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8일 단상 셋
하나 : 코로나(코비드)19-인류의 재앙
세계는 지금 코로나19로 인하여 가히 재앙상태이다. 코로나 바이러스19는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뒤 전 세계로 확산된 새로운 유형의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한 호흡기 감염질환인데 중국의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시작되고 확산되더니 곧 이어 우리나라로 넘어와 1월 20일 첫 확진자가 발생하였고, 2월 21일 첫 사망자 발생했다. 2월 22일 대구 신천지 사태가 터지면서 한국은 현재 확진자 8,565명, 완치 1,947명 사망 94명(20일 저녁 지금 현재 102명)이다. 우리 한국은 이제 확진자수가 하루 100명 이하로 줄고 있고 사망자가 극히 적어서 사망율 1%로 그나마 천만 다행이나, 중국은 2-3%, 이란은 10%, 이탈리아는 8%가 넘는다고 하니 전쟁보다도 더 무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다행이 우리는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는 방식과 효과에서 가장 우수한 의료 선진 모범국으로 칭송되고 또 본받아지고 있다.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이미 자국의 공항을 폐쇄하여 국경이 닫혔다. 불과 2주일 사이에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상호 문을 닫고 비상사태에 돌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여전히 마스크 쓰기를 계도하고 집단 모임을 중지하며 서로 거리두기 운동을 전재하고 있는데 아마도 3월이 다 지나야만 비로소 안심되는 상황이 올 것이라 예상된다.
WHO에 보고된 누적 확진자는 21만 8,815명, 사망자는 8천 810명이 넘었는데 각국별 상황은 이렇다.
●중국 : 81138명, 사망 3,237명-확진자 증가 제로 ●이탈리아 : 확진자 41,305명, 사망자 3405명. 1일 확진자 5천명 증가, 400명대 사망(2020.3.20일 현재)
●스페인 : 확진자 14,769명, 사망 638명 ●독일 : 확진자 12,327명, 사망 28명 ●프랑스 : 확진자 9,054명 ●스위스 : 확진자 3,115명, 사망 21명
●영국 : 확진자 2,626명, 사망 71명 ●네델란드 : 확진자 2,051명, 사망58명 ●미국 : 확진자 9,415명 ●이란 : 확진자 17,361명 ●인도네시아 : 확진자 309명, 사망자 25명
이제 코로나19는 남미와 아프리카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선진국들도 준비부족으로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는 공황상태인데 의료후진국들에서 창궐하면 더욱 엄청난 재앙이 전개될지 모른다.
14C에 유럽에서 창궐한 흑사병(페스트)은 인류역사상 가장 큰 재앙으로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나 되는 약 2천 만 명이상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세계화시대가 되어 버린 지금 코로나는 바야흐로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어 아무리 오늘날 최첨단 의학의 발전으로 치료를 한다 해도 의료체제가 취약한 후진국으로 전염이 확산되면 흑사병 못지않은 재앙이 될 우려가 큰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들이 대동소이한데 각급학교는 문을 닫고, 모든 시민들의 집회와 단체활동이 중지되고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생활의 패턴도 아주 크게 달라졌다. 경제활동이 대폭 줄어들고 매출이 급감하니 회사들이 문을 닫거나 사원을 감축한다. 경제의 악순환이 장기간 지속되면 전 세계의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되고 있다.
그리하여 각국들이 코로나로 인한 경제적 타격이 클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이에 대한 지원대책들을 세우고 있는데 무수한 생명들이 죽어가는 데 비하면 사실 경제가 무슨 그리 큰 대수인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명에 살다가지 못하면 누구나 억울할 진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염병이 나타나 자신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죽어가야만 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상상하기조차 무섭다. 한 인간의 미래와 꿈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며 이 세상을 하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간절하게 애도를 표하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의 확진자들에게 굳세게 이겨내라고 격려 드린다.
