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

청담(靑潭) 2017. 12. 19. 22:52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

지은이 : 장 베르쿠테

출판 : 시공사

머리말

2010년 1월, 이집트를 다녀왔다. 카이로와 룩소르를 방문하여 많은 유적을 찾았으나 지리적으로 잘 기억이 되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진즉부터 집에 소장되어 있던 책인데 이제야 읽어보게 되었다.

 

제1장 사라진 이집트, 파라오 시대

●AD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로마제국 안에 있는 이교도 신전을 무도 폐쇄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결정은 BC 4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알렉산드리아 침공 때 일어난 도서관 화재보다도 더욱 심각한 사태를 초래했다. ...알렉산드리아 시민이 봉기하자 군중이 함대를 탈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카이사르는 함대를 불살라 버리게 했고 불길이 도시로 옮겨 붙으면서 도서관도 화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로마와 비잔틴 황제들은 제국의 도시를 장식하기 위해 이집트에 남아있던 여러 가지 유물을 약탈해 갔는데 유물에 새겨 있던 신비한 비문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제2장 고대의 여행자

●그리스인 어머니를 둔 스트라본(BC64-AD23)은 흑해연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집트를 방문한 것은 BC 30년경이었다.

게르마니쿠스(BC 15-AD 19)는 몸소 이집트에 있는 고대 유적을 둘러보기 위해 이집트로 여행을 떠났다.

 

제3장 나일강을 따라 몰려오는 십자군, 수도사, 관광객

●이집트로의 여행은 지루하고 고통스러웠다. 사람을 잔뜩 실은 작은 배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는데 항해기간도 6개월이나 걸렸다.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반슬레프 신부는 1672년 루이 14세의 재상 콜베르의 요청으로 고대 이집트의 필사본과 화폐를 구입하는 학술적인 임무를 맡았다. 같은 해 카이로에 도착한 반슬레프는 이집트 곳곳을 여행했다.

●프랑스 총영사 마예는 19세기 이집트 고대유물을 약탈하여 유럽의 대형박물관에 실어 보내는 일에 앞장섰던 악명 높은 이집트 주재 영사들의 대선배였다.

●카이로 예수회 선교단 단장이었던 클로드 시카르 신부는 이집트 최초로 전역을 여행하면서 이집트 지도를 완성했다.

●제5집정관 시대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조세핀 드보아르네는 자신이 보호해 주던 드농나폴레옹에게 추천했다. ...비방 드농은 이집트학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

 

제4장 탐험가와 도굴꾼

●1799년 7월 카이로로 돌아온 비방 드농나폴레옹에게 스케치를 보여주면서 여행 중 보았던 모든 사실을 보고했다. 나폴레옹은 학자들로 구성된 두 개의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드농이 목격했던 모든 유적을 측정하고 그림에 담고 드농이 착수한 연구를 계속하도록 지시했다.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이 누렸던 부귀영화의 흔적은 1922년 투탄카멘(재위 BC 1361-1352)의 무덤 발굴로 다시 확인되었다.

●이집트인들이 시작한 약탈은 로마와 비잔틴 황제들로 이어졌다. 오벨리스크, 스핑크스, 조상 따위 역사적 기념물은 제국의 수도로 옮겨져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하드리아누스(76-138)나 디오클레티아누스(245-316)처럼 기념물로 별장을 장식한 황제도 있었다. 이들보다 앞서 페르시아 왕들도 고대 이집트 신전에서 빼내온 조상들을 페르세폴리스로 실어 날랐다.

●1810년 이후 도굴범과 모험가는 오랜 전통을 답습해 이집트의 유적을 약탈했고, 게다가 모하메드 알리 정부는 온갖 편의를 아끼지 않고 그들을 지원했다. 1769년 마케도니아에서 출생한 모하메드 알리는 알바니아군에 가담했다가 1803년에 영국인이 이집트에서 철수함에 따라 그 부대의 대장이 되었다. 1805년에 이집트총독으로 임명된 모하메드 알리는 1811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마믈루크족을 학살하고 그들의 세력을 제거했다. 카이로의 성채에서 발생했던 학살사건은 널리 알려졌다. 콘스탄티노플의 오스만투르크 황제가 임명한 총독 모하메드 알리는 사건이후 독자적으로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이집트 현대화 계획을 수립했다.

