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삶과 문화
2019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재
■이 책을 통하여 한국의 여성사, 위안부 문제, 여성의 노동운동, 페미니즘, 중국의 전족, 일본의 하녀, 프랑스의 유모제도와 모유와 우유, 인구문제와 피임, 낙태, 식민지 여성인권운동, 이슬람의 여성운동 등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제1장 고려시대의 여성 : 열녀와 절부
●고려가 성적으로 개방적이었다며 가장 많이 예로 드는 것이 고려가요이다. ...<만전춘>이나 <쌍화점>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성에 대해 규제했던 사실도 보인다. 유부녀가 간음하면 자녀안(恣女案)에 이름을 올려 바느질하는 공인(針工)으로 삼았다.
●규제는 어디까지나 유부남과 유부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배우자와 사별하는 경우 재혼은 일반적이었고 수절이 강요되지 않았다.
●고려왕조 건국 후 수 백년 간 열녀의 숫자는 거의 없다 할 정도로 적다. ...그런데 고려 말에 이르면 상황이 달라진다. 신진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여성의 정조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며, 이런 행위를 한 여성들이 열녀이고 이들의 행위는 널리 알려 모두가 본받게 해야 한다는 인식이 대두되고 있다. ...삼종지도로 대표되는 여성의 종속성은 한층 강화되었다. ...고려시대에 열녀는 수절을 선택했다면 조선시대의 열녀는 수절을 강요받았다.
제2장 <딸에서 며느리로>정체성 변화와 재산권
●조선 초기 양동마을은 사위에서 사위로 이어지는 마을이었다. ...그리고 이언적(1491-1553)이라는 혁혁한 인물이 출현하면서 두 성씨가 공존하는 부계마을로 전환되어 갔다. 이때가 16세기 중후반인데 이는 조선이 지향했던 부계적 가족질서가 비교적 빨리 정착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이 지역 여성들이 <딸에서 며느리로>정체성의 전환을 가져오게 했다.
●사실상 조선의 가족제도가 부계중심의 사회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오랜 기간 여자집안과 남자 집안이 대등하게 만나던 분위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여성들은 며느리로서 쌀 때 집안 운영이나 재산권 행사에 더 적극적이었다. 며느리로 사는 것은 더 많은 능력을 요구했지만 동시에 더 많은 권한을 가져오기도 했다.
제3장 식민지 조선여성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와 지속되는 트라우마
●1932년 1월 상하이로 전선을 넓혀 갔다. 이때 일본 해군에서 최초로 위안소를 열었고 곧이어 육군에서도 위안부단을 조직했다. 그 동기는 일본군이 중국인 여성을 강간하여 중국인의 반일감정이 높아지는 것을 막고, 병사들이 성병에 걸려 병력이 저하되는 것을 예방한다는 명분이었다.
●1938년 1월 중국 상하이에 개설되었던 육군위안소 벽에 걸려 있던 <위안소 규정>중 일부이다. 상하이 파견군 병참사령부의 명령으로 되어 있었다.
1. 본 위안소는 육군 군인, 군속만이 입장할 수 있다. 입장하는 사람은 위안소 외출증을 갖고 있어야 한다.
1. 입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접수를 하고 요금을 지불한 뒤에 입장권과 콘돔 한 개를 받아야 한다.
1. 입장권의 요금은 하사관, 병사, 군속은 2엔, 장교는 5엔이다.
1. 입장권을 구입한 사람은 지정된 방에 들어가 30분 동안 머무를 수 있다.
1. 규정을 위반하고 군기를 어지럽힌 사람은 강제로 퇴실시킨다.
※콘돔 사용은 병사의 의무사항이었다. ...술 취한 사람의 입실 및 음주를 금하고 있었다. ...일본 위안소의 위안부 다수는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이다.
●...정신대나 근로보국대, 간호부 등의 명목으로 끌려 왔으며 속아서 위안부 생활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국경을 넘어 온 소련군은 민간인에 대한 약탈과 폭행을 감행했다. 현지에 버려진 위안부 여성들은 다시 성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위안부였던 많은 여성들이 마을이나 가족의 비난을 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위안부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침묵을 선택해야 했다.