진정 정의롭고 자비로운 신이 있다면 하루빨리 나타나 뜻밖의 코로나 재앙으로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없는 행복한 세상으로 바꾸어 주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조속히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 : 문재인 팬덤과 한국정치
진중권 교수가 한국일보에 <트루스 에세이>를 매주 연재하고 있는데 읽을 때마다 공감하는 바가 크다. 예전에 진교수는 막무가내식 진보좌파인줄로만 인식하여 전혀 나의 관심 밖의 인물이었고 오히려 이 사회에 불필요하거나 없어지면 좋겠다는 존재(유시민, 정봉주, 김용민, 김어준 류)로만 여겼는데, 조국사태 이후 그는 진보좌파진영과 갈라서서 이젠 허위와 위선에 찬 그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양심을 팔고 정의를 짓밟으며 진실을 외면하는 파렴치한 일부 진보좌파진영과 거의 외로운 혈투를 계속하고 있는데 그의 해박한 이론과 논리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안들이 평소의 나의 생각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좀 더 학술적으로, 이론적으로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사실들을 토대로 쏟아내는 진교수의 논리적 주장에 자주 자주 감탄하여 마지않는다.
정권을 장악한 대통령과 집권당에 대한 비판은 당연한 것인데도 대통령과 당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면 소위 문빠(문팬덤)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무차별 공격한다. 우리 지역의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은 부정하겠지만, 문재인 대통령 정책을 비판하거나 조국을 비판하면 ?한국당과 같은 소리 하네?또는 ?꼴통보수구만?이라 막말을 하면서도 상대방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거나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소위 대학을 나왔다는 사람들의 지성은 온데 간데 없고 그저 맹목적으로 대통령과 민주당을 지지해대는 준노빠들 다름 아니겠는가?
나는 이제 문빠들과 별반 다름없는 인문학적으로 상당히 무지한(?) 사람들(비록 친구라 해도)과는 일체의 정치대화를 피하고 있다. 정치문제로 우정을 깨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 참고로 나는 대체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을 존경하고 그의 정책을 많은 부분(특히 대북 및 외교문제 그리고 복지문제)에서 지지한다.
나는 연중 내내 국회에 출석하지 않고 투쟁만 일삼더니 총선에 대비하여 귀신도 깜짝 놀랄 위성정당 비례한국당을 만든 통합당이나, 자신들이 앞장서 만든 새로운 연동형 비례대표제임에도 온갖 이유로 듣도 보도 못한 기본소득당· 시대전환· 가자환경당· 평화인권당 등 얼치기 정당들을 모아 비례연합당이라며 더불어시민당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위성정당을 만들어 국민들을 속이는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민주당도 역시 지지하지 않는 무당파이다.
다만 대통령 임기까지는 집권당인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민주당 후보자는 지지할 수 있지만, 정당은 두 당 모두 지지하지 않으므로 정당투표는 위선적이지 않은 중도소수정당에게 투표하려한다. 우리사회 구성원들의 이성과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저 사악한 정치무뢰배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한걸음도 더 선진국으로 도약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 예감을 가진다. 선거를 통하여 이 사회를 이끄는 정치집단과 정치인들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대개혁을 해야만 하는 시대적 요구가 절실하다.
이러한 시대에 오직 정의와 진실을 위해 거짓 사이비무리들과 주저하지 않고 용감하게 투쟁하는 진중권 교수를 적극 응원하면서 원문 그대로 옮긴다.
<10>팬덤의 정치
지난 1월 광주의 지하철역에 광고판이 등장했다. 대통령의 68회 생일축하 광고란다. 그 분의 사진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새로운 일이 아니다. 작년 67회 생일에는 서울역 옥외전광판에 축하광고가 등장했다. “그대와 함께 만드는 미래에 단 한 번도 등 돌린 적 없음을.” 재작년 66회 생일축하 광고는 뉴욕의 타임스퀘어까지 진출했다. “당신을 지켜드리기로 맹세합니다. 우리를 믿으세요.”
◇아이돌 능가하는 정치인 팬덤
이런 광고는 우리를 당혹하게 만든다. 보통 저런 데서 우리는 60대 후반의 노인이 아니라 20대 초반 남녀 아이돌의 얼굴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영화나 대중음악, 스포츠의 영역에 존재하던 팬덤이 정치로 옮겨온 것이다. 한국만이 아니다. ‘정치의 팬덤화’는 소셜미디어가 발달한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2004년 미국 민주당 후보경선에서는 하워드 딘 후보, 2008년 대선에서는 오바마 후보가 팬덤의 지원을 받은 바 있다.
맘 카페에 둥지를 튼 문재인 팬덤의 다수는 20년 전엔 아마 H.O.T., 젝스키스, god 팬클럽 중 하나에 속하여 활동했을 게다. ‘팬덤’은 그냥 ‘팬’이 아니다. 팬이 개인으로서 제공된 문화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한다면, 팬덤은 그 콘텐츠를 팬픽이나 팬아트의 형태로 스스로 생산하고 가공하고 공유한다. 제작사의 ‘굿즈’를 구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스스로 생산해 팔기도 한다. 문재인 팬덤 역시 팬아트를 창작하고 ‘이니 굿즈’를 제작해 판매한다.
