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정의 : 부르짖는 정의 실천하는 정의

청담(靑潭) 2020. 6. 6. 21:56

한국일보 : (2020년 6월 5일 26쪽)

<부르짖는 정의 실천하는 정의>

 

모두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고 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은 정의롭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꼭 대부분의 유명인들이나 정치인들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정의와 진실에 대하여 온갖 주장들을 하지만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참 부끄러운 개인 이기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에 존경할 만한 분들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아무리 내 주변의 중요인물들이라 하더라도 맹목적으로 좋아하거나 신뢰하지 않습니다. 전혀 의도적이 아니라도 그 사람의 언행에서 진실성, 정의로운 실천력을 주의깊게 살펴보게 되고,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비록 평소 친하게 지낸다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한 존경심은 가지지 못하고 크게 신뢰를 보내지도 않습니다.

어제 2020년 6월 5일자 한국일보 26쪽에 보이는 글들은 모두가 감명깊은 글들입니다. 집권세력의 비리와 권력남용, 그리고 잘못된 정책에 대해 입을 다물고 비판하지 않거나 비판하지 못하는 언론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부르짖는 정의 실천하는 정의>라는 제목을 붙여보고 여러 생각을 해봅니다.

 

1. 좀비, 암, 그리고 금태섭(이충재 수석논설위원)

요즘 연일 집권여당과 청와대를 비판하고 있는 진중권씨와 내가 20대 국회에서 상당히 싫어했던 의원 중의 하나였던 표창원 의원의 21대 불출마의 변을 들으면서 ?이제 보니 참 괜찮은 사람들이구나?라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현 집권세력의 집단에서 용감히 탈출하여 ?정의롭지 않은 것을 정의롭지 않다?고 비판하는 진교수와 의원직의 명예와 권력을 내던지고 새로운 역할을 찾아나서는 표의원을 보면서 비로소 장차 큰 지도자들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민주당의 당론과 달리 공수처법안에 소신있게 기권표를 던진 금태섭 의원도 마찬가지 압니다. 존경스러운 사람입니다. 법사위에 상정된 의안의 필요성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당리당략의 기준으로 무조건 상대방의 주장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국회 법사위의 모습은 조선시대에 당파싸움하던 인간들과 눈꼽만큼의 차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2. 적폐청산 구호 부끄럽지 않나(이준희 고문)

이 글은 20세기 후반,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서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고 오늘날 집권여당의 일원으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인간들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진정성을 가지고 투쟁하고 고생한 사람들인지, 오직 권력을 잡기 위해 싸웠고 잡은 권력은 절대로 놓지 않기 위해 사는 사람들인지 분간이 안 되고 존경심이란 전혀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오래토록 블로그에 남겨놓고 싶습니다.

■80년대 후반 얘기다. 5공이 끝나고 다소 온건해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어도 대학가나 거리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화염병 시위와 폭력 진압으로 날이 새고 지긴 마찬가지였다. 시위 현장에서 학생들과 유인물을 뿌리던 당시 유명 재야운동가와 마주쳤다. 그들은 “구로구청 지하에서 수십 명 학생이 경찰 진압으로 사망하고 은폐됐다”고 외쳐댔다.

“그날 제가 거기서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기자입니다. 쫓기다 추락하고 많이 맞아 다쳤어도 죽은 학생은 없습니다.” 답답했다. “여러분마저 거짓말하면 국민은 누구한테 기대야 합니까?” 학생들이 둘러쌌고 그가 화를 냈다. “당신 누구 편이야!”

진실과 상식이 적과 동지, 운동의 유불리 구분보다 가치 없다는 사실에 아득해졌다. 정의는 다만 대의에 복무하는 도구였다. 그와의 친분은 그걸로 끝났고, ‘사소한’ 이 일은 오래도록 묵직한 흉통으로 남았다.

비슷한 경험은 꽤 잦았다. 초년 기자 때, 학생들도 똑같이 애매한 사람을 구타ᆞ고문한 사실에 경악한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첫 상처였던 것 같다. 비장한 투쟁대오 뒤편에선 믿기 어려운 추문들도 자주 흘러나왔다. 그래도 그들은 늘 정당했다. 어쨌든 불의한 거악에 맞서는 전사들이었으므로. (이후 어디에나 섣불리 권위나 신뢰를 부여하지 않게 된 것도 경험 때문이다)

꼰대처럼 ‘라떼’를 들추고, 일반화 위험에도 개인 경험을 소환한 이유는 짐작하는 대로다. 30년을 뛰어넘는 기시감 때문이다, 조국과 윤미향 논란은 틀이 같다. 1980~90년대 운동권의 기여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실망스러웠던 부정적 행태를 빼다 박았다. 정의와 공정, 도덕을 독점하고 담장 너머로는 배타와 적대로 일관하는. 송철호ᆞ유재수 사건 처리 과정은 과거 보수 기득권 연대와 꼭 닮았고, 금태섭 징계 논란은 진보 아닌 수구적 행태에 다름 아니다.

