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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록(최덕중)

청담(靑潭) 2018. 7. 11. 19:04


연행록(燕行錄)

최덕중(?-?)


1712년(숙종 38) 군관 최덕중(崔德中)이 청나라에 다녀온 사행 일기. 1712년(숙종 38)에 저자가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 부사(副使) 참판 윤지인(尹趾仁 1656-1718)의 군관으로 정사(正使) 좌의정 김창집(金昌集 1648-1722), 서장관(書狀官)장령 노세하(盧世夏)를 따라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쓴 일기이다. 그 해 11월 1일부터 다음해 3월 30일까지 5개월 간의 기록이다.

권두·별록·일기로 구분되어 있다. 권두에는 저자가 부사 윤지인의 군관이 되어 동행하게 된 감회를 기록하였다. 별록은 청나라에 가서 행한 의식을 제목을 달아 설명한 것이다. 예컨대 입책식(入柵式)이란 만주 봉황성(鳳皇城)에 들어가는 절차를 기록한 것이고, 입경하정(入京下程)이란 청나라에서 조선 사행에게 공급하는 물품과 수량을 적은 것이다.

이 사행의 목적은 조선과 청나라간에 이루어진 네 가지 일에 대한 사은과 전통적인 동지사를 겸한 것이었다. 즉, 1644년(인조 22) 이후부터는 1년에 네 번 보내던 종전의 정기사행을 단일화해 삼절 겸 연공사(三節兼年貢使)란 이름으로 동지에 보내도록 했는데 바로 이 사행에 해당된다. 네 가지 사은이란 1712년에 확정시킨 백두산정계비의 건립, 예단을 줄여 방물로 바꾸도록 한 일, 금(金)의 진공을 없애고 표피(豹皮)를 감한 일, 청나라의 국경을 넘어간 조선 백성에 대한 조사를 면제한 것 등이다.

일기는 비교적 자세히 쓰여졌으며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종래 조선의 사대부는 청나라 문화를 적대시하고 우리 문화의 우월성을 내세웠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는 강희(康熙)의 치세로 문화가 극도로 융성하기 시작해 대청관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이와 같은 점은 이 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한편 청의 문금(門禁)이 한층 강화되어 모든 사행은 일정한 길을 경유, 정한 장소만을 유람하도록 했으며 문인들끼리의 문답도 저지했는데 종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이 사행의 다른 기록으로 김창업의 ≪연행일기 燕行日記≫가 있다.


■ 사절 파견의 역사적 배경과 동기

아아, 지난 병자년(丙子年)에 국운(國運)이 비색(否塞)하여 호기(胡騎 청 나라 기병)가 침범하매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도다. 취화(翠華)가 하성(下城)하매 대군(大君)은 볼모가 되고 연공(年貢)을 처음 정해서 신사(信使)가 잇따라 왕래하였도다. 그 후 갑신년(1644, 인조 22)에 이르러서는, 명(明) 나라 운수[統]가 이미 떨어져서 신기(神器 임금의 보위(寶位))가 넘어갔으니, 하늘의 뜻을 믿기 어려웠도다. 그 일을 어찌 차마 말하랴!

이 뒤로부터는 동지(冬至)ㆍ정조(正朝)ㆍ천추절(千秋節)의 방물(方物)을 온통 한 사신에게 부쳐서 절사(節使)라 부르며, 세수(歲首 연초(年初))에 바치기도 하였다. 임진년(1712, 숙종 38)에 청국(淸國)에서 백두산(白頭山)에 돌을 세워 경계(境界)를 확정(確定)하고, 예단(禮單)을 줄여서 방물로 이준(移准 옮겨 대충하는 것)하도록 허가하며, 진공(進貢)하던 금(金)을 혁파하고 또 표피(豹皮)를 감하며, 변경 백성이 국경을 넘은 자를 사의(査議)하는 것을 면제하였다. 이 네 건(件)에 대해 또 4기(四起)를 갖추어서 특히 절사(節使)에게 그 사은(謝恩)을 겸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장동(壯洞) 상국(相國) 김창집(金昌集)을 정사(正使)로, 명곡(明谷) 참판 윤지인(尹趾仁)을 부사(副使)로, 장령 노세하(盧世夏)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서, 그해 동짓달 초사흗날, 한양(漢陽)에서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나는 부사의 편비(偏裨 보좌관 또는 막료)로서 외람되게 그 뒤를 따랐다. 한 번 연산(燕山 연경(燕京))을 바라보니, 성난 머리털이 먼저 곤두서고 허리에 찬 칼이 저절로 울었다. 다만 한 차례 장한 구경을 한 것이 기뻤으나, 지식이 고루하고 문사(文辭)가 거칠고 졸렬하여 중국 산천과 이역(異域) 풍속을 오히려 능히 자세히 기록하지 못했다. 그러나 겨울에 갔다가 봄에 돌아왔는데, 그동안에 날마다 보고 들은 것을 뒤에 기록하였다.


■사행 의식 절차 및 예단 급여식

●입경 하정(入京下程)

예전 예는 다만 광록시(光祿寺)에서 쌀 1석 8두 ㆍ돼지고기 36근 ㆍ술 90병 ㆍ차 5근 10냥 ㆍ소금과 장 각각 9근 ㆍ기름 4근 8냥 ㆍ화초(花椒) 9냥 ㆍ채삼(菜蔘) 15근 등의 물건을 닷새 만에 한 차례씩 보내올 뿐이었다. 하곡의 《조천록》에 나옴.

순치(順治 청 세조(淸世祖)) 이후에는 호부에서 양식을 공급하고 공부(工部)에서 시탄(柴炭)과 마초(馬草)ㆍ기명(器皿)을 제공하며, 광록시에서 갖가지 찬물(饌物)을 제공한다.

하루 분 제공으로서, 사신에게는 논벼쌀[水稻米] 2되, 생선 3마리, 두부 2근, 엄채(醃菜) 2근, 흰 소금 2냥, 찻잎 2냥, 땔나무 17근. ○ 종반(宗班)이 정사(正使)일 적에는 논벼쌀 2되, 거위 1마리, 닭 3마리, 생선 3마리, 돼지고기 5근, 두부 3근, 엄채 3근, 우유 1동이, 홍시(紅柿) 15개, 밀초[蠟燭] 3지(枝), 마름 열매 15개, 대추 1근, 배 15개, 치즈[奶酥] 3냥, 수분(水粉) 1근, 식초 4냥, 마늘 10개, 청장(淸醬) 4냥, 반장(盤醬) 8냥, 생강 5냥, 흰 소금 2냥, 향유(香油) 3가지, 땔나무 30근이다. ○ 나흘 간격으로, 거위 2마리, 닭 3마리, 장과(醬瓜) 1근, 향유 2냥, 등유(燈油) 10냥, 식초 10냥, 청장 15냥, 반장 1근, 한양(漢羊) 1짝, 황주(黃酒) 1병을 한 차례씩 공급하는데, 겨울 석 달에는 손 쬐는 숯 10근이고, 노비(路費)로서 한양 두 짝이다. ○ 종반이 정사일 적에는 이틀 간격으로 달양(㺚羊) 1짝, 소주(燒酒) 1병을 한 차례씩 공급하는데, 겨울에는 고기 굽는 숯이 15근, 손 쬐는 숯이 30근이다. 서장관에게는 논벼쌀 2되, 생선 2마리, 두부 2근, 엄채(醃菜) 1근, 흰 소금 2냥, 찻잎 2냥, 땔나무 15근. ○ 나흘 간격으로 거위 2마리, 장과 8냥, 향유 10냥, 청장 15냥, 반장 1근, 한양 1짝, 황주 1병을 한 차례씩 공급하는데, 삼동(三冬)에는 손 쬐는 숯 10근, 노비로서 한양 1짝이다. 대통관(大通官)에게는 각, 백미 1되, 황육(黃肉) 1근 반, 닭 1마리, 엄채 반 근, 반장 3냥, 흰 소금 8냥, 등유 1냥, 찻잎 2냥, 황주 1병, 땔나무 10근인데, 겨울에는 손 쬐는 숯 7근, 노비로서는 고기 30근이었다. 압물관(押物官)에게는 각, 백미 1되, 황육 1근, 엄채 반 근, 반장 2냥, 흰 소금 2냥, 등유 2종지, 찻잎 1냥, 땔나무 10근, 오일주(五日酒) 4병인데 겨울에는 손 쬐는 숯이 5근, 노비로서 고기가 20근이다. 종인(從人)에게는 각, 백미 1되, 황육 반 근, 엄채 4냥, 기름 1종지, 소금 2냥, 땔나무 4근이다. ○ 상(賞)을 받은 종인(從人)에게는 오일주 2병, 노비로서 고기 10근이다. 말[馬]에게는 매 필에 콩 4되, 풀 2묶음, 땔나무 2근이다. 광록시에서 일행에게 주는 양고기 값은 은자(銀子) 58냥 5전이다. 대통관 세 사람에게는 각 1냥 9전, 압물관 24사람에게는 각 1냥 2전, 종인 30명에게는 각 8전씩이다.

