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미술과 역사 사이에서

청담(靑潭) 2024. 4. 20. 16:09

미술과 역사 사이에서

 

강우방(1941- ) 1999년 작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고고미술사에 뜻을 두어 하버드대에서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을 거쳐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역임했다. 현재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이다.

저자가 1999년에 쓴 책이다. 가원이 구입하여 읽은 책인데 한국미술사에 관한 글이므로 관심이 가서 대강 훑어보았다. 수필인 듯 전문서적인 듯 한 책으로 꼼꼼히 읽기엔 너무 벅차다. 몇몇 내용을 간추려 적어본다.

 

저 멀리 피렌체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의 가슴은 울렁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나라는 자주 가는 편이지만 이십년 전이나 십년 전이나 변화가 없어 늘 다정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내가 있는 곳은 세계의 중심이다.

감은사 쌍탑은 통일신라 최초의 석탑으로 늘 우리의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서라벌의 풍수는 전체로 보면 파격적이다. 왕궁부터가 거대한 반월의 기이한 형태를 띤 높은 대지에 자리 잡고 있다.

서라벌의 위치는 반월성을 중심으로 서족으로는 선도산을 포함하고, 북쪽으로는 소금강산, 동족으로는 명활산, 남쪽으로는 남산을 포함하며 그 안은 분지를 이루었는데 중앙에서 동쪽으로 치우쳐서 누에고치 모양의 나지막한 낭산이 엎드려 있다.

북악산이 없는 서울은 상상할 수 없다. 작고 예쁜 북악산이지만 다부진 기상이 빼어나서 서울이 등에 질 만한 산이다. 비록 서편에 우람한 암반을 드러낸 남성적인 인왕산이 있다하나 수려한 북악산은 그에 견줄 만 하다.

신라의 토우는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어던 구체적인 형상의 의기로 토우를 만들었다.

둘째, 토기에 붙인 작은 토기들이다. 셋째, 독립적으로 만든 토우들이 있다. ...신라의 토우는 즉흥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라인의 미술 감각이 솔직히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의 미술의 특성을 요약하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익살과 생명력을 들겠다.

황룡사 금당이 치미는 삼국시대에 흔히 보는 치미의 형태였지만 거대한 치미의 세 면에 부착된 연꽃무늬 기와와 사람얼굴 기와들이 걸작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파격의 멋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라시대의 치미와 토우,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민화 등을 들었다.

박수근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면의 바탕과 화면구조, 그리고 화면구성이다.

일본과 중국의 미술이 서양에 영향을 끼쳤고 유교와 불교사상에 매료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소위 전통의 단절 속에서 서양의 기법은 물론, 동양의 기법도 일본에서 배워 일본 화단의 아류로 전락하려는 시기에, 우리 문화에 눈을 뜬 박수근, 김환기, 이응로, 장욱진, 이우환 등이 우리의 정신을 살린 서양화를 확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기법은 어디까지나 서양의 것이다.

한 작가의 예술적 감수성과 인품을 안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화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작품을 통해 인간을 만난 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특히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는 예술가들에게는 깨달음의 과정이 있고, 그래야만 훌륭한 예술품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석불사의 본존 석가여래상을 비롯해 주변 벽면의 여러 부조상들이 1910년대에 널리 알려졌을 때, 언젠가 돔의 천장 일부가 함몰되어 석불들이 비바람에 얼룩져 있었다. 전체가 다 노출되면 그러한 얼룩이 지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석불사를 해체 복원하면서 조심스럽게 심한 얼룩을 지우며 세월의 더께를 살려 두었다. 그래서 옛 사진들을 보면 그런대로 고풍스러움이 있어서 정감이 있었다. 그런데 해방 후 석불사의 석불들은 표면을 벗겨낸 듯 말끔히 세월을 걷어 냈다. 일설에는 고압 스프레일 무자비하게 벗겨냈다고 한다. ...석불사의 핵은 본존 석가여래상이다.

일찍이 전주의 한 영화관에서 서편제를 상영한 적이 있었는데 관객이 없어서 닷새만에 그쳤다가 영화상들을 휩쓸자 다시 상영하여 성황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 영활를 보면서 전혀 감동을 받을 수 없었고, 영화의 불연결성에 당황스런적이 많았다.

寂滅이란 무엇인가? 불꽃을 불어서 끄는 것이다. 煩惱의 불, 妄執, 我執을 불어서 끄는 것이 적멸이며 涅槃이다. ...적멸은 진리를 듣고 깨달아 마음이 안락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바로 그 법이 화엄경에서는 비로나자불이라는 法身佛로 나타난다.

불상이 있는 법당보다 불상이 없는 적멸보궁이 오히려 불가사의한 힘으로 나는 사로잡곤 한다.

사람은 죽기 때문에 행동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인간 삶의 과정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일 뿐이다. 작별은 내가 태어난 고향이다.