●1988년 일본 남성들이 한국에서 성매매 관광을 하는 문제(일병 기생관광)를 논의 하는 한 세미나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생산하고 체계화한 제도였으며, 20세기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시 성노예 사건이다.
제4장 1970년대의 여성 노동운동
●1970년대의 노동운동의 주역은 여성노동자였다. ...당시의 통계자료를 보면 가족과 함께 농림어업에 종사하는 여성 경제 활동자가 1960년 약 70%였고 도시지역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여성은 19%정도였다. 1975년에는 농림어업종사자가 10%가량 감소하고 도시지역 취업자는 31%로 증가하였다 .
●1977년 당시 임금은 제조업의 경우 남성은 약 10만 3천원이었는데 여성은 3만 3천원으로 남성의 42%정도였다. ...1983년에는 98%의 노동자가 산업체 학교에 취학한 것으로 나타났다.
●1972년 동일방직에서 단위노조로는 최초로 여성이 노조 지부장에 당선되었다. ...원풍모방(한국모방)은 ...민주노조를 출범시켰다. ...이들은 민주식 절차를 거쳐 남녀 임금 격차 해소, 결혼 퇴직제 철폐, 생리 휴가 등 여성 의제를 제기했다.
●YH무역은 자본철수, 해외도피 과정에서 공장 이전과 위장폐업을 시도했는데 이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1979년 8월 노조가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경찰의 강제 진압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했고...김경숙은 1958년 전남 광산에서 태어났다.
제5장 21세기 한국사회의 여성혐오와 청년세대의 삶
●최근 한국사회를 달군 뜨거운 사회 이슈이자 언어는 <혐오>이다.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와 함께 여성을 둘러싼 이슈들이 혐오와 연관되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여성혐오는 <미소지니>라는 이름으로 그 나름의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다며 페미니즘을 공격하거나 성 평등은 이미 이루어졌다며 페미니즘을 낡은 기획으로 치부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의 물결을 타고 분출된다.
※현재 대통령 선거 운동기간 중에 20대 남성들이 결속하여 특정정당 후보를 크게 지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에서 지나치게 페미니즘을 강조한 연유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한다.
●노동시장에서 느끼는 불안과 연애와 결혼시장에서 겪는 남성들의 좌절감은 남성 되기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근대사회의 지배적 남성성은 병역의무를 한 이성애자로서 경제력이 있는 생계부양자이다.
●더욱이 교육과 취업에서 뒤지지 않는 여성들을 보며, 남성만의 병역의무 제도는 남성에게 공정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여성은 이제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의무를 똑같이 행해야 할 경쟁자가 된 것이다.
제6장 전족과 중국여성
●10세기 말 궁중 여성의 <금련무>에서 기원하는 전족은 그 후 북방이민족에 시달리던 12세기 북송말기부터는 인위적으로 발을 작게 만드는 전족으로 나타났다. ...남송대에는 여성에게 엄격한 정절이 강요되면서 전족은 정숙한 여성의 표상이 되었고...대다수의 남성이 이 작은 발을 사랑하고 찬미했다.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한족이 훨씬 우월하다고 하는 화이관이 지배하면서 전족은 한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고유문화로서 높은 지위를 부여받았다.
●청대에는 강남보다는 화북지역의 전족여성 비율이 높았고. 농촌보다는 도시에서의 전족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서양 선교사와 중국의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전족폐지 운동은 1870년대에 시작되었다. ...1906년 서태후는 전국에 전족금지령을 내렸고 지금까지의 <만주족과 한족의 통혼금지>도 폐지했다.
제7장 근대 일본의 하녀 : 교육인가 노동인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기까지 일본 최대의 여성 직업은 하녀였다. ...하녀는 결혼하기 전에 일시적으로 거쳐 가는 일이었고, 고용주와의 관계는 예속적이었다.
●부유한 농민이나 상인가문에서는 신분 높은 가문에서 하녀를 경험하는 일을<장래 자신의 집안을 꾸려 나가기 위해 예의 작법과 식솔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신부수업>으로 생각했다. ...인기가 있는 곳은 보수는커녕 하녀의 가족이 생활비를 지불하고 근무처에 보내기도 했다.