●조참의(朝參儀)

예전 예는 조현(朝見)하는 날 오경(五更) 머리에, 사신 이하가 공복을 갖추고 대궐(大闕)에 나아가서 오문(午門) 밖에서 휴게(休憩)하였다. 해가 돋을 무렵, 오봉루(五鳳樓) 위에서 북을 치고 종을 두드린다. 전(殿) 뜰에서 채찍을 세 번 울리면, 안팎에서 반열을 가지런하게 하였다. 황제가 나와서 황극문(皇極門)에 임어(臨御)하면, 지금은 황극전에서 조회(朝會)를 보는데 황극을 태화(太和)로 이름을 고쳤음. 모든 관원은 황극문 뜰에 들어간다. 사신은 13성 차래관(差來官)과 더불어 오문 앞에 반열을 정하는데 각 관원의 끝에 서열(序列)을 매겼으며,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하며, 《회전(會典)》에 의해 여러 나라 사신보다 위에 서열을 매겼음. 한 줄로 감생(監生)의 앞에 선다. 조금 있다가 오문의 3문을 다 열면, 홍려시 서반(序班)이 사신 이하를 인도해서 어로(御路 황제가 다니는 길)에 이르며 오배 삼고두(五拜三叩頭)의 예를 거행한 다음, 드디어 오른편 액문(掖門)을 지나, 들어가 조현한다. 문무관(文武官)이 동서(東西)에 서로 마주했고 규의어사(糾儀御史)가 가운데 뜰에 벌여 서는데 사신 이하는 그 뒤에 가서 선다. 13성 관원이 들어가서 조현을 마치면, 서반이 사신 이하를 인도해서 어로에 꿇어앉히며 홍려시 관원이 게첩(揭帖)을 가지고 꿇어앉아서 아뢰기를,

“조선국(朝鮮國)에서 차래(差來)한 배신(陪臣), 아무 직(職), 아무 성명 등 몇 원(員)이 알현(謁見)합니다.”

한다. 사신 이하가 삼고두의 예를 거행하고 다시 꿇어앉는다. 황제가 친히 옥음(玉音 임금의 말씀)으로,

“저들에게 술과 밥을 주어서 먹게 하라.”

하면, 사신 이하가 다시 삼고두의 예를 한다. 서반이 인도해서 나오는데, 오른편 액문을 다시 지나, 광록시(光祿寺)에 가서 술과 밥을 먹고 예를 마친다. 하곡의 《조천록》에 나옴.

지금 절차도 예전 것과 다름 없으나, 예수(禮數)는 삼궤 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행하였다. 외국 사신은 으레 서반(西班) 말석에 차례를 매기는데, 우리나라 사신 이하는 모두 여러 나라 사신보다 위에 서열을 매겼다. 사신의 벼슬이 1품이면 전(殿) 안으로 인도되어 올라가서 5등 제후(諸侯)의 다음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나온다. 혹 정조일(正朝日) 태평연(太平宴) 때를 만나도 동서반(東西班) 1품 관직 외에는 모두 잔칫상이 없다. 여러 나라 사신은 일행에게 다만 한 상을 준다. 그러나 우리나라 세 사신에게는 각각 한 상을 주며, 대통사 이하 세 사람에게는 아울러 한 상을 준다.

●상마연(上馬宴)

관소(館所)에서 거행하는데, 찬품(饌品)과 절차는 예부(禮部)에서 거행한 하마연(下馬宴)과 같다. 그런데 좌차(坐次)는 상서(尙書)가 동쪽에 앉고, 세 사신은 서편에 앉는다. 낭중(郞中)은 상서의 뒤에 앉고, 일행은 세 사신의 뒤에 앉는다.

황제에게 드리는 연공(年貢) 예물

백저포(白苧布) 200필, 홍면주(紅綿紬) 100필, 녹면주(綠綿紬) 100필, 백면주(白綿紬) 200필, 백목면(白木綿) 1000필, 생목면(生木綿) 2800필, 오조룡석(五爪龍席) 2장, 각양(各樣) 화석(花席) 20장, 녹비[鹿皮] 100장, 달피(獺皮) 400장, 청서피(靑鼠皮) 300장, 좋은 허리칼[腰刀] 10자루, 대호지(大好紙) 2000권, 소호지(小好紙) 3000권, 쌀 100석. 그 안에 70석은 찹쌀임.

동지 예물

황세저포(黃細苧布) 10필, 백세저포 20필, 황세면주 20필, 백세면주 20필, 용문 염석(龍紋簾席) 2장, 황화석(黃花席) 20장, 만화석(滿花席) 20장, 만화방석 20장, 잡채화석(雜彩花席) 20장, 백면지(白綿紙) 2000권.

정조(正朝) 예물

황세저포 10필, 백세저포 20필, 황세면주 20필, 백세면주 20필, 용문 염석 2장, 이상 다섯 가지는 동지 예물과 같음. 황화석 5장을 줄여서 15장, 만화석 5장을 줄여서 15장, 만화방석 5장을 줄여서 15장, 잡채화석 5장을 줄여서 15장, 백면지 2000권.

성절(聖節) 예물 이상 3절(三節 동지, 정조, 성절) 방물은 으레 3기(起)로 정했음.

황세저포 10필, 백세저포 20필, 황세면주 10필을 더해서 30필, 백세면주 20필, 용문 염석 2장, 황화석 위의 동지 예물과 같음. 20장, 만화석은 없고, 만화방석 위의 동지 예물과 같음. 20장, 잡채화석 위의 동지 예물과 같음. 20장, 백면지 2000권, 자세면주(紫細綿紬) 20필, 달피(獺皮) 20장, 6장짜리 유둔(油芚) 10부(部).

황태후(皇太后)에게 드리는 동지 예물

자개빗접[螺鈿梳函] 1채[事], 홍세저포 10필, 백세저포 20필, 자세면주 20필, 백세면주 10필, 황화석 10장, 만화석 10장, 잡채화석 10장.

정조 예물

위의 동지 예물과 같음.

성절 예물

자개빗접만 없고 이하 일곱 가지는 위의 정조 예물과 같음.

황후를 세우지 않았고 황태자를 폐출(廢黜)한 까닭에 예물을 우선 기록하지 않았으나, 이것은 해마다 반드시 거행하는 방물이며 세폐(歲幣)이다.

●이번에 사은(謝恩)하는 4기(四起) 예물

황제가 사의(査議)를 면제(免除)한 데에 대한 예물

황세저포 30필, 백세저포 30필, 황세면주 20필, 자세면주 20필, 백세면주 30필, 용문 염석 2장, 황화석 15장, 만화석 15장, 잡채화석 15장, 백면지 2000권.

방물로 이준(移准)했고 또 표피(豹皮)를 줄였으며, 경계(境界)를 조사해서 정한 이상 네 가지에 대한 사은 예물이며, 물건은 다 위와 같음.

황태후에게 사은하는 4기 예물 - 한 건 마다의 예물임 -

황세저포 10필, 백세저포 10필, 백세면주 20필, 만화석 10장, 잡채화석 10장.

이외의 3건의 예물도 같다.

황후를 세우지 않았고 황태자를 폐출한 까닭에 사은 예물을 우선 기록하지 않았다.

●저 나라에 들어가서 예단(禮單)을 급여(給與)하는 식(式)

책문수직 보십고(柵門守直甫十古) 2명, 갑사(甲士) 8명에게 각 백지(白紙) 1속(束), 연죽(煙竹) 1개, 향봉초(鄕封草) 1봉, 부시[火金] 1개를 주었다.

봉성(鳳城)의 청(淸)ㆍ한(漢) 두 장수에게 각 장지(壯紙) 5속, 백지 7속, 청서피(靑鼠皮) 3장(丈), 소갑초(小匣草) 20봉, 향봉초 10봉, 각색 연죽 6개, 은연죽 1개, 주석장도 1개, 은장도 1개, 칼집 3개, 부채 4자루, 대구어(大口魚) 2마리, 다리[月乃]ㆍ환도(環刀) 각 한 벌씩을 주었다.

청인 장경(淸人章京) 8명, 몽고 보경(蒙古甫京) 2명, 아역(衙譯) 2명, 영송관(迎送官) 3명, 종인(從人) 8명, 박씨(博氏) 2명, 외랑(外郞) 3명에게 각 장지 3속, 백지 5속, 소갑초ㆍ향봉초 각 15봉, 각색 연죽 5개, 주석장도 1개, 칼 3개, 청피 2장, 부채 3자루, 대구어 2마리를 주었다. 또 붓과 먹 각 둘을 박씨와 외랑 세 사람에게 더 주었으며, 은장도ㆍ은연죽ㆍ환도ㆍ다리 각 하나를 아역 두 사람에게 더 주었다.

보고(甫古) 17명에게 연죽ㆍ청피ㆍ장지 각 하나, 향봉초ㆍ백지ㆍ칼과 부채 각 둘, 부시[火金] 각 하나를 주고, 갑군 50명에게 각 백지 2속, 향봉초 2봉, 부시 2개, 연죽 2개, 칼ㆍ부채 각 1자루씩을 주었다.

성장(城將)이 별도로 청다리[靑月乃]와 유둔(油芚) 각 하나를 요구하였다.

봉성 호행장(鳳城護行將)ㆍ복병장(伏兵將)ㆍ영송관(迎送官)ㆍ아역(衙譯) 각 1인에게 각 장지 3속, 백지 5속, 청피 2장, 대갑초(大匣草) 10봉, 향초 4봉, 부채 3자루, 각색 연죽 3개, 칼 2개, 주석장도 1자루를 주었으며, 또 대갑초ㆍ다리ㆍ환도 각 하나를 별도로 주었다.

