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문은 힘이 세다
김근 지음(2019)
2020년 8월에 사위 정박사가 아버님이 읽으시면 좋을 듯해서 드립니다.라며 매우 두꺼운 책(1천여 쪽)을 선물했는데 바로 이 책이다. 시골 別墅에 가져다 놓고 근 2년여에 걸쳐 읽었으나 익은 뒤에도 여전히 시골집에 두고 있는 바람에 오늘에야 정리한다.
본디 千字文은 남조시대 梁나라(502-557) 武帝의 명을 받아 주흥사(502-549)라는 사람이 차운하고 王羲之(321-378) 서체에서 가려내어 지었다. 4언 고시의 형태로 250구로 이루어졌고 千개의 글자 중에서 중첩된 글자는 없으며 한문공부를 시작하는 아동들을 위해서 비슷한 형체를 갖는 변과 방으로 문자를 배열하고 압운하였다. 주흥사는 단 하루 만에 편철을 마쳤다하는데 얼마나 고심했는지 마치고 난후 머리가 하루 동안에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천자문은 한문의 입문서로 당나라 이후에 크게 보급되어 서예가들에 의해 쓰여 졌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왕희지의 7대손인 지영이 해서와 초서의 두 체로 쓴 《진초천자문》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명필 한호(석봉1543-1605)가 선조11년(1578)에 쓴《석봉천자문》이 가장 유명하다.
내가 서예실에서 해서 중에서 正字體인 한석봉 천자문으로도 종종 해서를 연습하곤 하는데 그 뜻을 자꾸만 잊어버리고 다시 되찾아보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단순히 천자문의 글자 뜻이나 해석에 머물지 않고 천자문 250구에 담겨 있는 철학적 의미를 깊이 있게 찾은 것이다. 중문과 교수인 저자는 《천자문》은 세계와 인생을 읊은 장편 서사시이고, 그 콘텐츠는 중국 고전 작품들을 망라해서 다시 쓴 것이어서 동아시아 전통사상이 그대로 압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4언 고시 네 글자의 뜻과 의미를 자세히 알려준 다음, 더 나아가 그 네 글자에 담겨진 철학적 의미를 찾아내고 거기에 덧붙여 자신의 생각을 다각도로 풀어낸다. 매우 어려운 책이지만 이 책을 통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와 사상을 이해하고 인생과 사회의 모습을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책에서 각 구의 해석은 여타의 천자문책에서의 해석과는 상당히 다른 것들이 많다.
예시) ■恭惟鞠養(공손할 공, 생각할 유, 기를 국, 기를 양)
○본서 : 공손한 마음을 가지니 굽어 살펴 길러주심이 생각나는데
○타서 : 국양함을 공손히 하라. 사람의 몸은 부모의 기르신 은혜이기 때문이다.
국양이란 부모가 어린 자식을 허리를 굽혀 보살핀다는 뜻으로 여기서 양이란 양을 먹이듯이 기른다는 뜻을 품고 있다. ...양을 기르듯이 자식을 양육하면 기실 스스로 자란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부모가 자식에게 집착할 일이 없다. ...자식은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자 나를 체험할 수 있는 생산물인 셈이다. 자식에게 온갖 공을 다 들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공을 들이는 것이 지나쳐 자신의 힘이 자식에게로 전이됐을 때에는 포이에르 바흐의 말처럼 자식은 우상이 되고 자신은 자식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자식을 기르는 일이 나중에 효도, 즉 국양에 대한 보답을 받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자식의 모습을 하고 있는 차세대의 젊은 내가 늙은 나를 거꾸로 보살피는 모양은 내가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위로를 받는 중요한 수단일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노인들에게 몇 푼 줘서 국양하는 척하기보다는 그 자식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거기서 노인들이 희망찬 자신의 모습을 보며 편안한 여생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효와 공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