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일기(燕行日記)
김창업(1658-172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대유(大有), 호는 가재(稼齋) 또는 노가재(老稼齋). 17세기에 활약한 노론의 정치가이며 유학자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넷째 아들이다.
큰아들 김창집(金昌集, 1648~1722)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을 비롯한 김창흡(金昌翕,1653~1722),김창업(金昌業,1658~1721),김창집(金昌緝, 1662~1713), 김창립(金昌立, 1666~1683)의 여섯이 있었는데 모두 학문과 시문에 뛰어나 세상에서 ‘육창(六昌)’이라 일컬었다
특히 시에 뛰어나 후에 김만중(金萬重)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681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한양의 동교송계(東郊松溪 : 지금의 성북구 장위동)에 은거하였다. 1689년에 기사사화가 일어나자 포천에 있는 영평산(永平山) 속에 들어가 숨어살다가 1694년 정국이 노론파에 유리하게 되자 다시 송계로 나왔다. 이 때 나라에서 내시교관(內侍敎官)이라는 벼슬자리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응하지 않았고 스스로 노가재라 부르며 세상일을 멀리하였다. 그리고 향리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고 거문고와 시 짓기를 즐기면서 사냥으로 낙을 삼았다.
중국 산천을 보지 못한 것을 늘 아쉽게 여기다가 1712년 연행정사(燕行正使)인 김창집(金昌集)을 따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이 때 보고 들은 것을 모아 『노가재연행록稼齋燕行錄)』을 펴내었다. 이 책은 중국의 산천과 풍속, 문물제도와 이때 만난 중국의 유생, 도류(道流 : 도교를 믿고 그 도를 닦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상세히 기록하여 역대 연행록 중에서 가장 뛰어난 책으로 손꼽힌다.
※가장 훌륭한 연행기이지만 최덕중과 함께 다녀온 연행기여서 최덕중의 기록과 대부분 중복되므로 간략하게 특이한 것만 기록하고자 한다. 김창업은 정사 김창집의 군관으로, 최덕중은 부사 윤지인의 군관으로 함께 다녀온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젊어서도 그림 그리기를 즐겼으므로 아버지로부터 그림에 마음을 빼앗겨 학업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니 손을 떼라는 충고를 받았다.
연행일기 제1권
■임진년(1712, 숙종 38) 11월
◯11일 대동문을 바라보니 상하 10여 리에 분첩(粉堞 백회로 바른 성가퀴)이 일신되어 있었다. 성 남쪽 머리에 새로 지은 누각이 있는데 아득하여 날아오르는 듯하였으니, 전 감사 이제(李濟)가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강은 아직 얼음이 얼어붙지 않아 배가 왕래하였다. 서윤 황이장(黃爾章)이 배를 가지고 대기하고 있었다. 배를 보니 정자가 있고, 그 사면에 주란(朱欄)을 설치하고 ‘벽한부사(碧漢浮槎)’란 방을 붙여 놓았다. 배에 오르니 반과(槃果)가 나오고 기생들 두 줄로 좌우에 늘어섰으니, 바로 관서 제일의 호화로운 일이었다.
선화당(宣化堂)에 들었다. 이 선화당은 본래 감사의 처소이지만, 마침 감사가 파직되어 사저에 나가 있었던 까닭이었다. 당의 넓이는 10여 영(楹)으로 크고 화려함이 궁궐과 다름이 없다. 이름이 선화(宣化)이니, 여기에 사는 자는 대장부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정치가 진실로 여기에 걸맞지 않는다면 아마도 복이 도리어 화가 되리라.
...다모(茶母)를 부르는 소리가 새벽까지 끊이지 않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행중의 비장(裨將)과 역원배들이 그렇게 다모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대개 온 읍내의 기생이라야 노약자를 빼고, 손님 대접을 치를 만한 자는 기껏해야 수십 명을 넘지 못한다.
이들을 삼행(三行)에 나누어서 배정하자니 비장이나 역원들에게는 두세 사람에게 다모 하나 꼴이다. 숙소가 각각 다르고 보니 이러저리 불려가야 된다. 이 때문에 사령의 고충은 견디기 어렵다고 하였다. 기생들은 연경에 가는 사람과 동침하는 것을 일러 ‘별부(別付)’라 하며, 미친 듯이 분주하게 하룻밤에 너덧 군데를 돌기 때문에 이러한 자는 아무리 수청을 든다고 하여도 그 밤으로 몰래 나간다고 하였다.
◯16일 저녁에 눈이 내렸다. 안주(安州)에서 머물렀다.
식후에 백씨를 모시고 백상루에 올랐다. 병사(兵使)도 따라왔는데, 바람이 많이 불었으므로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곧 돌아왔다. 효묘(孝廟 효종)께서 심양에 왕래할 때 이 누각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술이 얼큰해진 효종이 일어나서 춤을 추면서 기생들을 돌아보고 맞춤을 추게 하였으나 감히 그 명령에 응하는 자가 없었는데, 한 기생이 일어나 춤을 추었으므로 효종이 기뻐했다고 한다. 내가 지난 경진년(1700)에 이곳을 지날 적에도 그 기생이 있었는데 볼 수가 없어서 유감으로 여겼는데, 이날 물으니 이미 죽었다고 하였다.
밤에 병사가 동헌(東軒)에서 전별의 잔치를 베풀고 크게 기악(妓樂)을 벌렸는데, 부사(副使)가 자리하였기 때문에 나는 서헌(西軒)에 누워 있으면서 가지 않았다. 전에 부사가 백씨를 욕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목사(牧使)도 전별연을 차렸다.
◯20일 선천에서 출발하여 50리를 가다가 차련관(車輦館)에서 점심을 먹고, 또 30리를 가서 양책참(良策站)에 이르러 잤다.
해돋을 무렵에 출발하여 차련관에 닿았으니, 철산(鐵山) 땅이다. 수청기생 월출광(月出光)은 벗 이성징(李聖徵)의 눈길을 받았는데, 어제 선천에 있을 때 본부(本府)의 탐리(探吏)를 통해서 분부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데리고 왔다. 아이는 다섯 살인데, 생김새와 행동이 그 아버지를 너무나 닮았으므로, 쳐다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묻기를,
“네 아버지는 누구냐?”
하니, 답하기를
“동대문 밖에 사는 이 생원입니다.”
하였다.
상(床)을 물려서 아이에게 주었고, 백씨도 음식물을 주었다.
