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제28회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입상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영광스럽게도 제가 행초서로 입선했습니다. 취미활동공간인 우리 익산문화원 서예동아리가 생긴지 10년 만에 제가 처음으로 국전에 입선하였다고 회원들이 대단히 좋아하십니다. 서예입문 5년차라서 먼저 시작한 분들이 여럿인데 제가 감히 먼저 입선하니 죄송하기도 합니다. 함께 입선한 석봉선생은 우리 동아리에 들어 온지는 불과 3년이지만, 이미 서예계에 입문한지는 20년이 넘는 분이라 이미 작가 같은 수준이신 분입니다. 이제 꼼짝없이 열심히 글씨를 써야 할 듯싶습니다. 지난 6개월 이상 작품연습에 매진한 결과라지만 졸작의 부끄러움을 덮지는 못합니다. 문화원 앞에 축하 프랑카드까지 걸어놓으니 더욱 부끄럽습니다.
4일 어머니 89회 생신가족모임
요즈음 어머니 건강이 좋으십니다. 농장가든에 부모님과 육남매가 모두 모였습니다. 은희네는 다미가 아이를 가졌다는 기쁜 소식이 있었고 승환이가 아들을 낳은 기쁨으로 선희동생네가 식사비를 기꺼이 냈습니다. 난희동생도 아들 석중이와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6일 해우회 삼례문화촌 모임
코로나19로 부부모임은 중단되고 있으나 우리 진성회원들(남성)만큼은 모이자는 뜻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8개월여만에 만나 크게 성공한 삼례문화예술촌을 두루 구경하고 만경강 열차카페에서 즐거운 대화의 시간도 가졌습니다.
11일 대전 동춘당 답사와 대청호 드라이브
한 달여 전에 《金浩然齋(1681-1722) 시 깊이 읽기》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여류시인 김호연재가 외롭게 살던 대전 동춘당 공원을 찾기로 합니다.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 1606~1672)의 고택이 바로 이곳에 있는 본가입니다. 현재는 대전 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이며 조선시대에는 회덕군에 속했고 지금은 대전광역시 동춘당 역사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본가는 후손들이 살고 있어 제일 앞의 건물과 앞마당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본가 앞에 있는 동춘당은 송준길이 지은 별당으로 보물 제 209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현판은 송시열이 썼다고 합니다. 아주 멋있게 잘 지어진 집입니다. 그러나 개방하지 않고 굳게 닫혀 있어 담장 너머로 구경합니다. 종택 바로 오른편에 약간 높은 언덕에 우리가 정작 찾아간 ‘소대헌 · 호연재 고택’<민속문화재 제290호>이 있습니다. 이 고택은 송준길의 둘째 손자 송병하(宋炳夏, 1646~1697)가 분가해서 살던 집입니다. 이어서 송병하의 차남 송요화(宋堯和, 1682~1764)와 며느리 안동김씨(1681~1722)가 살았습니다. 고택 명칭은 송요화의 소대헌, 안동김씨의 호연재에서 따온 것입니다. 송준길에게는 증손, 증손부가 됩니다. 김호연재는 허난설헌에 버금가는 회덕의 여류시인이나 당시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살다간 외롭고 슬픈 여성이었습니다. 마당을 거닐면서 양반가문의 지식인 여성으로 태어나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남편을 대신하여 가정사에 얽매여 살면서 오로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외로움을 견디어내던 슬픈 호연재를 생각합니다. 여기 저기 탐방객들이 호연재의 시를 읽어볼 수 있도록 시가 적힌 설치물들을 전시하여 놓았습니다.
공원 앞에 있는 <오리사랑 송천점>에서 7,000원짜리 오리뚝배기탕을 먹었습니다. 국물맛이 끝내줍니다. 너무 맛이 있어 칭찬을 해드리고 두 그릇을 포장합니다.
이왕 나들이 김에 근처에 있는 대청호를 구경하기로 합니다. 충주호와 의암호 다음으로 큰 호수입니다. 비가 슬슬 내리지만 계획대로 대청호 수변길를 달려 보은군 회남면 소재지까지 드라이브를 합니다. 갈 때는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회덕 JC를 거치며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했는데, 올 때는 네비게이션이 남부순환고속도로로 안내합니다. 날씨가 적당히만 궂어서 오히려 덥지 않고 좋은 여행이 되었습니다.