●하녀를 고르는 면접을 치를때 어머니나 친척 여성인 보호자의 동반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녀를 두는 것이 고용계약이 아니라 부모를 대신하여 어린아이를 맡는 것인 만큼 가정교육을 보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녀 본인이 주인집의 사생활에 관심을 보이거나 급여를 묻는 경우, 혹은 보호자 없이 혼자 면접을 보러 오는 경우가 가장 나쁜 자질로 여겨졌다.
●1900년대 초반의 하녀는 ...숙식을 제공받는다는 이유로 하녀가 자신의 급여를 쓰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결혼자금으로 저축을 하거나 가족의 생활을 위해 선불로 받아갔다. ...이러한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과정이야말로 장래 훌륭한 부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수양의 광정이라고 강조되었다.
●새로운 고용주인 신중간층의 생활은 이전의 상류가문의 생활과 매우 달랐다. 일단 경제력이 부족했다. ...신중간층 부인들은 본인들부터 가사노동에 서툴렀다. 신부수업의 필수코스는 상류 가문의 하녀가 아니라 고등여학교의 양처현모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하녀의 목적은 오로지 경제적 이유에 집중되고 하녀의 출신계층도 낮아졌다. ...당시의 1인 하녀 시스템에서는 아침부터 밥까지 혹사당할 뿐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제8장 신여성의 새로운 직업, 정원 디자이너
●19세기 영국에서 여성의 새로운 직업분야로 정원디자이너가 형성된다. ...미술공예운동의 영향으로 중간계층 주택에 정원을 만드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들은 집에 딸린 작은 정원을 만들면서 여유롭고 아름다운 전원생활, 소비 중심이 아니라 내 손으로 만드는 창조의 기쁨과 충족감을 느끼는 자급자족 생활을 동경하는 마음을 담았다.
●정원 디자이너라는 업종을 개척한 지킬(1843-1932)은 개인적인 재능과 인맥이 기본 바탕으로 있는 동시에 시대의 운이 맞아떨어진 덕분에 업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제9장 프랑스에서의 수유와 모성
●1780년 무렵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2만 1천 명의 유아 중 약 1천 명만이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자랐을 뿐, 나머지는 모두 유모에게 맡겨졌다. ...이 관습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에서도 존재했는데 프랑스에서는 10세기 무렵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르네상스 이후 귀족사회에서 여성성은 출산 및 양육보다는 매력과 사교, 그리고 세련된 매너에 접근해 갔다. ...18세기에는 이 관습이 프랑스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일반화되었다.
●대도시에 설립된 유모협회에서 파견된 <유모 알선인>들은 왕복여행을 통해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부모에게 아이의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멀리 있는 유모들의 경우에는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했다. ...부모들은 자식을 거의 보러가지 않았으며 안부도 잘 묻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보던 아기들의 사망률은 18.7%를 넘기지 않았던 반면, 유모에게 맡긴 아이들의 사망률은 38.1%에 달했다.
●1860년 경 파리의 재가 유모들은 약 3880명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유모제도는 19세기 말까지 번영했다. ...19세기 말에 프랑스 전체를 통틀어 한 해에 신생아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0만 명의 아기가 유모의 집으로 갔다.
●1860년대 파스퇴르 혁명이후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살균 소독된 우유와 젖병이 보급되었다. ...유모협회는 1936년에 완전히 사라졌다. 젖병의 보급은 역설적으로 부모와 자식을 가깝게 만들었다. 부모들은 아이를 농촌 유모에게 보내는 대신 아침에 직장 주변의 주간 탁아소에 맡기고 저녁에 데려올 수 있었다.
●18세기부터 의사들은 초유와 모유의 이점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한다. ...18세기에는 미리 짜놓은 젖병을 이용한 수유, 물이 섞인 우유를 먹이는 시도 등 인위적인 수유의 실험들이 시도되기 도 했다. ...19세기 말 파스퇴르 살균법의 발명 이후에야 인공적인 유유수유가 가능해졌다. 우유응 많은 경우 소화불량과 알레르기를 유발했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생산되면서 가장 가난한 계층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1909년 산후 일자리 보장을 조건으로 8주간의 무급휴가가 제공되었다. 그러나 단지 초등학교 교사들만이 1910년부터 급여를 보장받는 출산휴가를 누릴 수 있었다.