연행일기 제2권
■임진년(1712, 숙종 38) 12월[1일-15일]
◯8일 심양을 지난 이후로 도중에 거마(車馬)들이 많이 보였는데, 서쪽으로 가는 거마가 더욱 많았다. 노루, 사슴, 돼지, 목물(木物) 등을 실은 수레들은 거의가 영고탑 오랄(兀喇 랴오닝 성[遼寧省] 부근) 지방에서 세시(歲時) 공물을 바치려고 서울로 가는 것이며, 서쪽에서 오는 수레는 거의 차, 누룩, 베, 명주를 싣고 있었다. 빈 수레도 있었는데, 요동과 심양의 상인들이 관내(關內)로부터 돌아오는 것이었다. 한 호인이 말을 타고 앞에 가고 따르는 호인[從胡] 5, 6인이 3, 4필의 말을 끌고 가기에 물었더니, 심양의 병부 시랑이 조참(朝參)에 참석하기 위하여 북경으로 가는 중이라고 한다.
또 한 호인이 등에 누런 봇짐을 진 채 말을 타고 가고, 역시 말을 탄 30인이 그 뒤를 따르는데, 그 가운데 활과 화살을 멘 사람 뒤로 큰 수레 11량이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데 수레마다 ‘상용(上用)’이라고 쓴 작은 누런 기(旗)를 꽂고 있었다. 물어보니, 오랄(兀喇) 지방에서 오는 진공물(進貢物)이며, 그것은 모두 구슬, 담비가죽[貂], 꿀, 잣[海松子]이라고 한다. 역관 최억(崔檍)이 병이 나서 단련사를 따라 귀환하였다.
◯9일 도중에서 호인 18인이 두 사람씩 철삿줄로 목을 묶인 채 걸어 가고 말을 탄 세 호인이 그들을 압송하는 것을 보았다. 물어보니, 그들은 몰래 인삼을 캔 자들로 영고탑에서 잡아 북경으로 압송 중이라고 하였다. 어떤 죄에 해당하느냐고 물었더니, 유배(流配)에 그칠 뿐이라고 한다.
또한 호인 아이 하나가 활과 화살을 차고 말을 타고서 우리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기에 물으니 심양 병부 사랑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는 길이며 나이는 열두 살이라 하였다. 조금 있으니, 그는 말을 채찍질하여 우리의 교자 앞을 지나 딸린 하인들과 함께 달려갔다. 그들이 탄 말을 보니, 몸은 작은데 잘 달렸다. 남경마(南京馬)라고 한다.
연행일기 제3권
■임진년(1712, 숙종 38) 12월[16일-29일]
◯17일 한인 진가유(陳嘉由)의 집에 들었다. 아침을 먹고 나니 주인의 동생 진가빈(陳嘉賓)이 글자로 써서 묻기를,
“대노야(大老爺)는 무슨 벼슬입니까?”
하기에, 각로(閣老 정승)라고 답하였다. 또 성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내가 써서 보여 주었다. 또 나의 벼슬을 묻기에, 벼슬이 없고 다만 늙은 수재[老秀才]라고 대답해 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22일 무오년(戊午年)에 강우(江右)의 여자 계문란(季文蘭)이 호인에게 강제로 팔려 심양으로 가는 도중에 이곳에 이르러 시 한 수를 지어 벽에 붙였다.
퇴계에 속절없이 옛 단장이 슬프고 / 推䯻空憐昔日粧
나그네의 옷차림 오랑캐로 바뀌었네 / 征裙換盡越羅裳
부모님의 생사 어디서 들을까 / 爺孃生死知何處
애닯다 봄바람에 심양으로 가는구나 / 痛殺春風上瀋陽
계해년(1683, 숙종 9)에 식암(息庵 김석주(金錫冑)의 호)이 이곳을 지나면서 보았다는 그 시가 바로 이것이다. 시 밑에 소서(小序)가 있는데,
“노(奴)는 강우의 수재 우상경(虞尙卿)의 아내였다. 남편은 살해되고 노(奴)는 사로잡혀 지금 왕장경(王章京)에게 팔렸다. 무오년 정월 스무하루에, 눈물을 씻어 벽에 뿌리며 이 글을 쓰는데, 이는 오직 천하의 인정 있는 어떤 사람이 이 글을 보고 불쌍히 여겨 구해 줄 것을 바라는 것이다.”
고 하였다. 그리고 밑에 또 쓰기를,
“노(奴)의 나이는 21세며, □□□ 수재의 딸이다. 어머니는 이(李)씨며, 형의 이름은 □□□인데, 국부학 수재(國府學秀才) □□□”
라 하였고, 그 다음은 글자가 마손되어 기록할 수 없으며, 맨 끝에 ‘계문란(季文蘭) 씀’이라고 씌어 있었다. 주인 여자에게 물었더니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5, 6년 전에 심양의 왕장경이 백금 70에 이 여자를 사서 이곳을 지났는데, 그렇게 비통하고 암담한 중인데도 자태가 아름다워 보는 이의 눈물을 흐르게 하였다. 이 글을 쓰는데 오른손으로 쓰다가 지치면 왼손으로 옮겨 쓰며, 매우 속필이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이런 이야기를 《식암집(息庵集)》에서 보았던 까닭에 이제 이곳에 오니, 나도 모르게 어렴풋하게 기억되었다. 나는 드디어 그 시를 차운하여 벽 위에 쓰기를,
강남 아가씨 화장을 지우고 / 江南女子洗紅粧
북경 하늘 바라보니 눈물이 옷에 가득 / 遠向燕雲淚滿裳
낯선 땅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 一落殊方何日返
볕을 따르는 기러기 정말 부러우리 / 定憐征雁每隨陽
하였다. 밑에 ‘조선인이 제(題)하다.’고 썼다.
◯23일 수재 차림을 한 그 사람은 그림을 보에 싸고 하인이 품고 왔는데, 그 보를 막 펴려고 할 때 마침 갑군이 들어오자, 그는 겁을 먹고 도로 말아서 품었다. 마침 서장관이 와서 문을 닫고서 그것들을 보았었다. 그가 맨 마지막에 또 하나의 그림을 내어 놓자 서장관이 집어서 펴 보니, 첫머리에는 한 소년과 미인이 마주 앉은 그림이었고 그 밑은 소년과 미인이 사랑의 유희를 하는 모습이었다. 서장관이 그 다음을 보려고 하는 것을 내가 웃으면서, 춘화도 같다고 하였더니, 서장관 역시 웃으면서 그만두었다. 내가 그 사람을 보고,
“그대는 수재입니까?”
