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신경 :(申炅 1613-1653)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용회(用晦), 호는 화은(華隱). 할아버지는 영의정 신흠(申欽)이고, 아버지는 동양위(東陽尉)신익성(申翊聖)이며, 어머니는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이다. 김집(金集)의 문인이다.
1635년(인조 13)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던 아버지의 뜻이 꺾이자 벼슬길을 단념, 태안의 백화산(白華山)으로 내려가 학문에 몰두하였다.
1643년 척화오신(斥和五臣)으로 지목되어 청나라에 붙잡혀갔던 아버지가 풀려나 이듬해 죽자 서울로 돌아왔다가 1652년에 다시 강릉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죽었다. 설화문학에 조예가 깊고 복서(卜筮)· 성력(星曆)· 산수(算數) 등에 해박하였다.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나라를 지켜 다시 세우다)』가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신경(申炅)이 임란전후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와 조선이 명나라의 후원으로 재조(再造)·재건된 사실을 적은 책.4권 4책. 1577년(선조 10)부터 1607년까지의 임진왜란 전후 30년 동안에 걸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아들 이화(以華)가 1693년(숙종 19)에 영천군(榮川郡)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앞에 인용서목 32종이 적혀 있으며, 이어 적당한 분량으로 분권되어 있다. 저자의 저술태도는 자신의 견해를 근거 없이 첨부하지 않고 다른 기록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내용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때의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를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러나 책을 펴낸 의도는 명나라가 조선에 베푼 휼소(恤小)의 은혜와 선조의 사대지성(事大之誠)을 기리는 데 있으며 읽어보니 왜란의 전말을 파악하는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다.
재조번방지 1(再造藩邦志 一)
□천자는 우리나라가 예의를 숭상하고 문학을 좋아하며 풍속이 중국과 비슷함을 가상히 여겨 무릇 큰 경사나 큰 예식이 있을 때는 특히 한림학사 행인급사중(翰林學士行人給事中)이나 혹은 중귀인(中貴人)을 파견하여 칙서(勅書)를 내려 자주 치하하였고, 우리나라 사신이 입조(入朝)하면 내지[內服]와 똑같이 여겨 특별히 예우하고 반차(班次)는 매양 여러 나라의 우두머리에 두었다.
□서울에 도착하게 되어 잔치를 베풀어 접대하는데, 예조 판서가 압연(押宴)하였다. 술이 얼근히 취하자 강광이 호초(胡椒 후추)를 잔칫상 위에다 흩어 놓으니 기생과 악공들이 다투어 가지려고 야단법석이었다. 강광이 자기가 묶는 여관으로 돌아가 탄식하면서 통역관들에게, “너희 나라는 망한다. 기강이 그렇게 문란하고는 망하지 않을 수 있느냐?”하였다. 강광이 돌아가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서계(書契)만 보내고 물길에 익지 못하다 하여 사신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 정해년(1587, 선조 20) 손죽도(損竹島)의 싸움 때 우리 나라 변방의 백성을 잡아가고도, 감히 와서 강화를 요구하니, 사신을 보낼 수 없는 이유의 하나라고 말하였다. 강광(康光)이 돌아가서 수길에게 보고하니, 수길은 크게 성내어 강광을 죽이고 그의 가족도 죽여버렸으니, 그것은 우리나라를 위한(?) 때문이었다.
□그가 서울로 올라오자 서울 안의 남녀들은 그를 구경하려고 성안으로부터 한강까지 사람들이 마구 몰려들어 동네가 거의 빌 정도가 되니, 식자(識者)들은 이를 괴상히 여겼다. 이에 왕은 또 2품 이상의 관원에게 명하여, 통신사를 보낼 것인가에 대하여 의논하게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 중에 대부분이 통신사를 보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예조 판서 유성룡(柳成龍)이 그 의논을 적극 주장하고, 전 참판 이산보(李山甫)는 통신사를 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호조 판서 윤두수(尹斗壽)는 자세한 것을 중국 조정에 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여 의논이 오래도록 결정되지 않았다. 그때 이조 정랑 이덕형(李德馨)은 선위사(宣慰使)로 있었는데, 조정에서 이덕형으로 하여금 평의지(平義智)에게 만약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을 쇄환(刷還)한다면 통신사 파견문제를 의논하겠다 하여, 우선 그들의 성의(誠意) 여부를 살펴보게 하였다.
평의지는,
“그것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하고, 곧 평조신(平調信)을 보내어 본국으로 가서 알리도록 하였다. 그 후 몇 달 안되어 우리 나라에서 붙잡혀 간 변방의 백성 김대기(金大璣)ㆍ공대원(孔大元) 등 1백 16명을 모두 돌려주고, 또 반란민 살배동(乷背同) 및 정해년(1587, 선조 20)에 쳐들어왔던 왜적 긴시요라(緊時要羅)ㆍ삼보요라(三甫要羅)ㆍ망길시라(望吉時羅) 등의 3인도 포박하여 보내 와서 말하기를,
“침범한 일에 대하여는 나는 모르는 바입니다. 귀국의 반란민 살배동(乷背同)이 5도(五島)의 일본 사람을 유혹하여 귀국의 변방을 공격했었다고 하니 포박하여 보냅니다.”
하였으니, 간곡히 통신사를 보내달라는 뜻이었다. ...이에 조정 의논이 비로소 결정되어 사신으로 보낼 만한 사람을 고르는데, 대신들이 첨지(僉知) 황윤길(黃允吉)을 정사(正使)로, 사성(司成)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로, 전적(典籍) 허성(許筬)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경인년(1590, 선조 22) 봄에 떠나게 하였다. 그리고 공작새는 남양(南陽)의 섬 안에 놓아 주게 하고 조총(鳥銃)은 군기시(軍器寺)에 보관하도록 명했다.
□왕께서도 조헌은 한단(邯鄲)의 흑생(黑眚)이라 하고 길주(吉州)로 귀양을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 또 이런 상소를 올리니, 세상에서 대부분 그를 이상히 여겼다. 이보다 앞서 정여립(鄭汝立)이 바야흐로 명성을 날릴 때 온 조정이 그에게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조헌은 ‘저 정여립의 인간됨이 흉악하고 교활하므로 반드시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하더니, 얼마 안되어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그래서 호남의 선비 양산숙(梁山璹) 등이 상소하여 조헌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왕이 드디어 전리(田里)에 방환(放還)하게 하였는데, 조헌은 문을 닫고 자취를 끊고 출입을 하지 않았다.