석굴암의 대불은 신라사람들이 석가가 정각을 이룩한 순간의 모습을 그대로 이 땅에 재현한 것이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교활한 수법으로 주실 입구 두 기둥사이에 아치형 돌을 올려놓아 본존의 시야를 가리게 했다. 그런데 해방 후 석굴암을 해체하고 수리했을 때 우리나라 미술사학자들은 그긴 돌을 다시 올려놓았다. 그 아치형 돌은 원래 있던 것이 아니고 일본인들이 임의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어서 석질이 생경하고 형태도 예스러움이 없어 석굴암 건축은 물론 본존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석가여래 본존이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도록 조성되어 있는 그 상징성을 인식한다면 그 돌은 하루라도 빨리 제거되어야 한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깨달음에 있지 않다. 깨달은 다음 깨닫지 못한 채 번뇌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이끌도록 노력하는 실천이야말로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적 행동지침이라할 수 있다.

예전에는 계급차별, 가난, , 죽음에 한 고통 두려움으로 인하여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힘들어하고 좌절하며 이를 정신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의 절대적 필요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의 발달에 따라 계급차별은 없어지고, 선진국들은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해지고, 의학의 발달로 많은 질병에서 극복되어짐에 따라 선진국의 보편적인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궁궐 같은 집에서 산해진미를 먹고 마시며 여행을 즐기는 삶, 현재를 즐기는 삶을 추구하기에 내세를 기약하는데 크게 의지하지 않음에 따라 종교의 필요성은 극히 약화되고 있다.

고선사탑과 감은사탑은 고유섭에 의하면, 익산미륵사지석탑-부여정림사지석탑-의성탑리석탑-익산왕궁리석탑이라는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을 거쳐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이루는 중요한 탑들인 만큼, 그 옥개석 양식의 차이는 그 선후관계와 더불어 풀어야 할 숙제이다.

석가모니가 어릴 때 부왕을 다라 農耕祭애 참석하고 비로소 세상의 무상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태자는 부왕이 행사에 참석하고 있는 동안 시원한 나무그늘에서 명상에 잠기는데, 흙에서 기어나온 벌레가 새에게 쪼아 먹히고, 그 새는 다시 독수리 같은 사나운 새에게 잡아먹히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세상의 무상함을 느꼈다고 한다. ...태자는 사람이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로 비탄에 빠지게 된다.

예술과 종교는 똑같이 영원을 지향하고 있다. ...신앙행위와 예술활동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인간이 죽음과 온갖 에 대처하며 이를 극복한 생의 행복을 찬미하는 과정에서 제사의식은 행해졌으며 여기에서 모든 예술행위가 성립했다. ...결국 모든 예술적 실험은 종교예술의 전개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생명력 있는 사상과 생명력 있는 예술표현이 하나로 이루어질 때 위대한 예술품이 탄생하게 된다. ...위대한 예술품에는 위대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진리였다.

역사 연구가는 그 진위를 판별하는 능력을 갖추어야한다. ...미술사가는 유믈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더 나아가 유물의 진위를 가릴 뿐 만 아니라 진품 중에서도 가치 있고 훌륭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참된 부처는 깨우침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우침을 이룬 자가 참된 부처를 볼 수 있다. ...그런데 깨우침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깨우침만이 인생의 궁극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小乘에 머물고 만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며 그 후의 實踐行이야말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다.

깨우치면 지혜롭게 된다. 그 지혜로움을 곧 실천으로 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知行合一이다.

종남산 지상사가 중국 화엄종의 요람이라면 태백산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고향이다. ...법장은 의상보다 십 구년이나 연하였고 ...우리나라 화엄종을 연 의상이 팔년동안 지엄에게 화엄을 배우고 법장과 교분을 맺은 지상사를 어찌 포기하겠는가? 일찍이 신라에서 수 많은 고승들이 법을 구하며 중국이나 인도로 유학했건만 고국에 돌아와 신라불교, 더 나아가 한국불교의 터전을 다진 고승으로 의상이 유일한 분이니...국청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오랫동안 초등학교로 쓰였다가 1991년쯤 다시 국청사를 회복했다고 한다. ...숨이 턱에 닿고 한 시간 남짓 산 정상에 이르자 뜻밖에도 아! 지상사란 현판이 나를 반기지 않는가? ...지상사 앞뜰에는 탑과 비가 즐비했는데 문화대혁명때 무참히도 모두 파괴되어 그 파편들은 인근의 집짓는데 쓰였다고 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기회는 사라지기 쉽고 경험은 의심스럽고, 판단은 어렵다라고 히포크라테스가 말한 적이 있다.

김홍도가 우리 서민의 삶을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을 때 비슷한 연배인 연암 박지원은 뛰어난 문체로 서민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었다.

21세기 들어 미술사학은 뿌리부터 썩어 가려하고, 천박한 학문으로 되어가고 있다. 더 이상으 오류는 용서될 수 없다. ...추사의 글씨와 그림이 아닌 간송 수집품과 그 밖에 개인소장 작품의상당량이 역시 완당평전2·3권에 그대로 실려 있다.

일반대중들은 이미 공개된 유적을 방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미술사학자들은 작품이나 유적의 원형을 중요시한다. ...미술사학자는 영혼의 세계로 떠나는 가슴 설레는 탐험가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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