하고 물으니,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성문(聖門)의 제자로서 어떻게 춘화도를 품고 와서 남에게 보이시오?”
하고 물었더니, 그는 이 말을 듣자 그만 얼굴이 붉어지며 주섬주섬 싸가지고 달아나 버렸다. 우스운 일이었다.
◯28일 일행의 인마가 노숙하며 밤을 새워 겨우 동사(凍死)를 면했다. 비장들 역시 앉아서 밤을 새웠는데 고생이 책문(柵門) 밖에서 노숙하기보다 더 심했다. 우리들이 든 온돌방은 많이 파괴되었으므로 관부(館夫)에게 말해서 미장이[泥工]를 불러 회를 발랐지만, 집이 워낙 큰 데다 방과 대청을 출입하는 판자 문이 틈이 많아 바람이 들어오므로 방답지 않게 싸늘하였다. 백씨는 온돌방 위에 방장(房帳)을 쳤고, 나의 온돌방은 대자리로 방을 만들었는데 길이는 한 길 남짓, 넓이는 그 절반이었으며, 남쪽으로 문을 내고 전(氈)을 치고서, 낮에는 걷어올리고 밤에는 내리니 참 좋았다. 또 바닥은 대자리를 깐 위에 기름종이[油芚]를 덮은 뒤에 이부자리와 책을 올려놓으니 기분이 상쾌했다. 그래서 내가,
“나갈 때는 이 방이 아깝겠다.”
하고 농을 하니, 동행들이 모두 웃었다. 비장들의 숙소에 가서 보니, 3칸 방에 남북으로 온돌방이 있는데, 김중화ㆍ유봉산ㆍ김덕삼은 북쪽 온돌방에 있고, 김창엽ㆍ홍만운ㆍ최수창은 남쪽 온돌방에 들어 있었다. 여기도 온돌방을 수리하고 창을 발랐는데, 온돌방은 작고 사람은 많아서 걱정되었다. 만상 군관(灣上軍官), 약방 서원, 승문원 서원, 상고배는 그러한 방도 없어서 후정에 점옥(簟屋)을 만들고 벽돌을 사다가 온돌방을 만들었으며, 역졸과 쇄마구인(刷馬驅人)들은 모두 담을 의지하고 깨진 벽돌을 모아서 바람을 막았으며, 그중에 돈이 있는 자는 역시 점옥을 만들었다. 원건과 선흥, 귀동은 정당의 동벽 밖에다 점옥을 만들어 들기로 의논했다. 서장관의 처소를 보니 5칸 집에 온돌방은 남북으로 2개가 있는데 모두 널찍하고 깨끗하여 오히려 정당보다 나았다. 서장관은 그의 군관 노흡동(盧洽同)과 북쪽 온돌방에 들고, 역관 오지항(吳之恒)은 남쪽 온돌방에 들었으나 그의 소속인 때문이다.
◯29일 밤에 세찬(歲饌)이 들어와서 세 사신이 원역(員譯)을 거느리고 뜰에 내려가 궤고례(跪叩禮 삼배 구고두의 예)를 행하였다. 세찬은 광록시(光祿寺)에서 준비하여 보내는 것이 전례인데, 이날은 밤이 깊도록 오지 않아 제독이 통관들을 번갈아 보내어 독촉한 뒤에야 비로소 보내 왔다. 그런데 보내 온 찬품을 보니 조악하고 그릇 수 또한 전보다 줄었으므로 통관배가 불평을 말하였다. 세 사신마다 1상씩이며 1상에 45그릇이었다. 그릇은 주석[錫] 그릇인데, 보통 접시보다 배나 컸으며 음식은 모두 당과(糖果) 등이었다. 그중에 오화당(五花糖)이란 것이 있었는데, 볶은 콩과 쌀가루를 버무려, 그 위에 오색을 물들여 만든 것으로, 단맛이 전연 없었다. 다른 것도 대개 이와 비슷했으며, 고기는 삶은 거위 한 마리가 고작이었다. 원역들의 몫으로 2상을 추후에 보내 왔다. 음식을 가져온 관원에게는 전례대로 예단을 주었다. 통관들은,
“내일 새벽에 입궐해야 되니 일찍 일어나서 의관을 갖추기 바랍니다.”
하며 재삼 신칙하고 돌아갔다.
연행일기 제4권
■계사년(1713, 숙종 39) 1월
◯3일 맑음. 춥지 않았다. 북경에 머물렀다.
식후에 장원익(張遠翼)이 와서 고하기를,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의 4대손 이정재(李廷宰), 이정기(李廷基) 두 사람이 들어와서 이동배(李東培)의 편지와 이여백(李如柏)의 화상을 주었습니다.”
하였다.
이여백은 바로 영원백 이성량의 둘째 아들로 임진왜란 때 형인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을 따라 나왔던 사람이다. 이여송의 아우 이여매(李如梅)는 무오년 심하(深河)의 싸움 때 동쪽으로 도망쳐 드디어 우리나라 사람이 되었는데, 그 증손자인 이동배가 지난해 사은(謝恩) 행차 때 참판 민성유(閔聖猷)를 따라 북경에 왔다가, 이여매의 형인 이여정(李如楨)의 증손 이정재, 이정기와 만났다고 한다.
이정재가 영원백의 고명(誥命)과 자손 족파를 기록한 것을 주었다. 이여백의 화상이 평양 무열사(武烈祠)에 있다는 말을 듣고, 모사해서 보내 줄 것을 청했다. 민 참판이 김진여(金振汝)에게 모사하도록 하고 이동배의 편지와 아울러 우리 행차에 부쳐서 이정재에게 전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진여가 먼저 모본을 가져다 보여 주었다. 그 사람이 장원익의 온돌방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나가서 보려 하였으나, 호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여러 비장들의 방에 앉아 있었다.
장원익이 와서 말하기를,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원백에게 다섯 아들이 있었으니, 첫째는 이여송, 둘째는 이여백, 셋째는 이여정, 넷째는 이여장(李如樟), 다섯째는 이여매인데, 이정재, 이정기는 바로 이여정의 증손이고, 이여송은 무후(無后)다.’라고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영원백의 자손들을 청조에서 특별히 대접하여 거의 모두 녹용(錄用)하여, 또한 부마가 된 자도 있으며, 이정재 역시 방금 지현(知縣)으로 체직되어 갔다고 합니다.”