●1949년 발간된 <제2의 성>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는 모성적 본능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성이 여성성과 인간성을 소외시킨다고 단언했다.
●1990년대 초 경제위기의 심화와 사회의 전반적인 위축 속에서 여성의 실직이 남성의 경우보다 월등히 높았으며 페미니스트들의 입지도 위축되었다.
●세계보건기구는 모유수유를 권장하는 공문을 발송했으며 이는 1999년 유럽연합의 강령으로도 나타났다.
●현대 프랑스 사회는 국민의 재생산 내지 인구증대에 각별한 관심을 할애하면서 아동의 출산과 양육을 위한 제반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가 인간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독립적인 기반을 확보하고 사회적으로 진출하는 것까지는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 남성 육아휴직의 약소함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들 역시 어머니 몫의 일들을 도울 뿐이지 가사나 육아 업무를 자신의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제10장 근대 독일의 인구정책
●독일의 인구는 1800년 2,500만 명에서 1900년에는 5,600만 명으로 늘어나 두 배 이상 증가했다.
●1990년 중반부터 출산율의 감소 추세가 급격해짐으로써 정부의 인구정책은 출산장려정책으로 전환되었다. ...1900년부터 피임용구 거래를 규제하기로 결정했으며 음란에 관한 형법 조항에서 외설스러운 목적으로 사용되는 물품들, 즉 피임 도구의 선전과 진열을 금지했다. 특히 법정에서 엄격하게 처벌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이전의 적극적인 출산장려정책을 포기했다. 이제 초점은 양적인 인구부양책보다 사회복지정책에 맞추어지면서 더 많은 아이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건강한 아이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가장 획기적인 변화는 피임에 대한 공식 태도로, 피임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피임방법과 도구들에 접근하기가 더욱 손쉬워지자 그동안 운명으로 여겼던 임신과 출산을 이제는 여성 자신이 계획적으로 조절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 ...여성들은 부유한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에게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허용해 달라고 건의했다.
●우선 낙태 시술을 받은 여성과 그것을 도와준 사람들을 징역대신 단순한 구금으로 처벌함으로써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치욕적인 처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나치정권의 인구정책은 ...1933년 법령에 의해 경찰은 수천 명의 매춘부를 체포했다. ...정치적, 인종적 기준에 부합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적극적인 출산장려정책으로 ...결혼자금을 대여해주는 것이었다. ...가장의 경우 아내와 자녀들의 몫으로 소득세 및 상속세의 일부를 환불받는 제도이다. ...다섯 번째 아이부터 매달 자녀양육비를 전부로부터 지급받게 되었다.
●1935년 ...뉘른베르크 법정은 유대인, 집시, 흑인들과 독일인들 사이의 성관계와 결혼을 금지했고 ...불임시술을 받은 자와 일반인의 결혼도 금지했다. 1933-45년 가임여성의 약 1%에 달하는 약 20만 명이 우생학적 이유로 불임시술을 받았다. ...인종적으로 순수한 아리안 독일 여성에게 낙태를 시행한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다.
●1992년 ...낙태를 법으로 금지하는 조항을 유지하기는 했으나, 임신 12주까지는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면 낙태를 허용해줌으로써 태아의 생존권과 여성의 선택권을 모두 존중하는 절충안을 마련했다.
※한국은 모자보건법을 통하여 22주 이내에 낙태가 가능하다.
-우생학적, 유전학적, 정신장애, 신체질환
-전염성 질환
-강간이나 준 강간
-혈족, 인척간 임신
-모체 건강
제11장 소비에트 정권 초기의 가족․출산정책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이혼이 자유로워졌고 혼외자녀가 법적으로 인정받았으며 세계에서 가장 먼저 낙태가 비 범죄화 되었다. ...결혼은 배우자 쌍방 혹은 적어도 일방이 그 취소를 신청하면 취소되었다.
