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기
3일 : 익산서예협회전
서예협회 익산지부에서 주최하는 서예전시회입니다. 우리 서가협회에서는 기 입상한 작품들을 모아 전시하는데 이 전시회는 생활속의 서예문인화를 주제로 생활용품에 글씨나 그림을 그려 전시하고 있습니다. 양드리는 세 작품을 제출하였는데 호평을 받았습니다. 개구리가 일품입니다.
9일 : 성포별신제
우리 익산시 성당면 성당포구에서 행하는 別神祭 행사입니다. 별신제는 목적면에서는 부락제나 당산제와 별 다른 점은 없으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무당이 주재하는 점이 가장 다른 점입니다. 성당창은 1662년에 설치되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조선왕조실록』영조 1년(1725년) 4월에 남원 유생 박시도가 성당창에 세납하는 괴로움을 말하는 기록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성당창의 위치는『여지도서』에 “성당창이 함열현에서 북 20리에 있다.” 고 기록되어 현재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를 지칭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성당창은 군산창과 함께 조창운영에 대한 관리상의 문제로 두 조창 통합의 논의가 지속되다가 고종 32년(1895)까지 운영된 후 폐지됩니다. 이곳에서는 본디 순풍당에서 당산제를 지냈으나 언젠부터인가 조운선 침몰이 있자 음력정월초에 별신제를 지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895년 성당창이 폐쇄되자 별신제도 중단되었는데 이후 당산제를 다시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당산제도 중단이 되었다가 1997년 익산문화원에서 별신제를 재현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문화원에서 주관하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에 웅포 용왕제(지금은 중단상태)를 참관한 일이 있었으나 성포별신제 참관은 처음입니다. 그동안 문화원에서 지내온 경험이 축적되어 제사관련 도구와 복장도 잘 갖추었고, 경험있는 무당이 주관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내년부터는 비록 운영면에서 전반적인 관장은 문화원에서 하지만 제례는 온전히 성당면 별신제전위원회에서 주관하고 농악대도 이곳 성포농악단에서 맡기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잘 된 일이라고 봅니다. 이곳 성포농악을 이끄시는 이인수옹과 임승용 성포농악보존회장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우리 전북에서는 유일한 별신제인만큼 익산문화원과 성당면이 잘 협조하여 오래토록 전승되기를 기원합니다.
17일 : 이쁜 딸 승원이의 결혼
프롤로그
우리 딸 승원이가 신랑 정준호와 함께 10일간의 아이슬란드 신혼여행을 하고 귀국하였습니다. 엊그제 완성된 그들의 보금자리를 찾았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이쁜 딸의 결혼과 결혼식에 대해 쓰는 글인지라 좀 조심스립기도 하지만 상당히 길어질 듯합니다.
어린시절과 성장
승원이는 33년 전에 우리의 둘째로 탄생합니다. 아들 다음에 딸을 얻었으니 행운이었습니다. 고창읍에서 1년 반을 살았습니다. 세 살 때 익산으로 왔습니다. 26개월 때 한글을 읽어 우리를 매우 기쁘게 했습니다. 물론 카세트를 들으며 동화책을 따라 읽다가 저절로 터득하게 된 것이지만 남들보다 많이 빨라서 놀라웠습니다. 유치원 때까지 주공 신동아파트에 살았는데 동갑내기인 상은이와 4년 반 동안을 가장 친하게 지냈습니다. 두 아이의 노는 모습을 보면서 두 아이 모두 높은 지능을 가진 것으로 파악되어 기대가 컸습니다. 일곱 살 때 우리집과 상은이 집 모두 다른 아파트(맨션)로 이사함에 따라 지역적으로 헤어진데다, 네 달 먼저 태어난 상은이가 한 해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바람에 학교와 학년이 달라져서인지 둘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북중학교에서 한 학년 차이로 만났는데도 서먹하여 서로 아는 체도 못하며 지냈답니다. 두 아이는 초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마치고 중학교 역시 최우수로 입학하였고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1등과 2등으로 입학하였습니다. 한해 먼저 고대법대에 입학한 상은이는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당당한 판사님이 되었습니다. 우리 승원이는 국어교사가 되고 싶다하여 서울대 사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때 전국 나의주장발표대회에 전북대표로 출전하여 장려상을 받은바 있고, 글짓기에도 소질을 보이고(고교 백일장 장원), 노래와 그림그리기에도 재주가 많았습니다. 사범대에 입학하였으나 교사의 꿈을 쉬이 접고 출판사 근무를 거쳐 대학원에 입학하여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재는 대학교 국제교육원에서 한국어를 강의 하고 있습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중에 의대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는 우리 사위 정준호군을 만나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승원이도 내년부터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정준호와의 만남