드로베티는 유물을 사들여 루브르박물관에 전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루이 18세(1755-1824)에게 제시했으나 앙은 값이 터무니없이 비싸다며 거절했다. 결국 드로베티의 제1차 수집품은 40만 리라에 사르데냐의 왕 샤를 펠릭스에게 돌아갔다. 토리노 박물관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수준 높은 고대 이집트 유물을 소장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거래에 만족한 드로베티는 유적발굴을 계속했고, 2차 수집품의 구매를 프랑스에 요청했다. 샹폴리옹(1790-1832)의 권유를 받아들인 샤를 10세(1757-1836)는 이 수집품을 25만 프랑에 사들였다.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관의 중심 소장품인 이 훌륭한 유물 중에는 투트모시스 3세가 부하 장군에게 선사한 놀랄만큼 아름다운 순금잔도 있다. 드로베티는 3차 발굴작업을 계속했고, 그때의 수집품은 1836년에 이집트의 학자 렙시우스의 요청으로 프러시아 왕이 구매했다. 이는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드로베티의 2차 수집품에다 솔트의 수집품가지 사들인 루브르박물관은 토리노박물관 못지않게 이집트관을 꾸밀 수 있었다. ...드로베티처럼 솔트도 3차 수집작업을 했는데 3차 수집품 1,083점 가운데 대부분은 1827년 그가 이집트에서 사망한 후 대영박물관에서 사들였다.

●19세기 초에 행해진 고대유물의 약탈은 분명 수치스러운 행위였지만, 어떤 면에서 그것은 오히려 파괴될 뻔했던 많은 유물을 구해 낸 행위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1810년에서 1828년 사이에 13곳의 신전이 파괴되었는데 그 신전 건축에 사용되었던 돌들은 공장을 짓는데 사용되었거나 용광로 속에서 녹아 버렸다. 그리고 많은 조상과 얕은 부조가 같은 운명에 놓여졌다.

 

제5장 학자의 시대

●1799년 8월, 공병장교 피에르 부샤르는 로제타 근처에서 쥘리앙 요새를 건설하기 위하나 기초공사를 감독하고 있었다. 그는 인부들이 부수고 있던 오래된 벽 내부에서 새까만 돌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돌에는 문자가 가득 담겨 있었다. ...원정대에 소속되어 있던 고전학자들은 아래 부분에 새겨진 문장을 해석하여 이것이 프톨레마이우스 5세(BC 196)가 내린 칙령의 사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1922년 마침내 샹폴리옹(1790-1832)은 이집트어가 표의문자인 동시에 표음문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6장 이집트를 구하려는 고고학자

●1850년 10월 27일 사카라에 도착한 마리에트는 반쯤 모래 속에 묻혀있는 스핑크스를 발견했다. ...1858년 마리에트는 이집트 고대유물 관리국의 책임자에 임명되었다. 샹폴리옹이 상형문자의 해독에 기여한 만큼 마리에트는 이집트 고고학 분야에 크게 기여했다. 볼로뉴 대학의 교수 마리에트는 이집트 총독 사이드 파샤의 후원아래 이집트 고대유물 관리국의 전신 유적발굴 본부를 창설했다. 이로써 이집트 고대 유물에 대한 조직적인 약탈은 끝이 났다. 그는 유적본부가 발굴한 유물을 카이로의 외항인 블라크에 설립한 작은 박물관에 소장했다. 마리에트는 카이로 박물관의 설립자라고 할 수 있다.

 

제7장 이집트 재발견

●이집트 발견의 중요한 전환점을 목격한 투탄카멘(재위 BC 1361-1352) 무덤발굴은 세가지 개별사건의 우연한 결합이 이루어낸 작품이었다. ...첫번째 사건은 BC 1140년경에 일어났다. 테베의 인부들이 람세스 6세(재위 BC 1156-1149)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파낸 흙더미를 입구 근처에 쌓고 있었다. 이대 인부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200여 년 전부터 잊혀져 왔던 작은 무덤 하나를 덮어버렸다. 람세스 6세의 무덤에서 작업하던 인부들이 아니었다면 투탄카멘의 무덤도 왕릉에 계곡에 있는 다른 무덤들과 마찬가지로 도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1892년 영국의 젊은 화가 하워드 카터가 이집트 탐험기금이라는 단체의 위촉을 받고 데이르엘바하리에 있는 멘투호테프(BC 2061-2010) 신전의 부조와 비문을 복제하기 위해 이집트에 왔다.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왕릉의 계곡에 매혹되어 꿈속에서 계곡을 거닐 정도였다. ...1922년 11월 4일, 지하로 연결되는 돌계단이 발견되었다. ..왕릉의 계곡(신왕국시대의 테베인 룩소르시 서쪽)에 있는 무덤 중 가장 작은 무덤인 투탄카멘의 무덤속에는 동상, 침상, 의자, 소파, 배의 모형, 이륜마차, 무기, 항아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물이 쌓여 있었다.