●...여성이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음 막고 여성의 사회, 경제활동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배우자는 상대방이 곤궁한 처지에 있어서 최소한의 생계 유지비를 가지지 못하고 노동능력이 없는 경우에만 부양의무를 지도록 하였다. ...볼세비키 이론가들은 사회주의적 결혼이란 인간과 인간사이의 숭수한 사랑의 감정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재산소유문제가 끼어들 필요가 없다고 모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혼생활에서 배우자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경제적으로 책임지게 한 것이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는 낙태가 비교적 관대하게 받아들여졌고, 중세에도 기독교회의 일률적 지배라고 하는 간념에서 연상되는 선입견에 비해 본다면 낙태에 대한 태도가 그리 엄격하지만은 않았다. 반면, 근대 이후 유럽의 모든 사회에서 낙태는 도덕적 악으로 여겨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형법상으로 범죄로 규정되었다.
●낙태 합법화 찬성론자인 겐스는 낙태 합법화가 낙태 여성의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1920년대 소비에트사회에서는 이념적인 이유에서건 경제적인 이유에서건 여성의 해방이라는 문분을 거부할 수 없었다.
...볼세비키 정부는 친 출산정책을 펴고자 하였다. 즉 여성이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과 사회 노동에 종사하는 것을 동시에 장려하는 이중의 장려정책을 취하였다.
●1930년대...스탈린 집권이후 보수 회귀적 여성 가족정책이 등장하고 전통적 모성이 찬양되었다. ...여성에게 어머니 역할을 강조하면서 소련 정부는 강제적 친 출산정책으로 나아갔다.
제12장 세계화 시대 유럽의 이주 여성들
●유럽은 수준 높은 인권의식과 안정적인 복지 제도로 인해 많은 이주민이 정착하고 싶어하는 지역이다. 현재 유럽에는 1,500만~1,600만 명에 이르는 제3세계 출신의 이민자들이 살고 있다.
●18세기와 19세기 유럽은 이민을 떠나는 곳이었다. 수 백만 명의 유럽인들이 신대륙이나 그드링 건설한 식민지로 이주해 갔다. ...2차대전 이후로는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지역으로 변모했다. ...독인은 터키출신 노동자들, 영국은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들,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출신 노동자들의 수가 빠르게 늘어났다. ...1970년대 이후 유럽의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실업률이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사회의 부담이 되어 갔다.
●2010년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다문화 사회를 건설하려던 독일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시인했으며, 2011년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과 영국의 캐머런 총리도 다문화주의 실패를 인정했다. 최근에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밀려오는 난민들로 인해 유럽이 분열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역시 다민족국가, 다문화사회로 변화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국내체류 외국인은 2019년 현재 241만 명 선으로 그 비율은 전체 인구의 5%에 이른다.
제13장 20세기 전환기 미국에서 <인디언>으로 살아가기
●20세기 전환기 미국 연방정부는 원주민에 대한 동화정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산비들기(1888~1936)는 미국의 원주민 여성작가이다. ...그녀는 원주민도 느끼고 생각할 줄 알고 공감할 줄 아는 사람임을 알리고 싶었다. ...로키산맥 북서족의 콜롬비아 고원지대에서원주민 조상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약 9500년 전 부터였다고 한다.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산비들기가 태어나기 약 80년 전이라고 한다. ...원주민 생활에 큰 변화가 시작된 것은 1870년대부터 이 지역으로 백인이 몰려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872년 인디언 보호구역을 설치했다.
●산비들기는 자서전에서 스스로를 혼혈인이라고 했고, 소설 주인공으로도 혼혈인을 내세우면서
원주민 세계와 백인 세계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들의 고난과 소외감을 호소했다.
제14장 라틴아메리카 여성의 삶과 문화 : 네 여성의 삶과 투쟁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여성은 어느 지역의 여성들보다 성적인 착취,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UN 여성 기구에 의하면 여성에 대한 폭력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나라 25개국 중에서 절반 이상이 라틴 아메리카 여성들이다.