□경인년(1590, 선조 23) 3월에 황윤길(黃允吉) 등이 평의지(平義智)와 함께 서울을 출발하였다. 4월에 부산포(釜山浦)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한 달을 묵었는데, 어느날 평의지가 우리 사신들을 청하여 어떤 절 안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래서 우리 사신들이 먼저 가서 자리에 앉았는데, 평의지가 가마를 타고 문으로 들어와 뜰 아래에 닿았다. 이에 김성일(金誠一)이 화를 내어,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우리 나라의 번신(藩臣)이요, 우리 사신이 왕명을 받들고 여기에 왔는데, 어찌 감히 이처럼 우리를 업신여기는가. 나는 이런 잔치는 받지 않겠다.”
하고, 곧 일어나 나갔다. 황윤길 등도 뒤이어 일어나 나오니 평의지는 가마군에게 허물을 돌려 가마군을 죽여 머리를 베어 바치며 와서 사죄하였다. 그로부터 왜인들은 공경히 예법대로 대접하고 바라보기만 해도 곧 말에서 내렸다. 황윤길 등은 또 대마도로부터 바닷길로 40여 일을 가서 일기도(一岐島)에 도착하고 박다주(博多州)ㆍ장문주(長門州)ㆍ낭고야(郞古耶)를 거쳐 7월 25일에 비로소 일본 국도(國都)에 도착했다. 대개 왜인들이 일부러 가는 길을 빙빙 돌고 또 곳곳에서 머물게 했으므로 여러 달이 걸린 것이다. ...
그 답서는 이러했다.
일본국왕 수길은 조선국왕 전하에게 국서를 바칩니다. 보내 오신 글을 삼가 재삼 읽었습니다. 본국이 66주(州)가 있기는 하나, 근년 이래로 여러 나라로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문란케 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폐기하여 조정의 정령(政令)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격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3~4년 사이에 반신(叛臣)을 토벌하고 역도(逆徒)를 정벌해서 이국(異國)의 먼 지역까지도 모두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적은 비루한 소신(小臣)이었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나를 잉태할 때에 나의 어머니는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므로 관상쟁이가 말하기를, ‘햇빛은 두루 비쳐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장년(壯年) 때에는 반드시 천지 팔방에 인풍(仁風)을 드날리고 사해에 위명(威名)을 떨칠 것이니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때문인지 기이한 점이 있어, 적이 되려고 마음을 먹은 자는 자연히 멸망되고, 싸우면 이기지 못하는 일이 없고 공격하면 빼앗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천하를 크게 다스려 백성들을 양육하고 고아와 과부를 구휼했으므로 백성들은 잘 살고 재물은 풍족해져서 각 지방에서 바치는 공물(貢物)이 옛날보다 만 배나 됩니다. 본조(本朝)가 개벽(開闢)한 이래 조정의 성사(盛事)와 낙양(洛陽 수도)의 아름다움이 오늘과 같은 적은 없었습니다. 대개 인생이 세상에 태어나서 비록 오래 산다고 하더라도 예부터 백년을 채우지 못하는 것인데, 어찌 답답하게 여기 일본에 오래 머물러 있겠습니까? 나라가 멀고 산하(山河)가 가로막혀 있을지라도 한 번 뛰어 대명국(大明國)으로 들어가 우리 나라 풍속을 중국 4백 주(州)에다 바꾸어 놓고, 황제의 조정에서 억만 년토록 정치를 행하는 것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귀국이 먼저 앞장서서 우리 조정에 입조(入朝)한다면 장래의 희망이 있고 가까운 근심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 곳의 바닷 속에 있는 작은 섬들의 뒤처진 무리들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국(大明國)으로 들어가는 날에 귀국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군영(軍營)을 바라본다면 더욱 이웃간의 동맹을 이울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아름다운 이름을 삼국(三國)에 남기는 것뿐입니다.”
김성일 등이 이 답서를 보고서,
“이런 내용으로는 우리 국왕에게 보고할 수가 없다.”
하고, 행장(行長)ㆍ평의지(平義智)ㆍ현소(玄蘇)에게 두세 차례 글을 보내 마침내 다시 고쳐 왔다. 그 답서는 이러했다.
일본국 관백(關白)은 조선국왕 전하께 국서를 바칩니다. 보내 오신 글을 삼가 재삼 읽었습니다. 나의 요청을 들어주어 세 사신을 보내 주시니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우리 나라 66주(州)가 근년에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법이 없어진 채 조정의 명령도 듣지 않으므로 내가 격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3~4년 동안에 반신(叛臣)을 토벌하고 역적들을 무찔러 모든 이국(異國)들까지도 모두 내 손아귀로 돌아왔습니다. 인생이 비록 오래 산다고 하나 예부터 백년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여기에만 답답하게 오래도록 머물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멀고 산하가 가로막혀 있을지라도 한 번 대명국으로 건너 뛰고 싶습니다. 바로 그때 귀국이 이웃간의 의리를 중히 여기어 우리 나라와 한 패가 되어 준다면 선린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황윤길 등이 이런 글을 받은 후에야 떠났다. 그리고 여러 왜가 준 물건들은 모두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신묘년(1591, 선조 24) 3월에 부산으로 돌아와서 그간의 사정을 치계(馳啓)하여,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복명(復命)하고 나서 왕이 인견하여 물으니, 황윤길은 처음과 같이 대답했으나, 김성일은,
“신은 이런 망극한 징조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황윤길의 말을 인심을 동요시키는 것으로서 옳지 않다고 하니, 유성룡(柳成龍)은 김성일의 주장을 지지했다. 이에 의논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는 황윤길을 지지하고 어떤 이는 김성일을 지지하여 의논이 분분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또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당론이 갈리어 겉과 속으로 각기 자기의 무리를 보호하는데 서장관 허성(許筬 1548-1612 허균의 형)만은 말하기를, ‘왜놈이 반드시 쳐들어 올 것이다.’ 하니, 그의 친구인 한준겸(韓浚謙)이 그 까닭을 물으니, 허성은,
“우리들이 일본에 가서 보니, 곳곳의 성지(城池)에는 병들고 나약한 군사들만 있으니, 이는 평성(平城)의 옛 지략이오.”