보고(甫古) 2명에게 각 장지 1속, 청피 1장, 칼 1자루, 연죽ㆍ부채와 다리 각 하나, 백지ㆍ봉초ㆍ부시 각 둘씩을 주었다.

갑군(甲軍) 18명, 종인(從人) 7명에게 각 향봉초 1속, 연죽 1개, 칼 1자루, 부채 1자루, 부시 1개, 백지 2속을 주었다.

요동호행 복병장(遼東護行伏兵將) 1명에게 청피 1장, 연죽 1개, 칼 1자루, 부채 1자루, 갑초 5봉, 장지 2속, 백지 3속, 향초 3봉을 주었다.

보고(甫古) 2명에게 각 부채 1자루, 연죽 1개, 칼 1자루, 향초 1봉, 청피 1장, 백지 1속을 주었다.

갑군 16명에게 각 백지ㆍ봉초ㆍ부시ㆍ연죽 하나를 주었다.

심양 소관(瀋陽所管) 압차장(押車將) 및 갑군, 광녕(廣寧)과 영원(寧遠) 등처에는 모두 난두(欄頭)가 실어 보내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음.

문장(門將)ㆍ영송관(迎送官)ㆍ아역(衙譯) 각 1인에게 각 청피 1장, 주석장도 1자루, 은항죽(銀項竹)ㆍ장죽(長竹) 각 1개, 장지 3속, 백지 5속, 칼ㆍ부채 각 둘, 갑초 다섯, 향봉초 4봉을 주었다.

보고 2인에게 각 장지 2속, 칼ㆍ연죽ㆍ부시 각 1개, 백지 2속, 봉초 2봉을 주었다.

갑군 16명, 종인 5명에게 각 연죽 1개, 칼 1자루, 향초 1봉, 백지 2속을 주었다.

예부 낭중(禮部郞中) 4명, 필첩식(筆貼式) 4명, 외랑(外郞) 4명에게 각 다리ㆍ은항죽ㆍ연죽 각 하나, 부채 2자루, 장지 3속, 백지 5속, 갑초(匣草) 10봉을 주었다.

세폐(歲幣)를 상납(上納)할 때에, 호부 낭중 2명, 외랑 4명, 필첩식 4명에게 각 청피 1장, 연죽 1개, 은항죽ㆍ장죽 각 1개, 대구어 1마리, 주석장도 1자루, 다리 1벌, 장지 3속, 백지 7속, 갑초 10봉, 부채 3자루, 봉초 5봉, 은연죽 2개를 주었다. 또 청은장도(靑銀粧刀) 2자루를 낭중에게 더 주고, 붓과 먹 각 둘을 필첩식에게 더 주었다.

서리(書吏) 4인, 고지기 4인에게 각 장지 3속, 백지 5속, 청피 1장, 전죽(鈿竹)ㆍ은항죽ㆍ장죽 각 1개, 대구어 1마리, 주석장도 1자루, 다리 1, 칼ㆍ부채 각 2자루, 갑초ㆍ향초 각 5봉을 주었다.

쌀을 상납할 때에 낭중 2인, 서리 2명, 고지기 2명에게 각 장지 3속, 백지 5속, 청피 1장, 은항죽ㆍ전죽 각 1개, 주석장도ㆍ다리ㆍ부채ㆍ칼 각 2자루, 갑초 5봉, 향초 3봉을 주었다.

갑군 6명, 종인 4명에게 각 부채 1자루, 칼 1개, 연죽 1개, 갑초 1봉, 백지 2속, 향초 2봉을 주었다.

산해관 소관(山海關所管)

성장 1인, 복병장 4인, 박씨 2인, 영송관 1인, 아역 1인에게 각 장지 3속, 백지 5속, 청피 1장, 은항죽 1개, 칼 1자루, 부채 1자루, 대구어 2마리, 전죽ㆍ장죽 각 1개, 은장도 1자루, 갑초 10봉, 향초 4봉을 주었고, 붓과 먹 각 둘을 박씨에게 더 주었으며, 다리 1벌, 대갑초 1봉, 유둔(油芚) 1채를 성장에게 더 주었다.

호행장 1인에게 장지 3속, 백지 5속, 갑초 10봉, 향초 5봉, 청피 1장, 대구어 1마리, 은항죽 2개, 장죽ㆍ주석장도 1자루, 전죽 1개, 칼 1자루, 부채 3자루를 주었다.

보고 2인에게 각 연죽 1개, 부채 1자루, 장지 1속, 백지 2속, 청피 1장, 부시 1개, 항초 2봉, 갑초 3봉을 주었다.

갑군 16명, 종인 5명에게 각 향초 1봉, 연죽 1개, 부채 1자루, 백지 2속, 부시 2개를 주었다.

문장(門將) 2인, 장경(章京) 4인, 필첩식 4인에게 각 장지 3속, 백지 5속, 청피 1장, 장죽ㆍ은항죽ㆍ전죽 각 1개, 주석장도 1자루, 칼 1자루, 부채 1자루, 대구어 2마리, 향초 4봉, 갑초 10봉을 주었다. 또 붓ㆍ먹 각 넷을 필첩식에게 더 주었다.

북경 소관(北京所管)

제독(提督) 1인에게 장지 20속, 백지 40속, 갑초 100봉, 대갑초 5봉, 청피 7장, 대모장도(玳瑁粧刀) 1자루, 은장죽 1개, 환도ㆍ다리 각 1벌, 전복(全鰒) 1접, 문어 1마리, 전죽 5개, 은항죽 5개, 장죽 3개, 부채 20자루, 대구어 5마리, 해삼(海蔘) 1말을 주었다.

대통관 6인에게 각 장지 15속, 백지 30속, 갑초 100봉, 대갑초 5봉, 청피 7장, 대모장도 1자루, 은장죽 1개, 환도 1벌, 문어 1마리, 전복 1접, 전죽ㆍ은항죽 각 5개, 대구어 5마리, 장죽 3개, 부채 20자루, 해삼 1말을 주었다.

차통관(次通官) 6인에게 각 장지 10속, 백지 20속, 갑초 50봉, 대갑초 3봉, 주석장도 1자루, 은항죽ㆍ장죽 각 3개, 대구어 3마리, 청은장도 1자루, 은소죽(銀小竹) 1개, 전복 1접, 해삼 1말, 전죽(鈿竹) 5개, 청피 1장, 칼 5자루, 부채 15자루를 주었다.

문장(門將) 2인에게 각 장지 5속, 백지 10속, 부채 5자루, 향초 5봉, 갑초 15봉, 청피 1장, 주석장도 1자루, 은항죽 1개, 칼 3개, 장죽ㆍ전죽 각 1개를 주었다.

보고(甫古) 2인에게 각 장지 2속, 부채 2자루, 칼 1자루, 부시 2개, 백지 3속, 향초 3봉, 청피 1장, 연죽 1개, 갑초 15봉을 주었다.

갑군(甲軍) 16명에게 각 백지 2속, 향초 2봉, 부시 2개, 칼 1개, 부채 1자루, 연죽 1개를 주었다.

개시관(開市官) 1인에게 장지 10속, 백지 20속, 갑초 20봉, 부채 10자루, 청피 3장, 칼 3자루, 주석장도 2자루, 은항죽ㆍ전죽 각 2개, 장죽 1개를 주었다.

회동관 부사(會同館副司) 1인에게 장지 5속, 봉초ㆍ갑초 각 5봉, 은항죽 2개, 칼ㆍ부채 각 2자루, 붓ㆍ먹 각 2자루, 백지 7속, 청피 1장을 주었다.

서반(序班) 3인, 대방(大房) 3인에게 각 장지 3속, 향초 3봉, 백지 5속, 갑초 5봉, 청피 1장, 은항죽 1개, 부채ㆍ칼 각 1자루, 붓ㆍ먹 각 1자루를 주었다.

예부 낭중(禮部郞中) 4인, 원외랑(員外郞) 4인, 필첩식(筆貼式) 4인에게 각 대갑초 2봉, 전죽ㆍ은항죽 각 2개, 장지 3속, 다리 1벌, 부채 3자루를 주었다.

예부 외랑 5인에게 각 장지 3속, 백지 5속, 갑초 10봉, 전죽ㆍ은항죽 각 1개, 부채ㆍ칼 각 1자루, 붓ㆍ먹 각 1자루를 주었다.

방물(方物)을 바칠 때에 면주고 색랑(綿紬庫色郞) 4인에게 각 청피 1장, 전죽ㆍ은항죽 각 1개, 다리 1벌, 대갑초 2봉, 장지 4속, 봉초ㆍ갑초 각 5봉을 주었다.

서리 3인, 고지기 3인에게 각 장지 2속, 갑초 5봉, 향초 5봉, 청피 1장, 전죽ㆍ은항죽 각 1개를 주었다.

백면지(白綿紙) 및 석자고(席子庫) 색랑(色郞) 4인에게 장지 4속, 갑초 5봉, 향초 5봉, 다리 1벌, 전죽 1개, 청피 1개, 은항죽 1개, 대갑초 2봉을 주었다.

서리 3인, 고지기 3인에게 각 장지 2속, 갑초 5봉, 향초 5봉, 전죽 1개, 청피 1장, 은항죽 1개를 주었다.

