격을 주는 것)를 받고 귀국하였는데, 바로 이 선발에 참여되었다.
임인년(1122, 예종17) 여름 4월에 왕우(王俁)가 죽으매, 여러 아우들이 다투어 왕위에 오르려고 했다. 이에 앞서 왕옹(王顒 숙종)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왕우가 맏아들이었다. 자겸이 이미 왕해를 세웠는데, 중부(仲父) 대방공(帶方公) 보(俌)가 그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여 드디어 문하 시랑(門下侍郞) 한교여(韓繳如)ㆍ추밀사(樞密使) 문공미(文公美)와 더불어 불궤(不軌 반역)를 음모하니, 예부 상서(禮部尙書) 이영(李永)ㆍ이부 시랑(吏部侍郞) 정극영(鄭克永)ㆍ병부 시랑(兵部侍郞) 임존(林存) 등 10여 인이 내응(內應)하기로 했었는데, 미처 거사하기 전에 음모가 누설되매, 곧 체포하여 하옥(下獄)하였다. 자겸이 이에 왕에게 풍간(諷諫)하여 보를 해도(海島)에 추방하고 여러 악인들을 베었으며 관련자 수백 인을 잡아들였다. 그리하여 변란을 안정시킨 공으로 태사(太師)로 승진시키고 식읍(食邑)과 채지(采地)를 더 주었으며 벼슬이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자겸은 풍모(風貌)가 의젓하고 거동이 화락하고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즐겁게 여겨, 비록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자못 왕씨(王氏)를 높일 줄 알아서, 오랑캐 중에서는 능히 왕실을 부장(扶獎)하는 자이니, 역시 현신(賢臣)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참소를 믿고 이득을 즐기며 전토(田土)와 제택(第宅)을 치장하여 전답이 연달아 있고 집 제도가 사치스러웠고, 사방에서 궤유(饋遺 선물)하여 썩는 고기가 늘 수만 근이었는데, 여타의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 나라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루하게 여겼으니 애석한 노릇이다.
■동접반 통봉대부 상서예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同接伴通奉大夫尙書禮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 김부식(金富軾 : 1075-1151)
김씨는 대대로 고려의 큰 씨족이 되어 전사로부터 이미 실려 오는데, 그들이 박씨(朴氏)와 더불어 족망(族望)이 서로 비등하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문학(文學)으로써 진출된 사람이 많다. 부식은 풍만한 얼굴과 석대한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 일을 잘 알아, 학사(學士)들에게 신복(信服)을 받는 것이 그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
그의 아우 부철(富轍) 또한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다. 일찍이 그의 형제들의 이름 지은 뜻을 넌지시 물어 보았는데, 대개 사모하는 바가 있었다.
6.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1권
■장위(仗衛)
고려 왕성(王城)의 장위(仗衛 의장과 호위)는 다른 고을에 비하여 가장 성대하고, 날랜 군사가 모두 모였으며, 중국의 사절이 이르면 이들을 모두 내어 보여 영예로운 모양을 과시한다.
그 제도는 백성이 16세 이상이면 군역(軍役)에 충당되는데, 그 육군(六軍 육위(六衛))의 상위(上衛 상번(上番)하는 군사)는 항상 관부(官府)에 머무르고, 나머지 군사는 모두 전지[田]를 지급하여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가, 경(警 외국의 침입 등 국가의 비상사태)이 있으면 무장을 하고 적지에 달려가고, 일을 맡게 되면 또 그 일에 종사하며, 일이 끝나면 다시 농토에 복귀하니, 우연하게도 옛날의 향민제도[鄕民之制]에 부합된다.
처음 위(魏) 나라 때 고려(高麗 즉 고구려) 호수는 3만에 불과하더니, 당 나라 고종(高宗 649~683)이 평양(平壤)을 함락시켰을 때 수합한 군사가 30만이었고, 지금은 전세(前世)에 비해 또 배가 증가되었다.
왕성에 머물러 숙위(宿衛)하는 군사는 항상 3만이며, 이들이 교대로 번(番)을 나누어 수비한다.
7.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5권
■거마(車馬)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군사가 있는데, 군사는 수레로 운송하며 수레는 말로 끌게 한다. 그러므로 옛적에 나라의 등급을 만들 때에 반드시 수레의 수를 보아 그 크고 작음의 차등을 두었으니, 《시(詩 모시(毛詩))》의 송(頌)에 노(魯)와 위(衛)의 부(富)를 칭송함도 모두 말[馬]로써 말한 것이다. 고려는 비록 해국(海國)이나, 무거운 짐을 끌고 먼 곳을 가는 데는 거마를 폐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토지가 낮고 좁으며 도로에는 모래와 자갈이 많아 중국과 비교되지 않으므로 수레의 제도와 말을 어거하는 방법도 다르다.
■우거(牛車)
우거의 시설은 제작이 간략하여 특별한 법도가 없다. 아래에 두 개의 수레바퀴가 있고, 앞의 멍에에 소를 매어 끌게 하는데, 매양 그 위에 물건을 싣고는 반드시 새끼줄로 꿰어매어야 비로소 기울어 엎어짐을 면할 수가 있다. 더구나 그 나라는 거개가 산길이어서, 행진하면 울퉁불퉁 흔들리니, 다만 예를 갖춘 도구일 뿐이다
■왕마(王馬)
왕이 타는 말은 안장이 매우 화려하여, 금으로 된 것도 있고 옥으로 된 것도 있으니, 모두 조정(朝廷 중국을 지칭)에서 내린 것이다. 평상시 탈 때에는 말에 갑옷을 입히지 않고, 오직 팔관재(八關齋)와 조서를 받는 큰 예식이 있을 때에만 마갑(馬甲) 위에 다시 안장과 고삐를 더하고, 수놓은 휘장[繡帕]을 씌우며, 혁대와 번영(繁纓 여러 가닥의 끈)에 모두 난성(鸞聲 방울소리)이 어울려 또한 매우 화려하다. 다만 중국에 비하여 안장 뒤에 다시 수놓은 방석을 더하였으니, 또한 시종관(侍從官)이 융좌(狨坐 융가죽으로 만든 방석. 융은 짐승이름)를 까는 것과 같다.
■사절마(使節馬)
고려는 대금(大金 여진족이 세운 금을 높여 부르는 이름)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그 나라에는 준마(駿馬)가 많다. 그러나 말 기르는 사람[圉人]이 길들이기를 잘못하여, 그 걸음이 빠른 것은 모두 천연적인 것이요, 사람의 힘을 빌려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안장의 제도는 오직 왕이 타는 것만이 붉은 비단에 수놓은 안장에다 금옥 장식을 더한 것이고, 대신들은 자주색 비단에 수놓은 안장에다 은으로 장식을 하였다. 나머지는 거란의 풍속과 같이 또한 등급이 없다. 처음 사신이 사관에 도착하면 날을 가려 조서를 받는데, 받드는 안마(鞍馬 안장 갖춘 말)가 대략 왕의 제도와 같았다. 그래서 사자가 참람되고 사치하다고 여러 차례 굳이 사양한 뒤에야 고려 관원이 타는 것과 같은 다른 말로 바꾸었다. 상절(上節)이 탄 것은 사부(使副)의 것보다 한 등급 내리고, 중절(中節)은 등급에 따라 강쇄하였다.
■기병마(騎兵馬)
기병이 탄 안장은 매우 정교하다. 나전으로 안장을 만들고, 안장의 끈과 고삐는 백지(栢枝)와 마노석(馬瑙石 보석의 일종)으로 만들었는데, 사이사이 황금과 오은(烏銀)을 섞어 장식하였다. 양쪽 언치[䪌 안장 밑에 까는 깔개]에는 거위 목을 그렸는데 몸의 배나 되며, 고려 사람은 이를 ‘천아(天鵝)’라 한다. 가죽 고삐와 방울 울리는 것도 옛 뜻이 있다.
■잡재(雜載)
고려는 산이 많고 도로가 험하여 수레로 운반하기가 불리하다. 또 낙타(駱駝)로 무거운 것을 끄는 것도 없으며 사람은 매우 가벼운 것이나 지고 간다. 그래서 이것저것 싣는 데는 말을 많이 쓴다. 그 제도는 두 개의 용기(容器)를 좌우에 장치하고 말 등에 옆으로 걸쳐 놓은 다음 물건들을 모두 그 용기 속에 넣는다. 머리를 얽고 가슴을 매는 것은 승기(乘騎 타는 말)의 제도와 같으며, 앞에서 끌고 뒤에서 모는데 그 걸음이 자못 빠르다고 한다.
8.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6권
■창름(倉廩)
대개 쌀은 공기가 소통되지 아니하면 부패하게 되는데, 지금 고려의 창름에는 비록 두어 해가 된 쌀이라도 신곡(新穀) 같은 것은 멱서리[苫]로 쌓는 법을 써서 다소 공기가 소통하기 때문이다.
국상(國相)에게는 해마다 쌀 4백 20섬을 주되, 치사(致仕 지금의 정년퇴임과 같다)하면 반으로 주고, 상서(尙書)ㆍ시랑(侍郞) 이하는 2백 50섬, 경(卿)ㆍ감(監)ㆍ낭관(郞官)은 1백 50섬, 남반관(南班官)은 45섬, 제군(諸軍)의 위(衛)ㆍ녹사(錄事)는 19섬인데, 그중 무신(武臣)은 이등급에 비교하여 문관(文官)과 서로 비등하게 올려준다.