팬덤은 자신들의 ‘팬 객체’(fan object), 즉 팬질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사물)과 강력한 정서적 유착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팬 객체에 대한 비판은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그 비판을 그들은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비판자를 향해 공격적인 태도를 드러내곤 한다. 문팬덤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일절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 논리를 떠나 그 일이 그냥 ‘정서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팬덤은 ‘상상의 공동체’다. 팬에게는 팬 객체만이 중요하지만, 팬덤에게는 그 대상을 사랑하는 이들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느낌이 더 중요하다. 이 집단정체성이야말로 팬현상과 구별되는 팬덤의 본질이다. ‘정체성’은 본디 배타적인 것. 그 옛날 H.O.T.의 팬덤이 젝스키스나 god 팬덤과 치열한 사이버 대전을 치렀듯이, 문재인 팬덤은 ‘달빛기사단’, ‘문꿀오소리’의 정체성을 가지고 적들과 패싸움을 벌이는 보람에 살아간다.
◇나르시시즘이 과대망상으로
팬덤은 일종의 나르시시즘 현상이다. 나르시스트는 연인에게 하듯이 제 몸을 어루만진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나르시시즘은 유아기의 자기성애에서 타자성애로 옮겨가는 과도기 현상이란다. 즉 아이는 그것을 통해 타인을 사랑할 준비를 시작하는 셈이다. 하지만 나르시스트의 리비도가 저 아닌 외부를 향할 수도 있다. 나르키소스가 물 위에 투사한 자신의 완벽한 미모에 반하듯이, 팬덤은 팬 객체에 투사한 제 이상적 자아를 사랑하는 것이다.
팬 객체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유난스러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사랑은 글자 그대로 광적(fanatic)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투사된 자아이기에 애초에 그것과 비판적 거리를 취할 수가 없다. 그 팬 객체가 아이돌이라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나, 그것이 정치인일 때에는 아주 피곤한 일이 벌어진다. 팬덤의 사적 기호가 정치에 필수적인 공적 비판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이 나라 기자 중에 문팬덤에게 ‘양념’ 당해 보지 않은 이는 별로 없을 게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나르시시즘 단계의 유아는 자기를 투사한 객체를 제 몸처럼 지배할 수 있다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다. 아득한 유년기의 인류가 주술로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그 때문이리라. 이 유아적 망상이 현실의 정치인을 만나면 꽤 현실성을 띠게 된다. 대통령에겐 권력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은 대통령을 지키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술적 믿음에 빠진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
◇노사모는 ‘지지’ 문팬덤은 ‘사랑’
문팬덤의 기원은 2002년 대선의 ‘노사모’에 있다. 하지만 노사모 활동은 ‘팬에 기초한’(fan based) 정치였을 뿐 팬덤정치는 아니었다. 노사모는 다른 커뮤니티와 싸우지 않았다. 남의 커뮤니티에 들어갈 때는 예의를 지켰고, 들어가서는 그곳 사람들을 ‘논리’로 설득했다. 당선된 후보가 “이제 뭐 하실 겁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감시, 감시!”라 외치며, 그를 감시하려고 모임을 해체했다. (그때 해산을 거부한 남은 소수가 문팬덤의 또 다른 줄기를 이룬다.)
문재인 팬덤은 다르다. 노사모의 토대가 후보의 철학에 대한 ‘이성적 지지’라면, 문팬덤의 토대는 후보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유착’이다. 그러니 그를 ‘감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들은 대통령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 그러니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를 옹호할 게다. 지지는 철회해도 사랑은 철회할 수 없는 것. 이것이 팬덤 정치다. 대통령도 이를 안다. 그래서 팬들의 패악질을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이라 미화한 것이리라.
문팬덤이 본격적으로 존재를 드러낸 것은 지난 지방선거 때. 당시 이재명을 공격하는 ‘달빛기사단’과 그를 방어하는 ‘손가락 혁명군’, 두 팬덤 사이에 치열한 결전이 벌어졌다. 문팬덤은 대선후보 경선 때 자기들의 팬 객체를 공격한 이재명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가 민주당 후보로 결정되자 그들은 새누리당 후보에게 표를 던지기로 했다. 이처럼 팬덤은 정당의 이해와 관계 없이 자기들의 쾌락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이것이 팬덤정치다.