 

 

 

기록과 증언

■이집트 출정

●1799년 5월 19일 나폴레옹(1769-1821)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가 툴룽을 출발했다. 일행중에는 학자와 화가도 끼어 있었다. 이집트 원정은 나폴레옹의 운명뿐 아니라 고고학사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전포고도 없이 식민지 건설을 위해 공공연히 침략행위를 자행했다. ...그러나 무모한 이집트 원정은 세계의 모습을 적지 않게 변화시켰다. 이를 계기로잊혀졌던 신비로운 이집트 문명이 다시 빛을 발하게 되었으며 구대 이집트와 그 언어를 연구하는 이집트학이 탄생되었다. ...탈레랑(1754-1838)은 이집트를 정복하면 원정대를 수에즈에서 인도로 보낼 수 있고 1784년 영국군을 축출하고 마이소르의 왕이 된 티푸 사히브(재위 1782-1799)와 동맹을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탈레랑이 나폴레옹을 이집트로 보낸것은 경솔한 판단이었던 듯 하다. ...제 5집정관 정부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던 장군이 멀리 떠난다는 사실에 만족했던 것이 분명했다. ...프랑스군은 이집트에 도착한 날부터 1799년 6월 28일까지 (겨우 한달 동안) 5,34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집트지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제국의 인쇄국은 《이집트지》를 발간했다. 200명의 화가들이 제작한 907장의 도판집에는 3,000여점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이집트지》는 유적, 식무로가 동물의 생태, 풍경, 이집트인의 전반적인 안내를 위해 발간되었다.

 

■이집트 양식의 부활

●파리로 귀환한 나폴레옹은 집정관이 되었고, 그의 승리는 확고한 듯 했다.

 

■오벨리스크의 긴 여행

●1836년 10월, 콩코드 광장 중앙에 새로운 기념물이 하나가 세워졌다. 이 기념물은 룩소르에 서 있던 오벨리스크로 이집트 정부의 선물이었다. 파리 시민에게 기념물 이전 행사에 참여할 것을 권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1878년에는 영국인도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고 부르는 오벨리스크를 템스강변에 세웠다. ...이오벨레스크의 길이는 22m이고 무게는 225통이다. 이 경이로운 기념비는 BC 1550년경에 축조되었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일찍이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유럽과 아시아의 직행항로 개설을 꿈꾸었다. 그 꿈은 1869년 페르디낭 레셉스(1805-1894)의 노력으로 실현되었다. 레셉스는 협곡을 뚫어 길이가 164km에 이르는 운하를 건설했다.

 

■동방여행

●예술가와 작가는 한결같이 낯선 곳을 꿈꾼다. 이탈리아를 꿈꾸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동방을 꿈꾸는 사람도 있다. 동방여행은 19세기 일부 작가의 작품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한다.

 

■미국인의 피라미드 등정기

●1867년 6월 8일, 마크 트웨인(1835-1910)이라는 필명을 쓰는 미국의 젊은 신문기자 새뮤얼 랭흔 클레멘스는 관광사상 최초로 구성된 대규모 단체여행단과 함께 퀘이커 시티라는 배에 몸을 실었다.

●돌덩이 하나의 높이는 65cm에서 90cm(보통 계단은 20cm)로 피라미드에 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필레에 온 해군장교

●1907년 1얼, 총독의 초청으로 이집트 방문길에 오른 피에르 로티는 나일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가는 곳마다 펼쳐진 아름다운 풍광과 위대한 약사의 흔적에 그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멤피스의 세라페움

●어느 날 스트라본의 책을 읽던 오귀스트 마리에트는 스핑크스에서 시작된 길이 멤피스에 있는 아피스 황소의 무덤으로 통할지도 모른다는 느김을 받았다. 1851년 11월, 그 장소에 선을 그어 구획을 정하고 이 길을 파헤쳐 나가다가 마침내 봉인된 무덤에 도달하게 된다. 그곳 세라페움에서 발굴해 낸 아름다운 유물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멤피스에는 여러 신전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아피스, 즉 오시리스를 모신 신전이다. 이곳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던 아피스 황소가 모셔진 방이 있다.