내ㆍ외직(內外職)의 현임(現任)으로서 녹을 받는 관원이 3천여 명이고, 산관 동정(散官同正)으로서 녹은 없이 전토(田土)를 급여(給與)받은 사람이 또한 1만 4천여 명인데, 그 전토는 모두 지방 고을[外州]에 있으며, 전군(佃軍)이 농사지어 시기에 맞추어 가져다 바치면 나누어 급여해 준다.
■약국(藥局)
고려의 옛 풍속은 사람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아니하고 오직 귀신을 섬길 줄만 알아, 저주(咀呪)하여 이겨내기를 일삼는다. 왕휘(王徽 문종) 때 사신을 보내어 입공(入貢)하고 의술(醫術)을 구해 간 뒤로부터 사람들이 점차로 배워 익혔으나, 그 방술에 정통(精通)하지는 못했다.
선화(宣化) 무술년(1118, 예종13)에 사신이 와서 글을 올려, 의직(醫職)을 내리어 가르쳐 주기를 청하므로, 상(上)이 그 건의를 허락하여 드디어 남줄(藍茁) 등을 고려로 보냈는데, 그런 지 두 해 만에 돌아왔다.
그 뒤부터 의술을 통한 자가 많아져서, 보제사(普濟寺) 동쪽에 약국(藥局)을 세우고 3등급의 관원을 두니, 첫째는 태의(太醫), 둘째는 의학(醫學), 셋째는 국생(局生)이라 하여, 푸른 옷에 나무 홀(笏 관인이 조정에 들어갈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는 것) 차림으로 날마다 그 직에 임했다.
고려는 다른 물화는 모두 물건으로써 교역(交易)했으나, 오직 약을 사는 것은 간혹 전보(錢寶)로써 교역하였다.
■영어(囹圄)
영어의 만듦새는 그 담장이 높아 모양이 환도(環堵 둥글게 담을 친 집)와 같고 중앙에 집이 있으니, 대개 옛날의 원토(圜土 감옥)와 같이 만든 것이다. 지금 관도(官道)의 남쪽에 있어 형부(刑部)와 마주하고 있다.
가벼운 죄인은 형부로 보내고 도둑 및 중죄인은 옥(獄)으로 보내는데, 포승으로 잡아매어 한 사람도 도망갈 수 없고, 또한 가추(枷杻)를 채우는 법도 있다. 그러나 지체시키기만 하고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여 철을 넘기고 해를 지나게 되기까지 하는데, 오직 금(金)으로 속바쳐야만 풀려나게 된다.
무릇 장형(杖刑)을 집행하는 법은, 하나의 큰 나무를 가로질러 놓고 두 손을 그 위에 묶어 땅에 엎드리게 한 다음에 치는데, 태장(笞杖)은 매우 가벼워 백 대에서 열 대까지 그 경중에 따라 가감(加減)한다.
오직 대역(大逆)과 불효(不孝) 죄는 참형(斬刑)하고, 다음은 뒤로 결박하여 비골(髀骨 넓적다리뼈)과 가슴이 서로 닿도록 하여 피부가 터지게 되어야 그만두니, 또한 거열(車裂)과 같은 유이다. 외방 고을에서는 형살(刑殺)을 시행하지 아니하고 모두 칼을 씌워 왕성(王城)으로 보내는데, 해마다 8월에 여수(慮囚 죄상을 참작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는 것)한다.
오랑캐들의 성격이 본디 인자하여, 죽을 죄라도 거의 용서하여 산골이나 섬으로 유배(流配)하고, 사면해 주는 것은 세월의 다소와 죄의 경중을 헤아려 용서하여 준다.
9.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7권
■사우(祠宇)
원단(元旦)과 매달 초하루와, 춘추와 단오에 다 조상의 신주에 제향을 드리는데, 부중(府中)에 그 화상을 그려 놓고 중들을 거느리고 범패(梵唄)를 하며 밤낮을 계속한다. 또 일반이 부처를 좋아하여 2월 보름에는 모든 불사(佛寺)에서 촛불을 켜는데 극히 번화하고 사치스럽다. 왕과 비빈이 다 가서 구경하고 나라 사람들은 도로를 시끄럽게 메운다. 그들이 신사(神祠)로 백리 안에 있는 것에는 사시에 관원을 보내어 태뢰(太牢 제물로 쓰는 소)로 제사하게 한다. 또 3년에 한 차례씩 있는 큰 제사는 그 경내에 두루 다 베풀어진다. 그러나 기일이 되어 신을 제사한다는 명목으로 분담시켜 백성의 재물을 거둬들여 백금(白金 은을 말함) 1천 냥을 모으고, 나머지 물건들도 이와 맞먹는데 그것들을 신하들과 함께 나누어 갖는다.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왕이 거처하는 궁실 말고는 오직 사우(祠宇)의 만듦새만이 화려하다. 여러 사찰 중에서 안화사(安和寺)가 으뜸인데, 그것은 거기에 신한(宸翰 임금이 쓴 글을 말함)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국사(興國寺)
흥국사는 광화문(廣化門) 동남쪽 길가에 있다. 그 앞에 시냇물 하나가 있는데, 다리를 놓아 가로질러 놓았다. 대문은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흥국지사(興國之寺)’라는 방이 있다. 뒤에 법당이 있는데 역시 매우 웅장하다. 뜰 가운데 동(銅)으로 부어 만든 번간(幡竿 당간)이 세워져 있는데, 아래 지름이 2척, 높이가 10여 장(丈)이고, 그 형태는 위쪽이 뾰쭉하며 마디에 따라 이어져 있고 황금으로 칠을 했다. 위는 봉새 머리[鳳首]로 되어 있어 비단 표기[錦幡]를 물고 있다. 다른 절에도 혹 있으나, 다만 안화사의 것에는 ‘대송황제성수만년(大宋皇帝聖壽萬年)’이라 씌어 있다. 그들이 마음을 기울여 송축하는 뜻이 성심에서 나왔음을 보니, 그들이 성조(聖朝)의 총애하심을 후히 받는 것도 마땅한 일이다.
■국청사(國淸寺)
국청사는 서교정(西郊亭) 서쪽 3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긴 낭하와 넓은 곁채에 높은 소나무와 괴석이 서로서로 비치며 둘러 있어 경치가 맑고 수려하다. 곁에 석관음(石觀音)이 벼랑 밑에 높이 서 있다. 지난번 사절이 지날 때 국청사의 문을 통과하게 되자 그곳 갈의(褐衣) 차림의 승도(僧徒) 1백여 명이 떼지어 나와 구경을 하였다.
■왕성내외제사(王城內外諸寺)
흥왕사(興王寺)는 국성(國城) 동남쪽 한구석에 있다. 장패문(長覇門)을 나가 2리 가량을 가면 앞으로 시냇물에 닿는데 그 규모가 극히 크다. 그 가운데에 원풍(元豐 1078~1085) 연간에 내린 협저불상(夾紵佛像)과 원부(元符 1098~1100) 연간에 내린 장경(藏經 대장경)이 있고, 양쪽 벽에는 그림이 있는데, 왕옹(王顒 고려 숙종)이 숭녕(崇寧 1102~1106) 때의 사자(使者) 유규(劉逵) 등에게, ‘이것은 문왕(文王)- 고려 문종을 말함 - 께서 사신을 보내어 신종 황제(神宗皇帝)께 고해 상국사(相國寺)를 모방해 만든 것으로, 본국인들이 우러러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러러 황은에 감사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입니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오룡묘(五龍廟)
오룡묘는 군산도(群山島)의 객관(客館) 서쪽 한 봉우리 위에 있다. 전에는 작은 집이 있었다. 그 뒤 두어 걸음 되는 데에다 지금 홀로 두 기둥이 있는 한 채의 집만을 새로 지었을 뿐이다. 정면에 벽이 서 있고 거기에 오신상(五神像)이 그려져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퍽 엄숙하게 제사한다. 또 서남쪽 큰 수풀 가운데 작은 사당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숭산신(崧山神)의 별묘(別廟)라 하였다.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에 있는 신당이다. 선유도 연안을 항해하던 뱃사람들이 해로의 안전을 기원하고 어로생활을 하던 도서민들은 풍어를 빌었던 곳이다. 고려시대에 강진에서 청기와를 싣고 개경으로 가던 배가 선유도 근해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오룡묘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을 때, 오룡묘의 용신이 꿈에 나타나 청기와 다섯 장을 오룡묘 지붕 위에 올려놓으면 풍랑이 가라앉을 것이라 하므로, 그대로 하자 풍랑이 멎어 항해를 계속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10.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8권
■국사(國師)
국사의 칭호는 대체로 중국에 승직의 강유(綱維)가 있는 것과 같다. 그 위의 한 등급은 왕사(王師)라고 하는데 왕이 만나면 그에게 배례를 한다. 다 산수납가사(山水衲袈裟)와 긴 소매의 편삼(偏衫)과 금발차(金跋遮)를 착용하고, 아래에는 자상(紫裳)과 오혁검리(烏革鈐履)가 있다. 인물과 의복은 비록 대략은 중국과 같지마는 고려인은 대개 머리에 침골(枕骨 후두부에 돌출한 뼈)이 없으나 중이 되어 머리를 깎아 버리면 그것이 보이는데 퍽 놀랍고 이상하다. 《진사(晉史)》에는, ‘삼한(三韓) 사람들은 갓난아이를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든다’고 하였으나 옳지 않다. 대개 종류와 타고난 자품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 반드시 돌 때문에 납작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1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9권
■민서(民庶)
고려는 땅이 넓지 못하나, 백성이 매우 많다. 사민(四民)의 업(業) 중에 유(儒 선비)를 귀히 여기므로, 그 나라에서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산림이 지극히 많고 땅이 넓고 편평한 데가 적기 때문에, 농민이 장인[工技]에 미치지 못한다. 주(州)나 군(郡)의 토산(土産)은 다 관가의 공상(公上)에 들어가므로, 상인은 멀리 나들이하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도시에 가서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필요한 것을 서로 바꾸는 것으로서 만족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분별없이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기며,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도 경솔히 합치고 쉽게 헤어져, 전례(典禮)를 본받지 않으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이다.