하였다. 당시 허성은 당론(동인)을 두둔하지 않는다 하여 훌륭하게 여겼다. 평조신(平調信)과 현소(玄蘇)도 통신사 일행을 따라 함께 왔었다. 조정에서는 전한(典翰) 오억령(吳億齡)을 선위사(宣慰使)로 삼았다. 오억령은 현소와 서로 만났는데, 현소가 처음에는 자못 오만하여, 시 한 수를 지어 오억령에게 화답을 요구하였다.
오억령이 즉석에서 그 운자에 맞추어 지으니, 현소가 탄복하고는 다시 공손해졌다. 오억령은 현소가 분명히 ‘명년에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곧장 중국을 침범한다.’ 하므로, 오억령은 들은 내용을 곧 갖추어 왜국이 반드시 쳐들어 올 것이라고 빨리 아뢰었다. 그때 나라의 정무를 맡은 자들은 편벽되게 들은 것만 주장하여 왜병이 반드시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왜국의 물정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자들은 번번이 일부러 일을 만들어내는 자들이라고 논박하였다.
□신립이 본디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소문이 있고 간 곳마다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니 수령들이 겁을 내어 백성을 징발하여 길을 닦고 공장(供帳)이 극히 사치스러워 비록 대신의 행차라도 이보다 못하였다. 이미 복명하고 나와서 대신을 보고 일을 의논하고, 4월 초하룻날에 또 유성룡(柳成龍)의 집에 이르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조만간 변란이 있게 되면, 공이 마땅히 맡게 될 것이요, 공의 생각에는 오늘날의 적세(敵勢)가 어떠하오?”
하니, 신립이 심히 일본을 가볍게 보아 걱정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오. 전일에는 왜(倭)가 단병(短兵)만을 믿었는데 지금은 겸하여 조총(鳥銃)의 장기(長技)가 있으니 경시해서는 안되오.”
하니, 신립이 얼른 말하기를,
“비록 조총이 있다고 하나 어찌 다 맞추리오.”
하였다. 유성룡이 말하기를,
“국가가 평화를 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사졸이 겁내고 약하니 만약 급한 일이 있다면 사세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오. 나의 생각으로는 수년 뒤에 사람들이 싸움에 익숙하여지면 혹 수습할 수 있겠으나 처음에는 알 수 없으니 나는 매우 걱정되오.”
하였으나, 신립은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하직하고 나아갔다.
□4월 26일. 신립이 충주에 이르렀는데 군사가 겨우 수천 명이었다. 단월역(丹月驛)에 진을 쳤는데, 이일ㆍ변기(邊璣)로 선봉을 삼아서 공을 세워 속죄하게 하였다. 김여물이 신립에게 말하기를,
“적세가 극히 크니 교전하기는 어렵습니다. 조령은 천험(天險)이니 만약 굳게 지키지 아니하면 적에게 점령당하게 될 것이니 나아가 조령에 이르러서 산중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적이 골짜기에 들어오기를 기다려 양쪽 언덕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고 쏘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고 만약 그 칼날을 당하지 못하겠다면 물러나 들어가 경성을 호위하는 것도 또한 한 가지 계책입니다.”
하니, 신립이 말하기를,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에 맞아 들이어 철기(鐵騎)로써 치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신립이 김여물의 계책을 쓰지 아니하고 험한 곳을 버리어 지키지 아니하고 호령이 번거로우니 보는 자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적이 이미 조령길을 경유하여 몰래 행군하여 들어와 성중에 이르렀으나, 신립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적이 처음에 조령 밑에 이르러서는 매복이 있을까 겁을 내어 사람을 시켜 엿보고 정탐한 뒤에야 군사 없는 것을 알고 춤을 추며 지나왔다.
친애하고 신임하는 한 군관(軍官)일가 조카. 이 있어 가만히 고하기를, ‘적이 이미 영을 넘었습니다.' 하니, 신립이 그를 거짓말로 여러 사람을 의혹시킨다 하여 끌어내어 베고, 장계에는 오히려,
“적이 상주를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고, 적병이 이미 성중에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5월 3일. 새벽에야 경성이 실로 이미 빈 줄을 알고 드디어 성중에 들어왔다. 선비와 백성들이 달아나 피난갔던 자들이 얼마 후에 도로 모여 방리(坊里)와 시장이 여전히 가득차서 왜적과 더불어 서로 섞여 사고 팔았다. 왜적이 정예한 군사를 많이 내어 사대문을 굳게 지키면서 우리 백성으로 적의 첩(帖)을 가진 자는 출입을 금하지 아니하니 이에 복종하고 첩을 받아서 감히 어김이 없으며, 또한 적에게 아첨하고 친하여 앞잡이가 되어 못된 짓을 한 자가 있었으니 예빈사 서원(禮賓寺書員) 박수영(朴守英)과 같은 무리는 적보다 더욱 심하여 성중의 사람이 만약 적을 죽이려고 꾀하거나 내응을 하려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박수영의 무리에게 고발을 당하여 종루(鐘樓) 앞과 숭례문(崇禮門) 밖에서 불태워 죽여서 참혹함을 극히 하여 위엄을 보이니 백골이 그 밑에 무더기로 쌓였다.
재조번방지 2(再造藩邦志 二)
□경상 우수사 원균은 적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서 감히 출격하지 못하고, 전선 백여 척 및 화포(火砲)와 군기를 바다 속에 다 던지고 수하의 비장(裨將) 이영남(李英男)ㆍ이운룡(李雲龍) 등을 거느리고 네 척의 배에 타고 곤양(昆陽) 해구(海口)로 가서 육지에 올라 적을 피하고자 하니, 수군 만여 명이 모두 흩어져서 수습할 수 없었다. 이영남(李英男)이 간언하기를,
“공이 왕명을 받아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나갔다가 후일 조정에서 죄를 내릴 때 어떻게 해명하겠습니까? 전라도에 청병하여 적과 한번 싸워 이기지 못한 뒤에 도망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원균이 옳게 여기고 이영남(李英男)을 시켜 이순신에게 가서 청병을 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각기 분계가 있는데 만약 조정의 명령이 없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월경(越境)할 수 있겠는가.”
하고 사절하였다. 원균이 다시 이영남을 보내어 청하기를 무릇 오륙 차나 왕래를 하였다. 이영남이 다녀올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서 멀리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재조번방지 3(再造藩邦志 三)
□9월 총병이 마침내 군사를 철수하여 돌아갔다. 이때는 큰 병란의 나머지라 기근이 겹쳐 들어서 백성들이 흔히 자식을 바꾸어서 잡아 먹고 사람을 죽여서 서로 씹어 먹을 정도였으며, 구렁에 굶어죽은 시체가 쌓이는 것이 하루에도 천여 구가 되었는데, 유 총병이 오랫동안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봉(自奉)이 심히 간략하였고, 또 백성과 군사들이 굶어 죽는 것을 측은히 여겨 법령을 군중(軍中)에 내리고 남은 쌀이 있는 것은 모두 우리 백성에게 매매하게 하여 식량의 밑천을 마련해 주어 백성들이 힘입어 생활하였다.