◇조국은 무엇이었는가
이제 그들이 왜 조국을 놓지 못하는지 알 수 있을 게다. 조국은 그들에게 시효가 다해가는 팬 객체 대신에 자신을 투사할 새로운 팬 객체였기 때문이다. 팬 객체의 요건은 ‘호감성’(likeability)이다. 훤칠한 외모, 쌔끈한 학벌, 강남 사는 좌파. 조국은 팬 객체에 필요한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문팬들은 그에게서 자신들의 나르시시즘적 과대망상을 계속 유지시켜 줄 새로운 팬 객체를 본 것이다. ‘노무현의 꿈 문재인의 운명 조국의 사명.’
팬덤은 지지자가 아니라 구축자다. 그들은 팬 객체를 통해 자신들의 상상계를 실현하려 한다. 그들에게 정당이란 리비도적 나르시시즘의 수단일 뿐. ‘너희는 현실을 연구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 그 현실을 너희들은 나중에 연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팬덤의 멘탈리티다. 조국일가의 비리가 드러났을 때 그들은 ‘그 안에서 조국이 완전무결한’ 상상계를 실현하려 서초동에 모였고, 팬덤을 쫓던 민주당은 그 망상에 들러리를 섰다.
◇금태섭의 ‘죄’
이제 금태섭 의원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있을 게다. 청문회에서 자기들의 이상적 자아가 훼손당할 때 그들은 자신의 전(全)존재가 부정당했다고 느꼈을 게다. 그 모욕과 상처를 잊지 않고 그들은 기어이 그 ‘배신자’를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검찰을 향한 그들의 광적인 증오도 마찬가지다. 윤석열은 그들의 상상계를 파괴했다. 자기들을 살아있게 해주는 나르시시즘의 쾌락을 부정한 죄. 그 죄는 죽음으로도 다 갚지 못할 것이다.
팬덤은 그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을 ‘따르는’ 데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나르시시즘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인을 직접 ‘만들려’ 한다. 김남국과 강선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팬덤은 자기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게 아니다. 팬덤은 자기들의 이해를 대리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는다. 자기들의 망상을 유지시켜 줄 정당을 스스로 ‘제작’하려 한다. 열린민주당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금태섭의 지역구에서 벌어진 일은 실은 모든 지역구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팬덤은 민주당 의원들에게 ‘친문’이나 ‘친조국’이 아니면 그 당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당이 그들에게 휘둘릴수록 현실이 자신들의 바람대로 움직인다는 팬덤의 망상은 더욱 더 심해질 것이다. 민주당은 팬덤의 쾌락을 만족시키는 자위도구가 되었다. 팬덤을 쫓아 그들의 망상 속으로 따라 들어가 버렸다.
하나 :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
도올 김용옥 교수는 내가 그리 평소에 존경하는 분은 아니다. 이 사회의 리더인 것은 분명한데 그의 강의와 주장에 별로 공감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신교에 대한 비판은 지속되고 있으나(많은 국민들과 의식 있는 목사들까지) 큰 변화와 개혁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사이비 개신교파인 신천지파에 대해 전 국민이 공분한 바 있고, 따라서 사이비 종교에 대한 경각심을 제고시켰다. 한국사회에서는 그 어디서 볼 수 없다는 거대한 대형교회와 자신이 구세주임을 자처하는 사이비 목사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마치 신처럼 따르며 일체의 비판과 공권력의 개입을 전면 보이콧한다. 자신도 모르게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개인을 우상화하며 자신의 미래와 재산을 헛되이 버리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다고 보고 있다.
오늘 한국일보에 게재된 김용옥 교수의 대담을 읽고 학문적 이론을 통해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많은 이해를 도와준데 대해 고맙게 생각하면서 크게 공감하므로 나도 블로그에 전문을 게재한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구약(舊約) 코로나’에 감염돼 이성이 마비된 상태입니다. 예수가 중계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약(新約), 즉 ‘사랑의 계약’으로 돌아가야 해요. 편협한 유대인의 종족신을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이 자기 신으로 모실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가 그러라고 한 적도 없고요.”
