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그리스 문명의 탄생

청담(靑潭) 2017. 12. 24. 18:46

 

그리스 문명의 탄생

 

지은이 : 페에르 레베크

출판 : 시공사

 

 

머리말

8년 전, 그리스를 다녀왔다. 겨우 만 하루 동안 아테네에 머물며 가까운 애기나섬을 찾아 아페아 신전을 보았고, 아크로폴리스 언덕과 파르테논 신전, 암벽동굴, 아고라 광장, 제우스 신전, 원형극장등의 유적을 둘러본 것이 전부이다. 그리스를 제대로 알기 위해 그리스 전역을 며칠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이제와서 실제로 샐행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전에 읽은 책인듯한데 다시 읽으면서 정리해 본다.

 

제1장 화려한 청동기 시대

●그리스에 농경과 목축이 소개된 것은 BC 6000년경으로 동양보다 상당히 뒤늦은 것이었다.

●청동 제련기술이 전파된 것은 BC 2600년 전후로 이점에서도 그리스는 후진성을 벗지 못했다.

●공동체 사회는 청동기 시대 초기(BC2600-2000)부터 형성되는데 이 시기의 도시유적이 아르골리스만 연안 레르네에서 발굴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인이 등장한 것은 BC 2000년 무렵이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들 인도-유럽어족의 일족은 카르파티아 지방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유럽의 스텝지역에 살면서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탄생시켰다.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 : 아카이아인의 물결이 닿지 않은 크레타에는 BC 2000년경부터 궁전이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크노소스의 왕은 미노스라고 불렀다. ...미노스의 궁전은 정치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을 조종하는 생산중심지이기도 했다. 창고에는 곡식과 생활용품이 그득했고, 인근의 작업장에서는 솜씨 좋은 장인들이 사치품을 만들어 냈다.

●크레타의 왕들은 막강한 전함과 상선을 동원하여 에게해 전역에 대해서 대 해상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최초로 미케네에 궁전이 등장한 시기는 BC 17세기라고 추정된다. ...크레타와 마찬가지로 미케네에서도 서기관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뛰어난 수비시설을 갖춘 성곽도시 미케네는 페르세우스가 세웠다고 전한다.

●당시 이집트 파라오는 그리스 군주를 푸른 대양(지중해)위의 섬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라고 불렀고, 그들과 진귀한 물품을 서로 교역하고 있었다.

아카이아인은 먼저 그리스 연안의 섬을 무대로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막강한 기세로 세력을 뻗치던 그들도 세력 확장 초기에는 미노스의 세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아카이아인의 크레타 정복은 그리스 반도에 미노스풍의 영향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아카이아 왕국의 제국주의적인 성격은 군사적인 면보다는 상업적인 면에서잘 드러난다. 미케네인들은 사절단과 교역품을 싣고 그때까지 알려졌던 세계의 경게선인 -그들의 문화가 이미 많이 이식되어 있던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제국과 루위제국(소아시아 남부에 위치)을 훨씬 넘어 미지의 땅까지 항해하였다.

●아나톨리아 북부 내륙지방에 있던 히타이트제국은 물론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와 긴밀한 교역관계를 맺고 있던 트로이는 눈부시게 번영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트로이는 아카이아인의 약탈로 잿더미가 되어 그 후 몇 세기 동안 폐허로 남았다.

●아카이아인들이 이룩한 궁전문명은 그들의 권력이 단단한 기반위에 세워져 있었으리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런데 이 궁전의 세계가 BC 1200년경에 갑자기 와해되고 만다. 수비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거대한 필로스 성곽이 붕괴되면서 곧이어 그리스 전역과 크레타 섬의 궁전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제2장 아르카이즘, 태동하는 창조력

●암흑기는 빈곤과 무질서의 시대이다. 그러나 점차 조직화된 공동체들과 호모왕국이라는 국가들이 구성되기 시작하면서 BC 800년 무렵부터 도시국가가 발생하였다. 헬레네 세계는 이렇게 하여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식민지가 확장되었고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창조되었다.

●대이변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도리아인의 이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핀도스 산맥 너머 그리스 북부 지방에서 살던 그리스 민족의 하나로 돌연히 부유한 미케네 왕국으로 내려와서 무력으로 왕국을 점령했다.

소아시아 해안지방에는 대륙에서 건너온 그리스인이 정착하여 북부에는 아이올리아인, 중부에는 이오니아인, 그리고 남부에는 도리아인이 주로 정착하였다.