세폐(歲幣) 쌀을 상납할 때, 색랑 2인, 피물 색랑(皮物色郞) 2인에게 각 장지 3속, 부채 3자루, 백지 4속, 청피 1장, 다리 1벌, 전죽ㆍ은항죽 각 1개, 칼 2자루, 갑초 5봉을 주었다.

서리 2인, 고지기 2인에게 각 장지 3속, 갑초 5봉, 전죽 1개, 청피 1장, 은항죽 1개를 주었다.

방물은고(方物銀庫) 색랑과 피물고(皮物庫) 색랑에게 증급(贈給)하는 물건도 일반이나, 두 물건을 제감(除減)했으므로 기록하지 않는다.

세폐(歲幣) 환도(環刀)를 바치는 사람 1인에게 다리 1벌, 대갑초 1봉, 전죽 1개, 갑초 20봉을 주었다.

세찬 영래관(歲饌領來官) 2인에게 각 장지 3속, 백지 5속, 갑초 5봉, 부채ㆍ주석장도 각 2자루, 연죽 1개를 주었다.

데리고 온 하인(下人) 6인에게 각 백지 2속, 갑초 2봉, 연죽 1개, 칼ㆍ부채 각 1자루를 주었다.

고시방(告示榜)을 가지고 온 서반(序班) 4인에게 각 장지 3속, 백지 5속, 갑초 5봉, 부채 2자루, 연죽 1개를 주었다.

연상 영래관(宴床領來官) 2인에게 각 장지 3속, 백지 5속, 청피 1장, 연죽 1개, 부채 1자루를 주었다.

데리고 온 하인에게는 인원수에 따라 각 백지 2속, 봉초 1봉, 연죽 1개, 칼 1자루를 주었다.

찬물(饌物)을 관리하는 관원 2인에게 각 갑초 5봉, 백지 2속, 부채 2자루, 장지 1속, 연죽 1개, 주석장도 1자루를 주었다.

데리고 온 하인 6명에게 각 봉초ㆍ연죽ㆍ부시ㆍ부채를 하나씩 주었다.

시초(柴草)를 관장하는 관원 1인에게 갑초 5봉, 백지 2속, 장지 1속, 청피 1장, 주석장도ㆍ칼 각 1자루, 연죽 1개, 부채 1자루를 주었다.

데리고 온 하인 7명에게 각 봉초ㆍ연죽ㆍ부시ㆍ부채를 하나씩 주었다.

양미(糧米)를 관장하는 관원 1인에게 갑초 5봉, 백지 2속, 장지 1속, 청피 1장, 주석장도ㆍ칼 각 1자루, 연죽 1개, 부채 1자루를 주었다.

데리고 온 하인 4인에게 각 갑초 2봉, 백지 1속, 부채 1자루, 봉초 1봉, 연죽ㆍ부시 각 1개씩을 주었다.

기명차지(器皿次知) 서반 2인에게 각 장지 2속, 갑초 2봉, 백지 3속, 연죽 1개, 칼 1자루, 부시 1개를 주었다.

주객사(主客司) 주사(主事)ㆍ낭중ㆍ원외랑ㆍ필첩식 합 16인에게 각 장지 4속, 갑초 5봉, 부채 2자루, 다리 1벌, 대갑초 1봉, 전죽ㆍ은항죽 각 1개, 청피 1장, 대구어 1마리를 주었다.

선래군관(先來軍官) 2인, 원역(員譯) 1인에게 노자(路資)로 정은(正銀)이 도합 8냥이고, 부채 20자루, 칼 10자루, 연죽 20개, 봉초 20봉, 청피 10장, 장지 10속, 백지 20속, 갑초 20봉, 화봉(花峯) 부시 10개를 주었다.

대략의 합계는 장지 690속, 백지 1300속, 청피 277장, 갑초 2424봉, 향초 950봉, 연죽 220개, 장죽 96개, 은항죽 263개, 주석장도 108자루, 칼 370자루, 부채 800자루, 대구어 170마리, 다리 68벌, 환도 14자루, 은대모장도 7자루, 청은장도 12자루, 은죽 19개, 연죽 179개, 전복 13접, 문어 7마리, 부시 310개, 해삼 20말, 정은 8냥, 대갑초 110봉, 유둔(油芚) 3채, 화봉(花峯) 부시 15개, 붓ㆍ먹 각 52자루이다. 이상 각종 물품은 상방(上房)과 부방(副房)에서 반씩 갈라서 내어준다. 이 밖에 별도로 요구하는 각색 어물(魚物)ㆍ유둔ㆍ능화(綾花)ㆍ환약(丸藥)ㆍ젓갈[醢物]ㆍ붓ㆍ먹 따위 물품이 이보다 몇 곱절이었다. 또 왕래하는 아문(衙門)의 갑군 및 관(館)에 체류할 때, 각처에 날마다 제공하는 갑초ㆍ봉초 또한 수천 봉에 이르나, 다 기록할 수 없다. 이 밖에 또 은으로 계산해서 주는 것이 있어 무려 수천 냥이나, 이것은 행중(行中)에서 추렴해서 내는 것이고 주방(廚房)에 책임지우지 않는다.


■동행록

정사(正使) 김 상국 창집 (金相國 昌集)

부사(副使) 윤 참판 지인 (尹參判 趾仁)

서장(書狀) 노 정 세하 (盧正 世夏)

상사 군관(上使軍官) 절충(折衝) 김창엽(金昌燁)

전 부사(府使) 김석보(金錫保)

전 군수(郡守) 유정장(柳貞章)

진사(進士) 김창업(金昌業)

부사 군관(副使軍官) 절충 홍순년(洪舜年)

전 현감(縣監) 최덕중(崔德中)

전 주부(主簿) 김상현(金尙炫)

서장 군관(書狀軍官) 선전관(宣傳官) 노흡(盧洽)

어의(御醫) 김덕삼(金德三)

수역(首譯) 박동화(朴東和)

상통사(上通事) 장원익(張遠翼) 김세홍(金世弘)

당상(堂上) 이유량(李惟亮) 박재번(朴再蕃) 김응헌(金應憲) 최태상(崔台相)

상건량(上乾糧) 홍만운(洪萬運)

부건량(副乾糧) 유재창(劉再昌)

삼건량(三乾糧)오지항(吳志恒)김만희(金萬喜)김상현(金尙炫)신지호(申之浩)장후량(張後亮)

각 종사(各從事) 현하의(玄夏誼) 최억(崔檍) 심양에 와서는 뒤에 쳐졌음.

박세장(朴世章) 오태원(吳泰元) 김창하(金昌夏)

별가정(別加定) 신지순(申之淳)

별만상(別灣上) 최수창(崔壽昌)

의관(醫官) 현익하(玄翊夏)

화원(畫員) 허숙(許淑)

사자관(寫字官) 오윤찰(吳允札) 한윤보(韓允輔)

상방(上房) 하인 강위양(姜渭陽) 노자(奴子) 3인 신희일(申喜日)

부방(副房) 하인 전관(全寬) 노자 모립(毛立)

서장관을 모시는 하인 없음. 노자 1인

승문원 서원(承文院書員) 강위문(姜渭文)

마의(馬醫) 변익(邊益)

약방(藥房) 서원 한태흥(韓泰興)

역(驛) 하인

상방 서자(上房書者) 숙천(肅川) 사람 준석(俊石)

부방 서자 숙천(肅川) 사람 만희(萬喜)

삼방 서자 정주(定州) 사람 직산(直山)

상건량 마두(馬頭) 용천(龍川) 사람 대직(大直)

부건량 마두 선천(宣川) 사람 원선(元先)

주자(廚子) 평양(平壤) 사람 유건(有建) 정주(定州) 사람 만흥(萬興)

식인(食人) 의주(義州) 사람 윤모롱(尹毛弄)

농(籠) 마두 평양(平壤) 사람 정의건(鄭儀建)

원(元) 마두 중화(中和) 사람 충신(忠信) 선천(宣川) 사람 홍건(弘建)

귀화[被屬] 작달(䎞達) 복남(卜男) 가산(嘉山) 사람 초동(楚同)

나(저자 최덕중(崔德中))의 마두 선천 사람 중건(重建)

홍료(洪僚 홍순년(洪舜年))의 마두 평양 사람 오왕(五往)


▣일기

■임진년(1712, 숙종 38) 11월

○1일 맑음. 명동(明洞)에 가서 배알(拜謁)하였다.

조정에서 저 나라(청국)가 사의(査議)를 면제하고 경계를 확정한 것, 표피(豹皮)를 감면하고, 방물(方物)을 이준(移准)한 것 등 네 가지 일로써 절사(節使)와 사은사(謝恩使)를 겸해서, 모레 출발시킬 참이었다. 나는 부사(副使)의 편비(偏裨)가 되어서, 영남 막료(嶺南幕僚)로 있다가 새로 왔다.

지금 만 리 길을 가는데 가진 것은 다만 석 자 칼과 긴 채찍 하나뿐이고,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한데서 먹고 자야 할 사람이 방한구(防寒具)조차 마련하지 못했으니 민망스럽다. 역참 인마(驛站人馬)를 갈라서 배정하고 가교마(駕轎馬)를 골라 잡는데, 건량(乾糧) 짐바리는 19바리로 한정하였다. 그리고 제한된 바리수 외에는 건량소에서 대가(代價) 5냥씩을 주어서 삯말을 내도록 하였다.

