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 36 회화
저자 백인산
컬처그라피
내가 아직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이 수집한 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을 찾아보지 못하고 있다. 일 년에 한 번씩 일정기간 동안만 신청자를 받아 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인 저자가 쓴 이 책에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36점의 뛰어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01. 포도(葡萄 신사임당 : 1504-1551 48세)
●율곡이 쓴 사임당 행장
자당께서는 묵적이 남다르셨다. 7세 때부터 안견이 그린 것을 모방하여 드디어 산수도를 그리셨는데 지극히 신묘했다. 또 포도를 그리셨다. 모두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것들로, 그리신 병풍과 족자가 세상에 널리 전해진다.
●소세양(1486-1562)은 그녀의 산수화에 대해 ?묘한 생각과 기묘한 종적은 따라잡기 어렵다.?했고 어숙권은 ?산수와 포도그림은 안견에 버금간다.?고 평가했다.
02. 고죽(枯竹 이정 : 1554-1626 72세)
●탄은 이정은 세종대왕의 고손자로 윤택하고 문예를 애호하는 집안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30대 때부터 묵죽화의 대가로 명성을 얻었다.
●먹물들인 비단에 금니라는 최상의 재료로 대나무, 매화, 난 20폭을 그리고 자작시 17수를 곁들여 성첩한 《삼청첩》은 임오군란 때 인천에 파견된 일진함 함장인 츠보이 코우소의 손에 넘어갔다.
03. 풍죽(風竹 이정 : 1554-1626 72세)
●묵죽은 조선초기부터 크게 유행하여 세종, 성종과 같은 군왕과 강희안 등 문인사대부들은 물론, 화원인 안견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가들에게 폭넓게 그려졌다. 조선 중기에는 신잠, 유진동, 신사임당이 묵죽 3대가로 명성을 떨쳤다.
04. 문월도(問月圖 이정 : 1554-1626 72세)
●임진왜란후 공주의 탄천가에 《月先亭》이라는 별서(別墅)를 마련하고 시와 그림을 지어 스스로 즐기며 일생을 보냈다.
※나의 별서 : 나의 시골집에 할아버지의 호인 芝山을 붙여 지은 이름이다. 고조부터 살아오신 옛집을 멋지게 리모델링했거나 돈을 많이 들여 한옥으로 잘 지었다면 芝山莊이라 붙이고 싶었지만, 어둡고 너무 커서 거추장스러운 옛집을 철거하고 적은 돈으로 아주 작게 지은 현대식 조립식집이라 차마 지산장이라고 붙이지 못하고 Jisan place라 했다. 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오신 곳이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은퇴 후 고향마을에서 텃밭을 가꾸고 과일나무를 가꾸며 닭 몇 마리를 치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작년에 지은 나의 別墅(농막)인 것이다. 이 별서에는 내가 직접 파서 만든 어설픈 연못이 있어 비단잉어 몇 마리를 넣었더니 어느 새 십 수 마리의 새끼들을 까서 노란잉어, 빨강잉어, 빨강과 노란색이 섞인 잉어, 검은 잉어, 하얀 잉어 등 형형색색의 잉어들이 노닌다. 또 본래 우리 집에서 자라던 대나무, 매화나무, 석류나무, 소나무, 백일홍, 애기사과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등이 있어 文人畵를 그리기에 매우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 졌다. 우리 양드리는 요즈음 문인화에 전념하고 있는데 이틀거리로 찾아가는 고향 시골집 별서에서 상당한 靈感을 받는지 모르겠다.
05. 고사한거 강산청원(이징 李澄 : 1581-? )
●高士閑居 江山淸遠:높은 선비의 한가로운 삶, 강과 산이 맑고 멀다.
●宗親不任以事 : 왕의 4대손까지는 품계만 받을 뿐 관직에는 나아가지 못하는 것
●이징은 성종의 고손자이다. ...천부의 재능에 남다른 열정이 더해지면서 이징은 당대 최고의 화가로 성장한다. 산수, 인물, 화조, 사군자 등 못 그리는 그림이 없었다. 허균은 이징을 〈조선 제일의 화가〉라고 추켜세웠다.