●말린체(1501-1528)는 아스테카 나우아족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나우아 귀족의 딸에서 마야 귀족의 노예가 된 것이다. ...코르테스에게 바쳐진 스무 명의 여성 노예중에 말린체가 있었다. ...아스테가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 ...코르테스는 말린체를 확실히 믿게 되어 정부로 삼았다. 1521년 무더운 여름날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되고 코르테스가 아스테가 제국의 통치자가 되면서 말린체의 효용가치는 그만큼 떨어 졌고 그리하여 점차 무대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코르테스 사이에서 낳은 아들 마르틴 코르테스가 최초의 메스티조이다. ...말린체는 아무도 자신을 구출해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운명을 개척해 나간 것이다
●소르 후아나(1651-1695)는 에스파냐의 식민지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크리오요(에스파냐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유달리 총명했고 ...副王(1535부터 스페인은 부왕을 파견하여 왕권을 대행)궁정에서 후아나는 시와 희곡들을 쓰고 음악을 배우고 철학, 자연과학을 공ㄹ부했다. ...1667년 후아나는 수녀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녀의 신분으로 그녀가 쓴 시와 희곡은 국가 행사에서 낭송되거나 공연되기도 했다. ...여성이 교육받은 권리를 주장했다. ...1693년 종교재판에서 그녀에게 글을 쓰고 출판하는 작업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호세파 오르티스(1768-1829)는 멕시코에서 크리오요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1791년 대학에서 만난 미겔 도밍게스와 결혼하여 크리오요 상층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하게 되었다. ...1808년 프랑스가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여 에스파냐의 페르디난드왕이 물러나는 상황이 벌어졋다. 그러자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독립에 대한 전망이 더 밝아졌다. ...1817년 다시는 반란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석방되었다. ...1822년에 멕시코가 독립한 후 그 활동을 높이 평가받았다. ...멕시코가 제국이 된 것에 분노하면서 자신이 추구한 공화국을 실현하기 위해 급진적인 정치집단에 계속 몸을 담았다.
●리고베르타 멘추 툼(1959- )는 과테말라에서 가난한 원주민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다가 부모와 함께 수도로 이주하면서 가정부로 일하기도 했다. ...내전을 겪고 있었는데 1980년대 초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 정권이 반란진압작전을 대대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온 가족이 군부 정권에 탄압으로 끔찍하게 죽어가는 성항에서 멘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과테말라시로 가서 수녀들과 잠시 생활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에스파냐어를 배웠다. ...1981년 멕시코로 가서 과테말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원주민 학살 상황을 알리기 시작했다. ...1954년 이후 미국의 개임이후 과테말라에서 벌어진 끔찍한 내전의 참상등을 솔직하게 증언했다. ...멘추를 무명의 원주민에서 원주민의 대변자이자 <5세기 동안 지속되면서 온 정복과 억압에서 살아남은>마야 원주민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1988년 멘추는 과테말라로 돌아왔다.
●이러한 원주민의 권리 회복과 인종, 종족의 화해를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처럼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얻은 명성과 자금 덕분에 멘추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원주민 출신 인권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1994년 중반 13여 년의 망명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2007년에는 원주민 정당을 조직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제15장 식민지 해방운동 속의 알제리 여성 그리고 독립 후 50년
●드골은 1943년 12월 콘스탄틴 선언으로 알제리 개혁을 약속했다. ...세티프 진압으로 희생된 알제리 사망자는 ...다음세대 연구자들은 3,000~8,000명으로 보고 있다. ...1954년 FLN(민족해방전선)이 식민지의 굴레를 벗어나는 데 이제는 전쟁 아닌 다른 평화적 방법은 없다고 천명하기까지 10년, 알제리 독립운동가들은 험한 길을 걸었다. ...전쟁을 끌고 간 것은 산의 무장대원들이었다.
●1990년대 이슬람주의 세력의 부상으로 알제리 여성이 부닥친 문제는 상상 밖이었다. 여성이 지켜야 할 규범을 정하고 이 원칙에 맞지 않으면 여성을 해치는 폭력이 예고 없이 출몰했다. ...2005년 다시금 결성된 여성의 권리와 평등을 위한 공동조직, 와실라는 이념적인 여성평등과 실천적인 여성폭력 반대 두 길을 걷고 있다. 여성과 남성의 구분과 역할은 어디까지나 역사와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근원적인 성찰도 나타났다. 가정 내 여성이 이슬람 고유의 미덕이라는 근본주의는 오히려 습속이 거친 시대에 여성을 보호하려고 한 코란의 참뜻을 저버린다는 비판도 대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