사실 오랫동안 이런 측면은 대체로 덮여졌다. 국민 사이에 민주화 과정의 부채의식이 상당했던 데다, 그들은 보호받을 필요가 있는 소수 비주류였으므로. 그러나 이젠 그들이 국정 책임을 맡았고, 스스로도 주류임을 선언할 만큼 환경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여전한 정의와 집단이기 사이의 인식 전도는 초라하고 시대착오적이다.

혹 잊었을까 상기시키자면, 촛불 정국 때 탄핵 요구는 80%를 넘었다. 보수 성향의 50~60대도 대열에 가담했다. 박근혜 지지율은 역대 최저인 4%까지 추락했다. 극소수 극우나 지독한 지역주의자들을 빼고는 거의 모든 국민이 동의했다는 뜻이다. 촛불은 이념 정파 세대 계층을 뛰어넘는 민심의 대폭발이었던 것이다.

‘박근혜 퇴진’으로 시작됐지만 민심을 응축한 한마디는 “이게 나라냐!”였다. 거기엔 불의하고 불공정한 기득권에 대한 염증과 분노, 불평등하고 불법이 횡행하는 현실에 대한 박탈감과 절망이 다 담겼다. 그러므로 촛불의 진짜 요구는 집권세력 교체보다 훨씬 더 큰, 평등 공정 정의 같은 보편가치의 회복이었다. 그래서 현 정권은 함부로 촛불혁명의 적자(嫡子)를 운위해선 안 된다. 아직까진 그냥 촛불집회의 수혜자다.

현대사의 큰 흐름상 지금은 또 한 번의 거대한 전환기다. 산업화시대는 오랜 진통을 거쳐 극복됐다. 성과가 무의미해진 게 아니라 과정에 수반한 폐해가 민주화 가치에 밀려 정당성을 상실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민주화시대의 극복이 시대적 과제가 됐다. 역시 성과가 아닌, 부정적 유산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산업화 과정의 적폐뿐 아니라 민주화 과정의 이런 폐해도 당연한 청산 대상이다.

그런 점에서 촛불혁명은 미완일뿐더러 채 시작도 하지 않았다. 이 엄중한 역사적 사명을 인식하지 못하면 아무리 절대권력을 보유했어도 애당초 시대를 맡을 자격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도 촛불정신으로 선언한 ‘평등 정의 공정’의 가치 회복 없이 20, 50년 집권론은 턱도 없는 얘기다. 집권 초부터 내내 적폐청산을 부르짖는 집권여당이 정작 스스로 새 폐해를 쌓아가고 있음을 제발 두려운 마음으로 깨닫기 바란다.

 

3. 소녀상 중심주의(권경성 문화부 기자)

나부터도 16세기 임진왜란의 고통과, 20세기 일본의 침략과 강점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진정한 사죄 없이 독도까지 우겨대는 저 일본이란 나라를 아예 이 지구상에서 괴멸시켜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흉악한 범죄를 상습적으로 저지른 범죄자에 대해서도 ?죄가 밉지 인간이 미운 게 아니다 ?라며 사형제를 폐지하려하고, 변호사들이 온갖 이유를 들이대고 그 돈의 힘에 의해 판사들은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용납되기 힘든 이상한 판결로 그 형을 경감해버리기도 합니다. 때로 울분이 일지만 우리가 어쩌지는 못합니다.

극우파인 아베가 집권하는 동안에는 일본과의 관계가 쉬이 좋아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의연의 윤미향 사건에서 보여주듯이 우리 정부와 여당이 적극적이고 진실하게 한일관계개선에 접근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반일사상을 은근히 부추기며 정치에 이용만 할 것입니까? 코로나 19로 전 세계 각국이 세기적 경제위기상황이며 미치광이 트럼프에 의해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패권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바, 우리가 미중의 대결구도에서 중심을 확실히 하고 하루빨리 한일관계의 개선이 이루어지도록 정부가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그리 오래 갈 듯싶지 않은 아베 집권이후에 대비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필요로 하는 외교전략은 부정할 수 없으나,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존재하는 한 오늘날 참 더 나쁜 나라는 미국입니다. 머지않아 소인배 아베와 악덕장사꾼 트럼프는 지구상의 지도자의 위치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이 글도 남기고 싶습니다.

■예술가가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실험하는 전위한테 시장은 자리를 주지 않는다. 많이 팔려면 과녁이 크고 확실해야 한다. 도리가 없다. 예술가는 살뜰할 필요가 있다. 창작물 소유권 챙기기는 당연하다. 대인배처럼 굴다 굶어 죽기 십상이다.