06. 고매서작(古梅瑞鵲 조속:1595-1668 74세)
●古梅瑞鵲 : 늙은 매화에 앉은 까치
●조속은 29세에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율곡학파의 사대부였다. 그러나 모든 공훈을 사양하고 금강산, 오대산등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시와 그림으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사생하며 평생을 보냈다.
07. 수로예구(壽老曳龜 김명국:1600-?)
●壽老曳龜 : 수노인이 거북이를 끌다
●김명국은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 일본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다녀왔는데 밤낮으로 밀려드는 일본들의 그림 요청을 감당하느라 울음이 나올 지경이었다고 한다.
08. 어초문답(魚樵問答이명욱:1640-1713 74세)
●魚樵問答 : 어부와 나무꾼이 묻고 답하다
●숙종은 그림을 잘 알았던 왕이다. 그는 이명옥을 이징보다 훨씬 높게 평가했으며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와서 4년간 머무르며 빼어난 화가로 많은 화제를 모았던 청나라의 맹영광에 뒤지지 않는 화가로 치켜 세웠다.
09. 심산지록(深山芝鹿 윤두서:1668-1715 48세)
●공재의 집안은 증조부인 고산 윤선도 이래 핵심적인 남인 가문 중 하나로 부상했고, 필연적으로 서인과의 치열한 당쟁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었다. 그 결과 증조부가 삼수로 유배되고, 祖와 父 양대가 禁錮의 몸이 되었으며 동기가 하옥되는 등 가문에 화가 끊이지 않았다.
10. 청풍계(淸風溪 정선 : 1676-1759 84세)
●겸재는 우리 산천을 사실적으로 사생했을 뿐 만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아름다움까지 자긍에 찬 시각으로 온전하게 화폭에 옮겼다. 그는 한양일대, 금강산, 영남일대 등 발길이 닿았던 곳마다 사생을 하여 진경산수화를 남겼다. 그 중에서 한양과 그 주변의 경관을 담은 그림이 가장 많다.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에 해당하는 청운동 52번지 일대의 골짜기를 그린 《청풍계》도 그중의 하나이다.
...청풍계는 김상용(1561-1637)의 초상화를 모셨으며 창의동 김씨라 불리는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겸재는 아우인 김상헌(1570-1652)의 증손자인 김창흠(1653-1722)의 제자였다.
●겸재는 화가이기 이전에 사대부 출신의 문인이었다. 겸재의 광주 정씨 집안은 명문가 중 하나였지만 겸재 대에는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락하고 만다.
11. 목멱조돈 (정선 : 1676-1759 84세)
●木覓朝暾 : 목멱산에서 해가 떠오르는 모양
●영조 16년(1740)초가을 겸재는 뜻밖의 왕명을 받는다. 양천현의 현령으로 부임하라는 것이었다.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김포공항 부근)에 위치한다.
●겸재의 그림은 무척 비쌌다. 어지간한 겸재 화첩을 구하려면 30-40냥이 필요했고 당시 좋은 말 한필 값이 10냥 정도였다.
...당시 기록을 통해 보면 겸재의 큰 그림은 은 백금 이상을 주어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동시대 중국의 유명화가들에 비해 열 배가 넘는 가격이다.
12. 단발령 망금강 (정선 : 1676-1759 84세)
●斷髮令望金剛 :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다
...단발령은 철원 금화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개이다.
●겸재가 금강산을 처음 찾은 것은 36세 때였다. 겸재와 동문수학한 진경시의 대가 이병연(1671-1751)이 금강산 초입인 금화 현감으로 부임해간 것이 계기였다.
...그는 72세에 금강산을 다시 찾는다. 그리고는 36년 전에 그렸던 금강산 명승들을 같은 위치에서 같은 구도로 닥시 그려낸다. 이 화첩이 바로 간송미술관에 소장된《해악전신첩》이다.
...1933년 장형수라는 골동거간이 친일파 송병준(1858-1925)의 손자인 송재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런데 측간에 가려다 군불을 때고 있던 머슴이 아궁이 속에 이 《해악전신첩》을 넣으려는 장면을 목격하고, 빼앗아 송재구에게 들고 가 헐값에 산뒤 간송 전형필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장형수가 그때 측간에 가지 않았다면 이 화첩의 운 명은 어찌 되었을까?