 

■카르나크의 부활

●1589년 여름 카르나크, 한 남자가 수많은 기둥이 세워진 홍을 향해 가고있었다. ...그는 나일강 상류지역에 발자취를 남긴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거의 1세기 동안 유럽 여행자 중에는 어느 누구도 위험을 무릅쓰고 나일강 상류지역으로 여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때문에 하류지역인 기제와 사카라 등 카이로 근처에 위치한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668년 프로테프랑수아라는 카프친파 신부 두 사람이 상류지역에 있는 콥트인의 거주지를 찾다가 우연히 카르나크와 룩소르의 폐허를 발견했다.

●룩소르는 카이로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외국인이 여행하기에는 위험했다. 도미니크파 신부 반슬레프는 왕실 도서관을 위해 고대 이집트 시대의 필사본을 수집하라는 콜베르(1619-1683)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룩소르 주민들의 적대감 때문에 카이로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과학적인 연구와 기록은 나폴레옹 원정대의 일원으로 지중해를 건너왔던 학자들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원정에 참여했던 젊은 기술자 졸루아드빌리에는 1799년 한 해를 카르나크 연구에 바쳤다.

●1828년까지는 골동품 상인과 암거래상이 설쳐 여러 차례 도굴이 행해졌다. ...1828년 샹폴리옹이 카르나크를 방문했다. ...1828년부터 1858년까지 이집트에 관심 있는 일반 여행객들과 함께 이집트의 학자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903년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영광의 해였다. 제7탑문 안뜰에서 파라오와 성직자와 고관의 조상 수백점이 발견되었다. 이 조상들은 프톨레마이우스(2세기) 시대 초기에 그곳에 묻혔다고 추정할 수 있었다.

 

■필레의 복원작업

●20세기 초에 시작된 나일강 공사로 수몰된 필레섬에는 더 이상 지난 날 여행자들이 찬미했던 전원풍경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네스코는 1960년부터 필레섬의 유적을 인근 섬의 높은 지대로 이전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1972년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필레섬은 1년 동안 물에 잠겨 있었다.

 

■아부심벨 구조작업

●1956년 이집트정부는 새로운 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공사는 나일강 연안에 위치한 누비아 지역의 모든 유적과 유물을 파괴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유네스코의 유적 구조 활동 중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아부심벨 바위위에 축조된 신전을 해체하여 끌어내린 후 유적과 성소(聖所)를 호수 위쪽 새로운 곳에다 복원해 놓는 작업이다.

●아부심벨의 신전들은 지금 원래 예정된 곳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으며, 인근에 고급 호텔도 세워져 이전보다 훨씬 편하게 그곳을 방문할 수 있다.

 

■도굴의 역사

●먼저 스핑크스로 가서 그 얼굴에서 남동쪽으로 12말레키트 되는 위치에 선다. 1말레키트는 남자의 팔뚝 길이의 1.5배 정도(약 1m)이다. 그곳에는 돌이 널려 있을 것이다. 여기서 두 개의 석실분묘 사이의 가운데를 1카마와1바스타 깊이로 파면 덮개문이 나온다. 그때 덮개문 위에 쌓인 모래를 깨끗이 치우고 들어 올리면 대피라미드의 입구까지 갈 수가 있다.

■오늘의 이집트학

●100년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에 개인적인 위대한 탐사에서 집단적이고 과학적인 작업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적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고고학자의 하루

●1976년 12월 6일, 이 책의 저자인 장 베르쿠테는 사이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서 밤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낮에는 무슨 일을 했을까? 해답은 발굴일지에서 찾을 수 있다.

 

■람세스 2세의 새로운 생명

●1976년, 102명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팀은 유명한 람세스 2세의 미라를 병에서 구하여 그에게 영생을 되돌려 주었다. ...람세스 2세는 무려 30세기 동안이나 시간과 공간을 여행한 끝에 마침내 카이로박물관에 자신의 거처를 정했다.

●람세스 2세의 미라는 BC 1000년에 다른 왕족의 미라와 함께 데이르알바하리의 절벽에 숨겨진 이래 1881년까지 그곳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881년 그 지방의 한 농부가 이 은닉처를 발견했으며 이어 프랑스의 고고학자 가스통 마스페로가 그것이 람세스 2세의 미라라는 것을 확인했다.

 

■케옵스의 발자취를 따라서

●대피리미드에는 아직도 더 발굴할 유물이 남아 있는가? 두 명의 프랑스 건축가에 따르면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들의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기 위한 작업이 1986년 8월에 시작되었다. ...투탄카멘의 경우처럼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들은 약탈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무덤을 숨기도록 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이집트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이집트 전시실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다.

 

'독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인의 삶  (0) 2018.01.04
그리스 문명의 탄생  (0) 2017.12.24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0) 2017.07.15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0) 2017.04.13
한국현대생활문화사(1980년대)  (0) 2017.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