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로마인의 삶

청담(靑潭) 2018. 1. 4. 14:03

 

로마인의 삶

지은이 : 존 세이드 ․ 로제르 아눈

출판 : 시공사

 

머리말

●2015년 4월에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산레모, 피사, 로마, 폼페이, 소렌토, 나폴리, 피렌체, 베네치아를 방문한 바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로마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더하고자 한다.

 

 

제1장 라틴의 도시국가에서 세계의 제국으로

로마제국은 대립과 전쟁, 문화교류를 통하여 BC 8세기부터 클로비스 시대에 이르는 동안 성장했다. 에트루리아와 마그나 그레키아, 즉 대국 그리스의 위협적인 영향권에 들어있던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로마는 AD 2세기경부터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EI양한 문화가 공존했던 이 제국은 5세기경에 이르러 일부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들이 생각한 사회적 이상은 사회생활의 즐거움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개인이 여유롭게 삶을 즐기는 것이었다.

●?진보하는 로마문화?라는 개념도 주의를 요한다. 이러한 개념은 부유하고 교양 있는 로마, 자유시민의 로마, 다시 말해서 극소수 엘리트들의 로마에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빈민, 여성 노예들도 분명 로마를 이루는 한 축이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로마인 대부분을 이루는 이들은 절망적인 어둠속에서 살아야 했다.

●BC 753년 로물로스가 도시를 건설하고 ...에트루리아는 거듭 이동하여 점아 중앙 이탈리아까지 세력을 떨친다. ...BC 6세기 말엽에 에트루리아 도시들의 세력권내에서 로마는 강대하고 번창한 도시국가로 떠오른다. ...로마는 BC 509년 공화정으로 체제를 변화시킨다.

●로마가 지중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자 로마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펴고 있던 카르타고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첫번째 전쟁의 서곡은 시칠리아에 대한 주도권 다툼에서 비롯되었다(BC 264-241). 이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 ...두번째로 서부 지중해의 주도권을 뚤러싸고 일어난 이 처절한 대규모 전쟁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패전으로 끝을 맺는다.(BC 219-202)...이탈리아에서 밀려난 한니발은 아프리카의 자마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퇴하고 만다. ...로마는 끊임없이 확장정책을 펼쳤으며 BC 30년에는 이집트까지 굴복시킨다.

●BC 130년-120년까지 약 1세기 동안 로마와 이탈리아는 내전에 시달린다. 이 혼돈의 시기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와 카이우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조치로부터 시작된다. ...마리우스와 실라의 대립(BC 87-82),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립(BC50-48)은 당시 명망 높은 장군들 사이에 독재에 대한 열망이 생겨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BC 44)카이사르의 반대파와 추종자들 간에 새로운 대립이 일어났다(BC 44-42). 안토니우스와 그의 동맹자인 클레오파트라에게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맞섰다(BC 39-31). 이 대결에서 옥타비아누스가 거둔다. BC 27년 옥타비아누스는 제1인자로써 원로원 의장의 권위를 확고히 하면서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고 로마제국을 설립한다.

●로마는 3세기 말부터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의 개혁정치와 함께 새로운 시기로 접어들어 갔다. 이때부터 로마는 두 황제가 통치한다. 모든 명령체계는 일신되고 보다 효율적인 체제가 들어선다. 다시 1세기 동안 로마는 예전의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기독교가 번성하여 새로운 체제의 지주가 된다.

로마의 영토는 엄청나게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로마에서 파견한 행정관이 통치하던 지역은 로마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대략 40여개에 달했다. 서쪽의 지브롤터에서동쪽의 흑해, 북쪽의 영국에서 남쪽 사하라 사막과 수단지방,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펼쳐져 있었다. 로마에 굴복하지 않은 나라는 오직 페르시아 제국뿐이었다.

 

 

제2장 로마인의 일상

●로마는 절대적인 불평등사회였다. 로마 시민들이 모두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예와 자유시민, 외국인과 로마인, 남자와 여자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차별의 벽이 있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노예와 자유시민이라는 매우 판이한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또한 로마시민 중에서도 일반대중과 귀족은 엄격하게 계층이 구분돼 있었다.

노예들은 육체노동뿐 아니라 지적인 영역에서도 다양한 일을 맡았다. 개인소유의 노예중 도시지역의 노예들은 다양한 일에 종사하였지만, 농경지역에서는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다.

