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부생육기

청담(靑潭) 2024. 9. 3. 19:24

부생육기(浮生六記)

 

저자 : 심 복

 

沈 復(1763 ~ 1808년 이후)

1763년 중국 강소성(장쑤성) 소주에서 출생했다. 그는 비록 선비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꽃나무를 가꾸거나 시를 짓고 명산대첩을 유람하는 것에 더 마음을 빼앗겨 지방하급관원을 전전하며 빈곤한 생할을 해야만 했다. 막역지우같은 아내 이를 잃고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까지 감당해야 했던 심복은 이 책을 통해 아내에 대한 사랑과 인생무상 속의 삶의 자세를 기술하고 있다.<역자 지영재>

 

<김창수의 차의 명인을 찾아서 중에서>

사랑스런 부인 운이 자신을 위하여 연꽃차를 끓이는 대목을 읽는 남성이라면 누구나 그런 재녀를 만나서 사랑해 봤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들 것이다. 임어당도 중국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사랑스런 여인으로 불렀으니 말이다.

 

역자의 말

1장에서는 사랑하는 아내와 엮는 즐거운 에피소드를,

2장에서는 생활주변의 하찮은 것에서 느끼는 취미를,

3장에서는 깊은 사랑과 자유로운 정신으로 인하여 겪는 현실적인 금전, 대가족 문제 등의 비극을,

4장에서는 국내 명산대천의 유람을,

5장에서는 바다 밖 유구국의 풍정을,

6장에서는 건강문제를 다루면서 인생의 해탈을 얘기하고 있다.

浮生이란 뜬구름 인생이니, 부생육기는 뜬구름 같은 삶의 여섯 이야기란 뜻이다. 글에서는 운이와 23년간을 함께하며 겪은 사랑과 애환이 담겨있는 3장까지만 기록한다.

 

 

1. 사랑의 기쁨

나는 1763년 즉, 건륭 28년 계미 동짓달 스무 이튿날에 태어났다. 마침 때는 태평성대였고 곳은 선비의 가문으로 창랑정 옆이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내게 특별한 은총을 베셨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1762-1836)과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 저자인 심복은 대도시 소주(쑤저우)의 선비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는 이곳저곳의 관청에서 일종의 계약직으로 일하는 하급관리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했다. 심복도 과거에 응시할 정도로 공부를 계속하지는 못하고 아버지처럼 하급관리로 일하지만 경제관념이 투철하지 못하고 경제적인 문제로 아버지와의 갈등이 발생하고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빈곤 속에서 이 부부는 온갖 고생을 헤쳐 나가지만 결코 탈피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부부는 그 지독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선비가문의 사람으로서의 체통을 지키면서 서로 사랑하고 자연과 그림과 시를 사랑하며 힘들게 살아나간다.

진씨는 이름이 (1763-1803), 자가 숙진으로 나의 외숙인 심여선생의 따님이었다. 나면서부터 비파행을 불러주었더니 그대로 외우더라고 한다.

운이와는 외사촌간이며 동갑이지만 운이가 10달이 빠르다고 하며, 운이는 비파행을 암기하고 이를 통해 한자를 터득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이 책에서 그녀의 생각과 언어를 통해 그녀가 수재임을 인지할 수 있다.

그녀의 모습은 어깨는 좁고 목은 길었으며 마르긴 했으나 뼈마디가 두드러지지 않았고 눈썹은 둥글게 굽었으며 눈은 감정이 풍부하고 맑았다. 그러나 앞니 두 개가 약간 내다보이는 점은 관상적으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찰싹 달라붙는 듯한 태도는 사람의 넋을 송두리째 빼앗았다.

운이는 신부가 된 뒤로 처음엔 말도 없었고 종일 가야 노한 빛을 띠는 일도 없었다. 말을 걸면 그저 미소로써 대답할 뿐이었다. 웃어른을 공경스럽게 모셨고 아랫사람은 화목하게 대했다.그 는 모든 언동에 있어 꼼꼼하고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이때부터 늘 그림자처럼 서로 붙어 다녔고 그 사랑하는 마음은 말이나 글로써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18세에 혼인하였다.