한다.
일찍이 이런 말을 들었다.
“영원백이 광녕(廣寧)을 지키고 있을 때, 누르하치가 그의 노예였는데 도망을 가니, 제장들이 모두 쫓아가 사로잡을 것을 요청했으나, 영원백이 듣지 않고 고의로 놓아 보냈다. 누르하치가 변방을 도리어 침노하여 이여백과 싸우게 되었을 적에, 누르하치가 그 군사들에게 이 제독군에게는 침범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총병 두송(杜松)이 혼하(混河)에서 전사한 것에 관해서 어떤 이는, ‘이여백이 몰래 오랑캐들과 통하고, 그들이 매복한 것을 알고 두송을 속여 보내어 드디어 패몰하게 하였기 때문에 뒤에 죄를 받아 죽었다.’ 한다. 천계(天啓) 연간에 명 나라 조정에서 아우 이여정을 이여백 대신에 파견하려고 할 때,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이성량의 자손은 오랑캐와 더불어 향화정(香火情 향을 피우고 맹세한 사이)이 있으니 보낼 수 없다.’ 하였다. 건주(建州)를 칠때 명 나라 군사가 사로(四路)로 들어갔는데, 동, 서, 북 3면은 다 패했으나, 이여백의 군은 남쪽으로 들어가 유독 온전히 돌아왔다 한다.”
지금 청 나라가 영원백의 자손을 대접하는 것으로 볼 때,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이 헛말이 아닌 것 같다. 이여백은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목매어 죽고, 이여정은 개원위(開元衛)를 잃었기 때문에 사형되었다고 한다.
◯17일 정세태는 북경의 장사치로, 우리나라에서 사들이는 비단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오는데, 그 대가가 은자 10만 냥을 훨씬 넘는다. 그 아비 때부터 이로써 살림을 일으켜 정세태에 이르러 더욱 부자가 되었고, 혼인도 벼슬하는 집들과 많이 하여 자못 권세가 있다. 비단 이외에 무릇 얻기 어려운 물건들을 정세태에게 말하면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 집은 옥하교 큰길 남쪽에 있는데, 조선과의 매매를 위해서 옥하관 문 곁에 묘당을 짓고 주야로 분향하는데, 그 향이 마치 구불구불한 노끈과 같아, 그 한쪽 끝을 태우면 일주야를 계속해 탄다 한다.
◯24일 천하의 세입전곡(歲入錢穀)이 《관계통록(官堦通錄)》에 적혀 있었다. 이날 최덕중과 유산산(柳山算)이 계산을 해 내었다.
북직례(北直隷) 9부(府) 20주(州) 120현 : 지정은(地丁銀) 2,450,192냥, 염과은(鹽課銀) 437,949냥, 관세은(關稅銀) 65,460냥, 은 합계 2,953,601냥.
성경(盛京) 2부 2주 7현 : 지정은 10,088냥, 지정 흑두속미(黑豆粟米) 44,300석.
강남성(江南省) 동도(東道) 7부 6주 46현 : 지정은 424,066냥, 지정전량은(地丁錢糧銀) 3,900,169냥, 관세은 176,720냥, 염과은 2,085,286냥, 합계 6,586,237냥. 조량(漕糧) 1,554,100석, 추미(秋米) 1,511,989석 7두, 백미 132,357석, 쌀 합계 3,198,446석 7두.
서도(西道) 7부 8주 50현 : 지정은 1,506,433냥, 지정전량은 172,820냥, 관세은 338,320냥, 은 합계 2,017,573냥. 조량 239,000석, 추미 188,987석 3두, 쌀 합계 427,987석 3두.
강서성(江西省) 13부 1주 77현 : 지정은 2,066,527냥, 또 20,027냥, 관세은 163,880냥, 은 합계 2,250,434냥. 추미 709,730석 4두, 또 7,888석 4두, 또 13,000석, 또 25,008석 6두, 조량 568,716석, 쌀 합계 1,324,343석 4두.
복건성(福建省) 9부 1주 60현 : 지정은 1,023,499냥, 인정은(人丁銀) 15,106냥, 징은(徵銀) 3,003냥, 정은(征銀) 2,717냥, 염과은 85,470냥, 관세은 66,549냥, 은 합계 1,196,344냥.
절강성(浙江省) 11부 10주 76현 : 지정은 2,944,169냥, 염과은 502,034냥, 관세은 230,180냥, 은 합계 3,676,383냥. 조량 662,030석, 추미 583,495석, 백미 66,195석 쌀 합계 1,311,720석.
호광성(湖廣省) 8부 8주 52현 : 지정은 1,858,732냥. 조량 244,995석, 추미 168,054석 2두, 또 6,000석, 쌀 합계 419,049석 2두.
하남성(河南省) 8부 12주 92현 : 지정은 2,915,684냥. 조량 379,992석, 추미 231,724석, 쌀 합계 611,716석.
산동성(山東省) 6부 15주 89현 : 지정은 3,415,053냥, 관세은 29,680냥, 은 합계 3,444,733냥. 조량 375,600석, 추미 344,902석 4두, 쌀 합계 720,502석 4두.
산서성(山西省) 5부 19주 78현 : 지정은 2,946,593냥, 염과은 172,628냥, 은 합계 3,119,221냥.
섬서성(陝西省) 8부 20주 96현 : 지정은 1,874,243냥.
사천성(四川省) 10부 22주 97현 : 지정은 217,432냥, 교절은(蕎折銀) 163냥, 은 합계 217,595냥. 창두미(倉斗米) 36석.
광동성(廣東省) 10부 9주 78현 : 지정은 1,239,403냥, 개정은(改征銀) 1,755냥, 관세은 122,950냥, 염과은 41,510냥, 은 합계 1,405,618냥.
광서성(廣西省) 12부 37주 46현 : 지정은 412,782냥.
귀주성(貴州省) 11부 12주 25현 : 지정은 63,549냥.
운남성(雲南省) 17부 27주 27현 : 지정은 366,052냥.
총계 은(銀) 34,368,873냥, 쌀 8,058,101석.