●로마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자유노예나 외국인들에게 선별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했다. 주인이 개인적으로 노예에게 자유를 주거나 공공의 결정으로 명령이 떨어지면 시민권을 주었으며, 그것은 개인이나 한 가족, 또는 한 집단까지 대상이 되었다. 대부분 노예의 헌신에 대한 보상이거나 로마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한 대가로 혜택을 준 것이다.

●가장 권위가 있는 계급은 원로원이었다. 원로원은 황제를 비롯하여 600명의 의원과 전임 집정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들의 역할은 현 집정관의 직무에 대한 조언을 하는 것이었다.

가족의 범위는 직계가족뿐 아니라 6촌까지의 방계가족도 포함하기에 이른다. 실제로 로마 가정의 정형은 한 증조부의 후손 3대가 모여 사는 형태였다. ...결혼을 했든 안했든 상관없이 아들들은 독자적인 결정권이 없었다. 그들의 재산은 모두 아버지의 소유로 되어 있었고 아버지가 죽은 후에야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었다.

●고대사회에서 은 결혼하면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남편의 영향권 아래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에 접어들면서 아내가 남편의 영향권 내에 있지 않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단지 결혼하고도 계속해서 아버지의 영향권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딸의 경우에는 12-16세 사이에 혼사를 정했고 아들은 대체로 18세 전후해서 결혼을 했다.

결혼식의 대부분은 신부 아버지의 집에서 치렀다. 결혼식에 앞서 약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신랑신부는 부모와 친구들 앞에서 결혼 서약을 교환한다. 신랑은 약혼녀에게 선물과 반지를 주었으며 여자는 이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었다. ...다음 신랑신부가 결혼에 동의하는 선언문을 읽었다. ...결혼 피로연이 끝나고 밤이 되면 사람들은 횃불을 밝히고 풀루트 소리와 결혼의 노래에 맞추어 유쾌하게 행렬을 지으면서 신부를 신랑의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부유한 시민들은 평균 3번 정도의 결혼을 했다. 사망률이 높고 이혼이 쉬운 탓도 있었지만, 단지 문서상으로만 부부인 경우도 있었다. ...로마에서 태어난 아이가 유아기를 무사히 지낼 확률은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고, 20세까지 살아남는 아이는 그 절반에 불과했다.

●결혼한 여자들은 집안에서 미약한 존재였다. 그들에겐 가문을 위해 희생할 권리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정을 관리했고 그리스의 여자들처럼 방에만 갇혀 지내지는 않았다. 부인은 남편과 동반해서 외출할 수 있었고, 남자들이 모이는 식사모임 등에 참석할 수도 있었다.

●평범한 가문에 재산은 많지 않으나 야심을 가진 이들은 부자나 권력자의 클리엔텔라(피보호자)가 되곤 했다. 이 관계는 세습되었으며 클리엔텔라와 파트로누스(보호자)간ㅇ 아주 긴밀하고도 상호적인 유대를 이루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지위와 능력을 동원해서 상대방을 보호하고 지지했다. 서로간에 충실함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상호부조관계는 정치 사회 재정 등 총체적인 면에서 로마인의 삶의 아주 중요한 근간을 이룬다.

검투사 경기는 돈이 많이 들었지만 그 지역의 재정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므로 새 집정관의 취임 시에는 으레 경기가 열렸다.

 

 

제3장 도시국가의 세계

●로마는 그리스로부터 부분적으로 이어받은 도시국가의 모델을 보전하고 확산시켰다. 로마를 거치면서 비로소 도시국가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오늘날의 법치국가들이 원형으로 삼는 법률의 원칙들을 만들어냈다. 500여 년 동안의 변화를 거치면서 라티움의 도시국가 로마는 모든 자유인의 조국이 된 것이다.

투표권이란 시민이 누리는 최고의 특권가운데 하나였다.

●집정관, 사법관, 지방총독 등 로마 행정관들의 권력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비하면 훨씬 강력했다. 물론 그들에게도 제한조항이 있었다. 매년 세금을 내야했고, 그들이 내린 결정이 성직자나 일부 고위 행정관(호민관, 집정관)들에 의해 유보되거나 거부당해 취소될 수 있었다. 결국 그들도 법에는 승복해야 했다. 행정관을 보좌하는 기구로는 원로원이 있었는데 그 권위와 위세로 행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도시행정에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제국을 방어하는 정규군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대략 30만-40만 명 사이의 병력을 유지했으며 그중 18만 명이 지역 주둔군이었다. 부대의 대부분은 영국이나 라인강과 다뉴브강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제4장 종교와 신앙

●의식을 중시하고 다신교이면서도 교조적이지 않고 공동체를 중시했던 로마의 종교 역시 도시국가라는 로마의 특성에 의해 규정될 수 있다. 팍스 로마나의 기치아래 그들이 보여준 종교의 대혁명을 가져오게 된다. 바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공동체들은 저마다 그들만의 종교와 신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나 라틴의 도시들은 반드시 카피톨리움의 3신(주피터, 주노, 미네르바)이나 신격화된 황제 같은 로마의 수호신을 숭배해야만 했다.