이 때에 왜장 소서비 등이 명나라 서울에 있은 지 이미 오래라 화친을 청함이 더욱 굳건하였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이에 많은 관원을 대궐 아래 모이게 하여 회의를 하고, 인하여 소서비를 끌어들여 통역을 시켜 말을 전하여 세 가지 일을 요구했는데, 하나는 군사가 모조리 바다를 건너 제 나라로 돌아가고 한 명의 군사도 부산에 머무르지 아니할 것, 하나는 다만 봉(封)에 대한 것만 구하고 공(貢)을 요구하지 않을 것, 하나는 영구히 조선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다. 이 약속과 같이 한다면 봉을 허락할 것이요 약속대로 하지 아니하면 허락할 수 없다 하니, 소서비는 하늘을 가리켜 맹세를 하며 영원히 약속을 준수하겠다고 청하므로, 병부는 황상께 아뢰니, 황상은 다시 병부에 유시하여 동궐(東闕)에게 자세히 정하게 하였다. 때는 12월 20일이었다.
재조번방지 4(再造藩邦志 四)
□○ 그때에 황신(黃愼)이 부산(釜山) 왜영(倭營)에서 국서(國書)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역관(譯官) 이유(李愉)와 박대근(朴大根)을 시켜 국서와 예물을 받들고 가게 하니, 성주(星州)에 이르자, 부사(副使) 박홍장(朴弘長)도 성주로부터 국서와 함께 부산에 이르렀다. 황신 등이 중간 지점에 나가서 공경히 맞이하여 부산에 들어오자, 왜영의 장수 평조신(平調信)과 사고안문(沙古雁門) 등도 5리나 가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 병신년(1596, 선조 29) 8월 4일. 저녁에 배를 타고 평조신과 같이 대마도(對馬島)로 향하였다.
○ 10일. 대마도 부중포(釜中浦)에 도착하였는데, 도주(島主) 평의지(平義智)와 평조신의 집이 다 그곳에 있다. 평의지는 자기 나라의 국도(國都)에 가 있었으므로, 평조신이 사신 일행을 인도하여 평의지의 객사에 들었다. 객사는 평의지의 집과 겨우 3리 되는 가까운 곳인데, 가사(家舍)가 그다지 화려하지는 못하나, 아주 정결하여 한 점의 티도 없으며, 돗자리는 모두 깁과 비단으로 단을 박고, 석린(石鱗)과 능화(綾花) 무늬의 벽지로 도배하고, 창호(窓戶)는 동석(銅錫)으로 장식하였다. 섬 안의 우두머리인 왜인들이 다 외청(外廳)에 와 있어, 모든 접대하는 예절에 공경을 지극히 하였으며, 음식은 다 우리 나라 것을 모방하여 흰 사발에 흰 죽을 담고 놋 뚜껑을 덮고 수저를 놓아서 올리는 것이었다. 평의지의 아내가 사람을 시켜서 사신에게 말을 전하기를,
“주인이 없을 때에, 큰 손님이 오시니, 아낙들만 있어서 접대하는 예절이 꼴이 아닙니다. 마음에 매우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도주의 아내는 평행장(平行長)의 딸인데, 집안을 잘 다스리며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베풀므로, 섬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다. 섬에 사는 늙은 왜인들이 모두 우리 나라의 은혜를 많이 느껴, 사신에게 와서 뵙고 옛일을 말하였는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고, 그 외에 여러 왜인들도 우리 나라의 옛일을 많이 이야기하며 잊을 수 없다고 하니, 우리 나라를 침범한 것은 본래 여러 왜인들이 기쁘게 여겨서 한 것이 아니다. 심유경(沈惟敬)의 중군(中軍)으로 이(李)가 성을 가진 자도 명 나라 황제의 고명(誥命)과 칙서(勅書)를 받들고 이 섬에 와 있으면서 우리 나라 사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19일. 낭고야(郞古耶)에 도착하였는데, 곧 관백(關白)이 병정을 점검하는 곳이다. 산위에 성을 쌓고, 성밖에는 삥 둘러 구덩이를 파고서 바닷물을 끌어들여 그 구덩이에 채웠으며, 성안에는 5층 대(臺)를 쌓아올려, 그 만듦새가 극히 정교한데, 이는 왜장(倭將) 정성(正成)의 진영(鎭營)이다. 이때에 정성은 국도(國都)에 가 있고, 그 부장이 대신 지키고 있었다. 사신들의 탄 배가 처음 정박할 때에 갯가를 바라보니, 우리 나라 여인이 자주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고 서 있었다. 일행이 모두 주목하여 보았으나 어떤 사람인지 몰랐는데, 가까이 가게 되어 물어보자,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유 정승(兪政丞)댁 여종으로 왜인에게 잡혀와서 있었는데, 중국 사신 밑에 있는 사람이 은(銀)을 치르고 이곳에 저를 데려다두고, 왜경(倭京)에 갔습니다.”
하니, 상하(上下)가 그를 보고 옛 친지를 만난 듯이 반겼다.
□○ 13일. 황신(黃愼) 등이 수도도(水途島)에서 배로 떠나 우창지로 향하였는데, 중국 사신이 왜국 수도에 먼저 가 있었으므로 차관(差官) 왕륜(王倫)을 보내어 중도에서 맞이하고, 왜장 평행장(平行長)ㆍ정성(正成)ㆍ평의지(平義智)ㆍ아리마(阿里麻) 등이 저마다 부장(副將)을 보내어 와서 맞이하여 배에서 내려 본련사(本連寺)에 가서 유숙하였다. 이곳에도 잡혀온 우리 나라 여자가 있어, 왜인 아이를 시켜 글을 보내왔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조선국 사신 일행께 공경히 글을 올립니다. 저는 전 영천 군수(榮川郡守) 김모(金某)의 딸인데, 처음 왜란이 났을 때에 적에게 잡혔으되 죽지 못하고 질긴 목숨이 오늘날까지 이미 5년을 끌어왔습니다. 이제까지 욕을 참고 죽지 않는 뜻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니 꼭 한번 만나보고 이 같은 슬픔을 다 털어놓은 뒤에 죽었으면 한이 없겠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매양 이러한 심정을 주인 왜(倭)에게 간곡히 빌었더니, 그도 이미 허락하였습니다. 이제 다행히 사신 행차가 마침 이때에 이곳에 오셨으니, 이는 하늘이 돌아갈 길을 터주신 것이며, 곧 제가 재생할 기회입니다. 만번 바라건대, 여러분께서 저의 슬픈 정상을 불쌍히 여기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데려가 주신다면 사포(沙浦)에 나가서 기다리겠으며, 혹시 중도에서 좇아가 만날 수도 있겠습니다.”