14일 전국서예대전 시연회 참가와 다보성 갤러리
가원이 전국서예대전에서 특선했습니다. 이당 선생님의 권유로 시연회에 참가합니다. 시연회는 천도교 중앙교당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각 부문별 특선자중 희망자만 참가하는데 대략 30% 정도인 30여명이 참가하였습니다. 이 시연회를 거쳐 현장에서 심사위원들이 우수상과 대상을 결정합니다. 우리 가원은 첫 특선이라서 참가하여 구경하는데 만족했습니다. 금년에 취임한 김기동 신임이사장이 고교 2년 선배라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10여년 전에 친구인 김용문 선생이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선배가 만든 책이라면서 〚篆刻 千字文〛한권을 준 일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전각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던 때인지라 ?대단한 선배님이 있구나?하고 서가에 꽂아 두었습니다. 오늘날 제가 서예에 입문하고 보니 그 책의 편찬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지, 그리고 김기동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잘 알게 되었고 그래서 더 반갑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시연회가 끝나고 바로 옆 빌딩인 수운회관1층에 있는 경매화랑인 《다보성갤러리》를 관람합니다. 처음으로 알게 된 미술관인데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들이 실로 대단합니다. 다보성 미술관은 83년에 문을 연 이래 많은 수준 높은 고미술품과 귀중한 사료(史料)를 수집(蒐集)하여 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시립, 공립, 각 대학박물관, 사립박물관 등에 공급시키는 일에 힘써 왔다고 합니다. 현관에서 우리 가원이 우연히 만난 어느 어른에게 꾸벅 인사를 드립니다. 그 어른이 조금 당황하시면서 인사를 반갑게 받으십니다. 그 분이 바로 이 미술관을 창립하고 운영하시는 70대 초반의 전 한국고미술협회회장이신 김종춘 선생이라고 합니다. 가원 대단합니다. 왠지 인사를 드리고 싶어 드렸답니다. 1층 전시실에 있는 도자기들이 나를 황홀하게 합니다. 완전 보물급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들이 많습니다. 국립박물관이나 호암미술관, 간송미술관 소장품 전시장에서 국보급 보물급 자기들을 모두 보았지만 그 못지않은 도자기들입니다. 지난 수십 년 간 우리의 문화유산들을 모으고 전시하고 여러 박물관에 공급하고 개인들에게도 판매하는 일을 해 오신 김종춘 선생님에게 존경을 드립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간송 전형필(1906-1962)선생만큼이나 큰 일을 해 오신 분이라 여겨집니다.
2층으로 올라가보니 조금은 가격이 낮은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가격까지 매겨져 있습니다. 기 백만원에서 기 십만원까지의 가격들이 적혀있는 청자나 백자들, 그리고 가구들입니다. 가이드가 아주 반갑게 맞이하며 설명해 줍니다.
?이처럼 고미술품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오랜만에 뵙습니다.?라며 두 권의 전시회 도록을 선물로 줍니다. 정말 고맙게 받았습니다. 오늘 뜻밖에 다보성 갤러러를 알게 되었는데 가이드는 친절하게도 다음 전시회가 있게 되면 알려드리겠다고 합니다.
18일 성포 설레임 버스킹
지도강사인 김원겸 선생이 당신이 가르치는 4개 팀으로 버스킹을 계획했습니다. 버스킹은 성당포구금강체험관 뒤 캠핑장에서 열었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우리만의 잔치인가 했더니 웬걸 아주 많은 젊은 엄마 아빠들과 어린이들이 물놀이를 하느라 모여있습니다. 덕분에 매우 흡족한 버스킹이 되었습니다.
출연팀은 우리 설레임 팀(혼성), 남성의사분들 팀(남성), 성당초학부모팀(여성), 도서관직원팀(여성)이며 팀별로 5곡을 부르고 싱 얼롱을 하게 되니 무려 두 시간 반이나 함께 하였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고향인 이곳 성포에 농장을 가지고 있어 금년에 처음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대훈 전 회장께서 맛있는 냉면을 사주셨습니다.
29일 황화정 탐방
남원출신 임란의벙장이자 문신인 양경우 선생(1568- ?)이 쓴 제호집을 읽다가 한시 <황화정>을 발견하고 관심을 가지고보니 신증여지승람 여산군조에 나와 있습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건물이지만 황화정이 있던 장소인 여산군 황화면은 1963년에 충남으로 넘어가 버림으로서 이젠 전라도땅이 아니라 충청도땅이 되어버린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황화정(皇華亭)은 지금은 충남 논산에 속하지만 조선시대와 1962년까지만 해도 전라도 땅 여산에 속했습니다. 본디 조선시대 여산군 피제면, 북삼면, 합선면이 합쳐져 1914년에 황화면이 되었는데 1962년에 충남으로 행정구역이 넘어가 1963년부터 연무읍에 속하게 되고 황화정리라는 里단위지역명칭만이 남아있습니다. 황화면의 명칭은 바로 이 황화정에서 유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곳 황화정은 전라도 첫 고을인 여산 초입에 세워져 전라도 신구 관찰사가 전주에 부임하기 전 부신(符信)을 주고받으며 인수인계를 하던 상징적 장소였습니다. 다시 말해 ‘호남 제일문(湖南 第一門)’이 황화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만 상태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전라감사를 지낸 풍석(楓石) 서유구(1764∼1845)의 공문서 일기인 '완영일록(完營日錄)'을 보면 새로운 전라감사(도지사)가 부임하면 이 황화정에서 신구감사 임무교대식을 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 행사는 화려하고 성대했습니다. 수백 명의 취타대가 도열했고 지방의 수령(군수, 현감)들이 황화정에 나와서 신임 감사를 맞이했습니다. 이 황화정의 정확한 위치는 논산훈련소 입영심사장내에 있었다고 합니다. (여산출신 향토사학자 최정호 선생이 알려주신 내용)
점심을 먹고난후 차를 몰아 연무읍 황화정리를 찾아 봉곡서원과 황화정 3구 경로당을 찾았습니다. 현재 尤庵 宋時烈(1607-1689)이 썼다는 황화정비는 1966년 봉곡서원을 이전 건립하면서 서원앞에 옮겨 놓았던것을 2017년에는 황화정리 3구 경로당 앞으로 옮겨서 세워져 있습니다. 비석의 후면에 군수인 정채화(1611-1677)가 경술년(1670년) 8월에 황화정을 다시 건립하고 세웠다고 쓰여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서동공원에 들러 얼마남지 않은 연꽃을 살피고 왔습니다. 요즈음 가원이 연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연을 오래 눈여겨 보기도하고 사진도 많이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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