■농상(農商)
농상을 업으로 하는 백성은, 농민은 빈부의 차이 없이, 상인은 원근의 차이 없이 다 백저포(白紵袍)를 입고, 오건(烏巾)에 네 가닥 띠를 하는데, 다만 베의 곱고 거친 것으로 구별한다. 나라의 관인이나 귀인(貴人)도 물러가 사가(私家)에서 생활할 때면 역시 이를 입는다. 다만 두건(頭巾)의 띠를 두 가닥으로 하는 것으로 구별하고, 간혹 거리를 걸어갈 때에도 아전[吏]이나 백성이 이 두 가닥 띠를 보고는 피한다.
(고려의 두건(頭巾)은 오직 문라(文羅)를 중히 여겨 두건 하나의 값이 쌀 한 섬[石] 값이 되어 가난한 백성은 이를 장만할 만한 돈은 없고, 또 상투를 드러내고 다니면 죄수(罪囚)와 다름없으므로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죽관(竹冠)을 만들어 쓰는데,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여 전혀 일정한 제도가 없다. 짧은 갈(褐 거친 옷)을 입고, 아래에는 바지를 걸치지 않는다.)
■공기(工技)
고려는 장인의 기술이 지극히 정교하여, 그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는 다 관아(官衙)에 귀속되는데, 이를테면 복두소(幞頭所)ㆍ장작감(將作監)이 그곳이다. 이들의 상복(常服)은 흰 모시 도포를 입고 검은 건을 쓴다. 다만 시역을 맡아 일을 할 때에는 관에서 자주색 도포[紫袍]를 내린다. 또 듣자니, 거란[契丹]의 항복한 포로 수만 명 중에 공장(工匠)을 - 기술이 정교한 자로 10명 중 한 명을 고른다. - 왕부(王府)에 머무르게 하여, 요즈음 기명(器皿)과 복장이 더욱 공교하게 되었으나, 다만 부화하고 거짓된 것이 많아 전날의 순박하고 질박(質朴)한 것을 회복할 수 없다.
■민장(民長)
민장의 명칭은 중국의 향병(鄕兵)이나 보오(保伍)의 장과 같다. 즉 백성 가운데 부유한 자를 뽑아 시키는데, 마을의 큰 일이면 관부(官府)에 가되 작은 일이면 곧 민장에게 속하므로 거기 사는 세민(細民)들이 자못 존중하고 섬긴다. 그 복식은 문라(文羅)로 건(巾)을 하고 검은 명주[紬]로 겉옷을 하고 흑각대를 띠고 검은 가죽의 구리(句履)를 신으니, 또한 아직 공(貢)에 들지 않은 진사(進士)의 복식과 서로 닮았다.
12.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0권
■부인(婦人)
삼한(三韓)의 의복 제도는 염색(染色)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꽃무늬를 넣는 것을 금제(禁制)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사(御史)를 두어 백성의 옷을 살펴 무늬 있는 비단과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을 입고 있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죄주고 물건을 압수하므로 백성이 잘 지키어 감히 어기는 자가 없다. 옛 풍속에, 여자의 옷은 흰 모시저고리에 노랑 치마인데, 위로 왕가의 친척과 귀한 집으로부터 아래로 백성의 처첩에 이르기까지 한 모양이어서 구별이 없다 한다. 얼마 전에 세공(歲貢) 사신이 중국 궁궐에 이르러 조정에서 내리는 십등관복(十等冠服)을 얻어와 드디어 이를 본받아, 지금은 왕부(王府)와 국상(國相)의 집에도 자못 중국풍이 있으니, 다시 세월이 지나가면 다 중국풍이 될 것 같다.
■귀부(貴婦)
부인의 화장은 향유(香油)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아니하고, 눈썹은 넓고, 검은 비단으로 된 너울을 쓰는데, 세 폭으로 만들었다. 폭의 길이는 8척이고, 정수리에서부터 내려뜨려 다만 얼굴과 눈만 내놓고 끝이 땅에 끌리게 한다. 흰 모시로 포(袍)를 만들어 입는데 거의 남자의 포와 같으며,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넓은 바지를 만들어 입었는데 안을 생명주로 받치니, 이는 넉넉하게 하여 옷이 몸에 붙지 않게 함이다. 감람(橄欖)빛 넓은 허리띠(革帶)를 띠고, 채색 끈에 금방울[金鐸]을 달고, 비단[錦]으로 만든 향낭(香囊)을 차는데, 이것이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부잣집에서는 큰자리를 깔고서 시비(侍婢)가 곁에 늘어서서 각기 수건(手巾)과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데 비록 더운 날이라도 괴롭게 여기지 않는다. 가을과 겨울의 치마는 간혹 황견(黃絹)을 쓰는데, 어떤 것은 진하고 어떤 것은 엷다.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처와 사민(士民)의 처와 유녀(遊女 기생)의 복색에 구별이 없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왕비(王妃)와 부인(夫人)은 홍색을 숭상하여 더욱 그림과 수를 더하되, 관리나 서민의 처는 감히 이를 쓰지 못한다.’고 한다.
■여자(女子)
서민(庶民)들의 딸은 시집가기 전에는 붉은 깁[紅羅]으로 머리를 묶고 그 나머지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남자도 같으나 붉은 깁을 검은 노[黑繩]로 대신할 뿐이다.
■대(戴)
지고 이는 일이 그 노고는 한가지다. 물이나 쌀이나 밥이나 마시는 것이나 다 구리항아리에 담았으므로 어깨에 메지 않고 머리 위에 인다. 항아리에는 두 귀가 있어 한 손으로는 한 귀를 붙들고 한 손으로는 옷을 추스리고 가는데, 등에는 아이를 업었다.
13.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1권
■조례(皁隷)
여러 만이(蠻夷)의 나라들은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다리를 꼬아 앉고 머리를 풀고 몸에 문신을 하고, 승냥이와 이리와 같이 살고 사슴과 더불어 논다 하니, 어찌 또 관원과 서리를 두는 법을 알겠는가? 오직 고려는 그렇지 않아, 의관(衣冠)과 예의(禮儀)며 군신 상하에 찬연히 법도가 있어서 그렇게 서로 접(接)한다. 안으로 대(臺)ㆍ성(省)ㆍ원(院)ㆍ감(監)을 두고 밖으로 주(州)ㆍ부(府)ㆍ군(郡)ㆍ읍(邑)을 두어 직(職)을 나누고 관리를 뽑아 일을 맡기고, 위에서 그 강목(綱目)만을 들 뿐이고, 아래에 있는 자는 번다스럽고 어려운 일을 맡으니, 비록 나라의 일이라도 간략하고 이치에 닿아, 적을 치고 도적을 잡으려 백성을 부르면, 다만 편지(片紙) 몇 자면 백성이 모이는 기한을 어기지 않는다. 고로 중서 급사(中書給事)중추 당관(中樞堂官)으로부터 그 민장(民長)에 이르기까지 감히 태만할 수 없다. 그 나라의 관리(官吏)를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허리를 구부려 무릎 꿇고 절하고 공경을 한다. 언사(言事)가 있으면 무릎걸음으로 구부리고 나아가서 손을 위로 하고 얼굴을 낮추어 듣고 이를 받드니, 오랫동안의 중국의 영향이 없으면 능히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1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2권
■향음(鄕飮)
고려의 풍속이 술과 단술을 중히 여긴다. 공회(公會) 때에는 다만 왕부(王府)와 국관(國官)에만 상탁(床卓)과 반찬(盤饌)이 있을 뿐, 그 나머지 관리와 사민은 다만 좌탑(坐榻)에 앉을 뿐이다. 동한(東漢)에서는 예장태수(豫章太守) 진번(陳蕃)이 서치(徐稚)를 위하여 한 탑(榻)을 마련하였을 뿐인즉 전고(前古)에도 이 예법(禮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고려인은 탑 위에 또 소조(小俎 작은 소반)를 놓고, 그릇에는 구리[銅]를 쓰고 숙석(鱐腊)과 어채(魚菜)를 섞어서 내오되 풍성하지 않고, 또 주행(酒行 순배(巡杯))에도 절도가 없으며 많이 내오는 것을 힘쓸 뿐이다. 탑마다 다만 두 손[客]이 앉을 뿐이니, 만약 빈객이 많이 모이면 그 수에 따라 탑을 늘려 각기 서로 마주 앉는다. 나라 안에는 밀이 적어 다 상인들이 경동도(京東道)로부터 사오므로 면(麵)값이 대단히 비싸서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식품 가운데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있으니, 이 또한 웃을 만한 일이다.