왜인 아이가 이 편지를 올리면서 말하기를,
“김씨가 날마다 울면서 주인에게 본국에 돌아가서 죽게 해달라고 청하니, 주인도 역시 슬프게 여기고 저를 시켜 이 편지를 전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데려가신다면 주인이 돌려보낼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니, 정사(正使)가 역관으로 하여금 답장을 쓰게 하여 데려갈 뜻을 일렀다.
□그때에 또 사로잡혀 온 우리 나라 부녀 7명이 오사포(五沙浦) 왜장(倭將) 중세(重世)의 집에 있으면서 각기 편지를 보내왔다. 그중 한 장은 곧 서울에 살던 사대부 집안의 딸의 것인데, 사연이 처절하며 사리에 통달하였으나, 그 죽지 못하고 그 몸을 욕되게 하였으니 아까운 일이다. 그 편지는 이러하였다.
“저는 아무 고을 아무 마을에 사는 성은 아무이며 이름은 아무인 자의 딸입니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부모를 따라 피란하였는데, 부모는 매양 저의 손을 잡고 울면서 ‘내가 죽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으나 우리 딸을 어쩔거나?’ 하고는 마주앉아 통곡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비록 입으로는 말하지 못했으나 속은 도려내는 것같았으며, 속으론 생각하기를, ‘살아서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할 것이라면, 어찌 빨리 죽지 않고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랴?’ 하였더니, 뜻밖에 적병이 산골짜기를 더욱 급하게 수색하여, 저와 부모는 각기 달아나 숨었는데 하루아침에 독수(毒手)에 잡혀서 스스로 죽지 못하였고, 서로 헤어진 뒤로는 영영 끊어졌으니, 소식인들 어찌 통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여! 하늘이여! 저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저로 하여금 이처럼 애통하고 처참하게 합니까? 부모가 죽었으면 그만이지만, 혹시라도 지금까지 살아 계신다면, 그 연모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어느 때인들 그치겠으며, 천지간에 어찌 이처럼 애통하고 가엾은 일이 있겠습니까? 남의 나라에 붙들려 있은 지 이제 다섯 해인데, 구차히 목숨을 보존하고 스스로 죽지 못하는 것은, 다만 살아서 고국에 돌아가서 우리 부모를 다시 보려는 것, 오직 이 희망뿐입니다. 부모가 이미 돌아가셨다면 부모가 살던 집이라도 한번 봤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나 밤마다 달이 밝을 때는 하늘을 향하여 축원하며 해와 달을 향하여 기도하면서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서 다시 우리 부모를 뵐 수 있을까? 부모는 지금 어느 곳에 계실까? 이때 부모께서 나를 생각하는 정은 반드시 내가 부모를 사모하는 정과 같을 것이다. 하늘이 반드시 나의 이 뜻을 살펴주신다면 어찌 살아 돌아가서 만나뵐 때가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지금 들으니,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되어 통신사(通信使)가 명 나라 사신을 따라서 이 땅에 오셨다고 하니, 이는 내가 다시 살아나는 날이며 하늘의 뜻이 과연 사람의 정을 이루어 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구출하여 주시는 은덕을 입어 우리 고향에 돌아가서 부모와 만나보게 된다면 이는 참으로 나를 낳아준 은혜와 다름이 없으며, 제가 비록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 섬길지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가 없겠습니다. 또 들으니, 사로잡혀 온 사람이 이번 사신의 행차에 따라서 돌아가는 자가 많다 합니다. 저는 하나의 버림받은 인간이므로, 고국에 돌아간다 할지라도 반드시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부모를 한번 만나보는 것이 소원이니, 그뒤에는 바로 죽어도 마음이 달갑겠습니다. 다행히 저의 불쌍한 정상을 살펴주시기를 천만번 바라는 바입니다.”
□왜적이 두 번째 침입할 때에 관백 수길(秀吉)이 임진년에 진주(晉州)에서 패전한 것을 분하게 여겨 모든 우두머리에게 명령하되, 바다를 건넌 후에 우리 나라의 남녀를 사로잡아 코도 베어 소금에 절였다가 말[斗]과 섬[石]의 분량으로 바치라 하였는데, 수길이 조사해 본 뒤에 그 나라 북녘 들 대불사(大佛寺) 근방에 버려 큰 언덕을 만들게 하니, 이는 극히 악랄한 짓을 마음대로 하여 위엄을 세우려고 하기 위해서였다. 또 우리 나라 사람을 많이 써서 길잡이로 삼았는데 그중에는 본국을 사모하는 자도 더러 있었으니, 임피(臨陂) 사람 박춘(朴春)같은 자는 재인(才人 남자무당)으로서 스스로 의병에 모집되어 금산(錦山)에서 싸우다가 적에게 사로잡혀 오랫동안 적진 중에 있으면서 공을 쌓아 장수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와서 적의 선봉이 되어 군사 천여 명을 거느렸는데 박춘이 전라도로 향하기를 원하였으니, 그 뜻은 예전에 살던 곳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여기 저기서 싸움하다가 곧바로 임피 옛집에 이르러보니, 이미 거친 빈터가 되었으므로, 박춘이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언서(諺書)로 그 주춧돌에 쓰기를,
“나는 이 집 주인 박춘이다. 적이 나에게 천 명의 군사를 주어 선봉이 되게 하였으므로 내가 이로 인하여 본국으로 투항하여 돌아오려 한다.”