17일 서울 동숭동 출판사 ‘통나무’ 사옥에서 만난 철학자 도올 김용옥(72)의 비판은 신랄했다. 한국 기독교계가 교인을 오도(誤導)하고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었다. 도올에 따르면 그건 신약 성경, 즉 복음서를 제대로 읽은 목회자가 드물기 때문이다. 성서를 도외시한 채 교조화한 조직 신앙에만 매몰돼 예수의 사상과 실천 가운데 일부 파편만 남은 설교를 목사끼리 서로 복제만 하는 게 지금 한국 기독교의 남루한 형편이라고 꾸짖었다.
도올은 원래 신학자를 꿈꿨다. 1967년 서울 수유리 한국신학대에 수석 입학했다. 최근 그는 ‘나는 예수입니다’를 펴냈다. 지금껏 교회가 강조해 온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아닌, 실제 예수의 삶과 진면목을 복원하고자 시도한 전기다. 책에서 그는 예수가 베들레헴(다윗의 고향)이 아닌 갈릴리 태생이라는 사실 등 후세 교회가 덧칠한 예수의 신성(神性)을 걷어내며 그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도올이 다시 그려내는 예수는 민중운동가이자 혁신가이며 무엇보다 휴머니스트다. 가난하거나 병든 자,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 등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이 예수의 우선 관심 대상이었고, 그렇기에 예수가 가장 중시한 계명은 “이웃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라”였다. 도올은 이웃 안전에 아랑곳없이 예배를 강행하고, 그걸 신성한 것인 양 포장하는 기독교인들을 두고 “상식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게 한국 기독교의 비극”이라 탄식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집단 감염 문제로 정부가 그렇게 말렸건만, 일부 교회들은 예배를 강행했다.
“이성을 마비시킨 광신 때문이다. 인류사에서 바이러스 창궐은 인간에게 삶에 대한 근원적 반성을 요구해 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얼마나 썩어빠진 종교에 감염돼 살고 있는지 드러났다.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사악한 ‘구약 코로나’에 감염돼 이성이 마비돼 버렸다. 종교적 행위도 얼마든지 합리적일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파되지 않도록 협조하는 게 사랑이고, 사랑이 종교의 정신 아니냐. 그런 상식을 거부할 정도의 광신이다. 그릇된 판단을 확신하고 그게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미친 나라다.”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인가.
“옛날 유대교 구약 율법의 토대는 착취였다. 사랑의 계약이 아니라 저주ㆍ질투ㆍ배타ㆍ억압의 계약이었다. 구약에서는 사람이 절대 약자다. 유대민족 신인 여호와는 ‘나 말고는 어떤 신도 섬겨서는 안 된다’거나 ‘안식일을 지키라’고 강요한다. ‘갑질’이다. 예수는 이런 구약을 새롭게 바꾼다. 바로 신약이다. 한국 기독교의 기반은 신약인데, 여전히 구약의 하나님을 모신다. 목사는 구약 율법에 따라 설교한다.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라기보다 천박한 형태의 유대교다.”
-주일 예배에 집착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까.
“유대인의 안식일은 계율을 상징한다. 율법상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된다. 경찰이 딱지를 떼도 안 된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배가 고파 밀이삭을 훑어 먹는 제자들을 보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고 항의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선언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거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라고까지 한다. 유대교의 여호와를 부정한 거다. 일요일에 교회에 갔다 오는 것도 좋다. 다만 성서적 권위나 근거는 없다. 교회 내부의 합의일 뿐이다. 코로나19 시대라면, 가령 북한산에 가서 예배하는 것도 괜찮다.”
-‘믿으면 구원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예수는 자기를 믿으라 한 적이 없다. 기적을 행한 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한다. 그 때 믿음이란 내적인 거다. 자기의 잠재력,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으라는 뜻이다. 그러나 바울이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를 만들면서 ‘예수가 메시아 그리스도이자 부활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라는 식으로 바뀌었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인간의 구원이 없다’고 한 뒤 교회가 우상화됐다. 믿음이 맹신으로, 난센스로 변질된 셈이다.”
-한국 교회는 특히 권위적이란 지적이 있다.