■치사(治事)
고려의 정사(政事)가 간편한 것을 숭상하므로 소송의 문서 같은 것은 간략하게 하여 글로 기록하지 않는다. 관부에서 일을 다스릴 적에도 앉아서 책상에 의지하지 않고, 다만 걸상에 앉아서 지휘할 따름이다. 아전이 안독(案牘)을 받들어 무릎꿇고 앞에서 아뢰면, 웃사람은 듣고 즉시 비결(批決)하되, 뒤에 상고하기 위하여 남겨 놓는 일이 없고 일이 끝나면 버리고 문서창고를 마련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의 조명(詔命)이나 신사(信使)의 글은 왕부의 창고에 잘 간수하여 비검(備檢 상고를 위한 검사) 거리로 삼는다. 음식을 공궤하고 세숫물을 받들 적에는 머리를 숙이고 무릎걸음으로 가며 높이 손을 받들어 이를 바치니, 그 위의가 매우 공손하다. 이적(夷狄)으로 능히 그러니 가상한 일이다.
15.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3권
■한탁(澣濯)
옛 사서에 고려를 실었는데 그 풍속이 다 깨끗하다 하더니, 지금도 그러하다. 그들은 매양 중국인의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서며,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씩 목욕을 하는데 시내 가운데서 많이 한다. 남자 여자 분별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구비 따라 몸을 벌거벗되,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의복을 빨고 깁이나 베를 표백하는 것은 다 부녀자의 일이어서 밤낮으로 일해도 어렵다고 하지 않는다. 우물을 파고 물을 긷는 것도 대개 내에 가까운 데서 하니, 위에 두레박[鹿盧]을 걸어 함지박으로 물을 긷는데, 그 함지박의 모양이 배의 모양과 거의 같다.
■어(漁)
고려 풍속에 양과 돼지가 있지만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하며,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 미꾸라지[鰌]ㆍ전복[鰒]ㆍ조개[蚌]ㆍ진주조개[珠母]ㆍ왕새우[蝦王]ㆍ문합(文蛤)ㆍ붉은게[紫蟹]ㆍ굴[蠣房]ㆍ거북이다리[龜脚]ㆍ해조(海藻)ㆍ다시마[昆布]는 귀천 없이 잘 먹는데, 구미는 돋구어 주나 냄새가 나고 비리고 맛이 짜 오래 먹으면 싫어진다. 고기잡이는 썰물이 질 때에 배를 섬에 대고 고기를 잡되, 그물은 잘 만들지 못하여 다만 성긴 천으로 고기를 거르므로 힘을 쓰기는 하나 성과를 거두는 것은 적다. 다만 굴과 대합들은 조수가 빠져도 나가지 못하므로, 사람이 줍되 힘을 다하여 이를 주워도 없어지지 않는다.
■초(樵)
나무꾼은 원래 전담하는 업이 없고 다만 일의 틈이 있으면 소년이나 장년이 힘에 따라 성밖의 산에 나가 나무를 한다. 대개 성 부근의 산은 음양설에 의해 사위가 있다 하여 나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에는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아 푸른 그늘이 사랑할 만하다. 사신이 관에 머물러 있는 동안이나 배에 오르더라도 다 공급을 맡은 자가 있어 때고 끓이는 나무를 대어주는데, 어깨에 메는 것은 잘하지 못하고 등에 지고 다닌다.
■각기(刻記)
고려의 풍속에 주산(籌算)이 없어 관리가 돈이나 천을 출납할 때, 회계리는 조각나무에 칼을 가지고 이를 그으니, 한 물건을 기록할 때마다 한 자국을 긋고 일이 끝나면 내버리고 쓰지 않으며, 다시 두었다가 계고(稽考)를 기다리지 아니한다. 그 정치가 매우 간단한 것은 또한 옛 결승(結縄)이 끼친 뜻인가 한다.
■도재(屠宰)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내장을 베어내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서투름이 이와 같다.
■시수(施水)
왕성(王城)의 장랑(長廊)에는 매 10칸[間]마다 장막을 치고 불상을 설치하고, 큰 독에 멀건 죽을 저장해 두고 다시 국자를 놓아 두어 왕래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마시게 하되, 귀한 자나 천한 자를 가리지 않는다. 승도(僧徒)들이 이 일을 맡아 한다.
■토산(土産)
고려는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굽어보며 땅은 토박하고 돌이 많다. 그러나 곡식의 종류와 길쌈의 이(利)가 있고, 소와 양을 기르기에 알맞으며, 여러 가지 해물의 아름다움이 있다. 광주(廣州)ㆍ양주(楊州)ㆍ영주(永州) 등 3주에는 큰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는 두 종류가 있는데, 다만 다섯 잎이 있는 것만이 열매를 맺는다. 나주도(羅州道지금의 전라도)에도 있으나, 삼주(三州)의 풍부함만 못하다. 열매가 처음 달리는 것을 솔방[松房]이라 하는데, 모양이 마치 모과[木瓜]와 같고 푸르고 윤기가 나고 단단하다가, 서리를 맞고서야 곧 갈라지고 그 열매가 비로소 여물며, 그 방(房)은 자주색을 이루게 된다. 고려의 풍속이 비록 과실과 안주와 국과 적에도 이것을 쓰지만 많이 먹어서는 안 되니, 사람으로 하여금 구토가 멎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인삼의 줄기는 한 줄기로 나는데 어느 지방이고 있으나 춘주(春州) 것이 가장 좋다. 또 생삼(生蔘)과 숙삼(熟蔘) 두 가지가 있는데 생삼은 빛이 희고 허(虛)하여 약에 넣으면 그 맛이 온전하나 여름을 지나면 좀이 먹으므로 쪄서 익혀 오래 둘 수 있는 것만 못하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그 모양이 평평한 것은 고려 사람이 돌로 이를 눌러 즙을 짜내고 삶는 때문이라 하였지만, 이제 물으니 그것이 아니다. 찐 삼의 뿌리를 포개서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그 달이는 데에도 마땅한 법이 있다. 관에서 매일 내놓는 나물에 또한 더덕이 있으니, 그 모양이 크고 그 살이 부드럽고 맛이 있는데 약으로 쓰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또 그 땅에 솔이 잘 자라 복령(茯苓)이 나고, 산이 깊어서 유황(流黃)이 나며, 나주(羅州)에서는 백부자(白附子)ㆍ황칠(黃漆)이 나는데 모두 조공품[土貢]이다.
고려는 모시[紵]와 삼[麻]을 스스로 심어, 사람들이 베옷을 많이 입는다. 제일 좋은 것을 시(絁)라 하는데, 깨끗하고 희기가 옥과 같고 폭이 좁다. 그것은 왕과 귀신(貴臣)들이 다 입는다. 양잠(養蠶)에 서툴러 사선(絲綫)과 직임(織紝)은 다 상인을 통하여 산동(山東)이나 민절(閩浙) 지방으로부터 사들인다. 극히 좋은 문라화릉(文羅花綾)이나 긴사(緊絲 결이 곱고 얇은 비단)나 비단[錦]이나 모직물[罽]을 짜는데, 그동안 여진[北虜]의 항복한 졸개 중에 장인[工技]이 많았으므로 더욱 기교(奇巧)하고, 염색(染色)도 그 전보다 나아졌다.
땅에 금은(金銀)이 적고 구리가 많이 난다. 그릇에 옷[漆] 칠하는 일은 그리 잘하지 못하지만 나전(螺鈿)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
송연묵(松煙墨)은 맹주(猛州 평안북도 맹산(孟山)) 것을 귀히 여기나 색이 흐리고 아교가 적으며 모래가 많다.
황호필(黃毫筆 족제비의 털로 만든 붓)은 연약해서 쓸 수가 없다. 예부터 이르기를 성성(猩猩 원숭이의 일종)의 털이라고 하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
종이는 전혀 닥나무만을 써서 만들지 않고 등나무를 간간히 섞어 만들되, 다듬이질을 하여 다 매끈하며, 좋고 낮은 것의 몇 등급이 있다.
그 과실 중에 크기가 복숭아만한 밤이 있으며 맛이 달고 좋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여름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 연고를 물으니 ‘질그릇에 담아서 흙 속에 묻으면 해를 넘겨도 상하지 않고 6월에 또 함도(含桃 앵두)가 있으나 맛이 시어 초와 같고, 개암[榛]과 비자(榧子)가 가장 많다’고 한다. 왜국(倭國)의 것도 있으며, 능금[來禽]ㆍ청리(靑李)ㆍ참외[瓜]ㆍ복숭아ㆍ배ㆍ대추 등은 맛이 적고 모양이 작으며, 연근(蓮根)과 화방(花房)은 다 감히 따지 않으니, 국인이 이르기를 ‘그것은 불족(佛足)이 탔던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16.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6권
■서교 송행(西郊送行)
정사와 부사가 귀로에 오를 때는 이날 일찍이 순천관을 떠나 얼마 안 가서 서교정(西郊亭)에 당도하는데, 이때 왕은 국상(國相)을 보내어 그 안에 술과 안주를 갖추어 놓게 한다. 상절(上節)과 중절(中節)은 동서(東西)의 행랑에 자리잡고 하절(下節)은 문밖에 자리잡으며 술이 15차례 돌고서 파한다. 정사와 부사는 관반(館伴)과 문밖에서 말을 세우고 작별 인사를 하고, 관반은 말 위에서 친히 술을 따라 사자(使者)에게 권한다. 마시는 것이 끝나면 각각 헤어진다. 이보다 앞서 접반관 및 송반관(送伴官)과는 관사에 도달하자 곧 헤어지는데, 귀로에 오르게 되면 이곳에서 다시 함께 가게 되어, 군산도(群山島)에서 바다로 나갈 때까지 같이 간다.
