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신축년 정월

청담(靑潭) 2021. 2. 3. 22:43

신축년 정월

■1일 : 신정

본디 新正은 단 하루만 공휴일이기에 가족들이 모이기 어렵지만, 금년은 금요일이라서 일요일까지 3일 연휴가 되었다. 내일이 아버지생신이시나 코로나 하루 확진자가 1천여 명씩 발생하여 가족들까지도 5인 이상 모임이 금지되고 있으므로 우리도 가족모임을 생략하고 각자 일정을 잡아 찾아뵙기로 하다. 이 대표가 내려왔으므로 부모님과 함께 떡국으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코로나 19 신정은 그렇게 지나갔다.

 

■16일 : 강경 문화재 답사

강경읍에 소재하는 문화재를 다시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일어 점심 후 출발하다. 현재 충남 논산시 강경읍의 남부는 익산시 망성면과 접하고 있는데 본래 강경읍 黃山里는 우리의 여산군(현 익산군 여산면 낭산면 망성면 일대)에 속하는 땅이었고 그 황산리에는 소중한 유림 문화재인 죽림서원, 팔괘정, 임리정이 있다. 본디 우리 전라도 여산군에 있는 세 문화재가 졸지에 충남의 논산군 지역으로 귀속된 것이다.

※전북 여산군의 지역이었는데 황산(黃山)과 황산포(黃山浦)가 있으므로 황산이라 하였는데 1895(고종 32년)에 은진군 김포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왜식 이름으로 황금정(黃金町)이라 하여 강경면에 편입되었다가 1931년 강경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강경읍에 소속되었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황산동이라 하였다. 1988년 8월 1일 동을 리로 고쳐 황산리라 부르게 되었다. <강경읍 홈페이지>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남 땅으로 변한 황산리는 아름다운 금강을 사이에 두고 강경읍의 강변지역 모두를 아우르는 땅이다. 참으로 아쉽다. 황산리 문화답사는 세 번쯤 다녀왔는데 아무래도 임리정은 확실한 답사기억이 나지 않아서 확인하려는 마음이 컸다.

 

□팔괘정[八掛亭] : 충남 유형문화재 제 17호

먼저 죽림서원 뒤편 언덕에 세워져 있는 팔괘정을 찾았다. 팔괘정 부근의 산을 황산근린공원으로 조성하여 잘 가꾸어 놓았다. 팔괘정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458-1631)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스승이 말년에 머문 이곳에 헌종 4년(1663)에 지었다고 전하는 정자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추모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금강 변에 남향으로 세워졌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 왼쪽으로 2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지붕은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이다. 건물 앞으로 잘 정비된 금강과 멀리 용안 용두산까지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가 그만이다. 건물 안에는 시를 쓴 현판이 걸려있고, 건물 뒤의 엄청나게 큰 바위에 송시열이 새긴 글자<夢挂壁>가 있다. 꿈을 걸어놓은 벽이라는 뜻인데 우암(尤菴)선생이 <벽>자를 멋지게 변형시켜 쓴 것 같다. 또 <靑草岸>세 글자도 있는데 역시 <>자를 약간 변형시킨 것이라 여겨진다. 이후 李重煥(1690-1756)은 이 八卦亭에 머물며 유명한 『擇里志』를 탈고했다고 한다.

팔괘정 뒤 언덕 정상에 아주 멋진 전망대가 세워져 있어 올라가 금강이 휘감아 도는 드넓은 강경․함열 들판을 바라다보았다. 4대강 사업으로 정말 금강은 깨끗하고 아름답게 정비 되었다. 끈질기게 4대강 사업을 물고 늘어지는 인간들도 금강에는 별 말이 없는 듯 하고 김호길 교감은 금강 변을 따라 조성된 자전거 길을 따라 자전거를 몰고 대청호까지 다녀오며 고마워한다. 지난여름 대홍수 때, 낙동강과 섬진강에서 겪은 큰 피해 원인은 4대강 사업이 아니라 부실한 하천관리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죽림서원[竹林書院] : 문화재 자료 제75호

정문이 닫혀있어 들어 갈 수 없어 주위를 돌아보는 수밖에 없다. 금강을 바라보며 야트막한 산을 두르고 자리한 죽림서원이 이 문화재 지역의 핵심이다.

1626년(인조 4)에 유림들이 세운 황산사(黃山祠)가 그 기원으로 이 해는 바로 김장생이 하향하여 바로 옆에 임리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해이다. 1665년(현종 6) ‘죽림’이라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원래 이이와 성혼, 김장생을 배향하였는데, 이때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까지 배향하였다. 이어 1695년(숙종 21)에는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이곳은 1653년(효종4년) 송시열과 윤선거((尹宣擧)가 만나 주희(朱熹)의 사상을 비판하고 개혁적 사상을 가진 윤휴를 두고 논쟁을 벌였던 곳이다. 윤휴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사서의 경전을 주희와는 다르게 해석을 내렸는데 주희의 해석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송시열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지만 윤선거는 경전의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윤휴의 학문이 높다고 평가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서원의 건물배치는 외삼문과 유생들이 공부하는 방이었던 강당인 憲章堂,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西齋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신문을 거쳐 竹林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祠宇가 있다. 사당 앞 좌우에는 공적비, 중건비 등이 세워져 있으나 좌대만 남아있는 것도 있다. 제향인물은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등 6인을 祭享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문묘에 배향된 유현들이어서 <六賢書院>으로 불려 지기도 하였다.

□임리정[臨履亭] : 충남유형문화재 제67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458-1631) 선생이 1626년(인조 4)에 하향하여 후진을 교육하던 자리로서 그는 이 정자를 짓고 원래는 黃山亭이라 하였으나 그 후 《논어》의 ‘如臨深淵(여림심연)’, ‘如履薄氷(여리박빙)’이라는 문장의 뜻을 따서 임리정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두려워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하는 것 같이 하며, 엷은 얼음을 밟는 것같이 하라.>는 뜻이다.

정자가 자리한 언덕의 동쪽 아래에는 김장생이 창건한 죽림서원(竹林書院)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는 그 당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종사(宗師)로서 학문은 물론 정치와 경제면에 이르기까지 큰 공헌을 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왼쪽 2칸은 대청이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이며 그 전면에는 빈 칸을 안으로 들여 위는 누마루로, 아래는 불을 때는 아궁이로 만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용안면 소재지에 들러 평소 윤길중 이사님께서 자주 자랑하시는 지역특화사업기념비를 찾아보고 왔다. 존경하는 윤 선생님께서는 고향발전을 위해 추진위원장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17일 : 내 변산 직소폭포 등산

김호길 교감샘, 박숙경님 부부와 선운사에 가려다가 도중에 행선지를 직소폭포로 바꾸었다. 아무래도 눈이 적당히 쌓인 내변산의 정경이 더 아름다울 것 같기도 하고 직소폭포까지 다녀오는 운치가 그만일 것 같아서이다. 예상대로 즐거운 산행이 되었다. 두 분은 수 년 만에 찾았다 하신다. 우린 2년에 한 번 정도는 찾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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