“예수에게 하늘과 땅은 하나다. 둘이 아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이 우리에게 전한 기독교는 하늘과 땅을 완전히 분리한다.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같은 이는 ‘하늘은 땅과 섞일 수 없다. 인간이 도달하지 못하는 게 하늘이고 인간은 하나님에게 복속돼야 하는 존재’라고 가르쳤다. 예수가 말하지 않은, 그런 구약적 질서가 한국에서 계속 널리 퍼진 것이다. 교회로서는 권위를 내세워야 구원이라는 명목 하에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다. 새로운 종교 운동이 태동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에는 토착적인 기복(祈福) 신앙적 요소가 많다는 질문에 도올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더니 “‘빨갱이 문화’와 관계가 있다는 게 비극”이라고 했다. “6ㆍ25 전쟁 이후 피폐해진 상황에서 민중의 구심적 역할을 했던 게 현세적 신앙이에요. 제주도에 왜 기독교인이 많겠어요. 여순민중항쟁이나 제주4ㆍ3사건을 겪은 이들에게 들어보면 이유 없이 그냥 막 쏴 죽이는 통에 공포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해요. 교회에라도 가서 매달려야 위안을 얻을 수 있었을 거예요. 게다가 교회에 가면 빨갱이로 몰릴 염려도 없었죠.” ‘좌빨(좌익 빨갱이)’을 빙자한 국가 폭력의 참혹한 역사가 한국 교회 급성장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는 설명이다.
-코로나19사태를 계기로 기독교계가 신천지를 집중 공격하고 있다.
“비슷한 사람과 싸울 때 화를 더 많이 내는 법이다. 계속 교인을 빼내 가던 신천지가 기성 교단은 무섭고 미웠을 거다. 그러나 신천지 바이러스가 침투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놓은 건 세습을 일삼고 헌금, 교회 출석을 강요하는 대형 교회들이었다.”
-상황을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신천지를 매도하고 계보를 뒤져봐야 소용 없다. 원조 예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를 바로 알고, 그 예수를 자신의 삶의 가치로 내면화시키고, 교회 바깥에서 생활 속 운동으로 전개해야 한다. ‘나는 예수입니다’는 우리나라 종교 혁명의 씨앗이 되라고 쓴 책이다.”
-제목을 보고 도올이 스스로를 예수라 한 줄 알았다.
“‘예수=그리스도=부활자=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초대 교회 사람들의 ‘케리그마’(신념이나 담론)와 대비되는, ‘역사적 예수’의 실상을 1인칭으로 드러내려는 의도였다. 역사적 예수는 인간 예수였다. 복음화된 예수,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와 다르다. 인성을 제대로 이해해야 신성도 이해할 수 있다. 그 말은 인간을 신처럼 고귀한 존재로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초대 교회부터 ‘예수는 하나님 아들’임을 부각하며 인성을 거론하려는 걸 막으려 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인간이 어디 있나. 누구나 ‘나는 예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1인칭 시점으로 쓰인 예수 전기는 독특한 시도다.
“동서 막론하고 1인칭 자기 고백 형식의 예수전(傳)이 쓰인 건 처음일 거다. 예수와 동일시하려면 역사적으로 존재한 예수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철저히 성서신학적으로 접근했지만, 신학자들이 보지 않는 역사적 문건이나 팔레스타인 생활사 자료를 면밀히 살폈다. 그렇다고 월권할 수는 없었다. 예수가 직접 말하는 방식인 만큼 신중했다. 4개 복음의 원전(原典)이자 ‘행위의 복음’인 마가복음이 다룬, 살아 있는 예수의 모습과 행동을 그대로 정직하게 전하려 애썼다.”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나.
“무엇보다 유대인이라 단정할 수 없다. 예수는 갈릴리 사람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민족주의(시오니즘)적 열망에 사로잡힌 적도 없다. 그에게 여호와는 유대인의 종족신일 뿐이었다. 갈릴리 민중의 고통은 오히려 선택과 경배를 강요하는 배타적인 유일신 여호와로부터 오는 거였다. 예수는 본질적 혁명을 꾀한 ‘천국운동가’였다. 천국이라는 게 나라 개념이 아니다. 희랍어 ‘바실레이아’에는 ‘질서’라는 의미도 있다. 억압하고 죽이고 미워하고 착취하는 인간의 질서 대신 ‘하나님의 질서’를 이 땅에 구현한다는 게 천국운동의 목표였다.”
-지금 우리에게 역사적 예수가 갖는 의미는.
“‘메타노이아’, 즉 생각의 변화다. 새로운 세상이 오려면 인간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회개’는 잘못된 번역이다. 예수는 인간을 죄인으로 보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아이와 여자에게 보인 당시로서는 혁명적 태도 역시 그런 인간관에서 비롯됐다. 반면 멀쩡한 사람을 병자로 만든 뒤 약을 주는 게 지금의 기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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