●BC 800년경에 유럽계 그리스와 아시아계 그리스에서는 도시국가(그리스어로 폴리스)는 새로운 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됫국가 초기에는 귀족세력이 KS을 치고 있었으나 차츰 시민들은 자신의 권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그리하여 왕은 1년을 재임기간으로 하는 다수의 행정관과 평의회, 평민의회 등 새로운 정치기구들로 급속해 대치된다.

●그리스에서 최초로 철기가 등장 시기는 BC 1100년경이지만 BC 9C가 되어서야 철기가 일상생활에 보급된다.

●암흑기 말기에 그리스인은 페니키아에의 자음조직 알파벳에서 직접 영향을 받아 그들의 문자체계를 만들어 냈다. ... 알파벳은 음운분석을 통해 만든 문자체계로서 서기관 따위 지식계급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소아시아와 유럽에서는 새로운 합리적 사고가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C 7C 말 이오니아의 탈레스에서 시작되었는데 그의 사상에서는 형이상학과 수학이라는 두 가지 학문의 방향이 이니 뚜렷하게 설정되어 있다.

올림포스와 델포이 신전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BC 7세기부터 BC 6세기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건축불과 장식물로 치장되었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가 좋은 예이다.,

●BC 9세기말 자급자족 체제는 막을 내리고 그리스인은 다시 항해에 나선다. ...식민활동은 곧 급속한 발전을 이룬다.

그리스인의 식민지는 현대 제국주의 식민지와 전혀 다르다. 비록 식민지는 종교적 문제나 다른 중요한 사항에서 모도시국가의 관습을 존중하기는 했어도 그들은 자유로운 정책결정을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식민지와 모도시국가의 긴밀한 관계는 상업적 이해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예를 들어 밀레토스(소아시아 소재)는 흑해연안의 식민지를 계속해서 지배하였고, 식민지에서 출발한 시라쿠사(시칠리아 소재)는 아드리아해 주변 식민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흑해연안의 식민지는 또 다른 세계였다. 이곳의 식민지 건설은 비교적 느즈막하게 이루어졌고 서방 식민지만큼 화려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이곳 토착민들의 세력을 매우 막강해서 식민개척자들은 때로 이들과 타협해야만 했다.

 

 

제3장 고전적 균형, 그 이상과 현실

페르시아 전쟁(BC 492-448) : 다리우스에게 <마라톤의 돌발사>란 작은 실수에 지나지 않았다. mfo서 더욱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왕은 시종장에게 ?아테네인을 기억하소서.?라는 말을 매일 반복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결국 살라미스해전(BC 480)은 전쟁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살라미스해전에서 도시국가들은 총연합해 페르시아 함대를 섬멸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울분을 삼키며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귀향길에서 벌어진 플라타이아 전투(BC 479)에서 페르시아군은 다시 한번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승리를 주도한 아테네는 보다 많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머뭇거리던 스파르타를 제치고 가장 먼저 전면에 부상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혹독한 지배에서 벗어난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국가와 아르케펠라고(에게해)의 도시국가를 연방화했다. 이것 델로스 동맹이다.

BC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테네의 패권시대는 계속되었다.

●BC 421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양쪽 진영은 다시금 균형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BC 415년 아테네시는 시칠리아 사람들이 이웃을 토벌하기 위해 원조를 요청해오자 이를 승낙하는 무분별한 짓을 감행하였다. 시라쿠사시와의 전투에서 아테네의 함대는 무참하게 파괴되고 병사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이에 따른 급격한 인구 상실이 있었음에도 아테네는 9년 동안 더 저항하였으나 BC 404년 마침내 함대를 반환하고 수비시설을 파괴하는 등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스파르타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승리로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유리한 상황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규모면에서 단지 중위 정도를 지키던 테베시가 에파미논다스(BC 420?-362)라는 뛰어난 지도자 아래 힘을 합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뒤 BC 335년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강요에 못이겨 협정을 맺음으로써 아테네는 완전히 몰락했다. 그 무렵 마케도니아에서는 필립 2세(BC 359-336)가 즉위하여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다 피폐해진 그리스 도시국가를 압박한다.

●BC 6세기 초 아테네 시민들은 솔론의 통치이후 자신의 권력을 부단히 확대해 갔다. 솔론(BC 630-560)은 평민의회의 최고기관인 평의회와 모든 시민에게 개방된 재판소 등 새로운 정치기구를 만들어 냈다. 그의 뒤를 이어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BC600?-527)가 등장하여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더욱 넓혔다.