정군은 런던대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현재는 서울대의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친후 논문을 준비중인 과학도로 이미 몇 권의 저서와 번역서가 있고, 현재 대학원 조교로 근무하면서 강의도 하고 있습니다. 기생충에 대한 강의를 하는 정군을 본 후 마음이 간 우리 승원이가 두 사람을 잘 아는 지인을 통해 소개받아 사귀지 3년이 되었고, 진솔하게 사귀는 것을 알았으나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가 아니면 만나지 않는 나의 신조 때문에 정군을 아직 만나지 않던 차에 지난 5월 우리 승원이가 결혼을 하겠다고 전격 선언하였고 그런 딸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월말에 함께 내려온 정군을 보고 나도 반했습니다. 학문을 하는 과학도이기도 하지만 용모가 준수하고 천성이 착하게 보이는 청년입니다. 과연 욕심이라고는 찾기 힘든(특히 물욕, 나는 이를 가장 칭찬합니다.) 우리 승원이가 반할 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이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하며 놀라운 일은 우리 승원이가 준호를 너무도 아낀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학문을 하며 성품이 고결한 준호가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상견례
한 달 후 상견례를 하게 되어 준호 부모님을 뵈었습니다. 경기도 출신이신 두 분은 대학을 나오시고 현재 서울에서 사시면서 두 분이 각기 사업을 하고 계십니다. 저보다는 오년 연하이신 준호 부모님께 나는 과감하게 제안을 드렸습니다.
“저는 실용주의자입니다. 그래서 허례허식을 아주 싫어합니다.
첫째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인 예단과 예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돈을 드리고 그중 다시 절반을 받는 어이없는 매매혼 같은 행위(예단)를 하고 싶지도 않고, 귀금속 예물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우리 승원이에게 예물이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예단의 병폐를 바로잡는 일에 앞장서지는 못하지만 저 자신만큼은 반드시 실천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니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예물은 준호와 승원이가 서로의 사랑을 약속하는 징표를 삼고 싶어 마련하는 정도로 따르기만 하고 싶습니다.
둘째는 결혼식준비와 결혼 후 두 사람이 살게 될 살림도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두 사람이 결정하며 양가 부모는 비용만 제공하는 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셋째, 두 아이가 공부하는 과정이니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여 뜻하는 바를 이루어 당당한 직업(교수)가 되면 세상을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경제력은 당연히 갖추게 될 것입니다. 양가에서는 큰돈을 들여 치르는 화려하고 빛나는 결혼식보다는, 추후 두 아이가 계속 공부하는 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일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
저의 제안을 두 분은 흔쾌히 승낙해 주셨습니다.
결혼준비
신부집에서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조심스레 신랑집에 예단으로 돈을 보내면 절반을 도로 신랑에 보낸다는 참으로 터무니없고 어이도 없는 예단은 나를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합니다. 신랑집에서 아들 장가간다고 친척들에게 선물을 돌리며 무슨 자랑할 일 있나요? 신랑집에서 신부에게 수백만원내지 수 천만원을 들여 다이아 반지를 하느니, 신랑에게 수 백만 원짜리 시계를 사준다느니 하는 예물도 나에게 고소를 금치 못하게 합니다. 요즈음 차지도 않는 비싼 시계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살아가면서 예쁜 귀금속 악세사리를 하나씩 구입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을 모르는 때문이지요. 경제가 넉넉해서 마음껏 돈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야 호텔에서 결혼식하고 비싼 선물하며 실컷 자랑하고 비싼 가구 마음껏 구입해도 되겠지만 우리네 서민들은 그러면 안되는 거지요. 부모님들을 너무 힘들게 해서도 안 되지만 설령 신랑신부 본인들이 벌어놓은 돈이라 해도 허례허식하면 안 되지 않나요?