대개 토지는 1묘(畝)마다 은을 4푼(分) 4리(里)씩 거두고, 정(丁)은 3등(等) 9칙(則)의 구분이 있는데 대략 한 사람마다 은 4전(錢) 2푼 9리씩 거둔다. 부역법(賦役法)도 대개 이러하다. 그러나 은과 쌀의 각항 명목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는 데가 많았으나 요점은 부담이 매우 가볍다는 것이다.
연행일기 제5권
■계사년(1713, 숙종 39) 2월[1일-8일]
◯2일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율시 한 수를 지었는데 백씨가 화답하였다. 이날 밤 꿈을 꾸었는데, 중평(仲平)이 동석하여 나와 더불어 《순화첩(淳化帖 송 태종 순화 3년에 만들어진 서첩)》을 함께 보았다. 곁에 몇 달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중평의 아들이라고 한다. 내가 희롱하기를, 늘그막에 정력을 여기에 다 쏟으니 벼슬 얻음이 어찌 늦지 않겠는가 하여 크게 웃었다. 깨고 보니 매우 생생하다. 백씨에게 꿈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한바탕 웃으며 적적함을 달랬다. 나는 현기증이 있어 지난달 18일부터 자음건비탕(滋陰健脾湯)을 복용하였는데 중지하였다가 오늘부터 다시 복용하였다
◯6일 날이 거의 정오가 되어 백관들이 모두 나갔을 때 비로소 사신들을 들어오라고 하였다. 군관과 원역도 어제 갔던 문밖으로 따라갔다. 두 사신이 북쪽으로 향해 서고, 예부의 청인 시랑 이격(二格)과 한인 시랑 풍충(馮忠)과 시종 2인이 문밖에서 좌우로 나누어 서서 황지(皇旨)를 전한다. 통관 김사걸이 두 사신에게 꿇어앉아서 들으라고 하였다. 드디어 황지를 전하기를,
“너희 나라에는 서책이 적고 청조에는 새로 나온 책이 많으니, 이제 4부를 주노니 헐거나 상하게 함이 없이 가져가 국왕에게 전하라. 동국(東國)의 시부(詩賦)와 잡문을 짐이 보고자 하니, 이후에 오는 사신에게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한편 이 말을 전하며 한편 환관들이 책을 안고 나와서 시랑 오른쪽에 서서 통관에게 주며 각서의 첫권을 열어 사신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제목은 모두 황제의 친필입니다.”
하였다. 그 책은 《연감유함(淵鑑類函)》 20투(套), 《전당시(全唐詩)》 20투, 《패문운부(佩文韻府)》 12투, 《고문연감(古文淵鑑)》 4투, 모두 370권이었다. 사신이 대답하기를,
“소방(小邦)은 전후로 황은을 입어 방물(方物)을 견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므로 소방의 군신이 감축(感祝)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서적을 내려 주니, 실로 앞서 없었던 일입니다. 이는 비단 저희 사신들만의 영광일 뿐만이 아닙니다. 삼가 받들어 국왕에게 바치겠나이다. 동국의 시문에 대해서도 마땅히 황지를 받들어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겠습니다.”
하였다. 통관이 다시 황지(성조 강희제 : 1661-1722)로써 묻기를,
“듣건대, 국왕은 어질고 현명하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나라를 잘 다스린다 하여 사신들이 왕래할 적에 자연히 소문이 자자하니, 짐이 이에 매우 기꺼워하노라.”
하였다. 사신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다만 엎드려 듣고 있을 뿐이었다. 김사걸이 재삼 말을 하며 반드시 그 대답을 듣고자 하므로 사신이 대답하기를,
“국왕께서는 한마음으로 큰 나라를 섬겨서 일찍이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습니다. 황상 폐하의 은혜로우신 뜻이 이토록 융숭하오니, 황공하고 감격한 마음 무어라 이뢰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국왕은 즉위한 지 지금 몇 년이나 되었는고?”
하니, 대답하기를,
“40년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국왕의 조상들 가운데도 임금 노릇함이 이와 같이 오랜 이가 있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소경왕(昭敬王 선조 대왕)이 40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소경왕은 국왕에게 몇 대 위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5대 위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국왕의 춘추는 얼마나 되었는고?”
하니 대답하기를,
“53세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국왕은 세자 외에 아들이 몇 명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두 왕자가 있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세자의 나이는 몇이며, 왕자들의 나이는 또한 몇인가?”
하니, 사신이 모두 대답하였다. 또 묻기를,
“사신의 나이는 얼마이며 조정에서 벼슬한 지 몇 년이나 되었는고?”
하니, 사신이 각각 연세와 벼슬한 햇수를 말하였다. 통관이 소경왕의 휘(諱)를 묻기에 사신이 대답하기를,
“군부(君父)의 이름을 입으로 말할 수는 없다. 황제께서 반드시 알고 싶어한다면 바깥에 나가 적어서 올리겠다.”
하였다. 인하여 그것을 묻는 의도를 물으니, 예부관이 황제가 물을 것을 고려하여 알고 싶어한다고 하였다.
오랄총관(兀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이 나와서 사신을 보기를 청하였다. 사신이 나아가 읍하니, 목극등이 통관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백두산(白頭山) 일은 이제 잘 해결되었으니, 다시 가서 보지 않더라도 지계(地界)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표(標)을 세우는 것도 또한 급히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한기에 서서히 해서 백성들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말을 끝내고 바로 갔다. 조금 있다가 또 수역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북도(北道)를 왕래할 때에 들으니, 회령(會寧) 개시(開市)에서 영고탑(寧古塔) 사람이 조선 사람의 물건을 억지로 사는 일이 있다고 하기에 돌아와 황제께 상주하니,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짐도 일찍이 그런 말을 들었는데 마땅히 경계시켜야 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사신과 마주 볼 때에 이 말을 미처 못했으니, 이 말을 고하여 주시오.”
하였다. 목극등은 황제의 총신(寵臣)으로 올라의 땅을 지키다가 연전에 황제의 명령으로 백두산에 가서 시찰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목극등의 위인은 작고, 눈에는 영기(英氣)가 있으며, 말할 때에는 웃는 듯하며, 매우 지혜롭고 약은 듯하나 역시 탁월한 인물은 못 되는 듯했다. 일찍이 압록강에서 몸소 배를 젓다가 미끄러져 이가 빠졌다고 한다.
연행일기 제6권
■계사년(1713, 숙종 39) 2월[9일-14일]
◯9일 저녁에 역관이 쌀을 납입하고 돌아와 통관의 말을 전하기를,
“조선 쌀은 오직 임금에게만 드리는데 겨우 1년을 지탱합니다.”