투키디데스(BC 460?-400)는 다소 냉소적인 시각으로 아테네 민주정을 비아냥 거렸다. ?겉보기에는 민주주의였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이 이끄는 군주제와 다름없었다.?

●시칠리아 출신 코락스와 테이시아스는 청주을 설득하는 변론술을 발전시켰다. ...소피스트들의 급격한 진출과 함께 수사학은 BC 4세기 초에 걸쳐 꽃을 피운다. 수사학은 사고의 방법뿐만 아니라 화술에도 매우중요한 기술을 가르쳤다.

소크라테스(BC 470-399 : 72세)는 전시대의 자연철학자들을 독단적이라고 비판했고, 동시대의소피스트를 지식을 파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지혜의 탐구자임을 자처했다. ...플라톤(BC 427-347 : 81세)은 절대적 이상주의를 표명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실재라고 믿는 이 세계는 단지 우리의 사고가 빚어낸 형상일 뿐이며 인간은 미와 사랑을 통해서만 실재인 이데아에게로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텔레스(BC 384-322 : 63세)는 플라톤이 기하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열정만큼이나 생물학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인간의 정신을 몇 등급으로 나누어 정리하기도 하였다.

●BC 5세기 아테네 예술의 가장 위대한 면모는 페리클레스(BC 495-425)가 발의하고 페이디아스(BC 490-430)가 감독한 아크로폴리스 복합건축물의 디자인과 실행이다. 이는 고대 미케네 시대의 석조건축물이 남아있는 성벽 안에 아테네 여신에게 바쳐진 세 개의 신전을 함께 모은다는 의도를 가지고 건축되었다. 프로피아이아라는 웅장한 입구를 지나 아크로폴리스 안으로 들어가면 새로 지어진 건축물과 함께 고대 건축물의 잔해가 서 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파르테논 신전의 화려함이다. BC 447년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은 도시국가 아테네의 보물창고였으며 또한 그들의 수호신 아테네에게 바쳐진 성역이기도 했다.

●종교적 열정을 강화하는 기운은 도시국가의 한계를 넘는 범세계적인 면을 내포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실패했다. 왜냐하면 도시국가의 구조자체가 이제 더 이상 시대적 욕구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에서 BC 338년 케로네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에 패배함으로써 그리스 도시국가는 사실상 독립성을 잃고 말았다.

알렉산더대왕(BC 356-323)은 페르시아정복이라는 어마어마한 야심에 제국의 백성과 동맹국의 국민을 함께 참여시켰다. 바로 그 순간부터 새로운 세계가 싹텄는데 거대한 헬레니즘의 세계 안에서 그리스인도 무려 3세기 동안 아시아의 내륙지방과 이집트에서 계속 위력을 떨쳤던 것이다.

 

 

기록과 증언

■이상적인 미에 대한 그리스인의 찬양, 망루에 선 아폴론

요한 빙겔만은 1755년 자신의 첫 저서에서 당시 서구사상의 주류를 거슬렀다. 그는 바로크 양식에 반기를 들고 이상적인 미를 추구하는 그리스 예술의 단순미를 제창하였으며, 절대적이고 영원한 미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예술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예술운동은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신고전주의 문학과 예술의 탄생을 촉진시켰다.

 

■아테네인의 종교생활

●프랑스 역사가 퓌르텔 드쿨랑주의 <고대 도시국가>는 19세기 역사의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종교가 고대인의 가족구조와 도시국가 구조의 기본원리였음을 보여주었다. ...로마인만이 신에게 경외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인에게도 신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테네인들은 오랜 전통과 의식에 대해서 각별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테네인의 주된 종교 자체이며 가장 헌신적인 신앙을 바치던 대상은 그들의 선조와 영웅이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올린 기도

●에르네 르낭(19세말 프랑스작가)이 아테네를 처음 방문했을 때으 감동을 적은 기도문이다. ...신앙이 우리를 구속하는 사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자색수의에 싸서 죽은 신들이 잠들어있는 곳에 정성껏 모셔두는 것으로 우리는 신앙과의 관계를 청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청동기 시대 궁전에서 발견된 음절문자들

●군주체제의 크레타와 그리스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표의문자들이 발달하였는데, 이들은 서로 계통적으로 서로 연관성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크레타인의 선문자 A와 아카이아인의 선문자 B다. 선문자 B는 선문자 A에서 파생된 것으로 크레타의 서기관이 그들의 언어와 다른 그리스어를 기록하기 위하여 기존의 문자를 응용한 것이다. 연구결과 선문자 B는 500여년 가까이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는데 그동안 형태가 거의 변하지 않았음을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선문자 A는 아직 해독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선문자 B는 점토팜 N이에 씌어져 인간이 기억하고 있는 사실들에 하나의 형태를 부여했다.