●집단적이고 대중적인 성격을 지녔던 로마의 제식은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사원 앞에서 거행했다. ...제식의 순수한 종교적인 내용 외에 하나의 신성이나 계시, 또는 예언자나 주술가의 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 그리고 할례 같은 의식 등은 엘리트들에 의해 우스꽝스러운 미신이나 쓸데없는 행위로 배척받았다.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가던 기독교는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황제에 의해 공인을 받게 되며, 로마 교단의 많은 도움을 받는다. 제국 어디에서나 별다른 저항 없이 전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가르침은 널리 퍼져나가서 로마의 체제 내에서 자리를 잡는다.

 

 

제5장 가옥, 촌락, 그리고 오락

●헬레니즘과 이탈리아 반도의 문화에서 유래한 로마의 전통 건축술은 시민사회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포룸(고대 로마식 중앙의 대 광장), 목욕탕, 원형경기장, 곡예장 같은 공공건물은 로마 시민고유의 생활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사생활에 있어서도 주거양식은 사회의 엄격한 계층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로마인의 개인생활과 가족생활의 기본 틀은 가옥이었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폼페이의 고대가옥 모델(BC 4-3세기)을 상상하면 그 형태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로마제국에는 1마일(1481미터) 표지석을 세운 전략적 주요 도로들이 조직적으로 정비되어 있었다.

●로마나 주요도시에는 포룸이라는 광장이 있었다. 정치적 모임을 위해 세운 것으로 집회나 대중모임, 재판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광장 주변을 따라 바실리크식의 시장이 인접해 있었는데 날씨가 궂으면 비를 피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대중제례를 모시던 사원과 제정기 이후 신격화된 황제를 모시던 제단이 광장을 굽어보고 있어서 광장에 상당한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

●제정하에서 위생은 개인의 몫이었다. 그러나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가 전쟁의 노획물로 부유해지자 도시마다 공중목욕탕을 세웠다. 처음에는 평범했던 공중목욕탕은 갈수록 웅장하고 사치스러워졌다. 공공장소였던 만큼 점차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목욕탕은 로마의 문명화된 삶의 상징이자 고대도시의 쾌락의 중심지가 되었다. ..공중목욕탕은 단순히 목욕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레저의 중심지였다. 목욕탕의 정원에서 산책을 즐기거나 놀이를 하기도 했고 만남과 사교의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이륜마차 경주는 오랫동안 로마의 가장 대표적인 유희였다.

검투사들의 경기는 원래 성대한 장례식의 폐막행사에서 유래했으며 처음에는 포룸에서 열렸다. 그러다 공화정 말기에 이르면 로마인들의 유희 중 최고의 행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제정기에는 각 도시의 중심 지역마다 극장원형경기장이 들어섰다. 로마만큼 번성하지 못한 도시에서는 극장을 개조해서 검투사들의 대결을 유치하기도 하였다. ...원형경기장의 규모는 지역유지들이 투자한 액수에 비례한다. 그들은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볼거리를 제공했다. 처음에는 검투사의 격투가 가장 주된 종목이었으나 점차 경기장 안에 맹수를 풀어놓고 죽이는 경기가 성행했다.

●오늘날에는 그 유적들이 폐허로 남아 있지만 로마제국의 거대한 건물들은 시민의 오락이나 레저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공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 경기장의 검투사와 곡예사들에게 박수를 치며 재충전을 하는 것, 이것이 로마 중간층의 이상적인 삶이었다. 사는 집은 변변치 않지만 이들에게는 먹거리와 놀거리가 넉넉하게 제공되었다.

 

 

제6장 로마 문화

●아테네보다도 오히려 로마가 그리스 문명을 세계에 전파했다. BC 2세기경부터 그리스 문화는 로마 제국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인들이 새롭게 정비한 이 헬레니즘 문화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로마 시대 말기에 이르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비잔틴-로마 문화이다.

●로마와 그리스 문화는 소수의 폐쇄적인 집단 내부에서만 계승이 되었다. 기초교육을 담당할 학교는 있었지만, 공적인 혹은 사적인 보조금이 체계적으로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수가 매우 적었다.