하였으니, 그 귀히 여김을 알 수가 있다. 또, ‘쌀의 품종이 근래에 점차 나빠졌다.’고 말했는데, 아마 이것은 선천(宣川), 곽산(郭山)의 쌀로, 1석의 값이 3석 값에 해당되기 때문에, 근래에는 적객(謫客)이 방납(防納)하여 이와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10일 저녁때에 고시방(告示榜)이 나왔는데 사신에게 보인 뒤에 붙였다. 고시방은 매매를 허락하는 내용이었다. 이날부터 사행 중의 사람들이 더욱 바쁜 기색을 보였다. 남쪽 물건이 귀했으므로 일행이 모두 잡물(雜物)을 샀다. 잡물은 실이나 천과는 달라서 정해진 값이 없으므로 한 물건을 보면 서로 다투므로 1냥 짜리가 10냥까지 올라갔다. 그리하여 사는 물건을 서로 속이고 감추기까지 하였는데 역관들도 그 수치스러움을 말하였다. 대개 이전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역관들은 자기 것을 매매하는 일 이외에 사대부집에서 별도로 부탁받는 것을 가장 민망스럽게 여겼는데, 그 값은 종이, 부채, 붓, 먹 따위가 많았으므로, 이 때문에 손해를 봄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13일 상사(賞賜)는 동지(冬至), 정조(正朝), 성절(聖節), 사은(謝恩) 등 각기 정해진 수가 있으나 합계하면, 국왕에게는 은 1000냥, 채단 25필, 준마(駿馬) 4필에 영롱안점(玲瓏鞍䩞)을 모두 갖추었다. 상사와 부사에게는 각기 은 200냥, 대단(大緞) 12표리(表裡), 황견(黃絹) 8필, 안구마(鞍具馬) 2필, 서장관에게는 은 180냥, 대단 8표리, 황견 5필, 대통관 3인에게는 각기 은 130냥, 대단 4표리, 또 1필, 황견 5필, 압물관(押物官) 24명에게는 각기 은 70냥, 소단(小緞) 4표리, 또 1필, 청삼승(靑三升) 10필, 종인 30명에게는 각 은 23냥을 주었다. 압물관 24명이 받은 상사는 정수 외로 들어온 자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는데 각기 은 53냥 5전, 소단 4필, 노주 주(潞州紬) 2필, 청삼승 8필이었다. 나는 은 15냥, 소단 1필을 강우양(康遇陽)에게 주었고, 원건과 선흥 등에게는 합하여 은 10냥, 삼승 2필, 마부 업립(業立), 귀동에게는 각기 은 5냥, 귀동에게는 삼승 2필, 업립에게는 삼승 1필을 주고, 갑군 왕사에게는 은 1냥 5전, 상통사에게는 주가(紬價) 1냥 2전, 소단 1필, 노주주 1필, 김창엽에게는 소단 1필을 주고, 어의(御醫)에게도 노주주 1필을 주고, 만상 군관 임충국(任忠國)에게는 삼승 1필, 효석(孝石)에게는 올 때에 그 말을 3일간 빌린 수를 주었다. 은 1냥을 1998문(文)과 바꾸어 돌아가는 길에 구걸하는 자들에게 줄 것으로 하고, 김창엽에게 9전, 마패(麻貝)의 노(奴)에게 6전을 주었으며, 동교동내(東郊洞內)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또 모자[笠] 50개와 띠[帶子] 100개를 사고, 그 나머지 몇 냥은 선흥에게 주어 도중에 쓸 비용으로 하되, 안 쓰게 되면 그가 스스로 갖도록 하였다.
상으로 내린 말은 모두 내구마(內廐馬)지만 중간에서 바꾸어야 하니, 모두 늙고 파리해서 타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국마(國馬) 1필이 귀로에서 죽었다. 백씨가 상으로 받은 말을 김중화, 유봉산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모두 은 4냥씩을 받고 팔았다.
연행일기 제7권
■계사년(1713, 숙종 39) 2월[15일-21일]
◯18일 이리점(二里店)을 지나오자 동남쪽으로 한 줄기 강물이 들 한복판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거리는 5, 6리 상간에 불과하였다. 어양하(漁陽河)의 하류라고 생각되었으나, 올 때에 보지 못한 것이 이상한데, 지금 문득 있기에 원건 등에게 물어보니, 아마도 올 때에는 강물이 얼어붙어 있었으므로 보지 못한 것 같다고 하였다. 여러 역관들에게 전에 이 강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박동화(朴東和) 이하 모든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것 같다고 한다. 나는 웃으면서,
“너희들은 이곳을 여러 번이나 지나다녔으면서도 이 강이 있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으니 장님[瞽]이라 해도 무방하겠구나.”
하였다. 10여 리를 지나가니 강물은 그득히 넘쳐흘러 온 들판에 넘실거리고 있어 마치 해문(海門)과 같았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의심스럽게 여겨져서 원건을 시켜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과 나무꾼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어떤 사람은 물이라 하고 어떤 이는 물이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그 광경은 단지 몇 리 밖에 있을 뿐이었는데 가까이 그곳에 이르면 문득 그 앞으로 옮겨 가고 뒤를 돌아보아도 없었다. 비로소 나는 진짜 강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사람이 물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를 속인 것이었다.
여기에서 김창엽(金昌曄)은 의혹을 품고 이상스럽다고 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모양이 신기하고 절묘하였으며 더욱이 올 때 보았던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가 신시(申時)에서 사시(巳時) 사이에 있을 때 햇빛이 아지랑이[野氣]와 서로 반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 같으나, 길 위에서는 또한 그와 같지 않으니, 그 이치는 끝내 알아 낼 수가 없었다. 이날 밤 비가 내렸는데 또한 신기루의 기운이 비 내릴 징조를 이루는 듯하였다.
◯19일 일찍이 이곳의 붓[筆]이 좋다는 말을 들었기에 김상현(金尙鉉)을 시켜 사 오게 하였는데 붓 1개에 별선(別扇) 여덟 자루의 가격이었다. 아역(衙驛) 오옥주(吳玉柱)가 길을 가다가 때때로 말을 붙여 왔는데, 일찍이 의주(義州)에 갔을 때 기생들과 통정했다고 하며 그 이름들을 거론하였는데, 역관들이 근거 없는 말이라고 말하니, 자못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런 일은 역관들이 심히 꺼리고 있는 일인 것인데, 오옥주의 사람됨이 우직하고 조심하지 않으므로 발설했던 것이다.