 

■미케네 서판에 나타나 있는 신들의 계보

●올림포스 신족의 계보는 미케네 시대보다 몇 세기 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올림포스 신족의 계보에 들어있는 주요한 신들은 이미 미케네 서판에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신들은 아주 보잘것없는 신으로 전락하여 단지 명맥만을 유지하기도 했고, 또 어떤 신들의 신격은 대신(大神)안에 수용되기도 했으며 어던 TLSEFM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아티카 도자기의 발전

●아테네 도자기는 다양한 변형을 거치면서 급속히 발전했다. 기하학적인 문양을 중심으로 한 추상적 양식이 풍미하던 시대를 거쳐 매우 화려한 동양풍의 시기로 넘어 갔으며 BC 6세기 초부터는 도자기 위에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붉은색 진흙으로 된 도자기 위에 검은색으로 채색된다. 이 기법의 개발로 도자기의 장식그림은 더할 나위없는 정교함과 섬세한 아름다움을 갖게 되었다.

 

■솔론, 입법자 그리고 시인

●솔론은 부채를 탕감해 사회적 위기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아테네인들에게 새로운 정치체제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애가(哀歌)에 자신의 행적과 정치적 노선으로서의 중용주의를 담았는데 이주 DAUC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의 정체>에 실려 있다.

1. 회고 : 나는 국민에게 충분한 권리를 주었다. 그들의 권리를 조금도 침해하지 않았고 조금도 더하지 않았으며, 힘을 가진 자와 자신의 부귀로써 힘을 과시하는 자에게 못마땅한 것이 없도록 조처하였다. 양편 모두으 L든든한 보호자로서 해야 할 의무를 밀고 나갔으며 어느 한쪽이 부당하게ㅐ 승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2. 정치 : 나라의 우두머리가 국민을 학대하지도 떠ㅗ너무 자유분방하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때 국민은 지도자를 가장 잘 따를 것이다. 왜냐하면 현명하지 못한 자에게 갑자기 행운이 떨어지면 비정상이 되기 때문이다.

3. 토지분배 : 그들은 광적인 희망을 가지고 약탈에 가담했고, 큰 부를 얻을 거라고 기대했다. 내가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거짓된 말로 자기들을 기만하고 있음을, 내 이면 잔혹성이 감추어져 있음을 천하에 드러낼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해

다. 얼마나 허황된 생각인가? 지금 사람들은 나를 원수로 보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약속한 것을 신의 가호아래 이루어냈으며,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결코 경박하게 처신하지 않았고, 독재적인 폭력을 사용하여 업무를 처리한 적도 없으며, 비옥한 조국의 땅을 선한자와 악한자로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었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부채탕감과 노예 신분 해방 : 내가 국민들을 단합시켜서 이루려고 했던 일 중에서 끝가지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그 무엇보다도 시간의 심판대 앞에서 나를 가장 잘 증명해 줄 수 있는 자는 올림포스 신들의 위대한 어머니, 검은 땅이다. 나는 방방곡곡에서 땅속깊이 박힌 말뚝들을 뽑아 버렸다. 예전에는 속박에 지나지 않았던 이 땅이 이제는 자유의 땅으로 변했다. 나는 많은 동포들을 신들이 건설한 우리의 조국 아테네로 다시 불러왔다. 그들은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로 팔려 조국을 떠났던 자들이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끔찍스러운 가난 때문에 유배생활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타향을 전전하며 살아와서 아티카의 말을 잊은 경우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로 여기 우리 도시에서도 수치스러운 노예생활을 하며 그들 주인의 잔혹하고 변덕스러운 성미 앞에서 오금을 떨면서 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나는 이 일을 실행할 때 정의와 현실적 제약을 동시에 참작하면서법에 의거하여 진행했으며 내가 약속했던 바를 끝까지 관철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선한 자들과 약한 자들 양자에게 각각 합당하고 공평한 법을 만들었다. 만약 나 이외의 어떤 사악하고 욕심 많은 사람 하나가 국민들을 마구 몰아쳤다면 그는 국민들에게서 지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대 국민의 적인 토지귀족들의 환심을 사려는 정책만 폈다면, 혹은 그들이 마음속으로부터 국민들이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던 바의 정책만 폈다면 우리는 많은 국민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들 모두를 멀리하고자 했다. 마치 사냥개의 무리에 둘러싸여 그 한가운데 있는 늑대처럼.....