저녁 무렵에 선전관 김중일(金重一)을 찾아가서 보았는데, 대개 과거(科擧)에 관한 일로 영변(寧邊)에 귀양가게 되었기 때문에 가서 위로한 것이다. 그 길로 건천동(乾川洞) 이석관(李碩寬) 장(將 벼슬)의 집에 갔으나, 그 분이 입직(入直)했으므로 뵙지 못하고 돌아오다가, 초동(草洞) 윤상형(尹尙衡)ㆍ윤상원(尹尙遠) 여러 종군(從君)을 찾았더니, 술과 안주를 내어서, 나의 만 리 길을 전송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남원(南原) 원 이성한(李聖漢)의 집에 가니, 주인 영감은 임소(任所)에 있고 다만 두세 형제가 있는데, 안에서 술과 찬을 푸짐히 갖추어서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밤들어서 집에 돌아오니, 벗 이만흥(李萬興)과 김천심(金天審)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린지 오래였다. 영장(營將) 이명하(李鳴夏)도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전송해 주었다.

○3일 바람이 세고 눈발이 날리더니 밤들어 크게 일었다.

이날 배표(拜表)하고 동행하는 여러 사람을 동고록(同苦錄)에 기재하였다. 날이 새기 전에 먼저 명동에 가서 주장(主將)을 모시고 입궐하였다. 대신(大臣)이 사폐(辭陛)로써 대명전(大明殿)에서 숙배(肅拜)했는데 동쪽을 상위(上位)로 하여, 같은 반열(班列)이라도 위차(位次)가 달랐다. 원역(員譯)은 그 뒤에 있고 4배(拜)를 거행한 다음에 예(禮)를 마쳤다. 세 사신(使臣)을 아울러 명하여 인견(引見)하시고 물품을 하사하고 어온(御醞 임금이 내리는 술)을 내렸다. 역관(譯官), 군관(軍官)에게도 각각 호초(胡椒)를 하사하였다. 또 대명전에 의장(儀仗)을 베풀어서 배표(拜表)하고, 세 사신은 바로 모화관(慕華館)으로 갔다. 나는 주장댁(主將宅)으로 나가서 하직하고 집에 돌아와서 아침밥을 먹었다.

동기와 친족들에게 고별(告別)한 다음 출발하였다. 지나가는 길에 지평(持平) 윤봉조(尹鳳朝), 통제사(統制使) 정홍좌(鄭弘佐)에게 하직하였다. 관소(館所)에 도착하니, 사대(査對)가 바야흐로 벌어졌는데 상국(相國) 이유(李濡)ㆍ상서 박권(朴權)과 모모 재신(某某宰臣)이 좌석에 있었다. 명동 여러 사람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여기에 와서 전별하였다.

오후에 정사(正使)가 먼저 떠나고 주장(主將)은 말을 타고 잇따라서 갔다. 곳곳에 조장(祖帳)을 베풀었고, 붙잡는 대로 말을 멈추었다. 이 상국 이하 여러 재상들이 모두 홍제원(弘濟院)까지 와서 고별하고 먼저 돌아갔는데, 주장은 말탄 채로 서로 작별하였다. 초동(草洞)의 여러 윤씨(尹氏)가 모두 여기 와서 작별하였다. 해질 무렵에 정사가 먼저 떠나고 주장은 옷을 갈아입은 다음, 가마를 타고 잇따라서 떠났다. 나는 김상현(金尙炫)과 더불어 앞에서 배행(陪行)하였는데, 눈바람이 크게 불었다.

밤 초경(初更)에 고양(高陽)에 도착하니, 주장의 자제(子弟) 및 지희(趾喜)와 동료 이만협(李萬協)ㆍ박세정(朴世挺) 및 모모가 모두 여기에 와서 모였다. 정사와 부사는 각각 동헌(東軒)과 서헌(西軒)에 사처를 정하고, 서장관은 별도로 딴 곳에 사처를 정하였다. 그런데 이 참(站)에서 공궤(供饋)하는 것을 으레 본 고을에서 홀로 담당했으니, 그 허술했음을 알 수 있다. 주쉬(主倅 그 고을의 원)는 이관수(李觀壽)라 한다.

○18일 맑음. 바람이 세고 추위가 심했다. 새벽에 주장이 먼저 출발했다. 25리를 가서 납청정(納淸亭)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주쉬(主倅) 홍이도(洪以度)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정사가 잇따라 온 것을 뵈었다. 도중에 재자관(齎咨官) 이추(李樞)가 보고(報告)한 것을 접수(接受)해 보니, 황태자(皇太子)가 음란(淫亂)하고 법도가 없어, 지난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는 이유로써 또 폐출(廢出)되었으니, 황태자에 대한 동지사(冬至使)와 3절(節 동지(冬至)ㆍ정조(正朝)ㆍ성절(聖節)) 방물(方物)은 정지하라는 것이었다. 까닭에 곧 45리를 가서 정주목(定州牧)에 이르러 유숙하면서, 봉진(封進)할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고친 것과 방물 유치(留置)에 대한 장계(狀啓)를 파발(把撥) 편에 전해 보냈다. 날마다 여행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 밤새도록 건량 사무에 골몰하느라 정력이 거의 소진(消盡)되어 답답하였다. 선천 원 장붕익(張鵬翼)ㆍ곽산(郭山) 원 한범석(韓範碩)ㆍ철산(鐵山) 원 이홍규(李弘規)가 와서 보고 곧 돌아갔다.

※재자관 : 조선시대 중국의 6부(六部)에 공문서[咨文]를 전달하거나 기타의 공무로 파견하던 연락관.

일종의 준사신(準使臣)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통은 예부(禮部)에 파견되었다.

재자관은 매년 겨울 다음해의 역서(曆書)를 수령해오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보내졌고, 표류해온 중국인들을 압송하거나 기타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에 수시로 파견되었다. 전자를 영력자관(領曆咨官) 혹은 황력재자관이라 하였고, 후자를 별자관(別咨官)이라 하였다.

또, 황제에게 올릴 간단한 공문서를 보낼 경우에는 재주관(賷奏官)이라 하였다. 재자관의 행차는 정규사행에 비하여 극히 단출하였는데, 재자관 1인, 소통사(小通事 : 통역관)·마두(馬頭 : 화물수송 책임자)·노자(奴子 : 하인) 각 1인, 구인(驅人 : 마부) 9인이 전부였다.

재자관은 보통 역관출신들 중에서 일에 경험이 있는 자를 가려 보냈으나, 재주관은 문관·무관 중에서 1인을 선임하여 파견하였다.

○19일 평명(平明)에 정사가 먼저 출발하였다. 주장은 서장관과 더불어 두 동기(童妓)의 칼춤을 잠시 보다가 곧 출발했다. 30리를 가서 운흥참(雲興站)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정사의 비장(裨將)들이 ‘여러 사신(使臣)은 정사가 거처하는 곳 대문(大門)으로 출입할 수 없다.’고 다투어 말했다. 그러나 주장도 다같이 왕명(王命)을 받들고 가는 것이니 협문(夾門)으로 지나다님은 결코 부당하니 편리한 대로 사처를 정함이 양쪽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내가 참에서 먼저 출발, 40리를 가서 선천부에 이르니 형과 아우가 함께 타향(他鄕)에 모여 있었으니, 그 기쁨을 알 만하다. 주장은 새로 지은 청진당(淸塵堂)에 사처를 정하였다. 귀성(龜城) 원 김숙(金俶)이 이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쉬가 솜 넣은 잠옷과 납창화(衲昌靴)를 행자로 주었다. 아우도 석새[三升] 솜바지와 작은 휘항(揮項) 등의 물건을 준비해서 기다렸다. 아우의 방기(房妓) 월중선(月中仙)도 베 버선 두 켤레를 준비해서 기다리고 술과 안주를 많이 갖추어 송별해 주었다. 밤에 형제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잤다. 기생 후귀례(厚貴禮)는 이미 소나무 아래 흙으로 되었다 하니, 비참(悲慘)했다.


■임진년(1712, 숙종 38) 12월

○5일 길에서 호녀(胡女) 한 떼를 만났다. 모두 검은 장의(長衣)를 걸쳐서 발꿈치에 치렁치렁하였다. 아랫도리에는 검은 바지를 입어서 남자 바지 같았으며, 당혜(唐鞋)를 신었고 버선은 푸른 베로 만든 것이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귀에 쌍구슬 귀걸이를 걸었고, 손가락에는 하얀 쇠가락지를 끼고 있었다. 검은 비단으로 머리를 싸매었고 혹은 머리를 땋아 돌렸는데 우리나라 제도와 같았다. 머리를 싸매지 않은 자는 혹 뒤꼭지에다 납비녀로 꾸며서 모양이 둥근 거울 같으며, 진주(眞珠)로 얽고 참 분(粉)을 진하게 바르고 있었다. 계집아이는 머리털을 세 가닥으로 서로 꼬아서 머리 뒤에 묶고 또한 검은 비단으로 싸매었다.

요동에서부터 비로소 무덤을 보았는데, 평평한 들판에 흙을 모았을 뿐이고 떼를 입히지 않아서 개밋둑 같았다.