※당시 북송의 서울은 카이펑(개봉)인데 조선시대와는 달리 사신들은 삼국시대이래 해로를 이용했고 개성을 떠나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출발하는 곳은 오늘날의 고군산군도임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금의 서울도 카이펑이었으므로 사신의 왕래는 같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34권을 읽어보면 카이펑에서 배로 이동하여 항저우부근 명주(현 닝보)까지 와서 고려로 출항하고 있다. 거란은 의식하여 남쪽 항로를 이용한 것이라고 한다.
17.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7권
■벽란정(碧瀾亭)
벽란정은 예성강(禮成江)의 강언덕에 있는데, 왕성(王城)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신주(神舟 조서를 실은 사신의 배)가 강언덕에 닿으면 수위병이 징과 북으로 환영하고 조서를 인도하여 벽란정으로 들어간다. 벽란정은 두 자리가 있으니 서쪽을 우벽란정(右碧瀾亭)이라 하여 조서를 봉안하고, 동쪽을 좌벽란정(左碧瀾亭)이라 하여 정사와 부사를 접대한다. 양편에 방이 있어 두 절(節)의 인원을 거처케 하는데, 갈 때와 올 때에 각각 하루씩 묵고 간다. 똑바로 동서로 도로가 있는데, 왕성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 좌우에 10여 호의 주민이 살고 있다. 사절이 성으로 들어가 버리면 뭇 배들은 다 항내에 정박하므로, 뱃사공이 순번을 정해 이곳에서 감시한다.
18.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8권
■와탑(臥榻)
와탑(침상) 앞에는 또 낮은 평상 세 틀이 놓여 있고 난간이 세워져 있는데, 각각 무늬비단 보료가 깔려 있다. 또 큰 자리가 놓여 있는데 돗자리의 편안함은 전연 이풍(夷風 오랑캐 풍속)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국왕과 귀한 신하에 대한 예(禮)이고 아울러 그것으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일 뿐이다. 서민들은 대부분 흙 침상이며, 땅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 고려는 겨울철이 극히 춥고, 또 솜 등속이 적기 때문이다.
19.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9권
■초구(草屨)
초구(짚신)의 형태는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그 모양이 괴이하나, 전국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신는다.
20.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2권
■다조(茶俎)
토산다(土産茶)는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고, 오직 중국의 납다(臘茶)와 용봉사단(龍鳳賜團)을 귀하게 여긴다. 하사해 준 것 이외에 상인들 역시 가져다 팔기 때문에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자못 좋아하여 더욱 차의 제구를 만든다. 금화오잔(金花烏盞)ㆍ비색소구(翡色小甌)ㆍ은로탕정(銀爐湯鼎)은 다 중국 제도를 흉내낸 것들이다. 무릇 연회 때면 뜰 가운데서 차를 끓여서 은하(銀荷 은으로 만든 연잎 형상을 한 작은 쟁반)로 덮어가지고 천천히 걸어와서 내놓는다. 그런데 찬자(贊者)가 ‘차를 다 돌렸소’하고 말한 뒤에야 마실 수 있으므로 으레 냉차(冷茶)부터 마시게 마련이다. 관사 안에는 홍조(紅俎)를 놓고 그 위에다 차의 제구를 두루 진열한 다음 홍사건(紅紗巾 붉은 색의 사포로 만든 상보)으로 덮는다. 매일 세 차례씩 내는 차를 맛보게 되는데, 뒤어어 또 탕(湯 끓인 물)을 낸다. 고려인은 탕을 약(藥)이라고 하는데, 사신들이 그것을 다 마시는 것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고, 혹 다 마셔내지 못하면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면서 불쾌해져서 가버리기 때문에 늘 억지로 그것을 마셨다.
■와준(瓦尊)
고려에는 찹쌀은 없고 멥쌀에 누룩을 섞어서 술을 만드는데, 빛깔이 짙고 맛이 독해 쉽게 취하고 속히 깬다. 왕이 마시는 것을 양온(良醞)이라고 하는데 좌고(左庫)의 맑은 법주(法酒)이다. 거기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와준(瓦尊)에 담아서 황견(黃絹)으로 봉해 둔다. 대체로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하지만 좋은 술은 얻기가 어렵다. 서민의 집에서 마시는 것은 맛은 싱겁고 빛깔은 진한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마시고 다들 맛있게 여긴다.
■도준(陶尊)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년의 만듦새는 솜씨가 좋고 빛깔도 더욱 좋아졌다. 술그릇의 형상은 오이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는 것이 연꽃에 엎드린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다.
■초섬(草苫)
초섬의 용도는 중국에서 포대를 쓰는 것과 같다. 그 형태는 망태기 같은데 풀을 엮어 만든다. 무릇 쌀ㆍ밀가루ㆍ땔나무ㆍ숯 등속은 다 그것을 가지고 담는다. 산길을 갈 때 수레가 불편하므로 흔히 그것에 담은 것을 마필에 싣고 간다.
2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3권
■순선(巡船)
고려는 땅이 동해(東海 우리의 서해를 말하는 것이다)에 접해 있는데도, 선박 건조 기술이 간략하여 그렇게 정교하지 않다. 중간에 돛대 하나를 세워놓고 위에는 다락방이 없으며, 다만 노와 키를 마련하였을 따름이다. 사자(使者)가 군산(群山)으로 들어가면 문(門)에 이러한 순선이 10여 척이 있는데, 다 정기(旌旗)를 꽂았고, 뱃사공과 나졸(邏卒)은 다 청의(靑衣)를 착용하고 호각을 울리고 징을 치고 온다. 각각 돛대 끝에 작은 깃발 하나씩을 세우고 거기에, 홍주도순(洪州都巡)ㆍ영신도순(永新都巡)ㆍ공주순검(公州巡檢)ㆍ보령(保寧)ㆍ회인(懷仁)ㆍ안흥(安興)ㆍ기천(曁川)ㆍ양성(陽城)ㆍ경원(慶源) 등의 글씨를 썼다. 그리고 ‘위사(尉司)’라는 글자가 있으나 실은 포도관리(捕盜官吏)들이다. 입경(入境)해서부터 회정(回程)할 때까지 군산도에서 영접하고 전송하고 하는데, 신주(神舟 중국 사절의 배를 말한다)가 큰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서야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관선(官船)
관선의 만듦새는, 위는 띠로 이었고 아래는 문을 냈으며,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고, 가로지른 나무를 꿰어 치켜올려서 다락을 만들었는데, 윗면이 배의 바닥보다 넓다. 전체가 판책(板簀)은 쓰지 않았고, 다만 통나무를 휘어서 굽혀 나란히 놓고 못을 박았을 뿐이다. 앞에 정륜(矴輪 닻줄을 감는 제구)이 있고, 위에는 큰 돛대를 세웠고, 포범(布帆 베로 만든 돛) 20여 폭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중 5분의 1은 꿰매지 않고 펼쳐진 채로 두었다. 이것은 풍세(風勢)에 거스를까 두려워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자(使者)가 경내로 들어가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접반(接伴)ㆍ선배(先排)ㆍ관구(管勾)ㆍ공주(公廚) 등 모두 10여 척의 배가 크기가 같고, 다만 접반의 배에만 시설과 장막이 있을 뿐이다.
■송방(松舫)
송방은 군산도의 배이다. 선수(船首)와 선미(船尾)가 다 곧고 가운데에 선실 5칸이 마련되어 있고 위는 띠로 덮었다. 앞뒤에 작은 방 둘이 마련되어 있는데, 평상이 놓이고 발이 드리워져 있다. 중간에 트여 있는 두 칸에는 비단 보료가 깔려 있는데 가장 찬란하다. 오직 정사ㆍ부사 및 상절(上節)만이 거기에 탄다.
■궤식(饋食)
사자(使者)가 경내로 들어가면, 군산도의 자연주(紫燕洲) 세 주(州)에서 다 사람을 보내어 식사를 제공한다. 서찰을 가진 관리자는 자주옷에 복두(幞頭) 차림이고, 그 다음 관리는 오모(烏帽 검정색 모자) 차림이다. 식품은 10여 종인데 국수가 먼저이고 해물은 더욱 진기하다. 기명은 금ㆍ은을 많이 쓰는데, 청색 도기도 섞여 있다. 쟁반과 소반은 다 나무로 만들었고 옷칠을 했다. 신주(神舟)가 정박하고 섬에 가까이 가지 않으면, 반드시 개(介)를 보내어 배를 타고 사자(使者)에게 음식을 드리게 한다. 구례(舊例)로는 3일 동안 보내며, 만약에 기간이 지나도 바람에 막혀 떠나지 못하게 되면, 식사의 공급이 더 이상 오지 않는다.
■공수(供水)
바닷물은 맛이 심히 짜고 써서 입에 댈 수 없다. 무릇 선박이 큰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면 반드시 물독을 마련하여 샘물을 비축해서 식음에 대비한다. 대체로 큰 바다 가운데서는 바람은 그리 심하지 않고 물의 유무로 생사가 판가름난다. 중국 사람들이 서쪽에서부터 큰 바다를 횡단하고 오느라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므로, 고려인은 중국인의 샘물이 반드시 다 없어졌으리라 짐작하고서, 큰 독에다 물을 싣고 배를 저어와 맞이하는데, 각각 차와 쌀로 갚아준다.