나는 성격이 솔직하고 또 자질구레한 일에 매이지 않았는데, 운이는 고리삭은 선비처럼 예절을 지나치게 지켰다. 내가 그에게 옷을 걸쳐주거나 소매를 바로잡아주면 그는 반드시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했고, 수건이나 부채같은 것을 건네주면 또 반드시 일어나서 받았다. ...서로 존경하면서 스물세 해를 살았는데 날이 갈수록 정은 더욱 도타워졌다.

운이가 이렇게 말했다.

우주의 크기는 이 달과 같아요. 오늘 저녁 우리 두 사람과 같이 다정하게 지내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모르겠어요.

1795...그에게는 감원이란 딸이 있었다. 아직 파과의 나이(16)도 안된 듯 그 날씬한 모습은 참으로...멋이 있었다. 수작을 건네 보니 시, 산문, 그림, 글씨에 대한 소양도 만만치가 않았다. ...나는 애초부터 아무런 생심도 먹지 않았다. 차 한 잔 이야기하는 것도 나같이 가난한 선비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방안에 들어가고 보니 마음이 설레어서 말대답을 간신이 해 나갈 수 있을 뿐이었다. ...

운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오늘 예쁘고 멋있는 여자를 찾았어요. 아까, 감원이와 약속했죠. 내일 저한테 놀러 오라고요, 당신을 위해 힘써 보겠어요.

이는 남편이 반한 감원이를 첩으로 들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나 수포로 돌아갔다. 오늘날 정서로서는 상상이 안 되지만, 당시 상류층에서는 첩을 두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었고 운이는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마음을 알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 인품이 성인에 가까운 진정으로 아름다운 여인이다. 이를 은근히 반기는 주인공 이는 그저 속물에 지나지 않다. 운이에 대한 그의 사랑은 운이의 자신에 대한 사랑에 비할 수가 없다. 과연 그 사랑에 진정성이 있는지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2. 한가롭고 멋지게

...그곳으로 옮길 때 우리는 머슴 내외와 그 작은 딸을 데리고 갔다. 머슴은 옷을 지을 줄 알았고, 어멈은 피륙을 낳을 줄 알았다. 그래서 운이는 수를 놓고 어멈은 피륙을 낳고 머슴은 옷을 지어서 이것을 내다 팔았다.

운이는 돈이 안 드는 안주의 요리 솜씨가 훌륭했다. 오이, 생선, 채소, 새우같이 흔한 재료라도 운이의 손만 한 번 거치면 특별한 맛이 있었다. 나의 친구들은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으므로 언제나 모일 때에는 술추렴을 해서 하루를 즐기곤 했다. 나는 또 청결한 것을 사랑했으므로 집안과 마당에는 언제나 검불하나 떨어진 것이 없었고, 또 친구들과는 허례를 차리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온 종일 시를 감상하고 그림을 토론할 뿐이었다.

나의 수박모자나 동정, 버선 등은 모두 운이가 손수 만든 것이었다. 옷에 헤진 곳이 있으면, 반드시 딴 헝겊으로 꿰매 주었으므로 옷은 항상 단정하고 깨끗했다.

 

 

3. 슬픈 운명

...아버지는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면서 모두 남을 위하여 쓰셨다. 우리 부부가 살림을 하면서부터 돈이 필요할 때는 전당을 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점점 집안 내에서도 비난을 사게 되었다.

○《...나는 너희를 너무 심하게 대할 생각은 없다. 너의 아내를 데리고 다시 내 눈에 띄지 않도록 따로 나가 살아라. 그래서 내 화를 돋우지 않으면 된다.

운이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동생은 집을 뛰쳐나갔으므로 운이는 친척집에 얹히게 되는 것을 싫어했다. ...운이는 전부터 하혈 증세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아우 극창이 집을 뛰쳐나가자 그 어머니 금씨께서 아드님 걱정으로 병환이 나서 돌아가신 뒤, 슬픔이 쇠져서 생긴 것이었다.