회령의 기생도 이름을 많이 알고 있는데, 개시(開市) 때에 안 것이라고 했다.
연행일기 제8권
■계사년(1713, 숙종 39) 2월[22일-29일]
◯26일 이날 찰원에 들었다. 백씨는 동편 안쪽 방에서 자고 나는 바깥 방에서 잤다. 서장관은 서쪽 온돌방에 들었고 부사는 민가에서 잤다.
밤에 나이 젊은 여자가 찾아왔기에 물어보니, 지난날의 늙은 노파의 손녀라 하였다. 머리를 들게 하고 보니 좌우로 땋은 편발(編髮)은 우리나라에서 하는 모양과 같이 이마 위에 서려 올리고 비녀와 머리침들을 가로 세로 꽂아 흐트러지지 않게 하였다. 또, 사륜(篩輪 대나무로 또아리같이 둥글게 엮은 것)같은 백포소투(白布小套 흰 천으로 머리에 얹도록 둥그렇게 한 것)를 머리에 얹고 있었다.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고랑(姑娘)의 상(喪)을 입었다고 한다. ‘고랑’이란 바로 어머니인 것이다. 소녀의 머리는 호인의 방식을 하였고 발은 전족을 하였는데, 그것은 만(滿), 한(漢)의 풍습을 혼합한 모습이었다.
“너는 고려말을 할 줄 아느냐?”
“모릅니다.”
그녀의 나이는 24, 5세쯤 되어 보이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남편은 이미 늙었다고 했다. 하인배들이 묻기를,
“왜 늙은 사람에게 시집을 갔느냐?”
하니까 대답하기를,
“부모님이 시키는 일인데 어떻게 늙고 젊음을 택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녀가 사는 곳은 서편에 있는 묘옥(廟屋)으로 주방으로 들어가는 집이었다. 들으니 유봉산(柳鳳山)이 불러다 놓고 희롱하며 가슴을 만지고 등을 어루만졌다고 한다.
연행일기 제9권
■계사년(1713, 숙종 39) 3월
◯12일 김응헌(金應瀗)이 말하기를,
“이곳의 호인들은 청심원(淸心元)을 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호인이 말하기를, ‘지난해 9월에 난 어린애가 급한 경풍(驚風 어린아이가 경련을 일으키는 병의 총칭)을 앓아 눈과 입이 굳어졌는데, 청심원을 씹어 흘려 넣었더니 즉시 소생하여 완쾌했다.’ 하면서 그 아이를 안고 와서 보이며 그 약의 신효(神效)함을 칭찬했습니다.”
하였다.
◯13일 마침내 중강을 지나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의주부의 관리 및 전도 위의(前導威儀) 기생들이 모두 와서 선상(船上)에서 기다리다가 다담(茶啖)을 내왔으므로 그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의주부에 이르러 밥을 먹고 나니 새벽닭이 울었다.
◯15일 맑음. 의주(義州)에 머물러 있었다.
전임 부윤과 서장관이 함께 와서 백씨(伯氏)를 따라 구룡정(九龍亭)에 가니, 전임 부윤이 먼저 와서 술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자 아래에서 그물을 던쳐 누치[重唇], 여항어(餘項魚) 수십 마리를 잡았는데 큰 것은 한 자 넘었다. 장관(將官), 기생(妓生)을 모래사장으로 보내 말을 달려 깃발을 뽑는 놀이를 하였다. 드디어 배를 타고 흐름을 따라 내려갈 때 기악(妓樂)은 옆 배에 실려 함께 나란히 갔다. 정자 아래에는 절벽이 강가에 높이 솟아 있었는데, 절벽 밑으로 배가 지나가기에 쳐다보니 더욱 기이하고 장엄하였다. 북문 밖에 배를 대고 통군정(統軍亭)으로 올라가니, 본부(本府)에서는 또 과일을 차려 내오고 기악을 베풀었다. 술잔을 들고 송골산(松鶻山)을 바라보니, 그곳을 왕래한 것이 하나의 꿈만 같았다. 밤에 달이 밝아 밖에 나와 뜰안을 거닐다가 돌아오니, 노기(老妓) 옥랑(玉娘)과 수청기(隨廳妓) 2인이 와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두 기생은 가 버리고 옥랑 혼자서 남아 옛말을 지껄였는데 한참 있다가 그녀도 돌아가 버렸다. 이날 원건, 선흥은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수청기(隨廳妓) : 높은 벼슬아치에게 몸을 바쳐 시중을 드는 것은 일반적으로 守廳이라고 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隨廳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자는 다르나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서장관을 보러 갔다. 용천 기생(龍川妓生) 낙포선(洛浦仙)은 겨우 20세인데 노래와 미색이 모두 관서(關西)에서 으뜸으로 불렸다. 지난해 가짜 어사[假御使]를 따라 의주에 갔다가, 의주 부윤에게 심문하는 곤장을 맞고 거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걸음이 아직도 절뚝거렸다. 그리하여 사신에게 수청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날 특별히 불러 노래를 시켰더니, 목소리가 맑고 낭랑하여 대들보가 진동하였다. 서장관은 자리를 피해 가 버리고 듣지 않으니 우스웠다. 철산(鐵山)의 기생 월출광(月出光)이 뵈러 왔다. 저녁에 세 사신이 함께 바위 위로 올라가자 기생과 풍악도 따랐다. 나는 피곤하여 당(堂) 뒤 조그만 방에 누워 곧 잠을 잤다.
◯18일 주수(主守) 홍이도(洪以渡)가 만나 보기를 청하기에, 대청(大廳)에 이르러 보니 거기에는 아직 머리를 올리지 않은 수청기(隨廳妓)가 있었는데 모양이 자못 단정하였다. 내가 팔을 잡고 희롱하면서 이름을 물었더니, ‘가학(駕鶴)이며 나이는 16세라.’고 하였다. 밤에 가학이 어린 기생[兒妓] 초옥(楚玉)과 검무(劍舞)를 추었는데, 초옥은 더욱 절묘하였으며, 나이는 13세라 하였다. 검무(劍舞)는 우리들이 어렸을 때에는 보지 못하던 것으로 수십 년 동안에 점차 성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8도에 두루 퍼졌다. 기생이 있는 고을은 모두 검무의 복색(服色)을 갖추어 놓고 풍악을 울릴 때는 반드시 먼저 기생을 바쳤다.