◯예단 : 일체 거론하지 않게 되어 저의 역사에 하나의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습니다.
◯예물 : 두 사람의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가벼운 기념반지 정도는 할 줄 았았더니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구태여 하고 싶지 않고 또 사용하지도 않을 시계 같은 건 더더욱 필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사지 않았습니다.
◯폐백 : 이미 우리 승원이는 시댁의 어른들과 사촌들까지도 함께 식사도하고 인사를 마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폐백은 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신혼집 : 요즈음 풍속은 대체적으로 신랑집에서 아파트를 장만하면 신부집에서 그 평수에 맞게 일체의 살림가구를 장만하여 간다고 합니다.
신혼집은 신랑과 신부가 그동안 저축한 돈과, 양가의 경제력이 허용하는 선에서 보조해 주는 돈으로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신랑과 신부가 각자 마련한 살림도구들을 모으고 부족한 것만 구입하여 신혼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왔습니다.
전격 발표된 결혼인지라 준호집에서 미처 집 마련 준비가 되지 않았으나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퇴직하면서 마련한 작은 오피스 텔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도록 했습니다. 꼼꼼한 우리 승원이의 요구를 다 받아들이시며 건축업을 하시는 준호 아버지께서 전적으로 리모델링을 책임지고 해주셨습니다. 정사장님과 채여사님의 며느리 사랑이 대단하십니다.
◯결혼식장 : 나는 번잡하고 시끄러운 대형예식장 결혼식을 아주 싫어합니다. 우선 차를 주차하기 위해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또 대부분의 하객들이 결혼식을 보면서 축하하지 않고 혼주에게 인사하고 축의금만 내고 가버리거나 아니면 식사만 하고 돌아갑니다. 그래서 대학에서 하는 결혼식이 가장 부러웠고 교회나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식 결혼식도 매우 좋게 보아왔습니다. 성스러운 결혼식을 하면서 장난치는 모습들은 보기에 안타까웠습니다. 정중하고 조용하고 차분한 결혼식이 좋습니다. 우리는 양가 모두 특정 종교가 없으므로 당연 대학에서 치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재작년에 친구인 현수의 딸과 조카인 수빈이가 서울대에서 결혼식을 치른 바 있습니다. 나는 참석지 못했으나 친구인 송지사 큰 아들도 역시 서울대에서 치렀습니다. 서울대에 있는 네 군데의 결혼식장중 가장 멋진 예식장인 엔지니어하우스 라쿠치나로 결정되었습니다. 시간은 지방에서 축하객들이 비교적 여유롭게 다녀가시는데 가장 편안한 방법이 오후 예식이므로 자연스럽게 오후 5시로 결정되었습니다.
◯축하객 초대
나로서는 처음 치르는 大事입니다. 지금까지 40여년 간 우리 두 사람이 정말 많은 애경사에 다녀오고 축의금과 부의금을 내며 살아왔지만, 우리가 치르는 대사는 은퇴한 오늘의 시점에 맞추어 보다 신중하게 하객을 초대하기로 했습니다.