이렇게 몇 해 안가서 빛은 날로 쌓이고 물의는 날로 심해졌다. ...이때 형편은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몇 해 동안이나 막우의 일자리를 얻지 못했으므로 사는 집에 서화포를 차려 보았다. ..나는 한겨울에도 갖옷(가죽옷)을 못 입고 맨몸으로 나다녔다. ...운이는 다시는 의원을 부르거나 약첩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다. ...불경을 수놓고 병이 도진 운이는 물을 달라, 약을 달라해서 시중이 많이 들었으므로 집안 모두가 싫어했다.

...형이 직접 우리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 딸 청군이)민며느리로 데려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봉삼이(아들)는 점방에 들어가 장사를 배우도록 천거해 달라고 친구 하읍산에게 부탁해 뒀다. 이때가 1801(39)이다.

양주 선춘문 밖 강 옆에 두 칸짜리 집을 빌려 놓고 운이를 데리려 직접 화씨댁으로 갔다. 화부인은 부엌일을 돌보라고 아쌍이라는 어린 계집종을 내주었다.

내가 의원을 부르려 해도 운이는 가로막았다.

...또 평소에 너무 염려를 많이 했어요. 좋은 며느리가 되고자 애는 무척 썼으나 결국 되지 못했어요. 그래서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등 여러 가지 증세가 겹치게 됐어요. ...인간은 백년을 살아도 종당에는 한번 죽는 것이지만, 지금 중간에 와서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군요. 다만 끝까지 당신의 시중을 들지 못하는 것과 봉삼이가 장가드는 것을 못 보는 것이 마음속에 아련히 잊혀지지 않아요.하고 말을 마치자 콩알만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당신이 부모님의 사랑을 못 얻으시고 타향에서 유랑하시며 고생하는 것은 모두 제 탓이어요. 제가 죽으면 부모님의 마음이 절로 돌려지실 테니 당신도 거리낌을 없앨 수 있을 것이어요. 부모님께서는 춘추가 높으셔요. 제가 죽으면 당신은 속히 집으로 돌아가셔야 해요. ...심덕있고 용모가 고운 사람을 골라서 속현(재혼)하셔요. 그래서 부모님을 받들고 저의 어린 자식을 돌보게 하셔야만 저도 눈을 감을 수 있어요.

운이는 남자의 도량과 재능을 갖추었다. ...나는 의식을 벌기 위하여 매일처럼 동분서주했지만 집에는 늘 돈이 달렸다. ...그는 질병과 빈곤에 허덕이다가 한을 머금고 떠났으니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인가?

나는 어머님께 하직하고 자녀들과 이별한 뒤, 한바탕 통곡하고서 다시 양주로 돌아가 그림을 팔면서 지냈다.

1805년 칠월에 탁당이 비로소 서울로부터 귀성했다....그는 나와 죽마고우였다. 탁당은 1790년 전시에서 장원급제했다. ...탁당은 다시 가족을 데리고 사천성 중경의 임지로 가야했는데 나더러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누이의 집으로 가서 어머님께 하직을 고했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옛집은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탁당은 옛 친구인 왕척부 효렴이 양주의 염서에 있었으므로 길을 돌려 방문하기로 했다. 나도 함께 갔으므로 다시 운이의 산소를 찾아볼 수 있었다. ...사월 말에 산동 안찰사의 봉급과 수당이 나오자, 탁당은 비로소 귀속들을 맞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이때 청군이의 편지도 함께 부쳐왔으므로 나는 봉삼이가 사월에 요철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알게 되었다. ...탁당도 이 소식을 듣고는 역시 한탄하면서 나에게 첩을 하나 주었다. 이때부터 나는 다시 춘몽에 잠겨 엄벙덤벙 지냈다. 그 꿈에서 언제 깨어날 지도 모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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