22.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4권
■해도(海道)
이를테면 바다 가운데 땅으로 촌락을 이룰 수 있는 것을 주(洲)라고 하는데 십주(十洲) 따위가 그것이다. 주보다 작으나 역시 살 수 있는 것은 도(島)라고 하는데 삼도(三島) 따위가 그것이다. 도보다 작으면 서(嶼)라고 하고 서보다 작으면서 초목이 있으면 섬(苫)이라고 하고 섬과 서 같으면서 그 바탕이 순전히 돌이면 초(焦 암초를 말함)라고 한다.
■객주(客舟)
바다에서의 항행은 깊은 것은 두렵지 않고 다만 얕은 곳에 박히는 것을 두려워한다. 배의 바닥이 편평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에 밀물이 빠지면 기울어 쓰러지고 구제할 수 없다. 그래서 늘 노끈으로 납추를 드리워서 재어 본다. 배마다 뱃사공과 수부가 60인 가량이나 되는데, 다만 그 수령(首領)이 해도(海道)를 익히 알고 하늘의 때와 사람의 일을 잘 헤아려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잡는 것을 믿을 뿐이다. 그래서 창졸간의 어려움이 생겨도 수미가 한 사람같이 서로 호응하면 구제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초보산(招寶山)
5년(1123) 계묘 봄 2월 18일(임인)에 장비를 재촉하고 배를 꾸몄으며, 24일에는 조명을 내려 예모전(睿謨殿)에 가서 예물을 선시(宣示)하였고, 3월 11일(갑자)에는 동문관(同文館)에 가서 계유(誡諭)를 들었고, 13일(병인)에는 황제께서 숭정전(崇政殿)에 납시어 평대(平臺)에 자리잡고 친히 보내며 전지(傳旨)를 선유(宣諭)하시었고, 14일(정묘)에 영녕사(永寧寺)에서 석연(錫宴 황제의 명의로 전송하는 잔치)하시었다. 이날 배를 풀어 변경(汴京 당시 북송의 수도, 지금의 하남성 개봉)을 나갔다. 여름 5월 3일(을묘)에 배가 사명(四明)에 머물렀다. 이에 앞서 특지를 얻어 두 척의 신주(神舟)와 6척의 객주(客舟)로 같이 가게 되어 13일(을축)에 예물을 받들어 8척의 배에 넣었다. 14일(병인)에 공위대부(拱衛大夫) 상주 관찰사 직예사전(相州觀察使直睿思殿) 관필(關弼)을 보내 조명의 취지를 말하고, 명주(明州)의 청사(廳事)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고, 16일(무진)에 신주가 명주를 떠나 19일(신미)에 정해현(定海縣)에 도달하였다.
이 기일에 앞서 중사(中使)인 무공대부(武功大夫) 용팽년(容彭年)을 보내어 총지원(摠持院)에서 7주야 동안 도량[道場]을 가졌고, 또 어향(御香)을 내려 현인조순연성광덕왕사(顯仁助順淵聖廣德王祠)에 선축(宣祝)하니 신물(神物)이 나타났는데 그 형상이 도마뱀 같았다. 이는 실로 동해의 용군(龍君)인 것이다. 그 사당 앞 10여 보 지점에 근강(鄞江)이 끝나는 곳에 산 하나가 높다랗게 바다 가운데 나와 있는데 그 위에 작은 탑이 있다. 전부터 전해지기로는 바다를 향하는 배가 이 산을 바라보면 그것이 정해(定海)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초보(招寶)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곳에서부터 비로소 바다로 나가는 입구라고 하게 된다. 24일(병자)에 배에 들어가 징과 북을 울리고 기치를 펼치고서 차례에 따라 배를 풀고 떠났다. 중사 관필은 초보산에 올라가 어향을 피우고 큰 바다를 바라보며 재배(再拜)하였다. 이날은 날씨가 쾌청하였다. 사각(巳刻)에 동남풍을 타고 뜸을 펼치고 곁노를 저었는데, 수세(水勢)가 매우 급해서 꿈틀거리며 갔다. 호두산(虎頭山)을 지나가니 물이 항구의 입구에 있는 칠리산(七里山)에 가득하였다. 호두산은 그 형태가 유사하여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그곳을 헤아려 보니 이미 정해에서 20리나 떨어져 있었다. 물의 색깔은 근강과 다르지 않았으나 다만 맛이 좀 짤 뿐이었다. 대체로 온갖 냇물이 모이는 곳이라 이곳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맑아지지 않았다.
※정해현(定海縣) : 송대의 정해현은 지금의 절강성(저장성) 진해현(鎭海縣)이다. 항저우 부근에 있다. 3월 14일 변경을 떠난 배는 5월 3일 사명에 머무르고, 16일에는 명주(오늘날 항저우 오른편에 있는 닝보)를 떠나며 5월 19일에야 정해현(명주에 속한 섬으로 된 현이며 오늘날 저우산 군도의 딩하이)에 도착하고 있다. 5월 24일에 공식적으로 항해를 시작하여(제39권 예성항조에서는 28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6월 6일에는 군산도에 도착한다. 남풍을 타고 아주 빠르게 항해하였다.
■매잠(梅岑)
매잠(梅岑) : 정해현 동북부에 위치한 산 이름. 전한 말기의 학자로 은자가 된 매복(梅福) 자진(子眞)의 은거지로 알려진 곳. 고려, 일본 등지의 외항선이 이곳으로 길을 잡아 항해하였다.
※동모(東牟) : 등주(登州)의 별칭이다. 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1년(742)에 등주를 동모군(東牟郡)으로 개명했다가, 숙종(肅宗) 건원(乾元) 1년(758)에 다시 등주로 바꿨다. 우리나라 및 일본과 왕래하는 중국의 중요한 해항(海港)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향하는 배들의 출항은 통일신라시대(당의 수도는 시안)에는 산동성의 등주였으나 고려시대(북송의 수도는 카이펑)에는 저장성의 항저우부근에 있는 명주(현 닝보)였던던 것이다.
■봉래산(蓬萊山)
봉래산은 바라보면 심히 먼데, 앞이 높고 뒤가 내려갔다. 뾰족하게 치솟아 있는 것이 사랑스럽다. 그 섬은 아직도 창국(昌國 정해현을 말함)의 봉경(封境)에 속해 있다. 그 위는 극히 넓어 씨를 뿌릴 수 있어서 섬 사람들이 산다. 선가(仙家)의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봉래가 있는데, 그곳은 약수(弱水) 3만 리를 넘어가서야 도달할 수 있다. 지금은 바로 앞에서 ‘선가의 봉래’를 보게는 안 될 것이므로, 틀림없이 지금 사람이 이것을 가리켜 그렇게 이름지었을 것이다. 이곳을 지나면 다시는 산이 나오지 않는다. 오직 연이은 파도가 솟았다 내렸다 하며 내뿜어 두들기고 들끓어 오르고 하는 것만이 보일 뿐이다. 선박이 뒤흔들려 배안의 사람들이 토하고 현기증이 나서 쓰러지고 제몸을 가누지 못하는 자가 십중 팔구나 된다.
23.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5권
■협계산(夾界山)
6월 1일(임오) 여명에 안개가 자욱한데 배는 동남풍을 탔다. 사각(巳刻)에 좀 갰고 바람이 서남으로 돌아 야호범을 더 보태었다. 오정에 바람이 사나워 첫째 배의 대장(大檣)이 와지끈 하고 소리가 나며 휘어서 부러지려고 해서 급히 큰 나무를 거기에 붙여 온전할 수가 있었다. 미시(未時) 후에 동북쪽 하늘 가를 바라보니 은은히 구름 같은 것이 보이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반탁가산(半托伽山)이라고 하였으나 그리 똑똑하게 가려낼 수는 없었다. 밤에는 바람이 약해 배의 항행이 매우 느렸다. 2일 계미에 아침 안개가 자욱하고 서남풍이 일어나더니 미시 후에 맑게 갰다. 정동(正東)으로 병풍 같은 산 하나가 바라보이는데 그것이 곧 협계산으로, 중국과 이족(夷族)이 이것으로 경계를 삼는다. 처음 바라볼 때는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유시(酉時) 후에 바싹 다가가니 앞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것을 쌍계산(雙髻山)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작은 암초 수십 개가 있는데 달리는 말의 형상과 같다. 눈 같은 물결이 세게 뿜는데 그것이 산을 만나서는 튀어 쏟아지는 것이 더욱 높아진다. 자정에 바람이 세고 비가 와서 돛을 내리고 뜸을 걷어 그 기세를 늦추었다.
■흑산(黑山)
흑산은 백산 동남쪽에 있어 바라보일 정도로 가깝다. 처음 바라보면 극히 높고 험준하고, 바싹 다가서면 산세가 중복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앞의 한 작은 봉우리는 가운데가 굴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가 만입(灣入)했는데, 배를 감출 만하다. 옛날에는 바닷길에서 이곳이 역시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었다. 관사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 길을 잡음에는 여기서 더 이상 정박하지 않았다. 위에는 주민의 부락이 있다. 나라(고려를 말함) 안의 대죄인으로 죽음을 면한 자들이 흔히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언제나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르렀을 때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불을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서 왕성(王城 개경을 말함)에까지 가는데, 그 일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신시 후에 배가 이곳을 지나갔다.
2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6권
■죽도(竹島) : 전북 부안군 곰소만에 있는 작은 섬.