첫째, 그동안 상대의 애경사에 적어도 1회 이상 참석하였거나 축의금, 부의금을 보내드린 사람
둘째, 친인척(본가와 처가의 형제자매 및 조카 그리고 사촌이내, 시제를 함께 하는 8촌 이내 집안)
셋째, 현재 각종 모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
그동안 함께 근무했으나 잘 만나지 못하는 교사 및 관리직 동료들은 거의 제외했습니다.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동기동창회장을 맡고 있으나 애경사를 주고받은 친구들로 한정하였습니다. 앞으로 애경사 주고받는 사람들을 축소시키고 싶어서입니다. 그래도 예상외로 많은 지인들에게 모바일 초대장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초대장의 사진은 다른 사람들처럼 예복을 입고 웨딩촬영을 하지 않고 서울의 우리 작은 아파트 주변에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일상복을 입고 찍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이하며 멋있다는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서울에서 혼사가 이루어지므로 식장에 참석하는 친척 및 지인들을 모시는 버스를 대절하고 가시는 분들을 정해야 합니다. 일체 누구에게도 함께 가주시라는 부탁을 하지 않기로 했지만 무려 70분이 두 대의 버스로 상경하여 주셨습니다. 친척은 14명이어서 56명은 두 사람의 지인들입니다. 특히 우리 두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해우회원들은 전 회원과 여러 사모님들까지 참석해 주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결혼식 참석을 위해 하루를 소비하며 서울까지 상경해주시는 일은 대단히 지난한 일입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들을 위한 최고의 간식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우리는 전날 상경하므로 1호차(가족 친척 동창회 기타 나의 지인들)는 유지득 교육장이 반장을 맡고, 2호차(모임회원들 및 양선생 지인들)는 김호길 교감이 반장이 되어 애써주셨습니다. 존경하는 은정표 교장선생님과 내가 좋아하는 후배인 조병호 전북학생해양수련원장님, 이재호 익산문화원장님. 이당 송현숙 선생님께서도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습니다. 이당선생님은 서울 결혼식장에 가면서 그처럼 질서 있고 조용한 버스분위기는 처음이라며
??역시 교육자들이구나?라고 생각되었어요.?라 하시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결혼식
결혼식장에 신부 측 축하화환이 두 개가 섰습니다. 하나는 조병호 원장이 보낸것이고 또 하나는 고등학교 서울동창회장인 최인호 회장이 보낸 것입니다. 나는 화환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인데(서울과 달리 지방에서는 결혼식장 화환문화가 거의 없다.) 체면을 세워준(?) 두 사람이 너무 고맙습니다. 우리 측 손님이 무려 180명이 오셨습니다. 상견례 때만 해도 나는 60여명으로 말씀드렸고 이후 80여명까지 예상했습니다만, 점점 버스 상경객이 늘어나는 바람에 최대 130여명까지 늘려 잡았는데 이게 웬 일입니까? 제가 세상을 꽤나 잘 산 듯싶습니다.
대략 친척들 50여명, 나의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동창들 40여명, 나의 지인들 40여명, 양드리 지인과 친구들 20여명 승원이 친구들 25명. 제 오빠 친구들 5명입니다. 정권영 교장님, 신기섭 선생님, 최병은 선생님 부부, 김예원 교장선생님 부부는 예고 없이 축하객으로 나타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서울의 고등학교친구들은 내가 평소에 애경사를 잘 챙기지도 못하는데 명색이 회장이라고 많이들 와주어서 고맙기가 짝이 없습니다.
미리 결정된대로 나와 정사장님이 촛불을 밝혔습니다. 아빠들이 촛불 밝히는 것은 나도 처음입니다. 사회는 준호군의 지인인 여성 아나운서가 봅니다. 여성사회자는 또 처음입니다. 그리고 준호와 승원이가 손을 잡고 입장했습니다. 나는 결혼하여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도 여전히 나의 사랑하는 내 딸이므로, 아빠가 딸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사위에게 넘겨주는 형식을 거부했습니다. 이것은 요즈음 가끔씩 보이는 장면입니다. 주례는 정준호를 지도하시는 서울의대 김옥주 교수께서 해주셨습니다. 준호를 아들처럼 사랑하시고 우리 승원이까지 딸처럼 대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성주례는 거의보지 못한 모습입니다. 아들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엄마들이 연출하였습니다. 양드리가 시적 형태로 먼저 쓰고, 채여사님의 의견을 보충하여 완성된 글을 두 사람이 교차하며 읽었습니다. 후일 대단한 찬사를 많이도 받았습니다. 축가는 서울음대 졸업생들로 보이는 남성4중창단이 해 주었습니다. 결혼식 내내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러운 표정과 행동으로 마냥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승원이의 예쁘고 의젓하고 지성적인 모습과 미소에 아빠인 나도 반했습니다. 상식과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결혼식에 참석자들이 놀라움을 표시하며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정말 자랑스럽고 행복한 결혼식이었습니다.