13. 풍악내산 총람(정선 : 1676-1759 84세)
●《풍악내산총람》은 겸재의 금강산도를 대표하는 대작으로 손꼽힌다. ...말 그대로 가을의 내금강 전경을 화폭에 압축해 넣은 그림이다.
●겸재의 후배인 정지순(1723-1795)은 겸재의 그림에 대해 ?실제 경치를 그리되 눈에 의지해 그리지 않고, 마음으로 이해하고 깨달아 그렸다.?고 했다. 겸재의 진경산수화의 본질을 꿰뚫는 적절한 평가이다.
14. 서과투서(정선 : 1676-1759 84세)
●西瓜偸鼠 : 수박(서양오이)훔치는 쥐
●연암 박지원(1737-1805)은 ?겸재는 여든이 넘어서도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촛불 아래서 세화를 그리곤 했는데 털끝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15. 자웅장추(변상벽 : 1730-? )
●雌雄將雛 : 암수탉이 병아리를 거느리다
●정약용(1762-1836)은 66세에 변상벽이 그린 닭 그림을 보고 말했다.
?변상벽이 변고양이로 불리는 것은 고양이를 잘 그린다고 사방에 이름이 나서이다. 이젠 또 닭과 병아리를 그려내니 마리 마리가 털이 살아있는 것 같다. ?
●강세황(1713-1791)도 이에 공감했는지 이런 題詞를 붙여 놓았다.
〈푸른 수탉과 누런 암탉이 일고여덟 마리 병아리를 거느렸다. 정교한 솜씨 신묘하니 옛 사람도 미치지 못할 바이다.〉
16. 雪竹(유덕상 : 1675-1756 81세)
●탄은 이정 이후에 활동한 조선의 묵죽화가들은 그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만큼 그의 영향력은 컸다.
...수운 유덕상의 일생은 순탄치 못했다. 경신대출척에서 남인들이 중앙정계에서 축출되면서 집안이 급격하게 쇠락한 것이다.
...發解試(과거 초시)에 나갔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대나무를 휘둘러 그려놓고 왔다는 일화는 그가 처한 현실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수운의 선택은 타고난 재능을 살려 그림에 몰두하는 일이었다.
17. 현이도(조영석 : 1686-1761 76세)
●賢已圖 : 장기놀이
●三圓 :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모두 화원화가
●三齋 : 겸재 정 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모두 사대부 화가
※관아재 대신 윤두서를 넣는 사람도 있다.
●윤두서(1668-1715 48세)가 풍속화가였으나 기법이 중기 이전의 인물화 기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 있다.
...관아재는 달랐다. 그는 그림의 이치를 묻는 사람에게 ?그림으로써 그림을 전하니 이것이 잘못된 것이다. 직접 대상을 마주하고 그 참된 모습을 그려야만 살아있는 그림이 된다.?고 설파했다. 이른바 《卽物寫眞》론으로 관아재 풍속화의 이론적 기반이다.
18. 와룡암 소집도(심사정 : 1707-1769 63세)
●〈그림을 천성으로 타고난 哲匠으로 현명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조영석, 정선과 더불어 그 명성이 같았는데 혹자는 초충과 먹으로 용을 그리는 솜씨는 아무도 견줄 수 없다고 한다.〉이덕무(1741-1793 )가 24살 때인 1764년에 심사정의 집을 방문하고 쓴 글이다.
19. 삼일포(심사정 : 1707-1769 63세)
●관념산수에 진경화풍을 더하다. 조선남종화가 탄생하다.
●50대 후반이면 화가로써 나름대로의 입지가 있을 대임에도 심사정은 가까운 북한산조차 가보지 못했을 정도로 곤궁했고 견문 또한 협소했다.
20. 촉잔도권(심사정 : 1707-1769 63세)
●蜀棧圖卷 : 촉으로 가는 험한 길
●촉도는 관중에서 사천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 절벽을 따라 선반을 매달아 놓은 듯한 좁은 험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이런 길은 棧道라 한다.
...현재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촉도 산천을 그려 냈다. 이백의 시를 참고했을 수도, 그림 끝에 썼듯이 남송대 화가 이당의 《촉잔도》를 따라 그렸을 수도 있지만...