이날 유시(酉時) 후에 배가 죽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그 산은 여러 겹이고 수풀의 나무들이 짙푸르게 무성하며, 그 위에는 역시 주민들이 있고 주민들에는 또한 장(長)이 있었다. 산 앞에 흰 돌로 된 암초가 수백 덩어리 있는데 크기가 같지 않고 흡사 쌓아 놓은 옥과 같았다. 사자(使者)가 귀로에 이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추석달이 돋아 올랐었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잔잔한데 밝은 놀이 서로 비치고 비낀 달빛이 천 장(千丈)이나 되어, 섬과 골짜기와 선박과 기물이 온통 금빛이 되었다. 사람마다 일어나 춤추어 그림자를 희롱하며, 술을 들고 저를 불고 하여 마음과 눈이 즐거워서 앞에 해양이 격해 있음을 잊었다.
■고섬섬(苦苫苫)
5일 병술은 날씨가 청명하였는데 고섬섬을 지나갔다. 죽도에서 멀지 않고 그 산이 유사한데 역시 주민이 있었다. 고려의 습속으로는 자위모(刺蝟毛 고슴도치의 털)를 고섬섬이라고 한다. 이 산의 나무들은 무성하나 크지 않아 바로 고슴도치털 같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이날 이 섬에 정박하니, 고려인들이 배로 물을 싣고 와 바쳐서 쌀로 사례하였다. 동풍이 크게 일어 전진할 수 없어서 결국 여기서 묵었다.
■군산도(群山島)
6일 정해에 아침 밀물을 타고 항행하여 진각(辰刻)에 군산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그 산은 열 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둘려 있는 것이 성과 같다. 여섯 척의 배가 와서 맞아 주는데, 무장병을 싣고 징을 울리고 호각을 불며 호위하였다. 따로 작은 배에 초록색 도포 차림의 관리가 타고 있는데 홀을 바로잡고 배 안에서 읍을 하였으나, 통성명은 하지 않고 물러갔다. 군산도의 주사(注事 아전을 말함)라고 한다. 이어 역어관(譯語官)인 합문 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심기(沈起)가 와서 동접반(同接伴)김부식(金富軾)과 합류하였다. 지전주(知全州) 오준화(吳俊和)가 사자를 보내와 원영장(遠迎狀)을 내놓자 정사와 부사가 예를 차려 그것을 받았다. 그러나 읍만 하고 배례하지는 않았고 장의관(掌儀官)을 보내 접촉시켰을 따름이다. 이어 답서(答書)를 보냈다.
배가 섬으로 들어가자 연안에서 깃발을 잡고 늘어서 있는 자가 1백여 인이나 되었다. 동접반이 서신과 함께 정사, 부사 및 삼절(三節)의 조반을 보내왔다. 정사와 부사가 접반에게 이첩(移牒)하여 국왕선장(國王先狀 국왕에게 그들의 도착을 만나기 전에 먼저 알리는 서장)을 보내니, 접반이 채색 배[采舫]를 보내어 정사와 부사에게 군산정(群山亭)으로 올라와 만나주기를 청했다. 그 정자는 바다에 다가서 있고 뒤는 두 봉우리가 의지하고 있는데, 그 두 봉우리는 나란히 우뚝 서 있어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문 밖에는 공해(公廨 관가 소유의 건물) 10여 칸이 있고, 서쪽 가까운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또 서쪽에 숭산 행궁(崧山行宮)이 있고, 좌우 전후에는 주민 10여 가가 있다. 오시 후에 정사와 부사는 송방(松舫)을 타고 해안에 이르렀고, 삼절은 수종 인원을 이끌고 관사로 들어갔는데 접반과 군수가 달려와 맞이하였다. 뜰에는 향안(香案 향로를 놓은 상)이 마련되어 있는데, 궁궐을 바라보고 배례(拜禮)하며 무도(舞蹈)하고서는 공손하게 성체(聖體)의 안부를 물었다.
그 일이 끝나고서는 양쪽 층계로 나뉘어 대청으로 올라가 정사와 부사가 상좌에 있으면서 차례로 만나 재배하고, 끝나면 좀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하고 다시 재배하고 자리로 갔고, 상ㆍ중절(上中節)은 대청 위에서 차례로 서서 위과 읍을 하였다.
이 나라의 습속은 다 아읍(雅揖 한쪽 무릎을 꿇고 하는 읍을 말함)을 한다. 도할관이 앞으로 나가 인사말을 하고 재배하고는 다음에 군수에게 앞서 한 예와 같이 읍하고 물러나 자기 위치에 와서 앉는다. 정사와 부사는 다 남쪽을 향하고, 접반과 군수는 동서로 마주 향하고, 하절(下節)과 뱃사람은 뜰에서 묵례하고, 상절(上節)은 대청에 나누어 앉고, 중절(中節)은 양쪽 행랑에 나누어 앉고, 하절(下節)은 문의 양쪽 곁채에 앉고, 뱃사람은 문밖에 앉는다. 시설이 극히 정제 엄숙하고 음식은 또 풍성하고 예모는 공손 근엄하다. 바닥에는 다 자리를 깔았는데 대체로 그 습속이 그러한 것으로 역시 고풍에 가까운 것이다. 술이 열 차례 돌아가는데 중절과 하절은 다만 그 횟수가 줄어들 뿐이다.
처음 앉을 때에는 접반이 친히 따라서 바치고 사자(使者)는 다시 그것을 따라 준다. 주연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술을 권하게 하고, 삼절은 다 큰 술잔으로 바꾼다. 예가 끝나면 상ㆍ중절은 처음의 예와 같이 걸어나가 읍하고, 정사와 부사는 송방에 올라타고 타고 온 큰 배로 돌아간다.
※사신일행이 변경을 출발한지 거의 3달(3월 14일~6월 6일)는 접반사 일행이 벌써 군산도에 와있다. 흑산도에서 봉화를 올리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봉화를 통해 북송의 사신들이 들어오는 것을 알고 즉시 접반사를 파견한 것으로 추측된다.
25.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7권
■자운섬(紫雲苫)
7일 무자에 날씨가 쾌청하였다. 아침에 전주 수신(全州守臣 전주 목사를 말함)이 서신을 보내와 술과 예를 갖춰 간곡하게 사자를 만류하였으나, 사자가 서신으로 고사(固辭)하여 중지되었다. 다만 그가 준 채소ㆍ어패 등만을 받고서는 방물(方物 여기서는 중국 물건을 말함)로 갚아 주었다. 오각(午刻)에 배를 풀어 횡서(橫嶼)에서 묵고, 8일 기축에 일찍 떠났다. 남쪽으로 하나의 산이 보이는데, 그 뒤의 두 산은 더욱 멀어, 흡사 한 쌍의 눈썹에 싱그러운 빛이 엉겨 있는 것 같다.
26.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9권
■자연도(紫燕島) : 인천
이날 신시 정각에 배가 자연도에 머무르니, 이곳은 곧 광주(廣州)이다. 산에 의지하여 관사를 지었는데, 방(榜)에 ‘경원정(慶源亭)’이라고 하였다. 경원정 곁에는 막집[幕屋] 수십 칸을 지었다. 주민들의 초가집도 많다. 그 산의 동쪽 한 섬에 날아다니는 제비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접반 윤언식(尹彦植)과 지광주(知廣州) 진숙(陳淑)이 개소(介紹)와 역관 탁안(卓安)을 보내어 서신을 가지고 와서 영접하게 하였는데, 병장과 의례가 융숭하였다. 신시(申時) 후에 비가 멎어 정사와 부사가 삼절(三節)과 함께 상륙하여 관사에 당도하였고, 그 음식과 상견례는 전주에서의 예(禮)와 같았다. 밤의 누각(漏刻)이 2각으로 내려가자 배로 돌아갔다. 10일(신묘) 진각(辰刻)에 서북풍이 불어 8척의 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할관 오덕휴(吳德休)와 제할관 서긍(徐兢)은 상절과 함께 다시 채색배로 관사에 갔다가 제물사(濟物寺)에 들러 원풍(元豐 송 신종의 연호) 때의 사신인 고 좌반전직(左班殿直) 송밀(宋密)을 위해 반승(飯僧) 의식을 행한 후에 배로 돌아갔다. 사각(巳刻)에 밀물을 따라서 전진하였다.
■예성항(禮成港) : 현 개풍군 서면으로 개성 입구 예성강의 항구이다.