●BC 2세기경까지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인구는 5%를 넘지 않았다.

●로마 세계에 공교육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교육은 가장과 가족들의 몫이었다. 학교의 교사는 회랑이나 상점의 뒷방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쳤다.

●철학이나 법률 같은 과목은 몇몇 도시(로마, 아테네, 베이루트)에서만 교육이 이루어졌다. ...좋은 가문의 젊은이들은 어느 정도 성숙하면 아버지의 주변사람들로부터 공공의 문제나 법률적인 논쟁, 군대에서 취해야 할 행동 등 실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선생은 그리 부유하지 못했다. 한생 한 명이 한달에 내는 돈이 50 데나리우스였기 때문에 솜씨 좋은 노동자 정도의 수입을 확보하려면 적어도 30명 정도의 학생은 확보해야 했다.

●그리스 세계의 풍속을 본떠 수많은 로마의 지식인들이 재미삼아 혹은 거의 직업적으로 책을 썼다. ...헬레니즘의 전통에 따르면 도서관은 일종의 문화의 전당이었다. 그래서 유지들은 도서관을 세우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았다.

●당시에는 문학도 역시 소수의 집단 내부에서 문자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제한적인 행위였다. ...일반적으로 친구에게 빌려주어서 베끼게 하거나 또는 아예 기증하는 방식으로 책이 전파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란 사치스럽고 비싸고 보관하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에 창작행위는 그다지 확산되지 않았다. BC 2세기경의 책이란 것은 3미터가 넘는 길이에 높이가 30센티미터에 이르는 파피루스의 두루마리였기 때문이다.

●대개 혼자 책을 읽을 때도 크게 소리 내어 읽었다. 또 LQ서가 읽어주거나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따로 두는 일이 많았다. 극장이나 공중목욕탕 등에서는 많은 수의 청중들을 위한 낭송이 열리기도 하였다.

●로마인들은 일상생활이나 행정적인 업무에 밀랍 칠을 하고 간혹 책처럼 제본한 얇은 판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를 코덱스라고 불렀다. 3-4세기경부터 양피지를 사용하여 제작한 이런 형태의 책은 놀랍게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보관도 편리하고 경제적이며 공간을 적게 차지했던 코덱스는 기억력에 주로 의존하던 넓은 의미의 독서에서 텍스트에 의한 좁은 의미의 독서로 빠르고도 용이한 변화를 의미하는 지표였다.

●로마는 우리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는가? 그들은 유럽 교양어중 하나인 라틴어를 우리에게 전해 주었고 수많은 로망어를 남겨주었다. 또 로마의 법률과 공화정 체제, 그리스 문화, 지중해 지역의 두 종교-유대교와 기독교-를 중세와 근대세계로 넘겨주었다. 이 모든 로마의 유산은 로마의 정복활동과 세계통일에 힘입어 가능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유럽인은 모두 로마의 시민이다. 그들 모두는 로마가 남겨준 고대 세계로부터 전승하여 고르고 개선해서 후대로 넘겨준 다양한 문화유산의 수혜자인 것이다.

 

 

기록과 증언

■시민권

●시민권의 개념은 로마인들이 물려준 가장 중요한 유산중의 하나이다. 시민권이란 단순히 정치적 참여의 권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 평등을 바탕으로 한 신분의 공동체이다. 시민이라는 추상적 지위를 법적인 권리의 소유자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로마는 근대국가의 조상이다.

로마의 자유는 법률적인 평등이 보장되는 한 사회적 정치적인 불평등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따라서 법의 자율성이 인정되는 한 귀족계급의 존재는 별 어려움 없이 유지될 수 있었고 개인의 권력 또한 용인되고 있었다.

●로마와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장 가까운 지역들은 곧 완전한 로마시민권을 획득했다. ...반면에 로마의 전통에서 문화적으로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국가들은 .....투표권 없는 로마시민의 그룹에 들어갔다. 이들은 로마의 시민이기는 하였지만 정치적 권리는 없었다.

●BC 334년에서 184년 사이에 약 25개의 식민지가 설립되었는데 주민의 절반은 로마인이고 나머지 반은 이탈리아 반도의 동맹국 사람들과 그곳에 낭아있던 원주민들로 이루어졌다.

 

■제식에서 기독교로

●1000여년 동안 로마는 로마법만큼이나 엄격한 제례의식을 종교로 삼았다. ...AD 3세기경 로마는 더 이상 다른 종교로부터 자신의 시민을 지킬 수 없게 되었고, 신성과의 또 다른 관계를 자유롭게 맺을 수 있었다.