21. 잉어(이광사:1705-1777 73세,이영익 1738-1780 43세)
●이광사는 백하 윤순(1680-1741)을 이어동국진체를 대성한 조선후기 서예의 명가이다. 이영익은 그의 아들이다.
●이 그림이 완성된 것은 영조 49년(1773)이다. ...이광사가 눈과 머리를 그리고 20년 후에 완성된 것이라 했으니 처음 그린 것은 50세 무렵일 것이다.
22. 협롱채춘(윤용 : 1708-1740 33세)
●挾籠採春 : 대바구니를 끼고 봄을 캐다.
●그의 할아버지는 윤두서(1668-1715)이고 아버지는 낙서 윤덕희(1685-1776 91세)이다. 윤두서는 조선 후기 회화융성의 서막을 올린 거장이고, 아버지 또한 인물화에 능했던 문인화가이다.
23. 竹石(강세황 : 1713-1791 79세)
●죽석 : 바위틈에서 솟아난 대나무
●바위틈에서 자라난 대나무를 그린 이 그림은 표암 묵죽화의 지향과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정약용(1762-1836)은 이렇게 말했다.
?근세에 강표암은 대를 그리면서 한두 가지만 그리고 分자나 介자형 잎 서너 개만 해놓고 그만둔다. 이는 竹畵일 뿐 어찌 畵竹이라 이를 수 있겠는가?
24. 향원익청(강세황 : 1713-1791 79세)
●香遠益淸 :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다
●강세황은 32세부터 61세까지 30여년은 경기도 안산에서 보냈다. 집안이 몰락하자 서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처갓집이 있는 안산으로 갔다. 안산은 본디 연이 많은 곳이다.
...세조때 문신인 강희맹(1424-1483)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연 씨앗을 가져와 심었다는 관곡지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연밭 중 하나이다.
25. 大快圖(김후신 : 1735 - ?)
●이재 김후신은 낯선 화가이다. 그의 아버지 불염재 김희겸(1710-?)은 그런대로 알려져 있다. 김희겸은 1748년 왕의 초상화를 그릴때 참여하여 그 공으로 사천현감을 지냈던 화원화가이다.
26. 馬上廳鶯(김홍도 : 1745-1806 62세)
●마상청앵 : 말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다
●《인생에서 날마다 접하는 백천 가지 일과 같은 세속의 모습을 옮겨 그리기를 잘했으니 저 길거리며, 나루터, 가게, 시장, 과거장, 노리마당을 한 번 그려내면 사람들이 모두 손뼉을 치며 기이하다고 소리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세상에서 말하는 김사능의 속화가 바로 이것이다. 진실로 신령스러운 마음과 지혜로운 머리로 홀로 천고의 묘한 이치를 깨닫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표암 강세황이 제자인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두고 한 말이다.
...관아재 조영석이 기틀을 닦아 놓은 조선후기 풍속화풍의 대미를 장식한 화가가 단원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7. 황묘농접(김홍도 : 1745-1806 62세)
●黃猫弄蝶 : 노란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
●사실성으로만 보자면 변상벽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단원은 사실 묘사를 뛰어넘어 그 속에 깃든 정취까지 담아낸다.
28. 염불서승(김홍도 : 1745-1806 62세)
●念佛西昇 : 염불하면서 서방정토로 올라가다
●탄은 이정은 대나무,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 화재 변상벽은 동물화를 잘 그리는 식이다.
...단원은 풍속화가 장기였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산수, 인물, 화훼, 영모등도 매우 잘 그렸다.
...그런데 단원을 따를 자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 道釋畵이다. 도석화는 신선이나 불보살, 승려 등과 같은 도교나 불교의 인물을 소재로 하는 그림이다.
29. 야묘도추(김득신 : 1754-1822 69세)
●夜猫盜雛 : 들고양이 병아리를 훔치다
●김득신의 장기는 인물 풍속화이다.
●이 그림의 본질은 역시 익살과 해학이다.
30. 美人圖(신윤복 : 1758-1813이후 55세 이상)
●혜원 신윤복은 단원 김홍도, 오원 장승업과 함께 三園으로 불리고, 단원 김홍도, 긍재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로 꼽히기도 한다.