‘평화의 소녀상’이라고 저작권이 없을 리 없다. 한복을 입고 맨발 뒤꿈치를 든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단발머리 소녀. 어깨에는 새, 옆 자리에는 빈 의자다. 한국저작권위원회 저작물 정보에 조각가 부부가 세세하게 등록해 둔 소녀상의 디자인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 하나 둘, 예외가 쌓이다 보면 결국 원칙이 무너지게 마련이다. 줄곧 자비는 없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제1호 소녀상이 세워진 지 근 2년 만인 2013년 여름, 교육용이니 괜찮을 줄 알고 서울 서초고가 허락 없이 원조를 베끼려다 작가의 경고에 포기한 뒤 광주와 전남 나주시 등의 소녀상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윤미향 블랙홀’ 탓이어도 별로 새삼스럽지 않은 최근 강원 태백시와의 시비에 새삼 야박하다 힐난하는 사람들이 작가는 오히려 야박할지 모르겠다.

조각은 힘이 셌다. 미학적 평가는 기자에게 주제 넘는 짓이다. 하지만 큰 부분 소녀상의 인기가 반일 민족주의 덕분일 거라는, 편승의 결과인 듯하다는 짐작은 아무래도 사실 같다. 우리 민족은 제국주의 일본에게 농락 당한 피해자이고, 수난사의 증인이 바로 일본군 위안부라는 게 종교적 신앙에 가까운 한국인 일반의 신념이다. 고통의 집단 파토스(정서)에 업혀 물신화한 소녀상은 전국으로 팔려 나갔다.

우리에게는 소녀상밖에 안 보인다. 3년마다 열리는 일본의 대표적 국제 미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가 지난해 파행한 건 ‘일본 국민의 마음을 짓밟는’ 소녀상이 출품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가 된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전(不自由展)’에는 소녀상과 함께 히로히토 전 일왕의 사진을 태우는 영상 전시물도 포함됐고 일본 우익은 그 불온에 더 격앙했다. 유명세 피해자연(然)으로 조각가의 지명도는 더 높아졌고 조각과 민족 간 결속도 단단해졌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 침해로 꾸짖을 일이었다.

‘우리라서 옳다’는 게 진영 논리다. 진실ㆍ정의의 기준이 한갓 편협한 이해관계라니. 국민을 ‘정치 종교’에 빠뜨리기 위해 국가가 동원하는 대표적인 숭배 대상 중 하나가 민족이라는 게 역사학자 임지현의 주장이다. 논객 진중권은 최근 “‘국가주의 남성 권력으로부터 여성과 개인을 보호한다’는 인류 보편 가치를 추구하는 만큼 위안부 운동은 일본인마저 우리 편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며 “일본 증오를 부추기는 민족주의 선동은 퇴행”이라 일갈했다. 한일전(戰) 프레임을 벗어야 한다.

추상은 실존을, 전체는 개인을 소외시키는 법이다. 소녀상이 기억의 수단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청동상에 목도리를 둘러주는 연민이 할머니를 따뜻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외려 망각에 필요한 알리바이를 제공할 따름이다. 현실에서는 구체적ㆍ입체적인 위안부 피해자 개인의 삶과 사정이 정형화한 민족 국가 서사로 환원될 수는 없다. 주객전도가 일어난다. 가상 위안부의 상(像)이나 민족의 이익과 운동 명분에 맞지 않으면 실재 당사자가 잘려 나갔다. 배봉기가 그랬고, 심미자가 그랬다.

그리고, 이용수가 그럴 위기다.

전형화만 문제가 아니다. 스테레오타입 자체도 문제다. 왜 하필 소녀였나. 클리셰였다면 일단 반(反)예술이다. 무의식적이거나 안이한 가부장제 순결 이데올로기의 구현이라면 반(反)페미니즘이다. 끌려가지 않았다면, ‘자발적 매춘부’였다면 피해자가 아닌가. 소녀상 틀에 맞춰 다양한 피해자 목소리를 재단하고 그들을 대상화한다면, 피해자를 주체화하는 피해자 중심주의도 아니다. 소녀상 중심주의일 뿐이다.

 

4. 대통령의 날(최윤필 선임기자)

아프리카 적도 기니의 오비앙 음바소고(1942~ ) 대통령이 무려 41년째 철권정치로 독재정치를 자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들이 부통령이고 170명의 의원 중 야당의원은 단 한 명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쿠바의 카스트로(1926~2016), 북한의 김일성(1912~1994), 스페인의 프랑코(1892~1975), 오늘날 캄보디아의 훈센(1951~ ) 등의 장기집권독재자들이 있고, 전제군주 볼키아 부르나이 국왕(1946~ )이 있지만 모두들 국가와 국민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였거나 보이고 있습니다. 음바소고는 우간다의 이디 아민(1925-2003)과 다름없는 미개인입니다. 지도자를 잘못만나 마음대로 교체하지도 못하고 쿠데타도 할 수 없는 적도기니 국민들이 안쓰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