○17일 광녕(廣寧)에서 서쪽으로는, 호녀(胡女)는 아주 없고 당녀(唐女)가 좀 있었으나 의복이 더럽고 헤어져서 한 사람도 편히 사는 모습이 없었다. 또 몽고 사람이 자주 왕래하는데 위아래에 입은 것이 청인과 똑같았고, 또 한어(漢語)를 알기도 했으나 인물(人物)이 더욱 추하고 더러웠다. 혹은 이르기를,

“그들이 이곳에 섞여 살되 청인과 엇갈리거나 의심하는 일이 없다.”

하였다.

○25일 찰원은 황제가 이번에 천금(千金)으로 촌민(村民)의 큰 집 세 채를 사서 한 원으로 만든 것인데, 일행 인마가 일시에 머물러도 넉넉하였다. 문 위에 현판을 걸어서 ‘조선관(朝鮮館)’이라 했고 좌우에는 붉은 종이에,

신하의 절개는 무겁기가 산 같고 / 臣節重如山

임금의 은덕은 깊기가 바다 같다 / 君恩深似海

라고 쓴 것이 붙어 있으니, 그 자랑한 것을 상상할 수 있으며 또한 통한스러웠다.

○26일 성안에 한인(漢人) 손심유(孫心維)라는 자는 수재(秀才)라 자칭했다. 내가 서책(書冊)을 사고자 하여 그 집을 빌려 자면서 밤에 더불어 말했는데, 그가 말하기를,

“한인은 3년 복상(服喪)하는 제도를 써서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으며 화장하지 않습니다. 재력이 있는 자는 광중(壙中)에 회로 벽돌을 쌓아 곽(槨)을 만들어서 폄장(窆葬)하며, 가난한 자는 그 제도대로 하지 못하고 다만 흙을 덮을 뿐입니다. 혹 객지에서 사망한 자로 친척이 없는 자는 그 마을에서 관(棺)에 담아 들녘에 방치합니다. 청인은 상기(喪期)를 석 달로 하여 술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화장한 후에는 타다 남은 뼈를 모아서 열 겹 비단 보자기에 싸고 또 꽃단지에 담은 다음, 옥뚜껑을 덮고 또 비단보로 단지를 싸서 매장합니다. 땅을 가리지 않고 떼를 입히지 않으며 혹은 무덤에도 회를 발라서 모양이 엎어 놓은 동이 같기도 합니다. 한인으로서 큰 씨족(氏族)과 높은 벼슬을 했던 집은 아직도 청인과 더불어 혼인하지 않으나, 그 밖에 상인(常人)과 가난한 양반은 청인과 혼인한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손된 자도 상제(喪制)와 전족(纏足)하는 등의 일은 한결같이 그 아비 쪽을 따릅니다. 비록 청인이라도 죽은 자의 유언(遺言)이 있으면 화장하지 않는데, 일찍이 태황후(太皇后)의 장사는 화장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한인은 한어(漢語)를 쓰고 청인은 청어(淸語)를 쓰지만 조정(朝廷)에서는 모두 청어를 쓰므로, 한인이 만약 청어를 쓰지 않으면 벼슬길에 지장이 있습니다.”

하였다.

○28일 맑음. 아침식사 전에 세 사신과 일행이 모두 공복을 입고 예부에 갔다.

예부는 대궐(大闕) 동쪽이고 관에서 서쪽으로 1리 남짓 거리인데, 문랑(門廊)과 정청(正廳)이 우리나라 예조만 못한 듯하며 모두 퇴락해 있었다. 세 사신이 왼쪽 월랑에서 잠시 쉬었다. 이윽고 한인(漢人) 상서(尙書)가 교자를 타고 들어왔다. 교자의 형태는 우리나라 여인이 타는 가마와 흡사하였다. 또 사방에 검은 장막을 드리웠고 앉는 판자 밑에 장합(粧盒)이 있는데, 대개 교자 안에 걸터앉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두 개의 가로나무 중간을 어깨로 메며, 교자 하나에 메는 군정이 네 사람이었다. 또 전도(前導)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부르는데, 그 소리는 우리나라 대각 전도(臺閣前導)가 대궐에 들어올 때 가금(呵禁)하는 소리 같았다.

시랑(侍郞)이 또한 이르렀다. 조금 있다가 시랑이 정청에 나와서 남쪽을 향해 섰다. 세 사신은 탁자(卓子) 앞에 나아가서 꿇어앉았다. 상통사(上通事) 두 사람이 자문(咨文) 담은 궤를 받들어 올리니, 상사(上使)가 두 손으로 올린 후에 물러났다. 그런 다음에 시랑이 들어갔고 사행(使行)은 옥하관으로 돌아왔다. 이 시랑은 한인이며 인물(人物)이 매우 정긴(精緊)하였다, 대통관에게,

“예부 아문(衙門)을 어찌해서 수리하지 않는가?”

물었더니,

“황제가 본조(本曹)에서 수리하게 하신 까닭으로 미처 수리하지 못했고, 옥하관도 예부에서 수보토록 하신 까닭으로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한 조(曹)에 상서(尙書)가 둘, 시랑(侍郞)이 넷, 낭중(郞中)이 둘씩이었다.


■임진년(1713, 숙종 39) 1월

○2일 맑음. 옥하관에 체류하였다.

일행이 모두 삿자리로 꾸민 방에서 따뜻하게 거처하는데 나와 동료 세 사람만이 꾸미지 않은 온돌에서 싸늘하게 거처하니, 호상(胡商)이 왕래하며 모두 그 외롭고 쓸쓸함을 비웃었다.

○3일 팔기(八旗) 군인은 24만 명을 넘지 않을 듯한데, 은을 사급(賜給)하는 액수를 물으니 갑군(甲軍)이 1인당 70냥, 보고(甫古)가 100냥이라 한다. 내가,

“나라의 은이 얼마나 되기에 이와 같이 많이 급여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답하기를,

“호부(戶部)에 저축된 은이 7000만 냥을 넘을 듯하나, 관장(管掌)하는 관원이라도 실상 얼마쯤인지는 모릅니다.”

한다. 내가,

“1년에 수봉(收捧)하는 것이 얼마쯤인지는 모르나 많은 관원에게 녹 주는 것을 모두 은으로 하면 1품 관직의 춘ㆍ추 관록(官祿)만 해도 많게는 180냥은 될 것이다. 그런즉 기타 여러 품계의 관원과 각색 군사 및 지출[用下]의 은자가 반드시 많을 터인데 능히 이와 같이 많이 저축됩니까?”

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지세(地稅)ㆍ정세(丁稅)를 모두 은자로 공납하는데 세관(稅官)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장사치들이 전일에는 한 곳에만 세를 바치면 천하를 두루 다녀도 다시 징세하는 예가 없었는데, 지금은 곳곳에 세를 바치므로 간혹 원망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한다. 이곳 각로(閣老)는 우리나라 삼공(三公)에 해당하지만 계급은 2품에 그친다. 황제의 태사(太師)ㆍ태부(太傅)ㆍ태보(太保)는 1품이고, 소사(少師)ㆍ소부(少傅)ㆍ소보(少保)와 태자(太子)의 태사(太師)ㆍ태부ㆍ태보는 종 1품이며, 소사ㆍ소부ㆍ소보는 2품이다. 각로는 육부(六部)의 상서(尙書)를 예겸(例兼)한다. 지금은 각로가 5인인데 청인ㆍ한인 반씩이며 송주(松住)도 끼어 있다.

○7일 통관들이 날마다 우리들에게 차를 권하고는 뇌물을 요구하는 것이 점점 심했다. 구렁 같은 욕심을 채워 주기 어려우니 괴롭다. 통관은 온돌 위에 앉았고, 우리들은 온돌 아래에서 읍(揖)하고 나서, 온돌에 올라가지는 못하고 좌우 등상(登床)에 걸터앉아 차를 마셨다. 차는 낙타(駱駝) 젖에다 당미죽(唐米粥)을 섞은 것이다. 처음 마시니 구역질이 나왔다. 그래도 사양하지는 못했는데, 자주자주 삼켜 가니, 도리어 기(氣)를 내리는 효과가 있었다. 옥하관에 체류하였다.

○8일 맑음. 옥하관에 체류하였다.

호인 장사치의 왕래가 날로 많아져 시끄럽고 북적북적하니 매우 괴로웠다.

○18일 맑음. 옥하관에 체류하였다.

대통사 김사걸(金士傑)은 우리나라 북도(北道)의 시장(市場)을 철파한 후에 돌아온 자인데, 평소부터 욕심 많고 악하다고 불리워진 사람이다.

○21일 부(部)마다 시랑(侍郞)이 4인인데, 한림원(翰林院)ㆍ내각(內閣) 등 관직을 겸무(兼務)하고 있다. 또 특지(特旨)로 기용된 자가 많은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남행(南行)과 같은 것이다. 과거(科擧)에 오른 자가 내각 및 간쟁(諫諍)하는 직에 많이 있으나, 임금의 뜻을 거스려 한번 파직되면 종신토록 서용되지 못한다. 남행으로 벼슬한 자가 높은 관직에 많이 있었고, 높은 벼슬에는 또 강남(江南) 사람이 많으니, 인재를 쓰는 것이지 문벌을 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높은 벼슬에 경성 사대부가 많고 외방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우리나라가 다만 문벌로만 뽑기 때문이었다. 통관 등이 나를 불러, 와서 보지 않음을 책하고 이어 구청(求請)하는 것이 있으니 매우 가소로웠다.