에필로그
폐백이 없는 덕분에 시간이 절약되었는데도 양가 부모와 신랑신부가 함께 식당에 계시는 축하객들을 찾아 일일이 인사를 하고 나서 식사를 하려니 버스 출발시간이 겨우 20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식사는 생략하고 사무실에서 바삐 결산처리를 한 뒤 급히 버스에 올랐습니다. 상경하신 분들을 위해 반드시 7시 출발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1호차와 2호차를 번갈아 타며 감사인사를 올렸습니다.
?친척, 친구, 지인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멀고도 긴 시간 서울 결혼식에 참석하여 축하하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이라서 여간 정성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평소에 우리 아이들의 결혼식에 버스동행하여 참석해주시는 분들이야말로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분들이라는 생각을 깊게 해 왔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이야말로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분들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모두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너그러이 예단과 예물 그리고 폐백까지 생략하는 나와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해주셔서 아이들이 결혼준비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사돈 내외분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결혼식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통한 우리 양가의 어른들이므로 장차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함께 도와주는 일에 협력을 잘 하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정준호와 이승원은 강의를 시작하고 우리는 김장을 마치고 시골집을 찾으며 열심히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24일 : 전북서예전람회
서가협회가 주최하는 전북지역 행사입니다. 소리문화의 전당 전시실에서 시상식이 있고 전시회가 시작됩니다. 이제 서예초보인 내가 특선을 하여 상을 받으니 쑥스럽지만 여송 김계천 선생님의 위치와 체면을 생각하여 회장님과 함께 상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여지 것 취미생활로만 생각하고 즐기던 방식을 벗어나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좀 진지하게 서예에 임하게 될 듯싶습니다. 계속 연마하여 특선을 계속하면 언젠가는 나도 우수상까지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농담입니다.
시상식 후 전북예술회관으로 가서 전국서예문인화명인전을 감상하였습니다. 전국적으로 이미 대가 반열에 오른 서예 및 문인화작가들의 작품들이라 눈여겨 볼 만합니다. 전북지역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이당 송현숙 선생님 작품만 전시되었습니다.
28일 : 익산문화원 발전을 위한 심포지움
원광대 숭산기념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재호 원장이 원광대 산학협력단, 지역발전연구소 등과 협력하여 개최되었습니다. 우리 문화원 가족 150여명이 회의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2시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제1주제는 나종우 전라북도 문화원연합회장이 ‘지역문화의 발전을 위한 문화원의 역할’에 대해, 제2주제는 이정호 원광대학교 지역발전 연구소 연구교수가 ‘익산문화원의 현황 및 발전방안’에 대해 발표를 했습니다.
우리 문화원 가족들에게도 문화원의 현재 모습과 문제점, 그리고 앞으로의 발전방향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어, 좌장 김성봉 원광대학교 교수가 진행한 종합토론은 제1주제에 대해 박종대 익산시의원과 김형훈 익산시 문화관광과장이, 제2주제에 대해서는 유은미 함해국 대표와 박봉수 시민과 사회 대표가 각각 토론을 벌였습니다.
익산문화원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이재호 원장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가 판단한 대체적으로 결론지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전통문화를 보존 계승 발굴하는 일과 회원제를 통한 동아리 활동은 병행되어야 한다.
둘째, 시에서 지원하는 예산을 더 늘려야 하고, 아울러 자체적으로도 재정충원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평생회원제, 후원회원제 등)
셋째, 운영은 전문위원이나 자문위원 중심으로 이루어져한다. (지금까지의 이사들 중심의 운영은 그 누구도 일체 말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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