하고, 마음속에 한 가지 계교를 생각하기를, ‘내가 우리 나라 사람으로 포로로 잡혀 왜병이 된 사람을 영솔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내가 거느린 천 명의 군사 중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 잡혀 왜병된 사람이 3분의 2나 되었다. 이때 성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의 처소에서 몰래 몰래 서로 약속하되, 만일 우리 나라 군사를 만나게 되면 포로로 잡혀 왜병 된 사람으로 함께 약속한 자와 한꺼번에 투항하자.’ 하고, 싸우며 올라왔으나 하나도 만나지 못하므로 본국의 군사가 달리는 곳에서 여러 날 동안 머뭇거렸으나 처음 계획한 대로 할 수 없자 통곡하면서 돌아갔다 한다. 그때에 전라도 옥야(沃野)에 사는 재인(才人) 임세붕(林世鵬)의 딸이 나이가 10살 남짓한데, 역시 사로잡혀 와서 박춘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어둑어둑할 때 왜병졸이 모두 흩어지고 박춘이 홀로 두어 왜인과 있더니, 홀연히 우리 나라 말로 서로 말하기를,
“여기가 전주의 옥야인가?”
하니, 두 왜인이 대답하기를, ‘그러하다’ 하자, 박춘이,
“마당(麻堂)ㆍ기운(氣運)ㆍ세붕(世鵬)들이 살아있을 수 있을까?”
하였다. 임세붕의 딸이 곁에 있다가 듣고서 마음 속으로 괴이하게 여기기를, ‘이 사람은 왜인인데 어떻게 우리 나라 말을 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우리 아버지의 이름자를 알 수 있는가? 하물며 마당과 기운은 모두 우리 아버지와 한때 이름난 재인인데, 왜국 장수가 어떻게 알았을까?’ 하고, 마음에 매우 의심스럽고 괴상하게 여겼으나, 박춘이 왜국의 장수가 될 줄은 알지 못하였다.
밤이 되자 가만히 그 딸에게 묻기를,
“너는 어디 사람이냐?”
하니, 딸이 대답하기를,
“내가 옥야(沃野) 재인 임세붕의 딸입니다.”
하였다. 박춘이 놀라면 말하기를,
“너희 부모가 잘 있느냐?”
하니, 딸이 말하기를,
“아버지는 원수의 진중에 있고 홀로 어머니와 내가 숲속에 숨었다가 한때 사로잡혔는데, 적이 어머니는 죽이고 나는 살려주었습니다.”
하였다. 박춘이 불쌍하게 여겨 탄식하며 한숨지었다. 수일이 지나 회군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임세붕의 딸을 말에 태워 박춘의 말 앞에 있게 하더니, 해남에 이르러 배를 탈 적에 박춘이 소매 속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내어 딸에게 주며 이르기를,
“이제 너를 놓아 돌려보내니 이 글을 갖다가 너희 아버지에게 꼭 주라.”
하고, 왜병 한 사람을 시켜 복병한 곳까지 호송하게 하니, 세붕의 딸이 드디어 벗어나 돌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옥야에 이르러 그 편지를 아버지에게 주니, 편지 가운데 말한 바도 역시 전일 주춧돌에 쓴 사연과 같은 것이었고, 이어서 안에 밀봉한 한 장의 편지도 박춘의 아비에게 전하였는데, 그 아비가 사실이 누설되어 누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일체 숨긴 까닭에 온 이웃의 재인도 감히 말을 내지 못하였다 한다.
재조번방지 5(再造藩邦志 五) : 1598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아서 군사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자 죽었다. 순신의 형의 아들 완(莞)이 본디 담력과 재량이 있어 그 죽은 것을 비밀로 하고 순신의 명령대로 더욱 급히 싸움을 동독하니, 군중(軍中)이 알지 못하였다. 적이 남해로 도망하여 들어가고 혹은 노량진으로 달아났다. 유형(柳珩) 또한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넘어지더니 조금 있다가 깨어나서 비로소 통제사의 죽음을 알고 통곡하면서 싸움을 동독하기에 더욱 힘썼다. 도독이 통제사의 배위에 군사들이 수급(首級)과 왜의 재물을 다투어 취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통제사가 반드시 죽었도다.”
하고, 이에 순신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기를 구해준 것을 사례하게 하였더니, 돌아와 말하기를, ‘순신이 과연 죽었다.’ 하므로, 도독이 의자에서 땅에 세 번이나 넘어지며 말하기를,
“나는 노야(老爺 이순신을 지칭)가 살아와서 나를 구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죽었는가?”
하고,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니, 온 군사가 모두 울어서 곡성이 바다 가운데 진동하였다. 행장이 미조항(彌助項) 바다 밖으로 도망하여 돌아갔는데, 그 행장을 잡아 베이지 못하게 된 것은 유 도독(劉都督)이 그르쳤기 때문이라 한다. 이보다 앞서 7월에 왜적의 괴수 평수길(平秀吉)이 이미 죽은 까닭에 바닷가에 진쳤던 왜적이 모두 물러간 것이다.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가 순신의 죽음을 듣고 진영이 연달아 통곡하기를 자기 어버이같이 하였고, 관을 운반해 가는데 이르는 곳마다 인민이 곳곳에서 제를 지내고 수레를 당기면서 울며 말하기를,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공이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오.”
하고, 길이 막혀 수레가 나아갈 수 없었고, 길 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의정부 우의정으로 증직(贈職)하였다. 형군문(邢軍門 이름은 개(玠))이 말하기를,
“바다 위에 사당을 세워 충혼을 표창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으나, 일이 마침내 행해지지 않았다. 이에 바닷가 사람들이 서로 솔선해서 사당을 세워 민충(愍忠)이라 부르고 철마다 제사를 지내며 그 밑을 지나는 장삿배도 모두 제사를 지냈다.