이와 같은 어린아이들도 그 춤을 능히 추게 되었으니 자못 세변이었다.
◯19일 밤에 주수(主守)가 보러 왔으며, 수청기(隨廳妓) 몽업(夢業)이 나와서 오랫동안 실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갔다.
◯20일 지난밤에 다모(茶母)를 부르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또 매를 때리는 소리가 났기에, 아침에 물어보니 역관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어의(御醫)가 한 일이며, 저희들이 한 짓이 아닙니다.”
하고, 이어 곧 또 말하기를,
“각 고을에서 어의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약방 서원(藥房書員)을 ‘서원나리[書員進賜]’라고 부르니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 일은 이상스러울 것이 없다. 어제 나의 장인(莊人)이 나에게 ‘진사대감(進士大監)’이라고 하였다. 진사대감도 있는데 어찌 서원나리가 없겠는가?”
하니, 사람들은 모두 허리가 끊어져라 하고 웃었다.
◯22일 저녁에 강계관으로 갔더니, 서장관은 먼저 도착하여 이미 기악(妓樂)을 많이 모아 놓았으므로 함께 마냥 즐겼는데 역시 나그네로서 한바탕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먼저 일어났다. 수청기 득례(得禮)는 노래를 잘 불렀는데, 백씨는 강계(江界 정필동(鄭必東)을 말함)가 그를 보고 싶어한다는 말을 듣고 보낸 것이었다. 나는 연당(蓮堂)으로 돌아와 그 기생을 불러다 노래를 듣다가 밤이 깊어 돌려보냈다.
◯23일 새벽에 득례(得禮)가 상방(上房)에서 나와 백씨의 거동을 전하고는 머물러 앉아 한담을 하였다. 날이 다 밝아서 강계(江界)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을 하고 뒤를 따라 스스로 이르렀는데, 득례를 보고 말하기를,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득례가 대답을 못 했다. 내가 강계에게 묻기를,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하니, 강계가 말하기를,
“어젯밤 득례가 왔을 때 서장관과 함께 이르기를, ‘네가 김 진사(金進士)를 잘 시침(侍寢)하면 상을 주고 그렇지 못하면 벌을 내리리라.’ 하였으므로 그래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비록 그렇더라도 저들이 그 일을 가지고 물어보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알고 싶으면 나에게 물어보십시오.”
하니, 강계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어찌된 것을 물어볼 것 없이 득례에게 예물이나 주십시오.”
하니, 강계는 반신반의하면서 세 필의 무명의 체지(帖紙)를 주었다.
나는 또 서장관에게 말을 해 본관(本官)에서도 음식을 내려 주도록 했더니, 득례가 부끄럼 없이 그것을 받았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해가 높아서야 아침을 먹고 출발하여 순안(順安)에 도착하였다. 황순승(黃順升)이 진사 노경래(盧警來)와 함께 와서 보았고, 본현(本縣)의 선비 박진혁(朴振赫)ㆍ박창채(朴昌采) 두 사람과 노기(老妓) 종섬(終蟾)이 또한 찾아와 인사를 하였다. 서장관은 기생을 시켜 두견화(杜鵑花) 한 가지를 보내면서 말하기를,
“전에 이 꽃을 본 일이 있습니까?”
하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나무의 꽃이 아무리 곱더라도 사람꽃만큼 고울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어 곧 서장관을 만나 보았더니, 서장관이 말하기를,
“처음 기생이 전하는 말을 듣고 묻기를, ‘사람꽃[人花]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냐?’고 물었더니, 기생이 자기를 가리킨다고 하여 우스웠습니다.”
하니, 나는 웃으면서,
“그 기백이 가상합니다.”
하고 드디어 술을 보내 주었다.
◯27일 수안 군수(遂安郡守)가 들어와 백씨를 배알하면서 묻기를,
“나와 기다린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도착하셨으니 어찌 된 일이십니까?”
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말을 듣고 입을 열지 못하였다.
◯30일 맑음. 파주를 출발하여 고양(高陽)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서울로 들어왔다.
새벽에 욕식(蓐食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식사를 함)을 하고 6, 7리를 걸어가니 그때야 비로소 날이 밝았다. 고양 객사에 도착하니, 한석창(韓碩昌)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관반(官飯)을 찾아 먹고 길을 떠나 신원(新院)에 도착하니 방시진(方時振)이 와서 맞아 주었고, 창릉(昌陵)에 도착하니 노비들이 마중하러 나왔다. 연서(延曙)에 이르니 김비겸(金卑謙)이 와 맞아 주었다.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니 사신의 행차는 도성에 간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창의문(彰義門)으로 가는 길을 따라 불암(佛巖)에 도착하니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의 호)이 김양겸(金養謙)ㆍ김치겸(金致謙)ㆍ김후겸(金厚謙)과 함께 시냇가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김중평(金仲平)과 감역(監役) 민성원(閔聖源)도 역시 함께 있었다. 그리하여 말에서 내려 서로 만나서 함께 갔다.
차일암(遮日巖)에 도착하니 비가 온 뒤라 수석이 깨끗하고 장려하여 구경할 만하기에 마침내 돌 위에 앉았다. 수사 이수민(李壽民)과 동생 이일민(李逸民), 이성징(李聖徵)이 와서 인사를 하였다. 동교(東郊)의 하인들이 모두 와서 배알을 하였다. 김언(金彦), 김신(金信)이 조반을 먹고 벽제(碧蹄)에서 따라왔다.
성 밖에 도착하니 이생 정엽(李生廷燁), 이정영(李廷煐)과 조생(趙生) 명두(明斗)가 와서 맞아 주어 또한 말에서 내려 반형(班荊 길가에서 친구를 만나 옛정을 주고받음)을 하면서 잠시 앉아 점심을 먹었다. 심대(心臺)로부터 온 점심이었다. 곧바로 백씨 집으로 가서 사당(祠堂)을 배알하고 저녁에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와 가묘(家廟)에 배알하였다.
연경에 갔다가 돌아오기까지의 기간은 5개월로 모두 146일이 걸렸고, 갔다 온 거리는 합하여 6028리였다. 연경(燕京)에서 출입한 것과 길에서 돌아다닌 것이 또한 675리나 되었고, 얻은 시문(詩文)은 402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