●혜원의 풍속화에서는 늘 여인이 주인공이며, 노동이 아닌 사랑과 욕망의 주체이다. 그는 여인을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무척 아끼고 깊이 사랑했던 화가였다. 그런 혜원이 온갖 정성을 다해 한 여인의 초상화를 그렸다.
31. 이부탐춘(신윤복 : 1758-1813이후 55세 이상)
●嫠婦耽春 : 과부가 봄빛을 즐기다
●특히 남녀 간의 애정과 낭만을 소재로 한, 이른바 《춘의풍속화》에서 그가 이루어 낸 성취는 독보적이다.
●《혜원전신첩》이라는 한 권의 화첩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인도〉라는 걸작이 있지만 이 책에 수록된 30폭의 풍속화가 없었다면 혜원은 결코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라는 칭송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32. 고사소요(김정희 : 1786-1856 71세)
●高士逍遙 : 뜻 높은 선비가 거닐다
●우리가 추사를 기억하는 것은 〈추사체〉라고 부르는 독특한 글씨체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추사의 학문과 예술세계는 쉽게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고 깊었다.
●추사의 그림에 대한 기준과 지향은 청나라 고증학을 토대로지고한 이념미를 추구하는 청대문인화풍에 있었다.
●추사는 학문과 예술에서 〈법고창신〉즉,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생각을 신조로 삼고 살았다.
●진경시대를 이끌었던 대가들의 그림을 가차 없이 깎아내렸던 추사는 ...사실 그림에 관한한 추사는 이론가에 가까웠다.
33. 積雪滿山(김정희 : 1786-1856 71세)
●墨蘭은 추사의 회화 작품 중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추사가 자신의 회화 이념을 밝힌 글들도 묵란과 관련된 글이 제일 많다. 그런 점에서 묵란이야말로 추사체와 더불어 그의 예술적 지향을 가장 구체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분야라 할 수 있다.
●추사는 묵란이 가장 어려운 그림이라 했다.
〈난을 치는 것이 가장 어려우니 산수, 매죽, 화훼, 금어는 옛날부터 잘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홀로 난 치는데 있어서는 특별히 들리는 소리가 없다.〉
〈난을 치는 법은 예서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文字香과 書卷氣가 있은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을 치는 법은 화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한 붓질이라도 화법이 있다면, 그리지 않는 것이 좋다.〉
34. 梅花書屋(조희룡 : 1789-1866 78세)
●...추사의 서화는 폭넓은 지지와 공감을 받으면서 조선 말기의 예술계를 일시에 석권해 갔다.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중인에 이르기까지 서화에 관심과 재능이 있는 많은 이들이 추사의 문호를 드나들었다.
...중인과 서얼출신의 제자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우봉 조희룡, 소치 허련, 고람 전기등이 바로 그들이다.
●매화를 애호했던 시인묵객들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있은 만큼 많지만, 추사일문의 매화 사랑은 유별났다. 특히 추사를 따랐던 중인 출신 제자들이 유난히 매화를 좋아했다. 매화나무 숲속에 서옥 하나 채를 지어놓고 그곳에서 시문과 서화로 즐기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꿈꾸어 왔다.
35. 三人問年(장승업 : 1843-1897 55세)
●오원의 그림은 왕실과 사대부, 혹은 부유한 중인층의 기호와 수요에 맞추어 그린 주문작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보니 자신만의 개성이나 감흥을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불학무식한 화공 오원에게 치열한 시대정신이나 선구적 독창성 등을 바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다.
36. 石竹(민영익 : 1860-1914 55세)
●그는 명성황후의 친정조카로 스무 살 무렵에 민씨 세도의 중심에 섰으며, 갑신정변 때는 개화파의 공격을 받아 전신에 자상을 입고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회복한 후에도 혼란한 상황 속에서 홍콩과 상하이를 전전하다 결국 상하이에서 망명객으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그가 묵란과 묵죽에 쏟은 애정은 남달랐다. 〈운미란〉이라 불린 민영익의 묵란은 석파 이하응의 묵란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세를 풍미했다. 묵란과 더불어 그의 이름을 더욱 빛내 주는 분야가 묵죽화이다.