재조번방지 6(再造藩邦志 六)
□이에 우리 나라에서는 큰 사당을 태평관(太平館) 서쪽에 짓고 군문(軍門) 형개(邢玠)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제사지내게 하고, 임금의 친필로 재조번방(再造藩邦)이라는 네 글자를 크게 써서 걸어 놓게 하고, 또 형군문의 평왜송(平倭頌)을 지어 그 공로를 찬양하니, 그 글에 이르기를,
“왜구가 우리 변경에서 혈거(穴居)한 지 대개 7년인데, 그 모여 있는 것은 벌과 개미 같고 가볍게 날랜 것은 시현(豺贙 승냥이나 서해바다의 날랜 짐승) 같고 빠르기는 풍우(風雨) 같아 갑자기 틈을 타면 문득 고함을 지르며 급하게 놀라 일어나서 달려와 충돌하고, 힘껏 쫓아가서 그 소굴을 없애버리려 하면 성채(城寨) 안으로 들어가 보전하기 때문에 그들을 방어하는 도리가 역시 어려웠다. 이로 말미암아 싸울 때마다 이기게 되어 창끝은 더욱 예리해지고 독은 더욱 여물어져서, 왕경(王京) 이남 수천 리의 땅이 거의 모두 백골이 되어 도깨비불만 푸르게 되었도다. 공경히 생각건대, 우리 거룩하신 천자께서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인덕(仁德)을 펴시고 멸망해가는 것을 일으키는 의리를 높여, 망해가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간악하고 강포한 것을 분하게 여기시었도다. 무릇 두 번이나 많은 군사를 내어 전쟁에 보내시고 세 번이나 독신(督臣)을 바꾸어서 바로잡으셨는데, 뒤에 와서야 우리 형공(邢公)을 얻었도다. 공은 정유년(1597, 선조 30)여름에 처음으로 명을 받았으니, 병부 좌시랑에서 상서로 진급되어 실로 군사상 중대한 책임을 받아 남북 장령(將領)을 통솔하면서 동녘에 군대의 일을 보았도다. 융거(戎車 군사용 수레)가 모두 준비되니 떨거나 놀라지 않고 그 군률을 물으면 먹줄친 듯 법도가 있고 호령을 물으면, 조리가 정연하여 기강이 있었도다. 큰 꾀가 먼저 정해지고 계획이 미리 서 있으므로 위엄 있는 목소리가 미치는 곳에 귀신이 놀래고 도깨비도 두려워하도다. 이해(1597, 선조 30) 가을에 왜적이 한산도(閑山島)를 함락시키고 바로 양호(兩湖 호서 호남)를 충돌하면서 서울 가까이까지 핍박하였는데, 공이 먼저 지시를 내려 직산(稷山)에서 크게 이기고 또 청산(靑山)에서 이겨 왕경이 보전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압록강을 건너 왕경에 이르러 계속하여 도산(島山)의 승리를 얻으니, 승세가 이미 십중 팔구는 되었었다. 다음 해 겨울에 여러 장병을 네 갈래 길을 나누어 서로 호응하는 형세를 가지고 내달아서 그 발가락을 잘라 버리기도 하고 혹은 그들의 목을 움켜 쥐기도 하니 왜적의 간교한 계획이 갑자기 궁하여졌도다. 공이 또 사태를 헤아리고 기묘한 계책을 쓰되 행동에 만전을 힘서 왜적을 잡아 죽이기를 돼지를 잡아 다듬돌이나 동이에 엎어 놓듯 하더니, 얼마 되지 않아서 왜적이 과연 무리를 모두 이끌고 몰래 도망하게 되었도다. 무릇 왜적이 올빼미가 숨어보듯, 토끼가 가만히 엿보듯 하면서 하늘을 향해서 활을 쏘려는[射天] 음흉한 꾀를 품어, 포학한 불꽃을 일으킨 지 이미 오래되어 우리 작은 나라에 감정을 두어 날로 불측한 못된 짓을 함부로 하였다. 이에 공께서 특히 마음속의 깊은 꾀를 내어 웃으며 말하는 사이에 지휘하여 마침내 왜노가 숨을 죽이고 바다의 나쁜 기운이 영원히 맑아졌으니, 아아, 공 같은 이는 참으로 특이한 사람이로다. 봉황이 잠깐 머무르니 세월이 묘연하고, 길이 기릴 제 상하가 뜻을 같이 하도다.”
하였다.
□이때에 경리 만세덕(萬世德)이 상소하여 뒤처리를 잘하는 방책을 의논하여 아뢰기를,
“왜놈은 이미 달아났고 속국은 다시 조성되었으므로, 간교하고 사특한 태도와 흉악하고 거슬리는 계획은 이미 좌절되어 비록 두 번 다시 쳐들어오지는 못할 것이오나 우리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뒤처리를 잘할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해야 하겠기에 감히 여덟 가지 일로써 우러러 아뢰나이다.
1. 장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조선은 문학만을 숭상하고 무비는 강논하지 않사오니 널리 장수될 만한 재주 있는 사람을 채용케 하여 군사정책을 맡기게 함이 합당하옵니다.
1. 군사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조선 사람이 사납고 영리하여 추위와 고생을 견디어 낼 수 있으나 긴 옷과 큰 소매는 본디 갑옷 입는 군사의 제도가 아니오니, 뒤가 짧고 옷깃을 좁게 하여 조련하는데 법도가 있게 함이 합당하옵니다.
1. 요긴한 길목을 지키는 것이옵니다. 조선은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사온데 부산과 대마도는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으로 돛을 올려 반나절이면 동쪽으로는 기장(機張)과 울산에 들어올 수 있사옵고, 서쪽으로는 한산(閑山)과 당포(唐浦)에 들어올 수 있으며, 들어오는 길이 반드시 우리의 등주와 내주를 경유하게 되는데, 부산은 바라보면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 같으며 거제도가 다음가오니, 각기 많은 군사로써 지키게 해야 할 것이옵니다.
1. 험하고 좁은 목을 수축하는 것입니다. 조선은 북으로 우거진 산을 의지하고 서남쪽은 바다가 둘러있어 본디 사방이 막혔다 일컫는 곳이온데, 충주 좌우에 조령과 죽령 두 고개가 있어 양의 창자같이 구불구불하여 참으로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을 막으면 만 사람이 넘을 수 없다.’는 곳으로, 전번에 왜적이 이곳을 지키면서 우리를 방어하였고, 우리가 남쪽을 향할 때 부장(副將) 오유충(吳惟忠)이 적은 군사로 오래 지켰사온데 왜적이 감히 엿보지 못한 것은 모두 지형의 도움을 얻은 때문으로서, 이제 영루(營壘)의 유지(遺址)가 지금까지도 남아있사오니, 빨리 고치고 수리하여 달려와 돌격하는 것을 방비해야 할 것이옵니다.
1. 성지(城池)를 세우는 것이옵니다. 조선 8도에 열에 아홉은 성이 없사와 그곳을 피해 가는 것을 편하게 여기고 있사온데 평양 서북에 압록강과 대동강 두 강은 모두 남쪽으로 바다에 통하였습니다. 만일 왜적이 따로 한 패의 군대를 보내어 평양과 의주(義州)를 점거하게 되면 왕경의 도움이 이미 끊어지고 앞뒤로 도적을 맞이하게 될 것이오니, 마땅히 큰 고을에 성지를 굳게 쌓고 많은 군사를 두어 무너져 흩어지는 마음을 굳게 해야 할 것이옵니다.