●AD 1세기경에 키케로(BC 106-BC 43)가 썼던 철학적 논설들은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그리스 철학의 범주들의 도움을 받아 로마의 전통에 대해 고찰하도록 가르치고 있었다.

《무릇 우리가 미신을 근절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나 모든 시민들에게 큰 이익이 될 것이다. 미신을 없앤다고 해서 종교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무릇 현자란 조산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예배의식과 그 규율을 잘 보존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주의 아름다움과 천체현상의 질서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경의와 숭배를 받아 마땅한 전능하고 영원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 질서에 대한 지식과 결합된 종교를 널리 퍼뜨려야하며 동시에 모든 미신의 뿌리를 근절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미신은 지독하고도 끈질긴 것이어서 그대가 어디로 몸을 돌린다고 해도 그대를 따라다닌다.》

 

■빵과 유희

●전차경주는 BC 6세기부터 시작되었다. 검투사 경기는 BC 264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장례의식을 위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모든 행사에 빠질 수없는 요소가 되었다. ...귀족층은 자신들에게 표를 던지고 경의를 바치는 시민들에 대한 보답으로 이런 오락거리를 제공했지만 이로 인해 재산을 탕진하고 몰락해 갔다.

●연극과 투기장의 스타들은 귀부인들을 반하게 했다. ...귀부인들의 품행은 충격적인데 그녀들은 사회의 최하층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보고 황홀해했기 때문이다.

벤허는 원래 루이스 윌리스의 소설(1880)로, 연극으로도 상연되기도 했고(1899), 영화로 제작되었으며(1907, 1925, 1959) 마침내는 -원작에 충실하게 -실제 규모로 야외에서 공연되기도 했다(1961). ...당시 로마의 전차경주 스타들의 인기는 결코 오늘날의 텔레비전에 비치는 스타들에 뒤지지 않았다.

 

■폴리비우스가 로마 제국의 군단에 대해 이야기하다

●로마의 그리스 정복과 제3차 포에니전쟁의 증인인 그리스인 폴리비우스(BC 201-120)는 스키피오 에밀리아누스의 측근이었는데 그는 저서 《역사》에서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 있는 로마군단에 대해 최초로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로마 군단의 야영지 규모는 하나의 도시에 비할 만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 제국의 언어, 라틴어

라틴어가 지방 방언을 넘어선 지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로마제국의 황제가 다스리는 정치가 모든 사람에게 라틴어를 사용하도록 종용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로마인들이 그것을 위대한 문화언어, 즉 로마법의 언어로 만들 만한 수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문명 중 가장 눈에 띄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상징으로 라틴어를 꼽을 수 있다. 라틴어는 엄밀 의미에서 로마라는 한 도시의 방언인데 우선은 이탈리아에서 다음에는 로마제국 식민지에서 점차 그 영역을 넓혀 로마제국 시기에는 세계 언어가 되었다.

●BC 8세기부터 에트루리아에서 들여온 그리스식 알파벳으로 쓰여진 라틴어는 완만한 내적 변화를 겪은 끝에 BC 3세기경부터 큰 변화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스 문화와 접촉한 후 곧 그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라틴어는 2세기동안에 그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를 표현하고 전달하기에 적합한 유연함과 완벽함을 획득했다.

●점차 달라져가는 각 지방의 방언 한편에서 문어 라틴어는 오로지 문학을 통해서만 그 통일성을 유지했다. ...심지어 카롤링거 왕조(AD 751-987)의 르네상스는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 로망어(로맨스어라고도 하는데, 라틴어가 분화하여 이루어진 언어를 통틀어서 이르는 말)의 단어들보다 더 현학적인 단어들을 로마의 영역권과 이웃한 지역들에 전파했다.

 

■트리말키온 : 사회적 신분 상승의 한 예

●원로원 의원인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BC 66 사망)의 작품인 《사티리콘》은 네로 황제 시대의 이탈리아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종종 근대적인 어조를 띠는 이 소설은 특히 벼락부자가 된 자유노예들의 사교계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은 당시 세련된 로마 귀족들의 비웃음을 샀다. 여기에 나오는 화려한 대목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트리말키온의 연회로 펠리니 감독은 이를 영화(샤티리콘 : 1969)로 만들었다.

●노예들 가운데 트리말키온은 긴 머리칼의 젊은 노예로 그려져 있다. ...트리말키온은 수입에 지출을 조정하며 마침내 호화롭게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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