◯24일 옥하관에 체류하였다.

이 나라 품급(品級)에 나누어 주는 녹(祿)으로서 쌀과 은은 같으나, 채단(彩緞)과 군병(軍兵)에 있어서는 품수(品數)를 헤아리지 않고 많고 적음에 차가 있다. 외직(外職)은 은자만 주는데 1품은 은 180냥, 2품은 155냥, 3품은 130냥, 4품은 105냥, 5품은 80냥, 6품은 60냥, 7품은 45냥, 8품은 40냥, 9품은 33냥 1전이고, 품류(品流)에 들지 못하는 잡색(雜色)은 31냥 5전이다. 군병에게 주는 은자는 이것과 상관 없다. 이것은 춘ㆍ추 조근(朝覲)하는 날에 특별히 나누어 주는 은자의 액수이며, 내관과 외관이 같다고 한다.


■계사년(1713, 숙종 39) 2월

○6일 잠시 후에 목극등이 문밖에 나와 서서 황제의 말을 전하므로, 사신 및 우리들이 앞에 나아가서 읍하고 꿇어앉으니, 통관을 시켜 전언하기를,

백두산에 경계를 확정한 뒤에 돌을 쌓아서 한계를 만들게 한 것은 민폐(民弊)에 관계가 있으니, 천천히 거행하여 민폐를 끼치지 말라.”

하였다. 사신이 답하기를,

“일찍부터 쌓기 시작했으나 아직 역사(役事)를 마치지 못했는데 하교(下敎)대로 천천히 쌓겠습니다.”

하였다. 목극등이 읍하면서 일어나기를 청하더니 곧 물러갔다. 그때 안에서 문틈으로 엿보는 자가 많이 있어 푸른 옷이 밖에까지 비쳤으나,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 수 없었다.

동국 서책을 진상하라는 말은 다만 구전(口傳)에서 나왔을 뿐이므로 사신이 청하기를,

“이것은 딴 일과 달라서 진상과 관계되오. 혹 그릇 전함이 있을까 염려되는데, 만약 문자가 있다면 그 책명(冊名)을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예관이 전언하기를,

“환관을 시켜 전교했는데 무슨 문자가 있겠소?”

하였다. 사신이 일행 여러 사람에게 뒤따라서 그 말을 자세히 듣도록 명했다. 환시(宦侍)는 들어가고 사신은 서책을 영수해 돌아왔다. 내가 소경 대왕의 어휘를 기억하고 있었으나 구전함은 위의(威儀)에 손상됨이 있을까 하여 적어서 바치겠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같이 온 사람에게 관소에 달려가서 나의 상자 속에 있는, 《어휘첩(御諱貼)》 책을 가져오게 했으나 끝내 다시 묻지 않았다. 일을 마치자, 사신이 공복을 입고 서책을 지닌 관원과 함께 나와 부성문(阜成門) 길로 해서 관소에 돌아왔다.

목극등이 통관을 시켜서 전언하기를,

“내가 입시(入侍)했을 적에 북도(北道) 개시(開市) 때 청인이 강매하는 폐단을 많이 아뢰었더니, 황제께서, ‘짐도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다. 종당에 처리하는 방도가 있을 것이다.’ 했소. 또 옥하관을 지금까지 보수하지 않은 것 역시 곧 개수할 일로 진달했소.”

하였다. 대개 목극등은 오랄 총관(兀剌總管)으로 우리 국경에 왕래하면서 그런 폐단을 익히 알았던 까닭으로 주달한 것이다. 이 사람이 우리나라 일엔 극력 돕고, 또 황제의 총애를 독점하니, 조정 사람 중에 시기하는 자가 많다 한다.

○14일 청국에서 1년 동안에 수봉(收捧)하는 지은(地銀)ㆍ정은(丁銀)ㆍ세은(稅銀)과 세곡(稅穀) 수량을 상고해 보니 은자가 3436만 8873냥이고 쌀이 805만 8101석이었다. 그중 400만 석을 경사(京師) 및 통주창(通州倉)에 조운(漕運)해 들여서 봉록(俸祿) 및 경비(經費)로 하고 그 나머지는 양미(糧米)로 각 요해처(要害處)에 조운해 들여서 군량(軍糧)으로 하는 것이었다. 은(銀)은 지은ㆍ정은 외에 또 세은(稅銀)이 있어, 혹 20만 냥, 10만 냥을 바치는 곳이 있었다. 산해관(山海關)에서 1년 동안 바치는 세가 2만 5000냥이고, 세를 수납(收納)하는 관청의 명칭은 초관(鈔關)이었다. 세 받는 곳의 많음은 과연 듣던 바와 같았다. 북직례(北直隷)는 은이 295만 3601냥이고 성경(盛京)은 관(關) 밖에 딸려서 지은만 1만 88냥이고 정은은 원래부터 없는데, 이것은 영원(寧遠)과 금주(錦州)에서 납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주(州)ㆍ부(府) 지역에서 흑두(黑豆)와 속미(粟米)가 아울러 4만 4300석이었다. 강남성(江南省)은 옛 남직례(南直隷)이며 3포정사(布政司)가 있어, 은 860만 3814냥과 추미(秋米)ㆍ백미(白米) 아울러 362만 6434석을 바치고, 강서성(江西省)은 은 225만 434냥과 두 가지 쌀 132만 4343석 4두를 바치며, 복건성(福建省)은 119만 6344냥을 바치고, 절강성(浙江省)은 은 367만 6383냥과 두 가지 쌀 131만 1720석을 바치며, 호광형주성(湖廣荊州省)은 은 185만 8732냥과 두 가지 쌀 41만 9049석 2두(斗)를 바치고, 하남성(河南省)은 은 291만 5684냥과 두 가지 쌀 61만 1716석을 바치며, 산동성(山東省)은 은 344만 4733냥과 추미(秋米) 72만 502석 4두를 바치고, 산서성(山西省)은 은 311만 9221냥을 바치며, 섬서성(陝西省)은 은 187만 4243냥을 바치고, 사천성(四川省)은 은 21만 7595냥과 추미(秋米) 36석을 바치며, 광동성(廣東省)은 은 140만 5618냥을 바치고, 광서성(廣西省)은 은 41만 2782냥을 바치며, 귀주성(貴州省)은 은 6만 3549냥을, 운남성(雲南省)은 은 36만 6052냥을 바친다. 대략은 이와 같으나 1년에 쓰이는 액수와 군병(軍兵)에게 지출되는 액수는 알 수 없었으니 섭섭하다.

○20일 정사는 성안 촌사(村舍)에 숙소를 정했는데, 찰원을 바야흐로 짓고 있어 역사를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절에 한 승려가 있어 나이가 아흔이건만 이목이 총명하므로 서로 수작(酬酌)하였는데, 내가 묻기를,

“갑신년에 그대 나이 스물 하나인데 그때 일을 능히 기억하는가?”

“그때에 출가(出家)한 지 오래인데 어찌 분명하게 알지 못하겠소.”

“우리들 의관이 명 나라 제도와 일반인가?”

“일반이나 입자(笠子)는 없고, 단지 관(冠)이나 모자를 썼소.”

“그해 이적(李賊 이자성(李自成))의 난리에 당신은 어떻게 피했는가?”

“옥전(玉田) 지역 산골에 가서 숨어 있었소.”

“청국 초기 머리 깎을 때에 대개 순종하더니 지금은 기꺼이 여기는가?”

“그때에 삭발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자살했고, 혹 갇혔으며 혹은 두들겨 맞기도 했소. 그리하여 1년 후에는 사람들이 모두 삭발했는데 지금은 벌써 습관이 되어서 혹은 기꺼이 여기고, 혹은 비통해하기도 하오.”

하였다. 나는 통분해서 다시 묻지 않았고 또 갈 길이 바빠서 그대로 마치고 돌아왔다.

○21일 오늘 지나온 곳에는 밭 사이에 뽕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는데 다보록하게 돋아서 삼 같았다. 괴이쩍어서 내가 물었더니,

“잎으로 누에를 치고 껍질로 종이를 떠서 만드니, 그 이익이 곡식 심는 것보다 열 곱절이오.”

하였다.

○27일 평명에 길을 떠나 33리를 가서 연산역(連山驛)에 이르러 조반을 먹었다. 또 32리를 가서 고교포(高橋鋪)에 이르러서, 정사와 서장관은 찰원에 들고 주장은 병환 때문에 사가에 숙소를 정했다. 도중에서는 비록 뒷간에 가지 않았으나 조석 식음을 전폐하니, 걱정스럽고 민망스러웠다.

영원 동문(東門) 밖 10리쯤 되는 동남쪽 들 복판에 온정(溫井)이 있다. 우리나라 온양 온천 같았으나 외국 사람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었고, 또 주장이 병환중이었으므로 구경할 마음이 없어서 참로(站路)로 직행하였다. 근래 날씨가 매우 좋지 못하고 또 바다를 따라서 가기 때문에 앓는 사람이 많으니 민망한 일이다. 주인 중에 탐악(貪惡)이 심한 자는 방세를 너무 많이 요구했으나, 나는 주장의 병환중에 시끄럽게 될까 두려워서 요구하는 대로 그 아내에게 주었더니, 지아비를 권해서 고약한 짓을 부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비록 어리석은 지어미라도 또한 부끄러워하는 바가 있어, 그리 못하도록 권하였으니, 인심의 한 끝에 진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밤에 한 번도 뒷간에 가지 않았고 잠자는 것도 며칠 전보다는 많이 나았으니 자못 기뻤다.