1. 기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왜적과 싸우는 데는 육지가 편하고 바다가 불편한 것은 배의 제도가 너무 무거워서 공격하기에 불리한 때문입니다. 복호(福號)에 준하여 천백 척의 배를 만들어 기병(奇兵)을 삼게 하고 백자화전(百子火箭)을 더 만들어서 돛을 태우고 배를 불사르는 계책을 삼아야 할 것이옵니다.
1. 특이한 인재를 찾아내는 것이옵니다. 조선 풍속이 대대로 벼슬하는 사람을 귀히 여기고 대대로 일하는 사람을 천하게 여겨 쟁쟁하게 스스로 뽐내니, 일체로 벼슬길을 막는 것은 마땅하지 않사옵니다.
1. 내치(內治)를 닦는 것이옵니다. 국가가 동남은 바다에 임하여 여순(旅順)에 오르면 문밖이 되옵고 진강(鎭江)은 목구멍이 되오니, 응원하는 것을 더해 줌은 마땅하오나 철수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사옵니다.”
하였다.
□숭정(崇禎 명 의종의 연호) 후 기축년(1649, 인조 27) 12월 1일에 해동포민(海東逋民)은 적는다. 만력 27년(1599, 선조 32) 기해 정월부터 35년(1607, 선조 40) 정미에 그치니, 통계 9년이다. 기축년(1649, 인조 27) 겨울에 큰 딸이 아기를 낳고 앓아 누웠다가 한 달이나 되어 병은 나았고, 그 후에 약을 먹으며 조섭 치료하는데 또한 수십 일이 걸리게 되므로 신음하면서 우울할 적에 이상한 말이나 기이한 이야기를 얻어서 마음을 달래는 방편으로 삼으려 한다. 내 생각에 전기로서 음일(淫佚)한 것은 족히 볼 곳이 없고 고고(古高)한 것은 재미가 적어서 모두 홧병을 씻어 내는 처방이 못 되므로, 이에 임진년에 침략 당하던 사실을 기록하는 데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호)의 문고중 《정왜지(征倭志)》를 근원삼고 여러 사람의 문집 소설의 유를 모아서 책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 자(咨)ㆍ주(奏)ㆍ장(章)ㆍ소(疏)의 번거로움이 있으나 삭제하지 않은 것은 그 변론을 자세하게 하려는 것이고, 거리의 이야기 같은 자질구레한 것을 오히려 기록한 것은 그 인정을 자세히 살피려는 것이다. 아아! 임진년의 화란이 참혹하였도다. 중국 군사가 아니었으면 나라가 없어졌을 것이고, 나라가 없어졌다면 우리들로 하여금 이같이 번성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이는 필부필부라도 마땅히 여러 번 익히 읽어서 그 사실을 자세하게 알아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이 가운데서 얻은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인데, 어찌 다만 신음하는 중의 소견거리만 되고 말 뿐이겠는가? 이에 글씨를 빨리 쓰고 번역을 잘 하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한 통을 베껴서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
슬프다! 이는 우리 선군(先君)의 뜻이다. 그전에 우리 선군이 이 글을 지으실 때에 여러 문집에서 한 조각씩 잘라내고 한 마디씩 잘라내서 차례를 찾아 기술한 것인데, 그 사건의 처음과 끝이 7~8년이나 되고 그 말은 동리 마을에서 주워 모은 것이다. 그러나, 명 나라 황제의 작은 나라를 보살피는 은혜가 관련되었으며, 선조대왕의 대국을 섬기는 정성이 관련되었고, 국가의 잘되고 못 되는 사적이 관련되어, 인심의 좋고 나쁜 것과 공과 죄의 크고 작음이나 임금에게 충성하고 절개를 위하여 죽은 사람을 분명하게 상고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초고를 꾸미기 시작하여 미처 마치지 못한 지 자못 수년인데, 선군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 사이에 혹 한두 가지 사실이 누락된 것과 시증(詩證)이 모두 구비하지 못한 것이 없지 아니하니, 어찌 우리 선군의 뜻을 크게 펴지 못하여 이 글의 불행이 되고 불초한 자손들의 통한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우리 선군의 뜻은 반드시 누락이 없고 모두 구비된 후에라야 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부자(夫子 공자)께서 일찍이,
“나도 오히려 사관이 글을 빼놓고 기록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아아! 그렇도다. 이는 그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서도 오히려 누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 그 글이 누락되었다고 폐지하는 것이 역사를 짓는 뜻이겠는가? 우리 부자의 말씀이 또 누락시키지 않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데 있지 아니하며, 더구나 이것은 역사와 다르고 역사를 지어내는 뜻과 차이가 있지 않은가? 이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우리 선군의 뜻은 또한 무엇을 크게 펴지 못했으며, 이 글에 혹 누락되었거나 모두 구비되지 못한 것이 또한 무엇이 불행하다 할 것인가? 이제 황조(皇朝)의 은혜, 선조대왕의 정성, 국가의 사적, 인심(人心)ㆍ공죄(功罪)ㆍ충절의 큰 것으로써 우리 선군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혹 누락됨과 모두 구비되지 못한 것을 못마땅히 여겨 우리 선군의 뜻을 크게 펴지 못한 것이라 한다면 어찌 통한의 작은 것이 아니겠는가? 슬프다! 이제 감히 ‘그 행실을 보며 그 뜻을 본다.’ 할 수 없으며, 또 감히 ‘실추시킴이 없다.’ 할 수 없으니, 어찌 통한하지 않겠는가?
기해년(1659, 효종 10) 3월 상순에 불초고 이화(以華)는 피눈물로 삼가 적는다.
이 지(志)는 《정왜지(征倭志)》를 근원 삼고 《징비록(懲毖錄)》ㆍ《유설(類說)》등에서 참고하여 넣었으며, 또 여러 문집 중에서 한 조각 말이거나 한 조각 글자라도 옳은 것이 있으면 채택하여 붙이되, 그 적확하기에 힘을 쓰고 감히 함부로 개인의 의견을 붙이지 않았으며, 그 너절한 말이나 거리의 말 같은 것을 산삭하지 않은 것은 대개 통속적인 언문 번역에 편케 하고, 또 역사에 혐의스럽기 때문이니, 보는 이는 글과 말이 거칠고 졸렬한 것으로 그 모아 편집한 뜻을 나무라지 아니하면 심히 다행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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