12일(계사) 아침에 비가 멎자 조수를 따라 예성항으로 들어가고, 정사와 부사는 신주(神舟)로 돌아 들어왔다. 오각에 정사와 부사가 도할관과 제할관을 거느리고 채색배에서 조서(詔書)를 받들고 갔다. 만으로 헤아리는 고려인들이 무기ㆍ갑마(甲馬)ㆍ기치ㆍ의장물[儀物]을 가지고 해안가에 늘어서 있고 구경꾼이 담장같이 둘러서 있었다. 채색배가 해안에 닿자 도할ㆍ제할이 조서를 받들고 채색 가마로 들어가고, 하절이 앞에서 인도하며 정사와 부사는 뒤에서 따라가고 상ㆍ중절이 차례로 따라가서 벽란정(碧瀾亭)으로 들어갔다. 조서를 봉안하는 일을 끝내고는 위차(位次)를 나누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육로를 따라 왕성(王城)으로 들어갔다. 생각하건대, 바닷길은 어려움이 대단하였거니와, 일엽편주로 험난한 바다에 떠 있을 적에, 오직 종묘 사직의 복이 파신(波神)으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였음을 힘입어 건너온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도달해 낼 수 있었겠는가? 큰 바다에 있을 때에 돛단배로 가는데, 풍랑을 만났다면 다른 나라로 흘러 들어갔으리니, 생사가 순식간에 달라졌을 것이다. 또 세 가지 위험을 싫어하니, 치풍(癡風 음력 7ㆍ8월에 부는 동북풍)과 흑풍(黑風 폭풍)과 해동(海動 바다의 지진으로 일어나는 물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치풍이 일어나면 연일 성내어 외치며 그칠 줄 모르고 사방을 가려내지 못한다. 흑풍은 때없이 성내어 불어닥치고 하늘 빛이 어두워 낮과 밤을 분간하지 못한다. 해동이 일어나면 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이 거센 불로 물을 끓이는 것과 같다. 큰 바다 가운데서 이것을 만나면 죽음을 면하는 자가 적다. 또, 한 물결이 배를 밀어내는 것이 툭하면 몇 리나 되니, 몇 길의 배로 파도 사이에 떠 있는 것은 터럭끝이 말의 몸에 있는 것 정도도 못 된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는 자는 배가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을 급무로 삼을 것이 아니라 조심해서 이행하는 것이 제일이다. 만약에 위험을 만나면 지성에서 우러나 경건하게 기도하고 슬프게 간구하면 감응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근자에 사신의 행차에 둘째 배가 황수양(黃水洋) 가운데에 이르러 세 개의 키가 다 부러졌을 때 내가 마침 그 가운데 있었는데, 같은 배의 사람들과 머리를 깎고 슬프게 간구하였더니 상서로운 빛이 나타났다. 그런데 복주(福州)의 연서신(演嶼神) 역시 기일에 앞서 이적(異蹟)을 나타냈었으므로 이날 배가 비록 위태로웠으나 다른 키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뒤에 바꾸고 나서도 다시 전같이 기울며 흔들렸고 5주야를 지나서야 비로소 명주(明州)의 정해(定海)에 도달하였다. 상륙할 때에 가까워져서는 온 배의 사람들이 초췌해져 거의 산사람의 기색이 없었으니,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헤아려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바닷길이 험난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조정에 돌아와 복명하고서 후한 상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조종(祖宗) 이래로 누차 사절을 파견하였어도 표류, 익사하고 돌아오지 않은 자는 없었다. 다만 나라의 위령(威靈)을 믿고 충신(忠信)에 의지하면 틀림없이 근심이 없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점을 서술하여 뒤에 오는 이들에게 격려가 되게 하는 바이다. 근자에 사절의 행차는, 떠나가는 기간 중에는 남풍을 이용하고 돌아오는 기간 중에는 북풍을 이용한다. 처음 명주를 출발한 것은 그해 5월 28일이었는데, 큰 바다로 나가서는 순풍을 얻어 6월 6일에 가서 곧 군산도에 도달하였다. 귀로에 오르게 되어서는 7월 13일(갑자)에 순천관(順天館)을 떠났고, 15일(병인)에 다시 큰 배에 올랐다. 16일(정묘)에 합굴(蛤窟)에 이르렀고, 17일(무진)에 자연도(紫燕島)에 이르렀고, 22일(계유)에 소청서(小靑嶼)ㆍ화상도(和尙島)ㆍ대청서(大靑嶼)ㆍ쌍녀초(雙女焦)ㆍ당인도(唐人島)ㆍ구두산(九頭山)을 지났는데, 이날 마도(馬島)에 정박하였다. 23일(갑술)에 마도를 떠나 알자섬(軋子苫)을 지나 홍주산(洪州山)을 바라보았으며, 24일(을해)에 횡서(橫嶼)를 지나 군산문(群山門)을 들어가 군산도아래서 정박하였다. 8월 8일까지 도합 14일 동안 바람이 막혀 가지 못하다가, 신시(申時) 후에 동북풍이 일어나 밀물을 타고 큰 바다로 나가 고섬섬을 지났고 밤으로 접어들어서도 머물지 않았으며, 9일(기축)에는 아침에 죽도(竹島)를 지났다. 진시와 사시에 흑산(黑山)을 바라보았는데, 느닷없이 동남풍이 사나워지고 또 해동(海動)을 만나 배가 한쪽으로 쏠려 기울어지려고 해서 사람들이 대단히 두려워하여 곧 북을 울려 뭇사람을 불렀더니, 배가 다시 바로 돌아왔다. 10일(경인)에는 풍세가 더욱 맹렬해져 오각(午刻)에 다시 군산도로 돌아갔다. 16일(병신)까지 또 6일이 지났다. 그날 신시(申時) 후에 바람이 가라앉자 곧 큰 바다로 떠나 밤에 죽도에 정박하였다. 또 이틀 동안 바람에 막혀 가지 못하다가 19일(기해)에 이르러, 오시 후에 죽도를 떠나 밤에 월서(月嶼)를 지났다. 20일(경자)에는 아침에 흑산(黑山)을 지났고 다음에는 백산(白山)을 지났고 다음에는 오서(五嶼)와 협계산(夾界山)을 지났는데, 북풍이 대단하게 일어나 뜸을 낮춰 그 기세를 줄였다. 21일(신축)에 사미(沙尾)를 지났고 오시 사이에는 둘째 배의 세 개의 보조 키가 부러졌고, 밤의 누각(漏刻)이 4각으로 내려가자 정타(正柂) 역시 부러졌다. 사신의 배와 다른 배들도 다 위험을 당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23일(임인)에 중화(中華)의 수주산(秀州山)이 바라보였고 24일(계묘)에 동서서산(東西胥山)을 지나 25일(갑진)에 낭항산(浪港山)으로 들어가 담두(潭頭)를 지났다. 26일(을사)에는 아침에 소주양(蘇州洋)을 지나 밤에 율항(栗港)에 정박하였고 27일(병오)에 교문(蛟門)을 지나 초보산(招寶山)을 바라보았고 오각(午刻)에 정해현(定海縣)에 도착하였다. 고려를 떠나서부터 명주 땅까지 오는 데 무릇 바닷길로 42일이 걸렸다.
※7월 15일에 배에 올라 8월 27일에 도착한다. 그러나 정작 큰 바다를 향해 군산도를 떠난것은 8월 16일이고 흑산도를 지난 것은 20일인데, 23일에는 중국의 수주산이 보였다고 하며 26일에 율항에 정박한다. 우리나라의 섬과 중국의 섬까지 대양을 항해하는 기간은 일주일 이내다.
※고려 때 중국과 통하는 항로는 예성강에서 서해를 건너 산둥(山東)반도의 등주(登州 : 山東省 蓬萊縣) 또는 밀주(密州 : 山東省 諸城縣)에 이르는 북선항로가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예성강에서 떠나 한반도 서해안의 자연도(紫燕島 : 지금의 인천)·마도(馬島 :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海美 서쪽)·고군산(古群山)·죽도(竹島 :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興德 서쪽)·흑산도(黑山島)를 거쳐 서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명주(明州 : 浙江省 0x9723縣)에 이르는 남선항로(南線航路, 明州航路)가 있었다.
고려와 송(宋)과의 왕래는 초기에는 주로 북선항로를 이용하였으나, 요(遼 : 契丹)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문종 때부터는 주로 남선항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북선항로는 우리 나라의 옹진반도와 중국의 산둥반도를 연결하는 항로로서 우리 나라와 중국 사이의 해로로서는 가장 거리가 짧은 이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 때뿐만 아니라 신라 때에도 남양만을 떠나 바다를 건너 산둥반도 등주에 이르는 북선항로와 거의 같은 항로를 활발히 이용하였다.
『송사(宋史)』 고려전(高麗傳)에 의하면 993년(성종 12)에 송나라 사신 진정(陳靖) 등이 산둥반도에서 배에 올라 순풍을 이용하여 2숙(宿) 만에 옹진구(甕津口)에 상륙하여 육로로 해주·염주(塩州 : 지금의 황해도 연안)·배천(白川)을 거쳐 개성에 도착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옹진반도에서 산둥반도까지의 해로는 보통 2숙, 즉 2, 3일 정도에 횡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7. 선화봉사고려도경 제40권
■유학(儒學)
동이(東夷)는 천성이 인자하여 그 땅에는 군자가 끊기지 않는다는 나라가 있다. 또 기자(箕子)가 봉해졌던 조선 땅에서는 본래부터 8조의 가르침을 잘 알아, 그 남자들은 예의로 행동하고, 부인들은 올바름과 신용을 지키고, 음식은 두변(豆籩 두와 변. 모두 법도에 맞게 쓰는 예기(禮器))을 쓰고, 길을 가는 자들은 서로 양보한다. 그리하여 만맥 잡류(蠻貉雜類)들이 이마에 자자(刺字)하고, 발에 굳은 살을 지우며 변발(辮髮)에 횡폭(橫幅 오랑캐의 복식 이름)을 두르고, 부자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친족이 관곽을 같이 하는 따위의 편벽하고 괴이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사군(四郡)을 설치해서부터는 신첩(臣妾)으로 내속(內屬)하여 중화의 정치 교화가 점차로 미쳐갔던 것으로 비록 위(魏)를 거치고 진(晉)을 지나면서 시대의 기복에 따라 잠시 이탈했다 잠시 합쳤다 하기는 하였으나 의리가 마음속에 뿌리박은 것은 없어진 적이 없었다.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