■임진년(1713, 숙종 39) 3월

○2일 부방(副房) 쇄마(刷馬) 31필 중에 왕래하는 동안에 버린 것이 두 필이고 또 두 필이 발을 절뚝거려서 버릴 참이라니 불쌍하였다. 그런데, 상방(上房)과 삼방 쇄마는 완전한 것이 얼마 없다 하니, 모두 염려스러웠다. 마철(馬鐵)과 약과(藥果) 등 물품을 덜어 내어 역하인(驛下人) 및 쇄마군에게 나누어 주었다.

○5일 이날 저녁, 행중에 남은 물건을 덜어 내어서 거느리고 있는 여러 하인에게 갈라 주었다. 북경에서 여기까지는 1500리, 여기에서 만상(灣上)까지는 500여 리에 불과하다. 훨훨 날아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6일 길에서 호인 하나를 만나 동행하면서 따져 물어 보니, 제법 확실한 정보가 있는 자였다. 내가,

“관동(關東)에 군졸(軍卒) 수효가 얼마쯤이며, 군졸에게 은 몇 냥씩을 주는가?”

1만 5000명이고 매인(每人)에게 은 24냥씩을 주는 외에 별도로 주는 것은 없소. 관(關) 밖에 세 장군이 있으나, 다 성경(盛京) 장군에게 예속되어 있소. 성경 장군이 거느린 것이 병마(兵馬) 8000이고, 7000은 두 장군에게 갈라 붙였는데 관 밖 모든 일은 다 성경에 속해 있소.”

“관(關)에는 원래부터 지은(地銀)이나 정은(丁銀)을 수봉(收捧)하는 규례가 없는데, 허구많은 군인에게 무슨 은(銀)을 찾아서 주나?

경사(京師)에서 운반해 오오.”

“관 안에는 군사가 얼마쯤이고 또한 은 얼마쯤을 주는가?”

“군졸 수효는 모르나 경사(京師)의 군졸은 매명(每名)에 은 36냥씩을 주고, 양미(糧米)의 섬 수도 또한 은 수량과 같소.

“외방 군졸과 관장(官長)에게도 아울러 쌀을 주는 것이 규정인데, 은자(銀子)만 준다는 것인가?”

내직(內職)과 경사 군졸에게는 은과 양미를 아울러 주지만 외관과 외방 군졸에게는 다만 은자만 주오.

“이 지역은 우리나라의 옛 땅이다. 네가 아느냐?”

“알지마는 풍속이 이미 변해서 사람이 죽으면 모두 화장한 다음, 타다 남은 뼈를 묻소.”

“너는 곧 한인(漢人)인데 어찌해서 화장을 하는가?”

“광녕(廣寧) 이동에는 한인이 적고 청인이 많소. 자연히 관습이 되어서 만인(滿人), 한인을 막론하고 모두 화장하오.”

“요동 들 동서남북이 몇 리쯤이며 복판에 어떤 큰물이 있는가?”

“각 250여 리고 복판에 삼차하(三叉河)가 있소. 이것은 곧 혼하(混河)와 태자하(太子河) 두 가닥 물이 합류하는 곳이오.”

“성경을 거치지 않고 바로 무려산(巫閭山)으로 향하는 길이 있는가?”

“많이 있소. 이 길로 계산하면 250여 리이오. 북쪽으로 심양성 뒷산에서부터 남쪽으로 바닷가까지도 또한 250여 리이오.”

하였다. 갈 때와 올 때에 자세히 보니, 심양성 후면 동북쪽 20여 리 사이에 한 줄기 낮은 산이 있었으나 그 이름을 알지 못했고, 요동 들 복판 및 산기슭에 또한 구롱(丘壠)이 간간이 뻗어 있었다. 내가 물으니 답하기를,

“이것은 명 나라 때 연대(煙臺) 터요. 지금은 허물어 버렸으므로 단지 옛터만 남았을 뿐이오.”

하였다. 또 역승(驛丞)을 만나서 묻기를,

“그대가 1년 동안 받는 관록(官祿)은 얼마이고, 왕래하는 사람에게 공궤(供饋)하는 비용과 파발마(擺撥馬)는 몇 필이며, 또 값은 얼마쯤을 주는가?”

“1년에 은 마흔 냥을 받는데 이것은 공궤하는 데에 드는 밑천이고, 저의 관록은 은 32냥이오. 파발마는 스무 필을 스스로 준비한 것이며, 매필에 관(官)에서 1년에 은 아홉 냥을 줄 뿐이오.”

“관 밖 사람에게는 정은(丁銀)을 수봉(收捧)하는 규례가 없으나, 지세조(地稅條) 곡식은 반드시 있을 것인데, 얼마쯤인가?”

“하루갈이에 다만 콩, 좁쌀 각 한 말 일곱 되와 풀 한 묶음을 바칠 뿐이고 딴 요역(徭役)과 과세(課稅)는 한 가지도 없소.”

하였다. 이 말은 북경에 있을 때에 들은 바와 다름 없었다.

○16일 맑음. 해돋이에 길을 떠나 소관참(所串站)에 도착해서 점심을 들고 양책참(良策站)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여러 역관(譯官)이 모두 뒤에 처졌는데, 다만 이유량(李惟亮)ㆍ최태상(崔台相)ㆍ박재번(朴再蕃)ㆍ홍만운(洪萬運)ㆍ오지항(吳志恒)ㆍ신지순(申之淳) 등이 배종(陪從)하였다. 유재창(劉再昌)ㆍ현의하(玄宜夏) 두 사람은 이 참(站)에 있다가 돌아갔다. 소관참에 기생 하나가 있어 이름이 월궁화(月宮花)인데, 곧 구면이기에 괴이해서 따져 물었더니, 바로 기축년(1709, 숙종 35) 가을 순사(巡使)를 배행(陪行)했을 때 귀여워했던 여자였다. 용천 부사(龍川府使) 심진(沈搢)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사가 주장ㆍ서장관과 함께 청류당(聽流堂) 앞 층층 바위에 올라서, 기생들을 불러 가무(歌舞)를 베풀다가 잠시 후에 마쳤다.

물 가까이에 세 당(堂)을 연달아 지었는데 하나의 이름은 ‘청류’이고 하나는 ‘청심(淸心)’인데, 하나는 이름을 잊었다. 그 당 앞에 각각 네모진 연못을 쌓고 물을 가뒀는데, 물가에 층층 바위가 벌여 섰고 그 위에는 꽃나무와 대나무가 어지럽게 심어져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이 산뜻하다고 일컬었다. 낙포선(洛浦仙)이 와서 기다렸으나 나는 불러 보지 않았으니, 대개 그가 상사 앞에서 노래 부른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역(驛) 기생 혜색(蕙色)은 일찍이 귀여워했던 자이므로 와서 뵈었다.

○21일 해돋이에 길을 떠나, 숙천에 이르러 유숙했는데, 사형은 먼저 갔다. 길에서 만윤 이유민(李裕民)을 만났다. 주장이 말의 멍에를 풀고, 앉아서 잠시 말하다가 떠났다. 본도 방백(本道方伯) 유집일(兪集一)이 바로 영변으로 갔으므로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정필동(鄭必東)이 들어 와서 뵙기를 청했다. 밤에 여러 기생을 불러 거문고와 노래를 듣고 헤어졌다. 들으니, 성천 사군(成川使君)이 평양에서 기다린 지가 여러 날이라 한다.

안주 기생 양대운(陽臺雲)이 서울에서 돌아와서 여기에 현신(現身 지체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처음으로 뵘)했는데 이 사람은 주장의 방기(房妓)였고, 기생 차정(次貞)도 와서 보았는데 이 사람은 내가 귀여워했던 자였다.

○22일 영(營)ㆍ부(府) 여러 사람 중에 아무개 아무개가 와서 뵈었지만 유독 기생은 한 사람도 와서 보지 않았다. 삼화(三和) 원 김중구(金重九)와 함종(咸從) 원 조빈(趙彬), 용강(龍岡) 원 권익관(權益寬), 중화(中和) 원 이하정(李夏禎), 증산(甑山), 상원(祥原), 강서(江西) 등 고을 원이 모두 여기에 와서 기다렸다. 성천 기생 상경(上京) 등이 바로 여기에 와서 기다리다가, 묵으면서 기다리기가 어려워서 여덟 사람은 먼저 돌아갔고, 소신월(小信月)ㆍ일흥래(一興來) 두 사람이 머물러 기다린 지가 벌써 사흘이었는데, 일흥래는 노래를 잘하는 자였다. 초대화(楚臺花)는 내가 귀여워했던 자였으나 여기에서 먼저 돌아갔다 한다.

○내가 연경(燕京)에 들어간 것은 오로지 그곳 풍물(風物)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 동료는 병들어 누웠고 한 동료는 선래(先來)로 되어서, 내 한 몸이 홀로 행중 모든 일을 전적으로 담당한 까닭으로 뜻대로 출입하지 못했다. 또 식견이 고루해서 당초 마음처럼 하지 못하고 다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곳에 따라 기록했을 뿐이다. 그리고 문사(文辭)가 무디어서 아울러 뜻대로 기초(起草)하지 못했음이 더욱 애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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