 

■나우크라티스, 이집트 영토내의 그리스 조계지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했던 그리스인은 중요 교역로 위에 무역기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착지들은 현지 권력의 승인을 얻어 개설한 상인들의 조계지였다. ...이집트 파라오 아마시스(BC 568-526)은 그리스인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인에게 여러 이권을 부여했는데 나우크라티스를 내주어 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하다.

 

■BC 5세기 초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두 학자

●밀레토스학파의 맥을 이어 헤라클리이토스도 우주의 생성과 활동에 대한 근본원리를 탐구하였다. 그는 우주의 근본을 불이라고 보았다. 그는 우주만물은 생성유전하며 항상 유동의 상태라고 주장하였지만, 결국 모든 것은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는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변화는 감각의 환영이라고 믿었다.

 

■BC 6-5세기의 민주주의 수호자들과 다양한 민주주의 체제

●참주, 개혁가, 민중의 지도자, 이들은 모두 아테네의 점진적인 민주주의 건설에 기여하였다.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기여를 한 세 명의 인물은 호인 페이시스트라토스(BC 600?-527), 자신의 정치적 실패를 토대로 민중의 편으로 돌아선 클레이스테네스(BC 500년 전후), 그리고 가장 위대한 페리클레스(BC 495-425)이다.

페이시스라토스는 참주라기보다는 선량한 시민으로서 겸손한 태도로 군림했다. ...클레이스테네스가 권력에 올랐던 초기에는 자신의 역할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가 민중의 지지를 얻기 시작하자 부족의 수를 늘리고 그 이름을 바꾸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열명의 족장을 임명하고 열 개의 구를 각 부족에게 분배하였다. 민중이 그의 편이었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경쟁자들을 누를 수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탁월한 재능과 청렴한 성품으로 확고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는 자신의 권위로 시민 개개인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러면서도 하나로 굳게 뭉치게 했다. 페리클레스는 국민에게 조종당하는 정치가가 아니라 국민을 자신의 신념대로 이끌 줄 아는 현명한 지도자였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반대한 늙은 과두정치가

●한 익명의 작가가 남긴 이글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글은 크세노폰(BC 431-352)의 글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사실은 늙은 과두정치가라고 부르는 인물이 쓴 <아테네의 정치체제>라는 글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가난한 자들과 민중이 교양인과 부유층보다 중시되는 정치형태가 아테네에서는 당연한 듯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전함을 움직이며 국력의 밑받침이 되는 자들이 민중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테네의 국력이 장갑보병이나 귀족 혹은 창출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항해사, 조타수, 이등수부장, 뱃머리에서 망보는 사람들, 그리고 배를 만드는 사람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통음난무(痛飮亂舞)의 디오니소스 제전

●디오니소스에게 정신을 뺏긴 여인들은 규방에서 뛰쳐나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날짐승을 잡아서 날것으로 먹기도 했는데, 이느 SWJD상적인 생활이나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제물의 희생의식과 상반되는 행위였다. ...도자기 작품 속에는 메나데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러한 작품의 의도는 최면상태에서 난폭하게 날뛰는 디오니소스 여신도들의 광적인 자태를 보여주려는 것으로 작가의 동작묘사는 매우 훌륭하다.

 

■아테네 시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감동적인 연설문

●뛰어난 변론술로 아테네 시민의 행동을 촉구한 데모스테네스의 연설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은 <최초의 탄핵연설>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아테네 시민에게 두가지 노선을 제시하면서 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촉구하였다. 그것은 비열하게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비극적인 결과를 맞겠는가, 아니면 마케도니아왕의 부당한 야욕에 맞서 도시국가 전체가 궐기하여 쓸모없는 용벙 대신에 아테네 시민으로 병력을 구성하여 대항하느냐하는 것이었다.

아테네 시민이여. 나는 당신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지켜본 어떤 신이 끝내 필립왕에게 그 같은 행동을 하도록 종용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우리는 필립왕을 벌하려고 했습니다. 우리의 조국이 폐허가 되지 않도록 전쟁을 끝내려 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결코 잊지 않았을 텐데 지금 그의 작태를 보고 분노를 느끼지 않는 여러분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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